God of Blackfield: Deadline RAW novel - Chapter (34)
615화 어련하겠냐 (1)
아무리 내키지 않는다고 해도 오마르와 자밀라의 인생이 걸린 일에 거짓말을 하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확고한 자밀라의 의지와 거듭된 오마르의 요청에 이용우는 결국 인터폰을 들었다.
– 필요한 게 있습니까?
“사진을 촬영한 오마르와 자밀라, 두 사람이 행선지를 한국으로 바꾸고 싶다는데 아무래도 어렵겠지요?”
어렵겠지. 어려울 거야. 어렵다고 말해.
– 그 정도 요구가 어려울 건 없습니다. 그럼 한국으로 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간절하게 바랐으나 이용우의 간절한 바람을 냅다 패대기치듯 이라크인 요원이 시원하게 답을 주었다.
– 다른 필요한 건 없습니까?
이 판국에 다른 게 더 있겠냐?
못마땅한 심정에 “당장은 됐습니다.”라고 답한 이용우는 인터폰을 벽에 걸었다. 그리고는 식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한국으로 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답니다.”
“아! 다행이오. 그리고 고맙소.”
“저기, 궁금해서 그런데 왜 갑자기 한국으로 간다는 겁니까?”
“갑자기 바꾼 게 아니라 어젯밤에 내내 고민했던 일이오. 그러고도 아침까지 자밀라가 마음을 정하지 못해서 미국을 선택했던 건데, 한국으로 가고 싶다니 나야 당연히 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잖소?”
“아니, 자밀라를 위해서도 미국이 편한 거잖습니까?”
“어차피 자밀라를 위해 이라크를 벗어나려는 거요. 그러니 딸이 원하는 곳으로 가야 하지 않겠소?”
오마르는 이미 마음을 정한 눈치였다.
이용우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자밀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느닷없이 한국행을 원한 거냐고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미국으로 갈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예멘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나니 한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뭐라는 거야? 내가 예멘에 가는 것과 두 사람이 한국에 가는 게 무슨 관계가 있는데?”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이용우는 분명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로 노골적인 의사 표시였다. 당연히 발끈할 줄 알았다. 그러나 자밀라는 입을 꾹 다문 채 이용우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래! 아니꼽잖아? 그러니까 그냥 미국 가.’
이용우의 시선에 담긴 감정을 알아챘을 텐데도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오마르가 지켜보는 앞이었다.
눈싸움을 하는 사람처럼 이용우와 자밀라는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랍 여자들은 대개 나이 들면 덩치가 반 이상 커질 만큼 살이 찐다. 그때 가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의 자밀라는 아랍의 미녀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였다. 특히, 그녀의 커다란 눈을 보고 있는 건 뭐라 해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이 아버지와 나를 노릴 때요. 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떠올리지 않았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미국으로 가라는 거잖아.”
“지금 당신 눈이 그때 내 눈하고 똑같아서 미국에 못 가겠어요.”
“뭐?”
말문이 막혀서 바보처럼 반문한 이용우는 멍한 눈으로 자밀라를 보았다.
“예멘에 가는 거요. 죽고 싶어서 가는 거잖아요? 아니에요?”
아, 자존심 상해.
속을 보였다는 생각에 이용우는 두 번째로 말문이 막혔다.
“기다릴게요. 돌아올 때까지요.”
“나 결혼했어.”
“누가 결혼하자고 했어요? 나도 당신처럼 막무가내인 사람 싫어해요.”
이 대 영.
두 번이나 연달아 졌다. 자밀라에게.
“기다린다는 말은 뭐야?”
“살아서 오라고요. 한국으로. 그럼 그때 미국으로 갈게요.”
“결혼했냐고 물었었잖아?”
“아내분이 있으면 찾아가서 인사하려고요.”
이상하게 대화를 할수록 점점 더 치사해지는 느낌이어서 이용우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살아서 한국으로 와요. 와서 연락해요. 그럼 미국으로 갈게요. 만약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거나 연락이 끊기면 집에 찾아갈 거예요.”
뭐라는 거야?
기가 막혀서 이용우가 픽 웃었을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주머니 속에서 폴더폰이 울었다.
“떠나기 전에 번호 알려 줘요.”
“이건 임무에만 쓰는 거야.”
“한국에 가서 인터뷰하거나 동영상 사이트에 떠들어도 돼요? 나를 구해 준 한국인 요원 이용우를 찾는다고요.”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민병대도 다 아는 이름을 아버지가 모르셨을 거 같아요?”
삼 대 영.
본전을 찾기 힘든 상황을 피할 겸, 이용우는 폴더폰을 꺼내 번호를 확인했다.
“여보세요?”
– 너 어디냐?
“어젯밤에 도착한 안전 가옥이요. 무슨 일이에요?”
신광선의 음성이 급하게 느껴져서 툭 던진 질문이었다.
– 뭔지 모르겠는데 정보총국을 포함해서 우리 회사에 연결된 라인이 모두 끊겼다. 너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고. 정보총국에 연락할 방법이 없어.
“안 그래도 오늘 오후에 안가를 폐쇄한답니다. 그래서 나는 30분 뒤에 예멘으로 가고, 여기 두 사람은 오후에 한국으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 예멘? 예멘은 왜?
“한국으로 못 가잖아요? 괜히 바그다드를 떠돌면 민병대랑 계속 치고받을 텐데 당장 갈 만한 곳이 있어야죠. 그래서 계약서에 써 있는 커피 농장에 가 보려고요.”
– 하필 예멘이냐? 다른 곳으로 가.
이거 봐?
프랑스 요원도 그러더니 뭔가 있는 거네.
고개를 갸웃했던 이용우는 바로 마음을 정했다.
“이미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라 당장은 장소를 못 바꿔요. 출발하면서 전화할게요. 참! 여기 두 사람한테 중상이 번호 알려 줄 테니까 도움 좀 주라고 하세요.”
– 야!
“어? 정보총국 요원 왔어요. 이따가 전화할게요.”
급하게 부르는 신광선의 외침을 무시한 채 이용우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뭐가 이렇게 꼬이지?
입술을 둥그렇게 만 이용우가 “후-” 하며 숨을 내쉴 때였다.
딩동. 딩동.
통화 내용보다 살짝 늦었지만, 실제로 요원이 온 모양으로 벨이 울렸다.
***
다시 본 반가움을 거칠게 표현했던 이병렬에게 다가선 다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먼 길이라 피곤하지?”
이병렬과 은선곤이 먼저 인사를 나눴고,
“오셨습니까, 형님?”
“여수 일 처리하느라고 고생했다며?”
“병렬이 형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가방 이리 주십시오, 형님.”
“태완이 형님 선물이니까 그냥 둬.”
강성태는 김진용을 비롯해 함께 서 있던 식구들과 안부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가. 가면서 이야기해.”
이병렬의 권유에 강성태는 그의 곁으로 움직여 함께 걸었다. 무엇보다 김진용부터 이종환, 유충일이 시선을 끄는 체형과 인상이라 공항에 오래 있어서 좋을 건 없었다.
“아프리카는 어땠어?”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에게 당했어.”
“뭐?”
“그 양반 진짜 남자더라고. 솔직히 달려들지도 못했다면 이해하겠어?”
“씨발. 그룹 총수가 그렇게 세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거야?”
짧은 대화를 나누며 공항 청사를 나선 뒤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양으로 최고급 S클래스 승용차가 비상등을 켠 채 다가와 멈췄다.
“은 실장까지 타. 너희는 뒤차로 오고.”
“예, 형님. 가서 뵙겠습니다.”
S클래스에서 덩치가 내리자 임무를 교대하듯 조봉진이 운전석에 올랐고, 은선곤이 조수석, 뒷자리에 강성태와 이병렬이 앉았다.
“가자.”
“예, 형님.”
조봉진이 차를 움직이기 시작한 다음이었다.
“공항에 잔뜩 몰려올까 봐 걱정했는데 그래도 많이 참았네?”
“아이고, 보스님. 아무렴 신강남파 보스가 귀국하는데 달랑 다섯만 왔겠어?”
강성태의 질문이 재미있다는 투로 대꾸한 이병렬이 고개로 뒤를 가리켰다.
“승용차랑 승합차랑 해서 한 오십 정도 될걸? 태완이 형님께 도착하면 그때 인사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럼 그렇지.
어쩐지 단출하게 왔다 했더라니.
조직의 생리상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강성태는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는 느긋하게 궁금했던 일을 꺼냈다.
“여수 쪽 일은? 좀 알아봤어?”
“그게, 중국 애들이 찝쩍댄 모양이더라고. 여수 상국이 말로는 마약이 아니라 진통제 종류라고 꼬드겼다는데 일단 확인해 봐야지.”
“확인을 어떻게 해?”
“약 대 주는 놈들 연락처 내놓으라고 다그쳤더니 내일모레 놈들이 온다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갈 테니까 그쪽에 말하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했어.”
“문상국이라고 했었지? 그 인간이 진짜 말 안 했을까?”
“말을 하든, 안 하든, 우리가 갔는데 중국 애들 없으면 여수 완전히 끝장나는 거니까 가 보면 알겠지.”
역시 이병렬이구나 싶을 만큼 꼬투리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일 처리였다. 이틀 뒤면 결과를 알 일이어서 강성태는 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치곤이는?”
“그 새끼 지금 특별 교육 중이야.”
“그건 또 뭐야?”
“네팔 교관들이 팀장 후보를 선발하잖아. 팀장이 되려면 특별 교육을 받는데 마지막 테스트에서 나랑 충일이는 통과했고, 치곤이 새끼는 아쉽게 떨어졌어. 지금 아마 죽을 맛일걸?”
구르카 용병이 하는 특별 교육이라면 분명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스키장을 달리는 훈련일 거다. 독기라면 뒤지지 않을 최치곤이 테스트에 떨어졌으니 지금쯤 미친놈처럼 눈을 번들거리며 달리고 있겠다.
견뎌라, 최치곤.
친구라고 해서 테스트에 떨어진 너를 팀장에 올리면 너나 나, 둘 다 명분을 잃는다.
창밖으로 시선을 잠시 돌린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뱉었다.
“여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보스는 다른 일 봐.”
“내일 곤잘레스 회장 만나서 몇 가지만 의논하면 나머지는 은 실장이 알아서 할 거니까 여수는 함께 가자.”
“직접 가려고?”
말리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본 이병렬이 ‘못 말리겠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
예멘은 정부가 정부가 아닌 정치 현실, 시아파, 수니파가 뒤섞인 데다, 그것들의 세부 갈래가 또 권력을 위해 다투고, 거기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와 알카에다, 지방 부족, 정부군, 후티라 불리는 반군이 총질해 대는 통에 당최 사회가 안정될 틈이 없었다.
긴말할 거 없이 15세 이전에 돈에 팔려 결혼하는 여자아이가 전체 여성의 25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사회 및 경제가 개판이어서 예멘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개막장’이라는 막말 외에는 없었다.
한국이 공식적으로 여행 금지 국가로 지정했을 정도로 외국인에게는 위험한 나라이고, 해외에서 들어오는 여행자들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예멘의 아덴에서 강찬은 창밖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흙으로 지은 붉은 건물들 위로 높다랗게 치솟은 탑과 꽃봉오리를 연상시키는 꼭대기 장식을 향해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대장.”
달달한 냄새와 함께 봉지 커피를 탄 제라르가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 말입니다.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죽지 않겠습니까?”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피식 웃은 강찬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마지막은 대장하고 함께하고 싶습니다.”
“왜? 여기에서 우리 셋이 캑 하고 죽을 거 같냐?”
“에이. 대장이 어디 그렇게 쉽게 죽겠습니까? 세상이 떠들썩하게 일 벌이겠지요.”
막힘없이 대꾸한 제라르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강찬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가 있지요?
어떻게 할 겁니까?
놈의 눈이 그렇게 묻는 것처럼 보였다.
“그나저나 다예는 왜 이렇게 안 와?”
“그 새끼는 잊어버리십시오. 아까 뜨거운 물 구하러 내려갔는데 완전히 물 만난 송사리처럼 보였습니다.”
“송사리는 아니다.”
“피라미로 할까요?”
뻔뻔한 질문에 강찬이 먼저 흐느끼는 듯한 웃음을 터트렸고, 제라르가 비슷한 모습으로 웃었다.
이래서 좋다.
제라르와 석강호는.
죽음이 코앞을 스치는 상황에서도 두 사람과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외롭지 않았다.
한바탕 웃고 난 다음이었다.
문바키의 생사조차 모르는 상황에 정보총국의 협조가 끊겼고, 한국에서 평화유지군 소속 대원들이 날아오는 갑갑한 상황이 현실이라는 탈을 쓰고 달려들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얌전히 나가면 라노크 대사님과 문바키가 죽는다.”
“그렇겠지요.”
“만약 이곳에서 버티려면 평화유지군 대원들을 불러들여야 하는데, 대신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지.”
“대장도 나이 들었나 봅니다.”
“망설이는 거 같아서 그러냐?”
설마 그건 아니겠지요, 하는 표정으로 제라르가 어깨를 들썩였다.
편하게 주고받는 대화였지만, 실제로 라노크, 문바키, 두 사람의 목숨과 얼마일지 모를 대원들의 희생 중 하나를 쉽게 결정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고민한 건 우리 셋이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해서였는데 결국 시끄럽게 처리해야 할 거 같지?”
“그게 또 우리 전문 아닙니까?”
강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달칵.
열쇠고리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다예가…….
뭐 저런 꼴을 하고 있지?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를 아랍 특유의 셔츠에 머리에 터번을 감은 석강호가 종이봉투 두 개를 들고 들어섰다.
“여기 음식이 제법 괜찮소.”
어련하겠냐.
거침없이 다가온 다예가 개를 잡아 온 호랑이 같은 표정으로 탁자에 올려놓은 종이봉투를 보며 강찬은 기가 막힌 심정에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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