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Blackfield: Deadline RAW novel - Chapter (35)
616화 어련하겠냐 (2)
대기발령이라니?
고개를 떨군 김형정은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김형정에게만 이런 징계를 내렸다면 원장에게 대들었기 때문이라고 믿겠다. 그런데 부원장 강찬은 직위해제고, 신광선을 포함한 팀장들 모두 줄줄이 대기발령을 받았다.
“미쳤네.”
단 한 번도 상부의 지시에 반항한 적 없는 김형정이지만 이번만큼은 참담한 심정을 밖으로 뱉었다.
정보국은 일반인들의 시선 바깥에서 움직인다. 그만큼 본부장 김형정과 신동선 같은 팀장들이 쌓아 온 경험과 네트워크가 넓게는 대한민국, 좁게는 정보국의 능력이요, 자산일 텐데 그 모든 걸 한순간에 버렸다.
김형정과 팀장들이야 그렇다고 친다.
프랑스가 그토록 집요하게 귀화를 설득하는 강찬을 직위해제로 내친다는 게 말이나 되냐 말이다. 아무리 새롭게 들어선 정권이 정치적으로 원장을 선임했다고 해도 정보국을 상대로 이따위 아마추어 짓을 할 줄은 몰랐다.
고개를 든 김형정은 기밀에 접근하지 못하게 된 모니터를 바라보며 숨을 기다랗게 내쉬었다. 강찬이 밀려났다는 소식과 정보총국과의 교류가 끊겼다는 현실이 알려지는 순간, 중국과 일본의 정보국이 만세를 부를 게 분명했다.
삐이-. 삐이-.
멍하니 있던 김형정은 정보원 내부 통신망이 울리자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김형정입니다.”
– 나 원장이오.
“예, 원장님.”
아직 뭐가 남았나?
대뜸 대기발령을 내린 원장 하동선의 음성에 화가 잔뜩 묻어 있었다.
– 지금 정보총국과의 교류가 느닷없이 끊긴 게 강찬 부원장의 짓이오?
그걸 이제 와서 분노해?
기가 막힌 감정을 넘어서 김형정은 아예 막막한 심정이었다.
– 왜 대답이 없어?
“프랑스 정보총국 내부에 일이 있는 눈치인데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방법이 없습니다.”
– 그동안 본부장으로 앉아서 당신은 도대체 뭘 했어?
이어진 원장 하동선의 질책성 질문을 받은 것과 동시에 김형정은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별이 된 요원들을 떠올렸다. 더불어 사선을 넘나드는 작전에서 희생된 증평과 특수부대원들의 모습이 빠르게 넘기는 슬라이드처럼 눈앞을 스쳤다.
– 그리고 말이야. VIP께서 일본 정부와 의논할 게 있다는데 지난주까지 공손하던 일본 정보국이 왜 태도를 갑자기 바꾸지? 그것도 부원장이 한 짓인가?
“부원장을 직위해제 했다는 소식이 퍼졌을 테니 앞으로는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올 겁니다.”
– 허! 아주 영웅 나셨네. 혼자서 나라를 이끌었어! 어!
당신은 원균 같은 간신배고…….
울컥 쏟을 뻔한 대꾸를 김형정은 이를 악물며 삼켰다.
– 아무튼, 일본 정보국과 물밑에서 협상할 게 있으니까 방법을 찾아봐요.
“대기발령 상태라 어떤 연락도 못 합니다.”
– 당신 지금 대기발령 냈다고 반항하는 거야? 아니면 대기발령 취소하라고 협박하는 거야, 뭐야?
“제가 복직된다고 해도 부원장이 직위해제 된 상태에서는 예전 같은 성과를 얻기 어렵습니다.”
– 능력 없는 게 자랑이네! 자랑이야! 왜? 그 자리에서 아예 잘라 줄까? 그걸 원해?
대한민국, 태극기, 별이 된 요원, 조국을 위해 희생된 특수팀 대원들, 김형정은 정말이지 온 힘을 다해 버텼다. 그러나 원장의 마지막 협박을 듣는 순간, 툭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김형정의 인내심이 끊기고 말았다.
“제가 사직하겠습니다.”
– 뭐? 당신 지금 뭐라고 그랬어? 허어, 참! 먹고살 만한 모양인데 알았다! 내가 일정 미루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얼른 사직서 올려!
김형정의 사직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빈정대는 마지막 말과 함께 내부 통신망이 뚝 끊겼다.
김형정이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였다.
노크와 함께 신광선이 들어섰다.
평소라면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야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참담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김형정은 입을 열지 못했다.
“바그다드에 있는 이용우가 예멘으로 간답니다.”
“예멘이라면 입국 금지 국가인데 거길 왜?”
“커피 수입 계약서에 적혀 있는 농장을 직접 확인하겠답니다.”
이용우 수준의 더 블랙 요원이 가겠다고 판단했다면 존중해 줘야 한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국가정보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원해 주어야 한다. 정상적으로 운영된다면 말이다.
“본부장님. 형식적으로는 대기발령인 거 같은데 실제로는 사직을 요구하는 거 같습니다. 이대로 팀장 자리를 공석으로 두는 건 위험합니다. 차라리 사직해서 다른 사람이 편하게 일하게 비켜 주는 게 진정 조국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방금 원장님과 통화하는 도중에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길게 말하지 않은 신광선이 깍듯하게 고개 숙인 뒤에 몸을 돌렸다. 지금 돌아선 신광선이 국가정보원에서 빠져나가면 당분간 중동 지역의 정세를 파악하기 어렵다.
설마 이래서였을까?
중동 지역에서 블랙과 더 블랙 요원들을 모두 철수시킨 게?
의아한 심정에 문을 향해 시선을 들었던 김형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저 새롭게 들어선 정권이 본인들의 사람을 국정원에 넣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대한민국의 앞날을 망치려고 이러는 건 절대 아닐 거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잘 수 있을 때 자는 건 강찬과 제라르, 석강호가 지닌 근본적인 삶의 자세요, 태도였다.
아무리 여유롭고 풍요로운 세월을 보냈다고 해도 세 사람은 유전자에 박히다시피 한 아프리카에서의 삶을 잊을 리 없었다. 그래서 향신료를 뒤덮은 양고기와 생선, 쌀밥을 펼쳐 놓고서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이 정도만 해도 감사하다는 생각이었다.
신기한 점도 있었다.
손으로 눌러 단단하게 만든 쌀밥과 향이 강하다 못해 역하게 느껴질 정도의 요리를 먹는 동안, 아프리카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일어났고, 그와 동시에 저 아래에서 잠자던 본능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는 묘한 느낌도 받았다.
“아후! 오랜만에 진짜배기를 먹으니까 정말 좋소.”
“정신이 번쩍 드는 거 같다.”
“푸흐흐. 내가 다 계산해서 준비했다는 거 아니오?”
강찬의 대꾸를 들은 석강호가 한 걸음 더 나가는 순간이었다.
“헤딩이나 하는 머리로 거기까지 계산했다는 게 말이 되냐?”
“스테이크에 와인만 먹다가 거친 음식을 삼키니까 속이 뒤집히냐? 나가면 빵 한 쪽도 못 구해 올 게 뭐 큰소리를 쳐?”
염병할 새끼들이 지치지도 않는지.
제라르가 한국말을 능숙하게 하면서 통역해 줄 필요 없는 두 놈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헛갈리는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고개를 저은 강찬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국가정보원에서 직위해제를 당했고, 문바키의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였으나, 다행히 아직 정보총국 부국장의 직위는 유지한 상태였다.
제라르와 석강호가 어디에 전화를 거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강찬은 아예 스피커폰의 버튼을 눌렀다.
위성으로 연결되는 전화답게 대기음의 하울링이 길게 울린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기다리던 음성이 전화를 받았다.
“문제가 생겼어.”
– 뭘 해 주면 되겠냐?
문제라는 말에 접근하는 방식이 이렇게 단순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지만,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이 양반에게 연락한 가장 큰 이유였다.
“이왕 시작한 거 시끄럽게 해 볼 생각인데 워낙 거친 바닥이라 희생이 불가피해.”
진짜 시작이구나.
제라르와 석강호가 비슷한 눈빛으로 독기를 피워 낼 때였다.
– 현재 임무 중인 대원 중에 선발하는 건 장팔모 소령을 통하면 될 테고, 이쪽 군사학교에서 그런 작전에 투입할 숫자를 뽑으라면 대략 70명쯤 된다.
“인솔은 누구를 시키지?”
– 동식이가 태산이에게 가 있으니 곽철호 대령과 내가 갈까 하는데 어떠냐?
“나이를 생각해야 하지 않아?”
강찬의 대꾸가 건너간 다음이었다.
반 박자 느리기는 했으나 피식 웃는 웃음이 분명하게 스마트폰을 통해 나왔다.
– 장소는?
“예멘.”
– 정보총국의 협조를 얻을 수 있나? 외인부대의 수송편을 이용하는 게 가장 빠르고 편할 거 같다만, 협조가 어렵다면 평화유지군 단독 이동으로 처리하마.
“연락할게.”
강찬의 답이 건너간 직후에 전화가 뚝 끊겼다. 하여간 이렇게 전화 끊는 건 나이를 그렇게 먹어도 바뀌지 않았다.
“학장님이 직접 와도 되겠소?”
“아직 그 양반 정도 뛸 사람이 너희 둘 빼고는 없다.”
“푸흐흐흐. 오랜만에 뵙겠구려.”
강철규와의 통화를 마친 강찬은 이어서 다음 번호를 찾아 번호를 눌렀다.
– 조쉬입니다, 부총국장님.
“아프리카 군사학교에서 예멘의 아덴 공항까지 수송편이 필요해. 탑승 인원은 무장한 평화유지군 대원 100명에서 150명 정도다.”
– 확인하고 답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확인?”
– 예, 부총국장님.
프랑스어로 주고받는 대화였다.
순식간에 변한 강찬의 음성과 눈빛을 확인한 석강호가 떠돌던 긴장을 후식으로 처먹은 것처럼 눈알을 번들거렸다.
“내 요청을 승인할 유일한 사람이 문바키 총국장이다. 그의 행방을 아직 찾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누구에게 뭘 확인하겠다는 거지?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총국장이 임명됐나?”
– 수송기의 상황을 확인하겠다는 뜻으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분명하지 못한 답변을 드린 점을 사죄드립니다, 부총국장님.
마치 조쉬가 앞에 있다는 것처럼 강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송편을 준비하면서 참고로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정보총국 요원들 전원에게 전해 줘.”
– 말씀하십시오, 부총국장님.
“문바키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총국장이 임명될 경우, 문바키 총국장이나 라노크 위원장,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죽었다는 소식이 들릴 경우, 프랑스 대통령이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프랑스어를 아는 제라르가 퍼뜩 시선을 들었을 정도로 섬뜩한 경고였다.
– 부총국장님? 정보총국에 속한 요원은 누구도 프랑스의 영광에 반하는 말이나 행동을 금지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문바키 총국장과 라노크 위원장이 무사하면 그런 일은 없어. 그리고 한 가지 더. 총국장의 행방을 모르겠다는 보고 이후로 반나절이 지났다. 내일 이 시간까지 행방을 찾지 못한다면 경호 총책임자부터 시작해서 해당 담당자들을 모조리 제거해.”
워낙 강한 어조라 그런지 조쉬는 알았다는 답조차 내놓지 못했다.
수송편 협조를 얻어야 하는 상황인데 왜 이렇게까지?
강찬을 살피는 제라르의 눈빛이 그렇게 묻는 것처럼 보였고, 그 옆에서 석강호가 갑갑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번갈아 돌리며 분위기를 파악하려 애썼다.
“조쉬?”
– 말씀하신 내용을 전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내일 이 시간까지 외인부대 전체에 비상을 걸도록.”
– 외인부대 전체 비상은 코드가 필요합니다.
“G-3079, 0- 3257, B-1155.”
– 외인부대 전체 비상 지시, 코드 확인했습니다.
피식 웃은 강찬은 강철규를 흉내 내듯 전화를 뚝 끊었다.
“뭐요? 무슨 통화인데 대장 눈빛이 갑자기 번들거리는 거요? 이놈이 놀란 건 또 뭐고요?”
강찬은 방금 했던 경고와 지시를 빠르게 석강호에게 설명해 주었다.
“일부러 그러신 겁니까?”
그런 뒤에 이어진 제라르의 질문을 듣고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문바키를 건드린 놈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겠지. 정보총국에서 나를 자르거나, 이곳에서 죽이거나. 어느 쪽을 선택할 거 같냐?”
“아니? 국정원에서도 대장을 잘랐는데 정보총국은 더 쉬울 거 아니오? 막말로 프랑스 사람도 아닌 거잖소?”
“에이, 돌대가리. 그래서 대장이 평화유지군을 불러들이는 거 아니냐? 수틀리면 평화유지군을 끌고 프랑스로 달려갈 수 있다는 협박으로. 안 그렇습니까?”
석강호를 타박한 제라르가 마지막에 강찬을 향해 의견을 물었다.
“수송편이 있어야 프랑스를 갈 거 아냐?”
“하여간 너도 참. 대장이 명령하면 너는 어떻게 할래? 걸어서든, 개별적으로 들어가든, 따라갈 거 아냐?”
제라르의 질문을 받은 석강호가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가는 게 아니라, 프랑스를 뒤집을 각오로 강철규 학장님부터 태산이, 나, 너, 양 소령까지, 소문난 독종들이 줄줄이 나설 텐데 너라면 섬뜩하지 않겠냐?”
“그러네.”
“대장 성격을 알 테니까 함부로 부총국장에서 자르기는 겁나겠지. 그렇다고 대장이 정보총국을 이리저리 흔드는 것도 못마땅할 테고. 그렇다면 남은 건 이곳에서 대장을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잖아.”
“오!”
“이제 알겠냐?”
느닷없이 감동이 쓰나미처럼 몰려든 얼굴로 석강호가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요?”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방문하는 놈이 있지 않겠냐? 놈들을 맞아 줘야지.”
강찬의 대꾸를 들은 석강호가 소리조차 나지 않는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하여간 이놈은 잔인한 표정을 지어도 이상스레 더럽게 잔인하다는 느낌을 풍긴다.
***
통화를 마친 강철규는 곧장 학장실을 나섰다. 그런 뒤에 곧바로 곽철호 대령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부관이 벌떡 일어나 강철규를 향해 손을 올렸다.
“곽 대령, 안에 있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다.”
급하게 움직이는 부관을 손짓으로 만류한 강철규는 바로 문을 열었다.
“학장님?”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피던 곽철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성격대로 책상과 책장, 벽에 걸린 태극기가 전부인 소박한 방이었다.
“특별 작전이다. 장소는 예멘. 인원이 대략 70명 정도라고 말했는데 그 수준에서 곽 대령이 선발해.”
“혹시 대장이 요청한 작전입니까?”
강철규의 고갯짓을 본 곽철호가 긴장되는 한편, 기대하는 눈빛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지휘관도 정하셨습니까?”
“우선 나하고.”
집중하는 곽철호를 보며 강철규는 먼저 피식 웃었다.
“곽 대령으로 했는데 괜찮겠지?”
강철규가 질문한 직후였다.
“감사합니다!”
마치 신병이 된 양, 곽철호가 커다랗게 답을 토해 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