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1
낙양(洛陽). 무림맹 총단.
작은 성을 방불케 하는 총단의 규모는 실로 엄청났다.
상주 인원만 삼만 명.
십 년째 지속 중인 마교와의 정마대전 때문이었다. 강호의 내로라하는 고수는 맹에 대부분 속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데 오늘 분위기가 남달랐다.
간밤에 전장에서 보내온 소식 하나에 총단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총단에 남아 있던 모든 사람이 환호했다.
드디어 오랜 싸움의 종지부가 찍힌 것이다.
물론 불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서둘러라. 영웅들께서 귀환하시면 큰 잔치가 벌어질 것이다.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우리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총단 하인들을 향해 명을 내리는 노인은 바로 무림맹 내총관 왕지(王地)였다.
대외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외총관과 달리 그는 총단 내 살림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다. 지금 그는 금의환향하고 있는 무사들을 대접할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인들을 총동원해 음식 마련과 청소 등 만찬 준비를 철저히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손이 부족했다.
전장에서 돌아오는 오만의 무사, 상주하고 있던 삼만의 무사, 그리고 인근에서 모일 축하객 등 모두 십만 명으로 예상되는 대인원이 모이는 자리였다.
왕지가 역시 옆에서 분주하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오십 대 사내에게 물었다.
“휴가 나갔던 하인들은 모두 복귀했는가?”
“아직 보고는 받지 못했지만, 당연히 했을 겁니다. 마침 어제가 복귀날짜였지요. 아, 저기 오는군요.”
내총관 휘하의 내부총관 맹찬(孟贊)이 기쁜 표정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왕지가 고개를 돌려 보니 과연 백 명 정도의 하인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총관님과 부총관님을 뵙습니다. 저희 십조 인원 한 명 빼고 모두 복귀했습니다.”
하인 중에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인의 말이었다.
그는 정기(鄭奇)란 사내로 십대조장 중 한 명이었다.
천여 명에 달하는 총단 하인들은 모두 열 개의 조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원래는 한 개 조씩 정기휴가를 보내주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어 그동안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사기진작 차원에서 백일 전 맹주의 특별지시로 조별로 순서대로 열흘간의 휴가를 가게 된 것이었다.
“으음, 늦지는 않았군. 보다시피 무사님들을 접대할 준비를 하느라 매우 바쁘다. 각 시설 관리와 청소를 마친 사람은 모두 식당으로 가서 일손을 돕도록 해라. 음식 마련하는 일이 보통이 아닐 것이니까.”
“네. 총관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래, 어서 일하도록 해라. 나는 외총관을 만나러 가봐야겠다.”
왕지가 총관실로 가자, 맹찬이 기다렸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 놈이 아직 복귀하지 않았다고? 내 분명히 비상시국이니까 절대 늦어져서는 안 된다고 했거늘. 대체 어느 놈이냐? 총관님이 아무 말씀 안 하셨지만 얼마나 내가 무안했는지······.”
맹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매사에 완벽하게 하는 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한데 옥에 티라고 단 한 명이 복귀하지 않은 것이었다.
십조 조장 정기가 안색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일반서고 청소를 맡고 있는 백소운(白少雲)입니다. 사정이 생겨 조금 늦는 것 같으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으음, 백소운이라면 십 년째 서고에서 잔다는 그 녀석 아니냐?”
“예. 서고 귀신, 일명 서귀(書鬼)라 불리지요. 서고 청소를 도맡아 하고 잠도 그곳에서 해결하지요. 원체 조용하고 착실한 녀석이라 곧 복귀할 겁니다.”
“정 조장! 지금 놈을 두둔하는 것인가? 영웅들께서 목숨을 바쳐 전장에서 싸우시는 동안 네놈들은 편하게 일만 하고 있더니 간이 너무 커졌군. 잔말 말고 백소운 그 녀석이 복귀하는 대로 광에 가둬놓도록 하게. 따끔히 교육한 후 다른 일을 시켜야겠네. 이게 다 일이 편해서 그런 게야. 원래는 휴가고 뭐고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맹주님께서 특별 지시를 내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줬건만. 내 말을 알아들었나?”
“네. 부총관님.”
정기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같은 조 하인들을 교육하는 것은 그의 임무였다.
하지만 평소 맡은 일을 묵묵히 하던 백소운이었기에 뜻밖의 사건이었다.
‘운이 그 녀석이 이렇게 규율을 어길 리가 없는데······.’
정기가 문득 아직 복귀하지 않은 백소운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이십이 년 전 벼락이 무섭게 치던 날 밤이었다.
당시 외부 객잔에서 술을 한잔하고 총단으로 복귀하던 그는 비를 피해 발걸음을 빨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는 더욱 거세지고 한 나무 옆을 지나는 순간 벼락이 떨어져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그는 부러진 나무 밑동 위에 벌거벗은 갓난아이 한 명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군가 버린 것으로 생각한 그는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숙소로 데려왔다.
이후 여러 날을 수소문했으나 아이를 버린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여자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총단 내에서 키우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아이가 열두 살이 되자 서고 청소 일부터 시켰다. 아이는 적성에 맞는지 청소를 마치면 숙소로 돌아오지 않고 서고에 틀어박혀 종일 책을 보고 지냈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의도한 일이었다. 아이가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해 책이라도 많이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었다.
‘하기야 느닷없이 휴가를 가겠다고 했을 때 수상했어. 갈 데도 없는 녀석인데, 그래도 답답할 것 같아 며칠 푹 쉬고 오라고 허락한 게 잘못이었다. 설마 도망을 간 것일까.’
정기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사십 대 중반의 나이인 그는 아직 미혼이었다.
자기 아들로 오인할까 봐 일부러 다른 성을 붙여 이름을 지어준 게 새삼스레 마음에 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내 아들로 삼을 걸 그랬나. 처음 봤을 때 온몸에서 나던 그 찬란한 금빛은 정말 잘못 본 것이었을까. 하여간 특별한 녀석이었는데······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정기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맹찬이 하인들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무안해진 정기가 분위기를 전환할 겸 맹찬에게 다가갔다.
“부총관님. 이번에 마교주 검마왕을 죽인 영웅이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험험, 자네까지 그 이야기를 들었나? 소문이 확실히 빠르군. 하지만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네. 어서 조원들을 데리고 맡은 일을 하도록 하게. 이르면 내일이라도 영웅들께서 복귀하신다고 하니까 시간이 없네.”
“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는 막사가 잘 쳐졌는지 확인하러 연무장 쪽으로 가보겠네.”
맹찬마저 떠나자, 정기가 한숨을 내쉰 후 아직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원들에게 배치 지시를 내렸다.
그때였다.
무림맹 대문 쪽에서 남루한 마의를 입은 한 청년이 천천히 다가왔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마치 그들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초연한 표정과 걸음걸이였다.
다만 피로가 겹쳤는지 창백한 기색이 조금 보였다.
정기 앞에 당도한 청년이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저씨.”
* * *
백소운이 광에 갇혔다가 풀려난 것은 사흘 후였다.
정기는 맹찬의 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 백소운 역시 순순히 잘못을 인정해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풀려난 그가 정기를 따라간 곳은 맹찬의 집무실이었다.
어젯밤 귀환무사들을 위한 잔치가 무사히 끝나 한숨을 돌리고 있던 맹찬이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이제 좀 정신을 차렸느냐?”
“네. 부총관님.”
백소운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지난 사흘간 하루 한 끼 죽만 먹으며 반성의 날을 보내서였을까. 안색은 더욱 창백해 보였다.
하지만 특유의 침착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맹찬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좋다. 복귀가 그렇게 늦지는 않았으니 벌은 이 정도로 그치겠다.”
“감사합니다.”
“후후. 좋아할 것은 없다. 당장 오늘부터 보직이 바뀔 테니까. 서고 일을 더 이상 못한다는 것은 들었겠지?”
“네.”
“으음, 그래. 생각보다 아쉬워하지 않는군. 아무튼, 오늘부터 네 녀석이 일할 곳은 마구간이다. 전쟁의 여파로 말들이 많이 상했다. 일손이 부족한 곳이니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알겠느냐?”
“네.”
백소운이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구간 일은 서고 일보다 훨씬 힘들고 무엇보다 쉴 곳이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좋아하는 독서도 하기 힘들어진 것이라 아쉬워할 만도 했다. 하지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듣던 대로 특이한 녀석이군. 알아들었다면 그만 가보도록. 정 조장이 알아서 잘 감독하게.”
“알겠습니다.”
집무실에서 나온 정기와 백소운 두 사람이 향한 곳은 하인들이 기거하는 전각인 하심각(下心閣)이었다.
마구간 일을 맡기기 전에 방부터 잡아주려는 것이었다.
이제 서고에서 잘 수 없으므로 당연한 절차이기도 했다.
“섭섭하지?”
“아닙니다. 모든 게 인연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지요. 마구간 일도 괜찮습니다.”
“너는 고작 허드렛일이나 할 사람이 아니다. 넌 특별한 녀석이야.”
“사람은 누구나 특별하지요. 자신이 잘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녀석. 말도 잘하는구나. 한데 정말 늦게 복귀한 이유를 말하지 않을 테냐? 대체 어디로 갔던 것이냐? 고향도 없는 녀석이······.”
“사실 한 사람을 만나보러 갔었습니다. 때가 된 것 같아서. 한데 뜻하지 않은 일에 휘말리는 바람에 조금 늦었습니다.”
“누구를 만났느냐? 네가 밖에 아는 사람이 있었느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을 만나러 갔었습니다.”
“허어, 또 시작이구나. 좋다. 더 묻지 않겠다. 깊은 뜻이 있겠지. 그건 그렇고 말이 나온 김에 하인 일을 그만두는 것이 어떠냐? 너는 이제 한창인데 언제까지 이 일만 할 수는 없지 않으냐?”
“이대로도 좋습니다.”
백소운의 말에 정기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너는 젊다. 꿈을 가져야지.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우리 총단 하인들은 보통 하인들과 다르다. 누구든지 십 년 기한을 채우면 조건 없이 그만둘 수 있지. 물론 나 같은 경우는 다른 목적이 있어서 계속 있는 것이지만, 너는 글을 배우지 않았느냐?”
“내세울 정도는 아닙니다. 한데 아저씨는 올해도 등룡관(登龍關) 시험을 치르실 생각입니까?”
“물론이다. 나이 제한에 걸리기 전에 꼭 통과해야지. 그러고 보니 너도 올해부터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이 되었구나. 사실 난 네가 글을 배운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수분의 눈에 띄어 상승무공을 배웠으면 했단다. 넌 특별한 녀석이니까.”
“과찬이세요. 저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무공 연마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지요.”
“하하하, 녀석. 누가 들으면 네가 무림고수인 줄 알겠다. 엉뚱한 이야기 하는 것은 여전하구나.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부터 나랑 하심수련동(下心修鍊洞)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 올해부터 너도 출입자격이 생겼으니 내가 기초부터 좀 가르쳐주마. 남는 시간에 심부름도 좀 하고······.”
정기가 안색을 조금 붉혔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상 자신의 의도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백소운이 잠시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등룡관이 열릴 때가 된 겁니까?”
“하하하. 그렇다. 어젯밤 만찬 때 들으니 이번에 일정을 앞당겨 대규모로 신입무사들을 뽑는다고 하는구나. 아무래도 마교 세력이 전열을 재정비해서 다시 공격을 가해올까 봐 대비하는 것이겠지. 천하 각지에 아직 잔당도 많고 말이야. 한데 나는 조장을 맡아 자잘한 일이 많으니, 시합이 열릴 때까지만 도와줬으면 한다. 밤에 급한 지시를 내릴 때 나 대신 전달해주기만 하면 되니까, 크게 부담은 되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수련동 안이 궁금했었습니다.”
“고맙다. 역시 너도 무공에 관심이 있었구나. 이미 나이가 들어 정식 무림맹 무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동네 건달 정도는 이길 수 있게 만들어주마.”
“감사합니다. 하지만 꼭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요. 진심으로 원한다면 말입니다.”
백소운이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정기는 이제 그런 모습에 숙달된 듯 껄껄 웃을 뿐이었다.
“알겠다. 역시 글을 배운 놈이 낫구나. 아, 이제 다 왔군. 마침 독방이 하나 있으니 여기서 자도록 해라.”
정기가 방문을 열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벌써 하심각 내부로 들어온 것이었다.
새롭게 배정받은 방은 맨 꼭대기 층이었다. 게다가 건물 구조상 모서리에 있어 매우 좁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한 사람만 지낼 수 있었다.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다른 방보다 인기가 좋은 이유이기도 했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자신의 성격을 배려해 일부러 골라준 방임을 알고 백소운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아, 그리고 제 예감이지만 올해는 꼭 정식 무림맹 무사가 되실 겁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게요.”
“허허. 말이라도 고맙다. 우리 십년 차 이상 하인들에게 허락된 무공이라 해봤자 삼류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래도 오래도록 연마했으니 이번에야말로 통과하겠지. 자, 이제 방은 됐고 마구간으로 가자.”
“네.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