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12
새벽이 되자 백소운은 간단하게 짐을 챙겨 하심각에서 나왔다.
공동식당에서 유덕, 정기, 막총, 진하림 네 사람과 합류한 그는 식사를 끝낸 후 함께 호법당으로 갔다.
호법당 연무장에는 마차와 예물을 잔뜩 실은 짐수레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간밤에 호법당 숙소에서 잠을 잔 중원표국 쟁자수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각자 맡은 짐수레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백소운 등 다섯 하인은 자신들이 맡기로 한 짐수레에 가서 천향을 기다렸다.
“예물이 추가되어 있군. 천 호위 말대로 아가씨 예물을 실은 것 같다.”
유덕이 조심스럽게 짐수레에 실은 상자들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못 보던 철상자가 서너 개 보였다.
하지만 간밤에 그대로 이곳에 놔둔 것을 보면 그다지 중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한편 연무장에는 운송대에 투입되는 무사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대부분 호법당에서 선발된 무사들로서 하나같이 무공이 출중해 보였다.
“으음, 생각보다 호위무사들의 수가 많구나.”
정기가 계속해서 불어나는 무사들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막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백 명 정도라 들었는데 지금 보니 오백 명은 될 것 같군. 소문에 의하면 무림맹과 천룡궁 사이에 혼사 말고도 중요한 협상이 있을 것 같다고 하던데, 혹시 그것과도 관계가 있는 것일까.”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네. 호위 인원 추가는 이미 들은 바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저 맡은 바 임무에만 신경 쓰면 될 것이야. 짐수레를 운반하고 천 호위 명을 따르고, 그리고 총쟁자수 소진 그 사람의 명도 따라야겠지.”
유덕의 말에 정기와 막총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 지휘부에서 하는 일은 그들이 알 수도 없을뿐더러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이상하긴 해요. 지금 보니 딱히 이 수레에 실은 아가씨 물건들이 귀중한 것 같지도 않고······ 아무래도 특수 임무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진하림이 의문을 표시했다.
이제 곧 천향이 오면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을 것 같아 지금 기회에 털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잠자코 있던 백소운이 무림맹 대문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곳 호법당 연무장과는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운아. 왜 그러느냐?”
“아닙니다.”
백소운이 안색을 조금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을 통해 대문 쪽에서 무사들이 나눈 대화를 들은 것이다.
– 그렇게 해서 겨우 맹주님을 시해하려 했던 자객을 붙잡았네.
– 아, 주작당 고수분들이시군요.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 소문대로 자객이 계집이었군. 소마녀라 했던가.
– 지금 바로 처형식이 거행된다고 하네. 아가씨께서 천룡궁으로 출발하시기 전에 소마녀를 불태운다고 하더군.
– 그게 정말인가? 아가씨께서 검마왕이 죽자 놈의 딸이라도 대신 직접 처형을 해 복수를 하려는 것 같군. 하기야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어머님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대화를 나누는 음성이 계속 들렸다.
백소운의 마음이 착잡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그녀가 다시 붙잡힌 것인가. 그대로 신강으로 갔으면 붙잡힐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백소운이 복잡한 눈빛을 보였다.
의문의 여지는 있지만, 그녀의 부친을 죽인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하지만 한 번 그녀를 구해준 것도 그였다.
무심결에 그런 행동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소속해있는 곳이 무림맹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큰 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구나. 행동에 제약이 따르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한 곳의 수장이 된다면 사정은 달라지겠지.’
백소운이 처음으로 무림맹주라는 자리에 대해 생각해본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이번 운송의 총책임자이자 운송대장인 장덕수가 조장급 무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무사들이 일제히 예를 표하자, 장덕수가 굳은 안색으로 말했다.
“긴급 상황이 벌어져 출발에 앞서 대연무장에서 처형식이 거행될 것이오. 처형을 당할 자는 바로 며칠 전 맹주님을 암살하려다가 도주했던 자객이오. 화형으로 다스린다고 하니 지금 모두 대연무장 쪽으로 이동하겠소이다. 처형식이 끝나게 되면 점심을 먹은 후 곧바로 천룡궁으로 출발하게 될 것이오. 알겠소?”
“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 * *
대연무장.
총단 안에 있는 연무장 중 가장 넓은 이곳은 최대 백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가히 광장이라 불릴 수 있는 이곳 정 중앙에 지금 제단 하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바로 소마녀를 화형에 처하기 위한 준비였다. 그녀는 지금 장작들로 뒤덮인 곳 중앙에 세워진 긴 말뚝에 묶여 있었다.
흑단 같은 머리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입고 있는 옷 역시 붉게 변했다.
잡히기 전에 혈투를 벌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정신은 잃지 않은 듯 눈빛은 반짝이고 있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대단한 미색이군. 마도제일미인이라는 소문이 과언이 아니었군.”
유덕이 소마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랬다.
다들 말은 안했지만 소마녀의 미색은 치명적이었다.
얼굴 절반 이상에 피가 묻었음에도 그 아름다움을 숨길 수 없었다.
“요녀로군. 화형을 시킬만하다.”
장덕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평소 수양이 철저한 인물로 특히 미인계에 강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정마대전 당시 마교 휘하의 문파였던 소녀문(少女門)과의 싸움에 선봉으로 나선 적도 있었다.
한데 그 역시 내심 지금 소마녀의 미색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백소운은 조심스럽게 주위 경계를 살피고 있었다.
아직 맹주 백리천이나 백리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은 상황.
소마녀를 구하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하지만 주저하고 있었다.
‘좀 더 상황을 지켜보자. 예감에 불과하지만, 뜻밖의 상황이 생길 수도 있을 듯하다.’
백소운이 마음을 다스렸다.
물론 그가 소마녀의 미색에 크게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동요는 있었지만 이미 어느 정도 극복한 바였다.
다만 예상하지 못한 악연과 관련되어 있어 복잡한 심사임은 틀림없었다.
‘차라리 소마녀가 오늘 처형을 당하는 게 좋은 일일지도······ 어차피 그녀는 부친의 원수를 끝까지 갚으려 할 것이다. 나로선 한 번의 기회를 준 것으로 충분한 게 아닐까.’
백소운은 지금 상황을 최대한 순리로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녀를 살려야 한다는 소리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실로 미묘한 마음의 파장이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바로 자신의 주인이거늘, 어찌 동요한단 말인가. 내게 힘이 있다고 명분이 없는데도 마음대로 행사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어차피 저 소녀는 죽을 운명인 것이다. 나 때문에 며칠 더 살게 되었을 뿐······.’
백소운이 이처럼 마음의 갈등을 겪고 있을 때.
드디어 지존각 쪽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바로 맹주 백리천과 그의 딸 백리영, 그리고 장로와 원로, 당주 등 지휘부 고수들이었다.
“맹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벌써 오만 명이 넘는 인원이 모인 대연무장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만하면 경계 병력과 마교 잔당 퇴치를 위해 중원 각지에 긴급 파견된 병력 등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 모인 셈이었다.
‘소마녀를 처형함으로써 승전식의 대미를 장식하려는 것 같구나. 상징성도 있고, 아직 마교의 세력권에 놓인 무림인들도 많으니 그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되겠군. 하지만 마교 성녀를 불태워 죽이는 게 아무리 관례라 해도 이러는 것은······.’
백소운의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검마왕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물어볼 걸 그랬구나. 왜 그녀는 맹주님을 원수로 확신한 걸까.’
백소운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화형식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불만 붙이면 될 정도가 되자, 집법당 당주가 횃불을 들고 백리천을 바라봤다.
“맹주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백리천이 대답 대신 옆에 앉아 있는 백리영을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면사를 쓰고 있었다. 뒤에는 천향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백소운이 천향을 보고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
‘으음, 어제 느껴졌던 기운과 조금 다르군. 아니 원래대로 돌아간 것인가.’
그때였다.
백리영이 입을 열었다.
“마녀를 죽이기 전에 먼저 그녀의 죄를 낱낱이 밝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유언도 할 수 있게 하고.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좋다. 죽일 이유는 넘쳐나지.”
백리천이 눈짓을 하자, 집법당주가 무사들을 향해 말했다.
“먼저 이 계집은 마교주 검마왕의 딸로 그동안 숱한 본맹 무사들을 죽였소이다. 이 계집에 의해 목숨을 잃은 무사들의 수만 수백 명이니 어찌 처형하지 않을 수 있겠소? 또한, 며칠 전에는 맹주님을 시해하기 위해 본 총단내로 잠입까지 하였소. 이 두 가지 사안만 해도 죽을죄를 지은 것이 분명하니, 더 이상 죄상을 밝힐 필요도 없을 듯하오. 마녀는 들어라. 죽기 전에 할 말이 있느냐?”
“어서 죽여라. 다만 내 아버님을 죽인 백리천 네놈을 직접 처단하지 못한 것이 한이다.”
“계집. 검마왕을 죽인 영웅께서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데 어찌 맹주님이 죽였다고 단정을 하는 것이냐?”
“흥! 아버님을 죽일 능력이 되는 자는 백리천 저자밖에 없다. 증거도 있다. 거듭 말하지만, 오늘 내가 여기서 죽은 것이 알려지면 본교의 숨은 고수들이 나타나 네놈 목을 칠 것이다.”
소마녀의 말에 백리천의 안색이 굳어졌다.
“헛소리를 왜 자꾸 하는 것이냐? 검마왕을 죽였다면 그것은 큰 영예일 터. 내가 굳이 숨길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냐?”
“그건 바로 네놈이 비겁하게도 암수를 썼기 때문이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아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 아버님은 운공요상을 하시던 중 등에 일격을 맞고 돌아가셨다. 그 일격만 없었다면 얼마든지 쾌차할 수 있었던 말이다. 또 있다. 아버님의 등에 드러난 장력의 흔적이 네놈이 연마한 무적대라장(無敵大羅掌)과 유사하다.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변형을 가한 듯하나,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이래도 부인할 셈이냐?”
소마녀의 말에 무사들이 웅성댔다.
애당초 검마왕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 그를 죽인 인물로 가장 먼저 언급된 인물이 바로 백리천이었다.
비록 이전에 검마왕과의 몇 번의 승부에서 근소하게 패배한 적이 있었으나, 그래도 검마왕을 죽일 수 있는 고수는 그뿐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하지만 백리천은 자신과 무관함을 밝혔었다.
한데 지금 소마녀의 말을 듣고 보니, 백리천이 비겁하게 등 뒤에서 검마왕을 죽였다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백리천으로서는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강호의 관례에 따르면, 운공요상을 하고 있는 자를 등 뒤에서 공격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나는 당시 지휘부 막사에 있었다. 비록 검마왕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천무산(天武山)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잠시도 막사를 비우지 않았지. 무엇보다 나는 정파 무림의 수장으로서 그런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다. 무슨 착각을 한 것이 아니냐?”
백리천의 말에 소마녀가 안색을 굳혔다.
백리영이 말했다.
“그러니까 검마왕이 누군가에게 패한 후 모처에서 운공요상을 하던 중 또 다른 자의 일격을 맞고 사망한 것이군요. 누가 검마왕의 시신을 먼저 발견한 것이죠? 어쩌면 그가 범인일 수 있겠군요.”
“설마 그가······.”
소마녀가 안색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누군가 집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백리천이 말했다.
“아무래도 내부에서 배신자가 생긴 것 같군. 으음, 아무래도 좋겠지. 그자 또한 분명 부인을 할 것이니까. 아무튼, 진실은 차차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는 이제 처벌을 받아야 한다. 다만 마녀를 화형에 처하는 것이 비록 관례라 하나 여인의 몸임을 감안하여 먼저 목을 쳐주마. 그게 좀 더 편할 것이다. 집법당주. 목을 벤 후 시신을 불태우도록 하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집법당주가 고개를 숙인 후 왼손으로 검을 뽑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소마녀의 목을 향해 내리쳤다.
쐐애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