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13
집법당주의 검이 빠르게 다가오자, 소마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길지 않은 생애의 마침표가 지어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사흘 전 이름과 얼굴 등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을 구해주었다. 그리고 총단에서 멀리 떨어진 한 동굴에 자신을 갖다 두었다.
‘아버님을 죽인 자가 정말 부교주라면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아, 누군지 모르나 날 한 번만 더 구해준다면 좋으련만······.’
소마녀는 신강으로 돌아가려다 다시 발길을 돌린 것을 후회했다.
몸 상태가 예상보다 훨씬 좋아 백리천을 다시 한번 급습할 의도를 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총단 쪽으로 되돌아오다가 추적 중인 주작당 고수들의 합공을 받아 그만 체포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그녀가 복수를 서두른 것도 사정이 있긴 있었다.
교주 대행을 맡은 부교주가 교를 재정비하기 위해 전쟁중단을 선언했던 것.
검마왕이 죽고 후퇴하던 중 무림맹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봤던 이유도 있었지만, 후계 구도가 명확하지 않은 탓이 가장 컸다.
죽은 검마왕에게 아들이 하나 있긴 있었으나, 이십이 년 전 태어나자마자 사라져 지금도 찾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소마녀가 자신 보다 네 살 위인 오라비의 얼굴을 전혀 모르는 이유였다.
무엇보다 혼란을 부추기는 것은 공식적으로 소교주의 자리는 실종된 아들이 맡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들을 찾고 말겠다는 검마왕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복수는 뒤로 미뤄졌다.
그 이면에는 실질적으로 비게 된 교주 자리를 차지하려는 거대한 욕망들이 꿈틀거리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소마녀는 이에 불복하여 혼자서라도 복수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던 것이었다.
‘너무 서둘렀다. 부교주가 만약 아버님을 암습했다면 그놈부터 처단했어야 했는데······.’
소마녀, 아니 임소혜(林素惠)가 다시 한번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이제 나의 생도 끝이구나. 한데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지?’
임소혜가 의아해하며 눈을 떴다.
한데 놀랍게도 집법당주의 검이 자신의 목 바로 앞에 멈춰져 있는 게 아닌가.
“왜 그러시오?”
백리천이 묻자, 집법당주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갑자기 진기가 흩트려져서······ 죄송합니다.”
집법당주가 굳은 표정으로 검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빠르게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하지만 혈도도 이상이 없었고 모든 게 정상이었다.
‘너무 긴장했었나. 많은 사람 앞에서 이 무슨 꼴인가.’
집법당주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다시 검을 들었다.
한편 백소운은 지금 적지 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 집법당주의 진기를 격공장으로 흩트린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그는 이번에는 전면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최후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소마녀를 구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그였다.
혼자 몸이라면 어떻게든 상관이 없지만 그에게는 정기가 있었다.
정기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절대 없어야 했다.
바로 그때였다.
무림맹 대문 쪽에서 한 사람이 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멈추시오. 천룡궁 장로로서 맹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집법당주가 움찔하며 동작을 멈췄다.
안 그래도 몸이 정상이 아닌 듯했다. 마침 잘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한편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대연무장에 들어오는 천룡궁 장로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중앙에 천룡문양이 새겨진 백의무복을 입은 그는 궁반척(宮班戚)이란 인물이었다. 한 명 한 명이 장문인 급 고수라는 천룡궁 칠십이 장로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궁 장로. 어인 일이오?”
백리천이 그를 알아보고 반겼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달 전 무림맹 총단에 와서 천룡공자와 백리영의 혼사를 의논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맹주님. 백리 소저께서 본궁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궁주께서 직접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소? 한데 저 마녀의 처형을 멈춘 이유는 무엇이오?”
“저 계집을 그냥 죽여서는 안 됩니다. 기밀을 많이 알고 있는 년이니 모두 알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년을 본궁으로 압송하게 해주십시오. 토설을 받아낸 후 반드시 죽일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궁반척의 말에 무사들이 웅성거렸다.
아무리 천룡궁이라지만 무림맹에서 잡은 포로를 마음대로 데려갈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고문을 해도 무림맹에서 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백리천은 심사숙고하는 표정이었다.
‘천룡궁과는 이미 마교 잔당을 처리한 후 마교 총단까지 함께 공격하기로 임시 약조가 되어 있는 상태다. 물론 혼사를 조건으로 한 것이지만, 저 계집까지 내준다면 더욱 확실히 협력관계가 유지되겠지. 더 이상 눈치를 보며 협상할 필요도 없고, 혹시 모를 복수도 피할 수 있게 된다. 우리로서는 밑질 게 없는 장사다.’
백리천은 내심 승낙했지만, 아직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혹시 천룡궁에서 다른 선물이라도 줄까 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궁반척이 무사들을 보며 말했다.
“저년을 본궁에 내어주시면, 우리 공자님과 백리 소저의 혼인 전이라도 천하에 흩어져 있는 마교 잔당을 소탕하는데 적극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 이는 우리 궁주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궁반척이 기존의 약속 중 하나를 즉각 실행할 것을 대외적으로 공표하자, 백리천이 흡족해했다.
“하하하. 그렇게 하시오. 천룡궁이 본맹을 도와 무림의 평화에 힘쓴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소? 아, 그리고 이건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이번 혼사는 정략혼인이 아니오. 천룡공자의 무공과 인품이 후기지수 중 제일이라는 소문을 믿고 진행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바라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궁주께서도 그동안 적극 무림의 일에 나서지 못한 점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제 오늘을 기점으로 무림의 악을 척결하는 데 본궁이 앞장 설 겁니다. 무림 동도들께서는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궁반척이 천천히 대연무장으로 들어오고 있는 천룡궁의 정예무사들을 쳐다봤다.
“천룡궁 무사들이군!”
“무공이 그렇게 대단하다지?”
“수준이 남다르다고 하더군.”
무사들이 웅성대며 백여 명에 달하는 천룡궁 무사들을 쳐다봤다.
“맹주께서 허락하셨으니 저 마녀를 인계받도록!”
궁반척의 명에 천룡궁 무사 두 명이 읍을 한 후 임소혜를 인수받았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한 쇠사슬을 임소혜의 손목과 발목에 채웠다.
철컹! 철컹!
“만년한철이군. 역시 천룡궁의 행사답군.”
사람들이 놀라는 가운데 임소혜는 마차 한 대에 태워졌다.
이미 혈도가 찍혀있는 상태였다. 체포당할 때 내상을 다시 입은 그녀는 그저 몸을 맡길 뿐이었다.
백소운은 그러한 모든 과정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막 손을 쓰려던 찰나이긴 했다.
조금 무리일 것 같았지만, 자신의 위치가 드러나지 않는 격공장력으로 임소혜를 총단 밖으로 날려 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 그녀의 혈도까지 풀어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후 그녀 혼자서 무림맹 무사들의 추적까지 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한데 뜻밖에도 천룡궁 무사들이 나타나 처형이 미뤄지게 된 것이었다.
‘아마도 우리와 동행하게 되겠군. 가는 길이 평탄하지는 않을 것 같구나. 소마녀에 대한 처리는 가는 도중 생각하자.’
백소운이 한숨을 돌렸다.
세상일에는 무력만으로 해결될 일이 있는가 하면 명분이 꼭 있어야 하는 일도 있었다.
임소혜에 대한 처리는 그로서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신경이 무척 쓰인다는 것을.
지금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이 그 증거였다.
상황이 정리되자 이제 남은 것은 운송대의 출발이었다.
혼인 예물운송에다가 백리영의 보호, 그리고 임소혜의 압송까지.
많은 의미가 내포된 운송임무가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한편 백리천은 임소혜 때문에 무력이 좀 더 보강되어야 한다는 총군사의 조언을 수용했다. 즉시 장로 두 명을 운송대에 가담하게 했다.
거기에다가 지존수호대의 정예무사 백 명을 추가해 백리영의 호위에 만전을 기하게 했다.
출발 전 백리천이 백리영에게 말했다.
“영아. 직접 가보려는 너의 생각은 나도 이해가 된다. 아무래도 혼인을 하기 전 천룡공자를 직접 만나보고 사람됨을 살펴보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천룡궁과의 동맹 문제는 무림의 영구적인 평화정착을 위해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총군사가 계속 협상을 할 것이지만 너의 역할 역시 막중하다는 것을 명심해라. 혼인이 실제 이루어져야 완전한 동맹이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알고 처신하여라.”
“천룡궁주의 며느리가 되어 맹을 도우라는 말씀인가요?”
“그렇다.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천룡공자는 여인이면 누구나 흠모할 수밖에 없는 청년이라고 들었다. 너 역시 마음에 들 것이다.”
“그건 겪어봐야 알겠지요. 한데 아직도 검마왕을 죽인, 아니 중상을 입힌 영웅을 찾지 못한 건가요?”
“그렇다. 설마 그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
백리영이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이제 출발 준비가 모두 마쳐진 상태.
백소운을 비롯한 다섯 하인도 짐수레 한 부분씩을 잡고 있었다.
천향은 그들 옆에서 말을 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하인들을 지휘하는 모습이었다.
백소운은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눈을 빛냈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하게 알겠구나. 어제의 천 호위와 지금 천 호위의 기운은 확연히 다르다. 한데 아무리 봐도 지금이 진짜인 것 같으니, 어제 낙양사흉을 죽인 여인은 다른 사람일 확률이 높구나. 으음, 설마 그 여인이 백리 소저란 말인가?’
백소운이 고개를 돌려 천천히 마차에 올라타고 있는 백리영을 바라보았다.
갈무리가 잘 되어 있어 본신내공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기감만은 느낄 수 있었다.
‘으음, 내 예상이 맞는다면 백리 소저의 무공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대단하겠군. 맹주님도 잘 모르는 것 같구나.’
백소운의 시선이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궁반척에게 향했다.
천룡궁 고수 중 한 명인 그의 무공을 가늠해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천룡궁 무공의 특징 중 하나가 겉으로 그 수준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었다. 소문이 맞는 듯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라면 백소운이야말로 무공을 전혀 배우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반박귀진의 전형이었다.
다만 두 사람의 차이라면, 궁반척은 무공을 숨기려는 느낌이 강하지만 백소운은 아예 그걸 초월하는 느낌이었다.
산이 산이면서 산이 아니듯, 무공 역시 배웠으면서 집착을 버려 마치 배우지 않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백소운은 특수 능력을 이용해 궁반척의 무공 경지를 알아보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만두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상대의 실력을 몰래 보는 것이 그의 성정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과 대치하는 경우처럼 꼭 필요한 경우까지 사용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뜻하지 않게 상태창이 나타나는 경우를 방지하는 방법을 어젯밤 터득한 것은 의의가 있었다.
그것은 사실 간단한 것이었는데, 바로 의념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금단비서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궁금증이 일어도 마음으로 차단하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는 더욱 쉬웠다.
‘그래도 한번 해볼까. 왠지 음산한 느낌이 드는 인물이니······.’
백소운이 마음을 내자, 곧바로 상태창이 나타났다.
‘으음, 비록 하이기는 하나 절정 급이라니 상당한 고수구나. 역시 천룡궁 장로답다.’
백소운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대부분 자신보다 무공이 아래일 것 같아서인지, 더 이상 상대의 무공 수준을 엿보는 것에 큰 흥미가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상태창이 곧바로 사라지고 그 역시 마음을 다시 다스렸다.
‘언젠가는 번뇌가 없어지고 뜻이 풀릴 날이 있을 것이다. 이제 시작인만큼 차근차근 나를 완성해 나가도록 하자.’
백소운이 자연스럽게 자기완성(自己完成)이라는 목표를 세우는 순간이었다.
‘무공의 궁극에 달한다면 모든 의문이 풀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직 내 실력이 부족해서 안개가 걷히지 않았을 뿐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결국 궁극의 무공이라는 무형검(無形劍)에 도전해야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