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133
무맹비고 안은 그야말로 거대한 서고였다.
십 년 간 서고 관리를 해왔던 백소운으로서는 신세계가 펼쳐져 있는 느낌이었다.
수만 권이 넘는 비급들이 서고에 빼곡히 꽂혀 있었다.
“이 모두가 비급이란 말인가.”
백소운이 감탄했다.
많은 책을 읽었지만 금단비고에서 익힌 무공 말고 다른 무공들은 거의 접해보지 못한 그였다.
당장 비급들을 읽어볼 생각이 절로 났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내일 아침까지 나가야 하는데 벌써 밤이었다.
‘일단 내가 갖고 있는 장보도가 무상장보도가 맞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단 한 권만 가지고 나갈 수 있다면 바로 그 무상비급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백소운이 금단비고에서 무상장보도를 꺼냈다.
아무 내용도 적혀 있지 않은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이곳에 정말 무상비급이 있다면 장보도에 어떤 반응이 생기리라는 것이 그의 예측이었다.
하지만 오산이었을까.
장보도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초조해진 것은 바로 백소운이었다.
‘이대로 시간만 보낼 수는 없다. 장보도에 변화가 있을 때까지 다른 비급들을 한번 읽어보자. 하지만 너무 권수가 많으니 한 번에 독파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을까.’
백소운이 잠시 궁리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가 눈을 빛냈다.
‘그래. 천리안이라면 책장을 넘기지 않고도 모든 책의 내용을 한 번에 볼 수 있을 것이다. 십만 권에 육박하는 책들이지만 한나절 정도면 충분히 암기할 수 있으리라.’
백소운이 곧바로 천리안을 가동했다.
이 천리안은 시전자의 무공에 비례해 그 효과가 높아지는 것으로, 지금 상황에 맞았다.
하지만 한꺼번에 보는 것은 처음 해보는 시도였다.
‘모든 것을 본다. 마음으로.’
백소운이 정신을 집중하며 눈을 빛냈다.
두 눈에서 강렬한 금빛이 뻗어 나와 마치 안개처럼 비급들에 스며들었다.
순간, 비급들의 내용이 그의 머릿속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백소운은 서두르지 않고 그 내용을 암기했다.
구결 암기와 동시에 이해까지 저절로 이루어졌다.
‘정말 방대한 내용이군. 일반 무공이라 해서 얕볼 것이 아니다. 앞으로 새로운 무학을 창안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구나.’
백소운이 기뻐했다.
이는 무공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도가 깊어짐에 따라 마음 또한 편안해진 결과였다.
‘군자무본(君子務本)이란 말의 뜻을 비로소 알겠구나. 근본에 충실하면 저절로 길이 생긴다고 하더니, 무형검 진전에도 큰 도움이 될 듯하다.’
백소운이 들뜬 마음을 다스리며 비급 독파에 전념했다.
어느새 비고 안에는 금빛으로 가득했다.
백소운은 더욱 집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무아지경에 빠져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비고 안에 가득했던 금빛 기운이 모두 사라졌을 때였다.
눈을 감고 수많은 무공을 정리하고 있던 백소운이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맑고 고요해져 있었다.
달관한 듯한 고승의 눈빛이라 할까.
“휴우······ 내가 그동안 너무 오만했구나.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무림 선배님들의 무공이 이렇게 대단하다니. 물론 그 뛰어난 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백소운이 탄성을 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진심으로 감탄한 것은 바로 비급을 남긴 무림고수들의 무공에 대한 오의(奧義)였다.
오의는 깨달음과 같은 것으로, 무공을 창안할 때의 핵심요소였다.
하지만 그 오의는 후대에 완벽히 계승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비급이나 무공 전수를 통해 무공을 배우게 되는 사람이 창안자의 오의를 완전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얼굴이 모두 다르듯 그 순간순간에 느끼는 감정들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소운은 이미 무형검의 경지 중에서도 상위에 올라와 있는 절대고수였다.
바다가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듯이 그 오의 또한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었다.
‘내가 뜻하지 않은 기연을 만났구나. 한데 공교롭게도 비급의 수가 꼭 구만구천 구백 구십 구권이구나. 마지막 십만 번째 비급이 있을 듯한데, 혹시 그 비급이 무상비급이 아닐까.’
백소운이 품속에 다시 넣어두었던 무상장보도를 꺼냈다.
이미 새벽 무렵이 다 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으면 비고를 나갈 생각이었다.
물론 비고 안의 점검도 마친 상태였다.
지하 이 층과 삼 층으로 내려가는 비밀통로는 발견 못 했지만, 그곳들은 처음부터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그가 입수한 무상장보도가 진짜라는 증거도 없었다.
그저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된 것이라 큰 미련도 없었다.
이미 생각지도 못한 기연을 만난 셈이라, 욕심을 내지 않으려는 생각도 한몫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무상장보도는 많은 변화가 생겨 있었다.
전에 보이지 않았던 지도가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천리안을 펼칠 때 드러난 무형공력 때문에 반응을 한 것인가.’
백소운이 눈을 빛내며 무상장보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아, 이건 바로 이곳 무맹비고의 지도가 아닌가.”
백소운이 탄성을 터뜨렸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본 후 그가 비고 한쪽 구석 벽을 쳐다봤다.
무상장보도에 그려져 있는 지도에서 가리키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지하 일 층 자체에 만들어진 비밀 석실과 연결된 벽이었다.
특이한 사실은 석실을 여는 방법에 있었다.
무상장보도를 벽 앞에서 태워야 했다.
‘단 한 사람에게만 기회를 주시려는 의도 같구나. 이 역시 이미 정해진 안배인가.’
백소운이 성큼성큼 구석진 곳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보니 역시 장보도에 그려진 그림대로 희미한 동심원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백소운이 망설이지 않고 삼매진화로 무상장보도를 태웠다.
화라락.
장보도가 타며 연기가 났다.
한데 그 연기가 금빛이 아닌가.
금빛 연기는 벽 틈으로 스며 들어갔다.
얼마 후 그그긍 소리와 함께 벽이 갈라지며 석실 하나가 드러났다.
백소운이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다시 그그긍 소리를 내며 벽이 다시 합쳐졌다.
출구가 막힌 것으로 볼 수 있어 불안하게 느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소운은 개의치 않고 석실 안을 둘러봤다.
야명석이 박혀 대낮처럼 환한 석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백소운이 석실 벽을 쳐다본 순간 두 눈 가득 이채를 띠었다.
석벽에 뭔가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읽어보니 바로 상승무공들과 깨달음이 적힌 경문이었다.
“무상비급이다. 책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벽에 새겨져 있었구나.”
백소운이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무상선인께 무림말학 백소운 인사드립니다.”
백소운이 말을 한 후 석벽에 적혀 있는 내용을 암기하기 시작했다.
미세한 진동이 바닥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무래도 석실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백소운은 천리안을 익혀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만 그 내용이 생각보다 심오해 이해는 단번에 할 수 없었다.
특히 깨달음을 적은 경문은 극히 심오했다.
‘역시 예상대로 무상선인께서 말년에 무형검을 터득하셨구나. 그것도 단숨에 지고의 경지에 오르셨다.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의 내 경지보다는 훨씬 높은 게 틀림없다.’
백소운이 다소 흥분을 느꼈다.
단순한 무형검의 이론이 아닌 실질적인 무형검 공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침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나가자. 천마성으로 가는 동안 시간이 많으니 그때 연구하면 될 것 같다.’
그때였다.
진동이 조금 멈추는가 싶었던 석실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석벽에 새겨져 있던 무상비급의 내용이 모두 사라진 것은 물론이었다.
백소운이 급히 신형을 돌려 통로가 있던 벽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벽이 갈라졌다.
백소운이 급히 나오자 뒤쪽에 있던 석실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하지만 출구를 이루고 있던 벽은 건재했다.
게다가 백소운이 빠져나온 즉시 벽이 합쳐지며 원상태로 복귀했다.
처음과 마찬가지 상태가 된 것이었다.
백소운은 석벽 맨 마지막에 적혀 있던 무상선인의 당부 글을 떠올렸다.
그것은 누군가 석실을 발견했을 때는 감당하기 힘든 천하대란이 시작되었을 때이니 무림을 위해 싸워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무림맹주의 신물인 지존령기(至尊令旗)가 보관된 장소를 가르쳐주었다.
백소운이 비고 중앙에 놓여 있는 바위 하나를 쳐다봤다.
‘저 안에 지존령기가 있단 말인가. 지존령기는 초대 맹주의 신물로서 현 맹주라 해도 지존령기를 가진 사람의 명을 받아야 한다고 했던가.’
백소운이 바위 앞까지 걸어가 손을 대고 내공을 불어넣었다.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가루로 변했다.
먼지가 사라진 자리에는 깃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금빛이었다.
“지존령기로군. 무상선인님이 사용하시던 것으로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던가.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는 잘 모르겠구나.”
백소운이 중얼거린 후 지존령기를 집어 역시 금단비고 안에 넣어두었다.
금단비고는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비밀금고와 마찬가지라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이제 정말 나가봐야겠군.’
백소운이 지존각 지하와 연결된 출구 쪽으로 갔다.
그곳은 철문이 있던 곳으로, 비고 내에서 보기에는 보통 벽처럼 되어 있어 이곳에 문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나가면 기관이 원래대로 복구된다고 했던가. 내 기운을 기억해두었다면 저절로 문이 열릴 것이다.’
백소운이 좀 더 다가갔다.
순간, 그그긍 소리와 함께 벽이 갈라졌다.
백소운이 그 틈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휙휙.
백소운이 무맹비고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자명선생이 매우 기뻐한 것은 물론이었다.
“나오셨군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네. 계속 여기서 기다리신 겁니까?”
“아닙니다. 아무래도 오래 계실 것 같아서 한숨 자고 반시진 전에 왔습니다. 일단 기관부터 점검해보겠습니다.”
자명선생이 철문 옆에 오목한 곳을 몇 번 누르고 문지르자 그그긍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백소운은 일부러 자세히 보지 않았다. 하지만 마치 열쇠처럼 기관을 작동하는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다시 철문이 닫히자, 자명선생이 미소를 지었다.
“완전히 고쳐졌습니다. 비고 안에 다른 이상은 없었습니까?”
“네.”
“잘되었군요. 비고 안 상태는 나중에 맹주님과 함께 와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에서 마음에 드는 무공비급은 발견했습니까?”
“네.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마음에 드는 비급도 있었고요.”
“아. 잘 되었군요. 그 비급을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머릿속에 기억을 해뒀지요.”
“하하하. 어떤 무공인지는 여쭤보지 않겠습니다. 맹주님께서도 기관이 정상 작동한다는 사실을 들으면 기뻐하실 겁니다. 시장하실 텐데 나가서 식사하고 천마성으로 출발하십시오. 네 분 호법은 이미 준비를 모두 마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한데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말씀하십시오.”
“맹주님의 신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건 왜?”
“갑자기 궁금해져서 여쭤보는 겁니다.”
“맹주님 신물은 따로 없습니다. 맹의 비사인데, 맹주 신물인 지존령기는 초대맹주님이 등선하신 후 사라지고 말았지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지존령기를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그분에게 맹주 자리를 내놓아야 한답니다.”
“아직 새로운 맹주 신물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단 말입니까? 지존령기가 나타나면 맹주님께서 정확하게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지존령기가 나타나면 일단 현 맹주는 부맹주로 밀려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부맹주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 맹의 관례가 되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누군가 지존령기를 훔쳐서 악용한다면 그것 또한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순히 지존령기만으로 새 맹주가 되는 게 확정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초대 맹주님의 진전을 이어받았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일종의 거부권이군요.”
“네. 그런 셈이지요. 지존각 바깥까지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가시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