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14
무형검.
금단비서의 마지막 부분에 적혀 있던 무공의 경지.
삼류, 이류, 일류, 절정, 최절정 위의 상승무공 경지였다.
마음의 작용이 중요하기에 심검(心劍)으로도 불린다.
사실 금단비서의 모든 무공은 무형검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백소운 역시 알고 있었다.
그가 결심한다면 금단비서 역시 무형검의 연마방법에 대한 기록을 보여주리라는 것을.
‘금단비서 마지막 장에 있는 무형(無形)이란 글자가 적힌 금색 문을 열면 아마도 새로운 환상 공간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무형검에 관한 내용이 있을 것이다. 오늘 밤부터라도 시작해야 할 듯하구나. 새 무공을 창안하는 것과는 별개로, 무공의 끝을 볼 수 있는 최고의 길을 애써 외면할 필요는 없겠지. 문제는 무형검 연마에 흠뻑 빠져 세월을 잊고 지내는 것인데, 그 점만 조심하면 될 것 같다.’
백소운이 결심을 다시 한번 확고히 한 후 지금껏 배운 모든 무공을 빠르게 한번 정리했다.
무형검으로 가는 과정이란 느낌으로 정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전까지는 하루빨리 신세내력을 알기 위해 이게 마지막이라는 느낌으로 연마를 했었다.
이윽고 정리가 끝난 후 눈앞에 그만이 볼 수 있는 안내글자가 다시 나타났다.
‘아, 역시 지금까지 배운 것이 무형검의 전단계 유형검이었군. 한데 대체 이런 글자는 어떤 주술로 안배되어 나타나는 것일까.’
둥둥둥!
북소리와 함께 장덕수의 출발 명령이 떨어지자, 백소운은 생각을 멈추고 짐수레를 밀었다.
‘마치 무형검 수련 시작을 의미하는 북소리 같군.’
백소운이 씁쓸해하며 짐수레를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론 그 수레는 그 혼자 끄는 것이 아니었다.
유덕이 맨 앞에서 끌고 있었다. 정기와 막총은 양옆에서, 그리고 진하림과 백소운이 제일 뒤에서 밀고 있었다.
“오라버니. 무슨 생각 하세요?”
오늘 아침부터 오라버니라 부르겠다고 선언한 진하림의 물음이었다.
백소운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 * *
낙양에서 출발한 예물 운송대는 저녁 무렵에야 성을 벗어났다.
운송대에 합류한 천룡궁 무사 백여 명과 지존수호대 무사 백여 명 덕분에 백리영에 대한 호위는 충분해 보였다.
게다가 호법당에서 자체적으로 무사들을 한 번 더 충원해 총 천여 명에 달하는 대인원이 움직이는 행렬이 되었다.
그 때문인지 무사들의 경계심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이제는 적의 습격에 대한 우려는 거의 사라졌다.
오히려 천룡궁이 있는 호남성 장사(長沙)에 어서 도착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다.
둥둥!
정지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소운 등 다섯 하인도 짐수레에서 손을 떼고 멈췄다.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 백년죽림(百年竹林)에서 식사한 후 야영을 할 것이오. 모두 그에 따른 준비를 해주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무사들과 쟁자수들이 대답과 함께 막사를 치는 등 숙영 준비를 했다.
백소운 일행도 열 명 정도 잘 수 있는 간이 천막을 가져왔기에 짐수레 옆에 쳤다.
“호호호. 표행과 달리 서두르지 않아서 좋네요. 우리끼리 오붓하게 식사도 함께할 수 있어 더욱 좋고요.”
진하림이 유덕과 백소운 등에게 건량과 물을 나눠주며 빙긋 웃었다.
“천 호위는?”
“아가씨 계신 마차로 가셨어요. 아무래도 우리와 함께 자는 것은 좀 꺼리는 것 같아요.”
“아니다. 우리가 맡은 수레의 책임자이니까 아마도 돌아올 것이다.”
젊었을 때 잠시 쟁자수 일을 해본 막총의 말에 하인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백소운은 허기를 채우면서 막사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공터를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 숲은 그야말로 고풍스러운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백 년 전 기인이사들이 즐겨 찾던 숲이라 그런지, 고요한 가운데에도 힘찬 움직임이 있구나. 도를 깨우친 사람의 마음이 이러하다고 했던가.’
백소운이 잠시 상념에 잠겼을 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천룡궁 무사들의 막사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백소운 등이 의아해하며 쳐다보니, 바로 임소혜가 타고 있는 마차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궁반척이 마차에 다가가자, 마차 안에서 나온 무사 한 명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계집이 음식을 거부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제 출발했는데 먹지 않고서 갈 수는 없다. 억지로라도 먹여야지. 밖으로 끌어내라.”
“네. 장로님.”
무사가 고개를 숙인 후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가 임소혜를 끌어냈다.
“이것 놔라!”
임소혜가 거칠게 소리쳤다. 하지만 쇠사슬로 포박을 당한데다 마혈이 찍혀 있어 꿈쩍도 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풀려있는 혈도가 아혈이라 이렇게 악을 쓰는 것이었다.
“마녀의 입을 벌리고 강제로 먹여라. 아무래도 부피가 적은 벽곡단이 좋겠군.”
“존명!”
천룡궁 무사 둘이 양쪽에서 임소혜의 입을 강제로 벌려 벽곡단과 물을 먹였다.
임소혜는 수치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기가 소진했는지 이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장덕수를 비롯하여 무림맹 무사들 또한 그런 광경을 보았으나 아무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그녀에 대한 관리 권한이 천룡궁에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개중에는 임소혜를 어서 죽였으면 하는 사람도 많았다.
임소혜의 미모가 비록 경국지색이라 하나, 오랜 전쟁 끝에 마교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었다.
임소혜가 다시 마차 안으로 끌려가자, 백소운이 안색을 굳혔다.
‘차라리 오늘 밤이라도 구출해주는 것이 좋겠구나.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다. 무림맹 소속 하인의 신분으로서 더 이상의 일탈은 용납될 수 없을 테니까.’
백소운이 임소혜가 탄 마차 주위를 살폈다.
천룡궁 무사 백여 명이 삼중으로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백소운이 아무리 은잠술을 발휘해도 쉽게 구해내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땅속으로 침투해 마차 바닥에 구멍을 뚫어 순식간에 빼내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한데 과연 내가 잘하는 것일까.’
백소운은 다시 한번 자신의 결심을 점검했다.
하지만 자꾸 임소혜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설마 나와 무슨 특별한 인연이 있는 소녀인가.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아마도 악연으로 이어져 내가 좀 더 측은하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아무튼, 검마왕을 실질적으로 죽인 자는 따로 있는 듯하니 마음이 한결 편하군. 아마도 내게 찍힌 혈도를 무리하게 풀려다 내상을 입고 운공요상을 하다가 암습을 당한 것 같은데, 정말 내부 배신자의 소행일까. 차차 알게 되겠지.’
백소운이 마음을 다스리며 막사 한쪽 구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미 식사를 마친 시간이라 진하림이 차를 한 잔씩 돌리고 있었다.
“천 호위가 늦는 것 같군. 하기야 지금은 특수한 경우니까 아가씨 옆에 있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아가씨 전담 호위이니까.”
유덕이 말한 그 순간.
인기척이 나며 천향이 들어왔다.
유덕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 호위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네. 아가씨와 마차 안에서 단둘이 오붓하게 식사했어요. 아, 그리고 지금부터는 천룡궁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분과 함께 지낼 거예요. 식사도 잠도 모든 것을 수레 옆에서 해결해야 할 듯해요.”
천향이 막사 바로 옆에 있는 짐수레를 쳐다봤다.
하지만 말과 달리 그다지 예물에는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조금 전 천향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인지 얼굴이 붉어진 유덕이 입을 열었다.
“천 호위께서 우리 책임자이시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저희와 막사를 함께 사용하려면 불편하실 텐데······.”
“괜찮아요. 한쪽에 천을 걸면 남녀 구별이 되지요. 저는 진 소저와 함께 있으면 돼요.”
“비천한 하인입니다. 소저란 호칭은 좀······.”
진하림이 얼굴을 조금 붉히며 겸양을 하자, 천향이 고개를 저었다.
“본맹의 총단 하인 분들은 일반 하인들과 달라요. 맹 밖에서는 오히려 양민보다 더 우대를 받지요. 그래서 맹주님은 여러분을 보통 사람처럼 공자나 소저로 부르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계시지요.”
“감사한 말씀입니다. 이게 다 하인 출신이었다는 초대 맹주님 덕분인 것 같군요.”
유덕의 말에 천향이 미소를 지었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유 총지기의 말씀도 일리가 있군요. 고금제일인으로 평가받는 초대 맹주님의 무공이 실전되지만 않았더라도 정마대전을 십년이나 끌지 않았을 텐데······ 무림인 모두가 아쉬워하는 부분이지요.”
“아, 그럼 초대맹주님이 남기신 비급을 발견한 사람은 천하무적이 될 수도 있겠군요.”
“당연하지요. 사실 아직 그 비급을 찾아 천하를 헤매는 분도 많아요. 특히 십 년 마다 한 번씩 있는 무맹비고 대개방 때에는 혹여 비고 안에 있을까 다들 찾느라 난리이지요.”
“아, 비급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기연이라 할 수 있겠군요.”
막총이 눈을 빛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물론이에요. 한데 제 생각에 여러분께서는 이번 운송 도중 틈틈이 무공을 연마하실 것 같은데, 그게 맞나요?”
다시 유덕이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다시 총단으로 복귀하려면 넉넉잡고 보름은 걸릴 것 같아서 틈틈이 등룡관 시험을 준비하려 합니다. 아가씨께서 감사하게도 가점을 주신다고는 하나, 일단 그런 혜택이 없다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좋은 생각이에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기 마련이지요. 저도 틈틈이 여러분의 수련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천향이 은근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미 낙양사흉을 간단히 비수로 처단하는 모습을 보여준 그녀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기세로서 한 번 더 자신의 무공을 드러내려는 것 같았다.
순간 유덕과 정기, 막총, 진하림 네 사람이 기의 위축을 느끼며 안색을 굳혔다.
천향의 무공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아예 꿈도 못 꾸는 경지에 도달해있는 점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한편, 백소운은 천향을 보면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시 기운이 바뀌었다. 아마도 내 예상이 맞는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여인은 천 호위가 아니라 백리 소저일 것 같구나. 으음, 그렇다면 왜 굳이 역용까지 하면서 신분을 바꾸었을까. 단지 적의 침입에 대비해서는 아닌 것 같은데······.’
백소운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천향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일부러 몸을 조금 떨어주었다.
천향이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기운을 거뒀다.
“죄송해요. 하지만 무공수련은 명사(名師)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여러분이 배운 육합계열 무공 또한 마찬가지지요. 무엇보다 육합계열 무공도 제대로 배운다면 정식 무사가 되는데 모자람이 없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러니 기탄없이 질문하도록 하세요. 그래야 저도 덜 심심할 것 같아······.”
천향이 말을 하다 끊고 안색을 조금 굳혔다.
그 모습을 보고 백소운이 눈을 빛냈다.
‘진짜 천 호위라면 심심하다는 표현은 하기 어렵겠지.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으니 좀 더 지켜보도록 하자. 일단은 오늘 밤 소마녀를 구출하는 것이 우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