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15
밤이 깊어 대부분이 잠들고 경계무사들만이 불침번을 서고 있는 삼경 무렵.
백소운은 마치 유령처럼 일어났다.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다. 막사 안에 함께 자고 있던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게다가 백소운이 누워 있던 자리에는 백소운과 똑같은 사람이 여전히 자고 있었다.
이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분신을 만들어둔 것이었다. 진짜 분신술을 사용한 것은 아니고 환술을 이용한 눈속임이었다.
즉, 고도의 진법을 이용해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착시를 일으키게 하는 비술이었다. 세상에 보기 드문 것임은 틀림없었다.
진짜 백소운은 극도의 은잠술을 펼쳐 마치 허깨비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유령처럼 흐릿한 모양이었다.
그는 귀식대법을 사용해 숨소리까지 없앤 후 아예 흔적 자체를 없애버렸다.
즉, 보통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같은 존재가 된 것이었다.
물론 상승고수가 이를 간파하고 공격을 가해올 여지는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 고수는 이곳에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스스스.
마치 바람처럼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임소혜가 갇혀 있는 마차였다.
주위에 삼십 명 정도의 천룡궁 무사들이 삼중으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백소운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금단비서에 여러 가지 터무니없는 비술이 많아 언제 그런 걸 써먹을까 했는데, 벌써 사용하게 되었구나.’
백소운은 자신이 서 있는 장소와 임소혜가 안에 있는 마차와의 거리를 재어본 후 내공을 일으켰다.
바로 통지술(通地術)을 시전한 것이었다. 통지술은 말 그대로 땅을 지상처럼 마음대로 통과하는 비술이었다.
물론 시간제한이 있는 단점이 있긴 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매우 유용할 수 있었다.
스스스.
백소운의 신형이 연기처럼 변하며 땅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그가 나타난 곳은 임소혜가 갇혀 있는 마차 밑이었다.
마차 바로 옆에 네 명의 천룡궁 무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으나, 조금의 눈치도 채지 못했다.
백소운의 안색이 굳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설마······.’
백소운이 은잠술을 통해 마차 밑에 구멍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 구멍은 곧바로 원상 복구되어 누가 들어온 흔적은 지워졌다.
밤에는 임소혜 혼자 갇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백소운은 마차 안을 둘러보고 더욱 안색을 굳혔다.
‘정말 소마녀가 없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누가 나보다 먼저 구출해간 것인가.’
당황한 백소운이 잠시 뭔가 생각을 한 후 다시 마차 밑 땅으로 사라졌다.
스스스.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처음 거리를 재보던 장소가 아니라 대나무 숲이었다.
‘도주가 아니라면 이 숲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백소운이 내공을 끌어올려 최대한 음파를 탐지했다.
하지만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이라면 풀벌레 소리와 대나무 사이를 가르는 바람 소리 정도.
‘대체 어디로 간 것이지? 도주했다면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데······.’
백소운이 황당함과 함께 안도감을 느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자.’
백소운이 포기하지 않고 죽림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대나무 숲이 끝나는 장소로 산비탈과 연결되는 곳이었다.
백소운이 직감에 따라 천천히 산비탈로 향했다.
그때였다.
어느 순간 그의 준미가 꿈틀거렸다.
야산 위쪽에 보이는 한 동굴 안에서 한 소녀의 미약한 숨소리가 들린 것이다.
‘저쪽이군.’
휙휙휙.
백소운의 신형이 소리가 난 쪽으로 바람처럼 날아갔다.
* * *
스스스.
극도의 은잠술을 펼치며 동굴 안으로 들어온 백소운은 이윽고 드러난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룡궁 장로 궁반척.
그가 알몸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다만 피부색이 온통 붉게 변해있었다. 혈관 역시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슨 대법을 펼치려는 것 같았다.
백소운은 급히 그의 발밑에 놓인 반 투명색 자루를 쳐다봤다.
자루 안에 뭔가가 들어 있었다. 미약한 신음이 들리는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소마녀가 자루 안에 있는 것 같구나. 궁반척 저자가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는 특수 자루를 이용해 이곳까지 데려온 게 틀림없다. 한데 옷을 벗은 것으로 봐서 못된 마음을 품은 모양이구나.’
백소운이 나름대로 추리한 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일단 무엇보다 자루 안에 있는 사람이 소마녀가 맞는지 확인부터 해야 했다.
그때였다.
백소운의 마음을 알았는지 궁반척이 자루를 풀기 시작했다.
그가 풀고 있는 자루는 천룡궁의 법보 중 하나로 무색자루라 했다.
자루를 쥐고 내공을 일으키면 외부에 보이지 않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졌다. 강호에서는 실제 이를 믿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백소운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금단비고 안에 비슷한 기능의 법보들이 여러 개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 그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색자루보다 훨씬 뛰어난 자루도 있는 건 확실했다.
아무튼, 궁반척이 자루를 풀자마자 한 소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수혈을 찍힌 듯 눈을 감고 있는 그녀.
예상대로 소마녀 임소혜였다.
동굴 안에 가득한 이상한 열기 때문인지 미약하게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의 소리는 삼 장 거리만 되어도 절대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세기였다.
자루에서 그녀를 완전히 끄집어낸 궁반척이 득의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궁주가 이 계집을 원하는 것은 마교 성녀의 음기를 흡수해 공력을 더욱 높이려는 의도라 할 수 있지. 천룡공자는 백리영 그 계집의 음기를 흡수하기 위해 혼인하려는 것이고. 부자가 똑같이 순음지체(純陰之體)에 대해 욕심이 크군. 하지만 나 또한 기회가 왔는데, 그대로 넘겨줄 수는 없지. 알고 보니 처녀가 아니었다고 보고하면 되는 거니까.”
궁반척의 눈빛이 욕심으로 이글거렸다.
그것은 색욕이 아니라 더욱 높은 무공에 대한 갈망이었다.
무엇보다 천룡궁의 기본심법인 천룡심공(天龍心功)은 승천하는 용의 강한 양기를 축적하는 내공심법이었다. 여기에다 음기를 보완하면 음양합일(陰陽合一)을 이루어 무공이 급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순음지체의 여인은 천하에 열을 넘지 않았다. 그 구별방법도 매우 까다로웠다.
하지만 천룡궁에는 이미 백리영과 임소혜에 대한 신체특징이 알려진 것 같았다.
“후후후. 어차피 천하는 결국 우리 천룡궁의 차지가 될 것이다. 오랜 전쟁으로 속까지 골병든 무림맹 또한 희생양에 불과하지. 대업을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궁반척이 중얼거린 후 임소혜의 옷을 벗기려 했다.
백소운이 지풍을 날려 궁반척을 제압하려는 그 순간, 인영 하나가 빠르게 들어왔다.
그는 놀라운 신법을 보여줬다. 봉두난발에 얼굴이 가려져 누군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흰머리와 쭈글쭈글한 피부로 봐서 노인 같았다.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대로 일장을 날렸다.
궁반척이 매우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급히 왼손을 내밀어 맞받아쳤다.
도저히 피하기 힘들 정도로 상대의 장력이 빨랐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동굴 벽이 흔들렸다.
“웬 놈이냐?”
궁반척이 일어서며 노성을 터뜨렸다.
상대의 장력이 비록 고강했으나 자신에게 내상을 입힐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 괴노인의 신형은 좌우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습 공격의 이점이 있었음에도 공력에서 밀렸던 것이다.
“으으······ 역시 천룡궁 장로로군. 하지만 성녀님을 네놈에게 당하게 할 수는 없다.”
괴노인이 허리에 찬 기형도를 빼 들어 궁반척의 허리를 갈라왔다.
쐐애애액.
동굴 안이라서 그런지 파공성이 요란했다.
“흥. 그러고 보니 마교 호법 괴추노인(傀醜老人)이었군.”
궁반척이 훌쩍 뒤로 물러나며 동굴 천장까지 날아올랐다. 동시에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이 빠르게 하강하며 우장으로 괴추노인의 어깨를 강타했다.
이는 그의 독문장법인 파골장(破骨掌)이었다. 격중되면 어김없이 뼈가 부러지는 효능이 있었다.
그 때문인가.
괴추노인이 옆으로 신형을 움직여 조금 스쳤음에도 뿌드득 하는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으윽!”
괴추노인이 신음과 함께 반쯤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동시에 기형도를 아래쪽으로 쓸어 담듯 휘둘러 궁반척의 발목을 베어갔다.
“제법이군.”
궁반척이 신형을 다시 물리며 좌우 쌍장으로 도를 막아냈다.
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동굴 한쪽 벽이 무너지며 먼지가 크게 일었다.
마치 안개가 앞을 가로막은 것처럼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상황이 되자, 두 사람은 잠시 동작을 멈췄다.
하지만 괴추노인의 숨소리가 가쁜 것으로 봐서 이번에도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후후후! 제법이지만 내 적수는 아니다. 죽은 검마왕이 직접 온다면 모르겠지만 네놈 정도야······.”
먼지가 가시기가 무섭게 궁반척이 허리에 찬 검을 순간적으로 뽑아 괴추노인의 목을 찔렀다.
괴추노인이 급히 목을 비틀어 이를 피했으나, 동시에 날아온 궁반척의 왼 주먹이 옆구리를 파고든 후였다.
“커헉!”
괴추노인이 허리를 굽히며 피를 한 사발 정도 토했다.
아무래도 내가중수법에 당한 것 같았다.
임소혜의 호위를 맡은 지 십년 째인 그였다.
검마왕이 죽고 마교가 퇴각한 후 임소혜가 실종되자, 그녀를 찾아왔지만 중상을 입은 것이었다.
“성녀님······.”
괴추노인이 반격을 포기하고 임소혜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그 바람에 손톱이 서너 개 빠지며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아직 안 죽었나? 그만 보내주지.”
궁반척이 우장을 날려 괴추노인의 뒷머리를 박살 내려는 순간.
그가 동작을 멈추고 멈칫했다.
임소혜가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무색자루도 함께 없어진 것이 누군가 몰래 데려간 것 같았다.
“이놈! 동행이 있었더냐?”
궁반척이 분노하며 쓰러져 있던 괴추노인의 머리를 오른발로 걷어찼다.
괴추노인이 옆으로 굴러 이를 피하려 했으나 이미 늦어 발이 머리에 닿을 찰나.
궁반척이 별안간 신음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쿵.
괴추노인이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텅 비어 있던 자리에 임소혜가 다시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괴추노인이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상을 입어 즉각적인 운공요상을 요하는 몸 상태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힘이 생긴 것 같았다.
“성녀님.”
괴추노인이 초인적인 힘으로 임소혜를 등에 업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지체하지 않고 이곳을 벗어나는 게 현명했다.
휙휙휙.
괴추노인이 임소혜를 업고 경공을 펼쳐 사라져 버린 그 순간.
유령같이 한 사람이 동굴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데 그는 바로 백소운이 아닌가.
그랬다.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궁반척을 제압한 것이었다.
백소운이 쓰러져 의식이 없는 궁반척을 무심히 쳐다봤다.
그리고 땅에 떨어져 있는 무색자루를 집어 품속에 넣었다.
“이런 법보로 또 해괴한 짓을 하게 두어선 안 되겠지. 깨어나면 그 괴추노인인가 하는 사람이 가져간 것으로 알 것이다.”
백소운은 다시 궁반척을 바라보다가 버려두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아침이 되면 저절로 혈도가 풀릴 것이니 알아서 돌아오겠지. 죽어 마땅한 자이나 이번 운송의 성공을 위해 한번은 기회를 준다. 그나저나 이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백리 소저 역시 혼사에 신중해야 할 듯하구나.’
백소운이 한번 뒤돌아본 후 운송대가 있는 공터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휙휙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