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16
아침이 밝았다.
지난 새벽 백소운은 무사히 막사로 돌아왔으며 푹 자기까지 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임소혜의 도주 소식은 식사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곪은 상처는 언젠가는 드러나는 법.
도주 사실은 천룡궁 무사가 마차 안으로 식사를 넣어 줄 때 알려지고야 말았다.
원래는 제일 먼저 궁반척이 확인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간밤에 마지막으로 확인을 하고 나왔던 궁반척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것이었다.
“헉! 마녀가 없다!”
경계무사들의 다급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아침 식사를 빨리 끝내고 짐수레를 다시 밀 준비를 하고 있던 백소운 일행 역시 놀라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 놀라는 의미는 백소운과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 조금 달랐다.
천향은 직접 천룡궁 무사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마녀가 도주했다는 것 같은데요.”
진하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백소운은 말없이 임소혜를 발견했던 동굴 쪽을 쳐다봤다.
‘궁반척 그자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혈도가 풀린 지 한 시진은 넘었을 텐데······.’
백소운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궁 장로께선 어디 계시오?”
장덕수의 물음에 천룡궁 무사 한 명이 대답했다.
“어젯밤에 마녀를 점검한 이후부터 보이지 않으십니다. 마녀가 도주한 것을 알고 급히 쫓아간 것이 아닐까요?”
“으음,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지 않겠소? 장로님을 제외하고 최고 책임자가 누구시오?”
“접니다. 천룡대(天龍隊) 부대주 직함을 맡고 있는 종자강(鐘自强)이라고 합니다.”
종자강이 자신을 소개했다.
천룡궁의 주력 전투부대인 천룡대는 특이하게도 대주 휘하에 백여 명의 부대주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부대주 한 명이 백 명 정도의 무사들을 거느리고 있으니, 결국 천룡대 무사만 모두 만 명이나 된다는 결론이었다.
“종 부대주시구려. 어서 주위를 수색하도록 합시다. 본맹 무사들도 돕겠소.”
“감사합니다.”
종자강이 감사를 표시하며 무사들에게 수색을 명하고 자신도 직접 참여했다.
장덕수 역시 최소한의 인원을 남겨두고 무사들을 보내 돕게 했다.
한편 백소운 등은 수색에 참여하지 않고 쟁자수들과 함께 짐수레를 지켰다.
출발한 지 하루 밖에 지나지 않은데다 큰 사건이 발생해 어수선한 분위기인 것은 물론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군. 마녀가 그렇게 소리 없이 도망갈 수 있단 말인가.”
유덕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기와 막총 역시 어두운 표정이었다.
백리영이 약속한 가점은 운송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를 전제한 것이었다.
그때 천향이 굳은 얼굴로 돌아왔다.
그녀 역시 수색에 참여하지 않고 제 자리로 온 것이었다.
“천 호위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유덕이 정중하게 물었으나, 천향은 묵묵부답이었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 말했다.
“아, 죄송해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아닙니다. 저희가 신경 쓸 일이 아닌데 주제 없이······.”
“아니에요. 모두 다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해요. 간밤에 적이 만약 누군가의 목숨을 노리고 왔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그렇군요. 아가씨께서는 무사하시지요?”
“그래요.”
천향이 말을 한 바로 그때였다.
종자강을 비롯한 천룡궁 무사 수십 명이 한 사람을 데리고 돌아오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종자강의 등에 업혀 있는 그 사람에게 쏠렸다.
한데 그는 바로 궁반척이 아닌가.
의식은 돌아왔지만 아직 마혈이 덜 풀린 것 같았다.
백소운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저자의 무공을 과대평가했군. 완전히 풀리려면 적어도 한 시진은 더 있어야겠구나.’
* * *
궁반척의 혈도가 풀리는 데는 반나절 이상이나 걸렸다.
물론 그전에 그의 지시로 백여 명의 천룡궁 무사 전원은 달아난 임소혜를 추적하는 데 투입되었다.
괴추노인과의 싸움에서 약간의 내상을 입었던 궁반척은 운공요상을 위해 막사에 남았다.
장덕수가 무림맹 장로 두 명과 함께 그의 막사로 온 것은 점심 식사 후였다.
운송이 지체되고 있어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좀 어떻습니까?”
장덕수가 묻자 궁반척이 가부좌 자세를 풀고 간이의자에 앉았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귀맹에서 붙잡은 마녀를 본궁이 놓쳐버려 여간 죄송한 게 아니군요.”
“별말씀을. 마교 호법 괴추노인 그자의 무공은 우리 맹주님께서도 꺼리시지요. 하지만 그자가 궁 장로까지도 이길 줄은 몰랐습니다.”
장덕수의 말에 궁반척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까는 정신이 없는데다가 임소혜를 추적하는 일이 급해 사람들에게 간단한 설명만 해주었다.
한데 지금 보니 자신이 귀추노인에게 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가.
몇 달 전 혼담을 위해 무림맹 총단을 방문했을 때 그 무공수준이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은 터라, 지금 상황은 여간 모욕적인 게 아니었다.
“으음, 사실 귀추노인 그자는 본인에게 패해 중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끝장을 내려는 순간 암습을 받은 것이었지요. 당시는 귀추노인 그자가 마지막 한 수를 숨겨둔 것으로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른 놈의 짓 같습니다.”
“다른 자가 암수를 날렸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본 장로의 이목을 속일 정도이니 아무래도 그 무공이 검마왕 급으로 판단됩니다.”
“장로께서는 설마 검마왕이 다시 살아나 자기 딸을 구해갔다는 말씀입니까?”
“무공수준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궁반척이 말을 하며 광오한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아무튼 이번 사건과 관련 없이 곧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천룡궁 무사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으음, 본궁 무사들이 마녀를 추적 중이니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마녀를 다시 잡아오면 여러분을 쫓아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
장덕수가 다소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막사 밖으로 나왔다.
한편 그와 동행한 장로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별호는 흑백쌍로(黑白雙老)였다. 흑의를 입은 자가 흑로(黑老)이며 백의를 입은 자가 백로(白老)였다.
“어떻게 보십니까?”
“궁반척 저자의 말에 어느 정도 허풍이 있으나 괴추노인 보다 그가 고수인 것은 사실이오. 괴추노인은 마녀의 근접 호위로 첩보에 의하면 종종 마녀로 분장해 우리 무사들을 해치곤 했소.”
“그럼 마녀가 직접 우리 무사 수백 명을 죽인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소이다. 마녀의 나이는 이제 겨우 열여덟에 불과하오. 한데 우리 무사들이 마녀에게 주로 당한 때는 칠팔년 전이었소. 열 살 정도의 계집 아이가 어찌 그렇게 살수를 펼칠 수 있겠소? 그런 면에서 어제 처형장에서는 죄상을 부풀려서 말한 셈이라 할 수 있소. 게다가 설사 우리 무사 수백 명을 죽였다고 해도 전장에서 벌어진 일이오. 구태여 죄라고 할 수도 없지 않겠소?”
“맹주님을 암살하려 했던 게 가장 큰 죄였군요.”
“그렇소이다. 하지만 최대한 죄를 부풀릴수록 강호 여론 형성에 유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오. 솔직히 화형식이란 게 우리 정파와 어울리는 처형방식은 아니지 않소? 아무튼, 우리 역시 현무당주에게 살짝 들은 이야기이니 다른 곳에는 말하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다만 다음에 마녀를 잡게 될 때 꼭 참고로 하겠습니다.”
장덕수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자신이 비록 운송대장이라 하나 공식 직함은 호법당의 부당주였다.
아무래도 장로 보다는 격이 낮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첫날밤부터 마교 고수가 침입했으니 아가씨 호위에 만전을 기해야 할듯하오.”
백로의 말에 장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 호위에게 다시 아가씨를 호위하라고 말해야겠군요.”
* * *
장덕수와 흑백쌍로가 천향을 찾았을 때 그녀는 하인들과 함께 있었다.
미리 지시가 내려졌기 때문에 식사 후 출발준비를 완전히 마친 상태였다.
“어쩐 일이신가요?”
천향이 장덕수와 흑백쌍로를 향해 인사를 했다.
장덕수가 바로 용건을 말했다.
“아무래도 천 호위도 아가씨 호위에 합류해야 할 듯하오. 여기 수레에 싣고 있는 아가씨 개인물품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마교 잔당들이 이제 마음 놓고 우리를 공격할 가능성이 커졌소.”
“저는 아가씨 명만 받들 뿐입니다.”
천향이 단번에 거절하자, 장덕수가 안색을 굳혔다.
흑로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운송 임무시에는 누구나 대장의 명을 따라야 하네. 아가씨께서 경험이 모자라서 일의 경중을 잘 헤아리지 못하시는 것 같군. 그렇다면 조언을 해야 마땅하지 무조건 복종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네. 장 대장의 말대로 고수들이 공격해오면 한 명의 고수가 아쉬워질 수 있네. 개인물품이야 마차에 옮겨두면 될 것 아닌가?”
“죄송해요.”
천향이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옆에 있던 백소운이 생각했다.
‘이 소녀가 진짜 백리 소저라면 난감하겠군. 분명 목적이 있어서 이러는 것인데 변수가 생겼으니까. 하지만 모두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러는 것이니 끝까지 고집을 피우기는 힘들 것 같구나.’
백소운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장덕수가 급히 백리영을 부르려 했다. 그제야 천향이 하는 수 없다는 듯 세 사람을 따라갔다.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돌아올 것이니 그때까지는 유 총지기께서 수레 지휘를 맡아주세요.”
천향이 백리영에게 가면서 당부의 말을 하자, 유덕이 고개를 숙였다.
“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장덕수와 흑백쌍로, 천향이 백리영이 타고 있는 대표마차로 가자, 진하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처음부터 우리 같은 초보들에게 중요한 물건을 맡긴다는 자체가 이상하긴 했어요. 아무튼, 우리끼리 수레를 끌게 되었네요. 그래봤자 무사들이 경계를 서주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말이에요.”
“그렇긴 하구나.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도 당사자에겐 중요한 의미가 될 수도 있는 것이지.”
유덕이 말을 한 순간, 재출발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렸다.
둥둥둥!
‘예감이 조금 좋지 못하구나. 아무래도 계속해서 난관에 부딪힐 것 같다. 천룡궁 무사들이 함께하지 못하게 된 데는 내 책임도 있으니 조금 찜찜하군.’
백소운이 짐수레를 밀며 다시 임소혜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소마녀가 무사히 빠져나간 것 같으니 조금 안심이긴 하다. 실수를 되풀이 하진 않겠지. 다만 이런 와중에 불필요한 희생자가 생긴다면 내 마음이 무거워질 것 같군.’
백소운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스렸다.
그의 수양 방법은 자신의 마음을 세밀하게 살피고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모든 방법은 그가 생각하는 지선(至善)이라 할 수 있는 중(中)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으음, 무형검의 시작과 끝 역시 바로 중용(中庸)일 테지.’
백소운이 수레를 밀며 천천히 내공을 운기해 금단비서를 보았다.
유형검 수련 완료 후부터 이제는 별 어려움 없이 금빛 기운을 숨길 수 있었다.
‘표시가 안 나서 좋구나. 숨기는 것이라······ 갑자기 그 물건이 생각나는군.’
백소운이 문득 어제 얻은 무색자루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궁반척이 가지고 있던 무색자루를 시험 삼아 금단비고 안에 넣어두었는데, 그야말로 감쪽같이 숨긴 셈이 된 것이었다.
‘몸수색을 당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으니 무척 유용하군. 그러고 보니 내게는 따로 그런 자루 같은 게 필요가 없구나. 공간의 제약도 거의 없고 말이야.’
그랬다.
금단비고 안에 있는 물건들은 오로지 그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라 들킬 염려가 없었다.
‘조만간 금단비고 안에서 마음에 드는 무기도 한 자루 골라야겠다. 강한 적수가 나타날 것 같은 예감이 자꾸 드니 필요할 수도 있겠군.’
백소운이 안색을 조금 굳혔다.
“오라버니. 또 무슨 생각을 하세요?”
진하림이 어제처럼 말을 걸어왔다.
무형검 입문에 대한 글을 천천히 보면서 수레를 끌던 백소운이 고개를 돌렸다.
“별 것 아니다. 하림이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저야 뭐 자나 깨나 어머니와 동생 걱정이지요. 아무래도 황금방 소방주 그자가 걱정이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낙양사흉의 복수를 할 자는 아닌 것 같으니까.”
“그건 몰라서 하는 말씀이에요. 그자가 얼마나 거만하고 교활한데요.”
“그래? 그렇다면 자신이 한 일의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하늘의 법칙이니까.”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언젠가는 제 손으로 직접 원수를 갚을 거예요.”
진하림이 눈을 빛냈다.
수레를 밀면서 자신의 원수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줬던 그녀였다.
백소운은 고개를 끄덕인 후 금단비서를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묵묵히 짐수레를 미는 한 청년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