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177
“임 소저와 혼인하라는 말씀입니까?”
백소운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임소혜가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부터 그녀에게 왠지 모를 친밀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게 바로 오누이 관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조금 전 확인한 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무작정 거절하면 아버님의 화를 돋울 수 있다.’
백소운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혼인은 인륜지대사인데 어찌 제가 지금 함부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지금은 임 소저를 비롯하여 본교의 이십만 무사들이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지옥맹주 지옥검선 그자가 살인기관 작동을 계속 시도하고 있습니다. 어서 그들을 탑 밖으로 대피시켜야 합니다. 혼사는 이후에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그도 그렇군. 혜아에게 직접 물어보고 좋다고 하면 무조건 너도 혼인해야 한다. 안 그러면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
백소운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자신이 아들임을 밝힐 것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직 그가 혼인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대상은 비단 임소혜 뿐만이 아니었다.
진하림, 백리영 등 많은 여인들이 그의 마음 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혼인에 대해 생각할 시기가 아니다. 무림의 운명이 나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 한눈을 팔 수 있단 말인가.’
백소운의 안색이 다시 평온해졌다.
언제 어디서든 담담한 마음과 태도를 유지하는 것.
그것은 바로 바른 도를 깨우치는데 있어 첩경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다가 화를 내려 했던 검마왕이 두 눈 가득 이채를 띠었다.
‘보통 녀석이 아니다. 어쩌면 나보다 더 고수일 수도······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젊은이를 만났는데, 너무 몰아세우지는 말자.’
검마왕이 안색을 풀었다.
“혹시 내게 불사단을 복용시켜준 것이냐?”
“네. 알고 계셨군요. 운이 좋아 이곳에서 불사단을 발견해 태상교주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불사단만으로는 어려웠을 것이다. 필시 약효를 퍼지게 하기 위해 내공으로 도와주었을 터. 그냥 구해준 게 아니라 내게 큰 은혜를 베풀었구나.”
“과찬의 말씀입니다. 제가 도와드린 것은 맞지만, 결국은 태상교주님의 굳은 의지가 주효했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산도 움직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렇다. 역시 보통 친구가 아니군. 한데 저 시체가 내 제자 사자성의 것이라고 했느냐?”
“네. 그는······ 지옥대공자에게 당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백소운이 안색을 조금 굳혔다.
아까 설명을 해주었을 때 사자성이 검마왕의 목숨을 노린 사실은 일부러 말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검마왕을 지키려다가 죽은 것으로 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니 그 명예만은 지켜주자는 뜻이었다.
하기야 검마왕 입장에서도 제자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좋을 것은 없었다.
“자성이가 비록 욕심은 많으나 이 사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안타깝기 그지없구나.”
검마왕이 공력을 발출해 땅을 파 사자성을 묻어주었다.
“일단 본교 무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내 처와 딸을 어서 보고 싶다.”
검마왕의 말에 백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절 따라오십시오. 마침 새 통로 하나를 발견했으니 그쪽이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백소운이 천마비동 한구석에 새롭게 나 있는 통로를 가리켰다.
그 통로는 바로 검마왕이 백소운을 공격하다가 생긴 것이었다.
백소운은 천마검혼에게 들은 천마탑의 구조를 분석해 이 통로 쪽이 군웅들과 더 가깝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백소운과 검마왕 두 사람이 통로 안으로 들어갔을 바로 그때였다.
우르르릉 소리와 함께 천마비동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백소운의 안색이 굳어졌다.
‘큰일이군. 지금까지 살인기관 작동을 저지해주던 기관이 박살 났다. 서두르지 않으면 탑 전체가 무너져 몰살당할 수 있겠구나.’
검마왕이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인가?”
“기관이 본격적으로 작동한 것 같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그러지. 서두르는 게 좋겠다.”
백소운과 검마왕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이 경공을 펼쳤다.
휙휙.
* * *
얼마나 나아갔을까.
백소운과 검마왕이 경공까지 펼치며 날아갔지만, 통로는 끝없이 이어졌다.
‘미로진인가.’
백소운이 초조해하며 손에 들고 있는 천마검을 쳐다봤다.
바로 천마검혼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상태창과 달리 천마검혼을 따로 부르는 방법은 없었다.
옆에 검마왕이 있음에도 몇 번 직접 불러봤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시간만 보낼 수는 없었다.
“천마검혼! 내 말이 들리나?”
백소운이 언성을 조금 높였다.
검마왕 역시 답답하던 차라 모른 척했다.
그때 백소운의 귓전에 전음이 들렸다.
바로 천마검혼이 보낸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주공. 또 깜빡 조는 바람에······ 아무래도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아 주기적으로 잠을 자야만 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네가 가르쳐준 천마탑의 구조에 변형이 생긴 것 같다. 원래대로라면 벌써 어떤 공간이 나와야 하는데 계속 미로같이 통로만 이어지고 있다. 한데 앞으로 널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지금 제가 내는 음파의 세기를 기억해 전음을 보내시면 됩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저는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전음으로 대화하는 게 편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너를 탓하는 게 아니다. 지금 탑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겠느냐? 특히 본교와 무림맹, 그리고 사도맹 무사들의 안전이 무척 염려스럽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지옥검선 그자가 기관을 발동한 것 같은데, 지금 보니 사람들을 모두 한군데로 모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곳이 어디냐?」
「지하광장입니다. 천마탑의 중추 기관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그곳이 무너지면 탑 전체가 무너지게 되어 있지요. 다만 탑 밖으로 나있는 출구도 그곳에 있습니다. 아마도 지옥맹 무사들을 밖으로 내보낸 후 나머지 무사들을 몰살시키려 하는 것 같습니다. 지하광장의 이름은 악마광장(惡魔廣場)이라 하며, 백만 명도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곳입니다.」
「환상진법 안에 그만한 공간이 또 있다는 것이냐?」
「네. 다만 주공께서 지옥검선이 가지고 있는 천무시만 확보할 수 있으면 모두 무사히 탑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탑이 조용히 사라지게 하는 기관은 이미 파괴되어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한데 탈출로는 어떻게 찾는 것이냐?」
「악마광장 안에 두 곳의 탈출로가 숨겨져 있습니다. 원래는 천무시와 천마시로 각각 한 곳의 출구를 열 수 있었지만, 지금은 기관 혼동이 발생해 아마도 두 개가 모두 필요할 겁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천마검혼의 전음이 끝나는 순간, 천마검이 백소운의 손에서 벗어나 길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둥둥 떠서 앞으로 날아가는 천마검의 검봉에서 붉은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그 기운이 통로 좌우 벽에 부딪히자 폭음이 터져 나왔다.
콰콰쾅.
백소운은 검마왕에게 급히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천마검은 좌우 벽에 새로 생겨난 통로 중 한 곳으로 길을 안내했다.
아무래도 기관을 일부 파괴해 미로진을 뚫는 모양이었다.
“하하하. 천마검혼이 영물이라 하더니 정말 대단하군. 웬만한 호법보다 낫다.”
검마왕이 껄껄 웃으며 백소운과 함께 천마검을 따라갔다.
휙휙.
콰콰쾅.
* * *
악마광장.
지옥맹주 지옥검선을 필두로 한 삼십만 무사들이 일제히 도열해 있었다.
지옥검선 옆에 서 있는 붉은 수염의 노인, 즉 지옥맹 총군사 지옥노인(地獄老人)이 말했다.
“맹주님. 놈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나도 알고 있다. 사도맹 놈들이 먼저 오는 것 같군.”
“네. 한데 대공자께서 아직 소식이 없어서 그게 걱정입니다. 대공자께서 오셔야 탑 밖으로 나간 뒤 탑을 붕괴시킬 건데 말입니다.”
“뭐 별일 있겠느냐? 미로진에 갇힌 모양인데, 지금 대부분 풀렸으니 곧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가지고 있는 천무시만으로 탑을 붕괴시킬 수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귀혈공자 그놈이 천마시를 찾아서 이곳으로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놈이 천마시를 찾았다고 보십니까?”
“그렇다. 천마시가 아니라면 내가 살인기관을 발동시킨 것을 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작전을 바꿔 놈들을 모두 이곳으로 유인하고 있지만 말이다.”
“천무시와 천마시가 합쳐져야 이곳 악마광장에 숨어 있는 중앙 붕괴기관을 작동시킬 수 있게 되었군요. 출구도 마찬가지입니까?”
“그렇다. 그래서 계획을 바꿔 이곳에 도착하는 놈들을 모조리 죽이기로 했다. 물론 그전에 귀혈공자 그놈이 오면 죽인 후 천마시를 빼앗아야겠지. 내가 가진 천무시와 합쳐 출구를 알아내게 되면 본맹 무사들을 먼저 내보낸 후 탑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좋은 계획이십니다. 아, 저기 사도맹 놈들이 오는군요. 원래는 저놈들을 모두 괴수로 만들려 했는데, 모두 죽이자니 아깝긴 하군요.”
“괴수로 만들 자들은 많다. 천마의 유물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귀혈공자 그놈에게 선수를 빼앗겼으니 어쩌겠느냐? 모조리 죽일 수밖에.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천마시의 확보라 할 수 있지.”
“귀혈공자 그놈이 꼭 천마시를 가지고 와야 할 텐데······.”
지옥노인이 말을 한 바로 그때였다.
지옥맹 무사들이 있는 동쪽과 반대편인 서쪽 통로에서 십만 무사들이 나타났다.
바로 사도맹 무사들이었다.
일부이긴 하나 살인기관에 당해 부상자들도 수천 명이 넘어 보였다.
물론 그들을 이끄는 사람은 이번에 새롭게 사도맹주가 된 매소청이었다.
“하하하. 매소청 네년이 죽을 곳을 찾아왔구나. 하기야 기관 때문에 이곳에 오지 않을 수도 없었겠지.”
지옥검선이 껄껄 웃었다.
매소청이 흠칫했다.
하지만 조금만 버티면 무림맹과 마교 무사들이 도착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교주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면전이 벌어지면 놈들도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니 함부로 공격해오지 못할 겁니다.”
사사천교 태상봉공 잠사노인(潛邪勞人)의 말이었다.
그는 원래 이번 출정에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은 처음부터 무사들 속에 잠복해 있었다.
교의 원로로서 바로 이런 비상시기를 대비한 것이었다.
“태상봉공의 생각대로 되었으면 좋겠어요. 최소한 우리와 동맹을 맺은 무림맹과 마교 무사들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해요.”
“후후후! 매소청! 네년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 공격하라!”
지옥맹 총군사 지옥노인의 명이었다.
이미 준비를 마쳤던 지옥맹 무사들이 일제히 공격을 가해왔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사자들에게 먹이를 던져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매소청이 급히 후퇴를 명하려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자신들이 이용했던 서쪽 통로는 이미 막혀있었다.
아직 남쪽과 북쪽 통로는 열려 있었으나, 지옥맹 무사들에 의해 막혀 있었다.
“어쩔 수 없군요. 모두 공격하라! 곧 동맹 무사들이 올 것이니 목숨을 걸고 싸우면 반드시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매소청이 자신의 애검인 혈사검을 높이 들고 소리쳤다.
와아아!
와아아!
엄청난 함성과 함께 양 진영의 무사들이 격돌했다.
천마탑에 들어온 후 첫 전면전의 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