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18
무한은 한 성의 성도로서 사람과 물자가 풍부했다.
며칠 후 무한에 당도한 운송대 행렬은 호북성 총지부로 사용되는 장원으로 들어가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제 이곳에서 천룡공자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총지부장 무적검(無敵劍) 계박(桂搏)이 이들을 정중하게 맞이하였다.
“거대말벌 떼의 습격을 받으셨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아가씨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네.”
여전히 면사를 쓴 백리영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한편 백소운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머지 하인들과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천향 역시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녀는 장덕수와 계박 등이 있는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천 호위님. 아가씨 계신 곳에 가보지 않으셔도 됩니까?”
유덕의 물음에 천향이 고개를 저었다.
“네. 이곳에 고수가 많으니 저까지 필요 없을 거예요. 필요하면 부르신다고 했으니 그때까진 저도 여러분과 함께 쉬도록 하지요.”
“아, 잘되었습니다.”
유덕이 미소를 지었다.
요 며칠간 마차 바로 앞에서 수레를 끌며 나름대로 임무에 충실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를 비롯한 하인들의 안색은 많이 좋아져 있었다.
하기야 강호에서는 원래 사건이 끊이지 않는 법이었다. 이미 말벌 떼도 모두 제거가 된 상태라 분위기 회복은 시간문제였다.
“그동안 수고했으니 내일 아침까지 휴식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소이다. 다만 보안상 총지부 밖으로는 따로 허락을 받아야 나갈 수 있게 하겠소. 그러니 가급적 객청에서 지내도록 하시오.”
장덕수가 전체 명령을 내린 후 백리영, 흑백쌍로, 계박 등과 함께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 주위에는 따로 경계무사들이 배치되어 있어, 총지부 내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한편 백소운 등은 성 안을 구경하지 못하게 되었다며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불만을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없었다.
“잘되었군. 이 기회에 수련하면 되겠다.”
유덕의 말에 정기와 막총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소운은 무심해보였고, 진하림은 여전히 아쉬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때 천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하시는 분이 있으면 제가 외부 객잔으로 데려가 줄 수 있어요. 아가씨께서 아까 정보를 좀 알아보라고 하셔서, 아무래도 오늘 저녁 식사는 객잔에서 해결해야 할 듯하거든요.”
“저는 괜찮습니다.”
유덕이 먼저 사양을 했다.
정기와 막총 역시 사양했다.
아무래도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천향이 아직 대답하지 않은 백소운과 진하림을 쳐다봤다.
“좋아요. 그럼 두 분이라도 저와 함께 가도록 하지요. 일이 생기면 총지부로 연락을 보낼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요.”
“네.”
진하림이 기뻐하며 말했다.
백소운 역시 간단히 묵례를 했다.
“알겠습니다.”
* * *
저녁 무렵.
무한의 중심부에 위치한 무한객잔은 계속해서 몰려드는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대부분이 병장기를 찬 무림인들이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내용은 천하 각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리 한 가지 주제가 득세하고 있었다.
바로 거대말벌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이는 무림맹의 예물 운송대를 공격한 말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정말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모르겠네. 정마대전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무시무시한 말벌이 나타난단 말인가.”
“그러게 말일세. 운송대 무사들 절반 가까이가 별 저항도 못하고 한줌 혈수로 변해버렸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사백 명가량의 무림맹 무사들이 그렇게 죽임을 당할 정도라면, 웬만한 문파는 순식간에 멸문을 당하고도 남음이 있지.”
“보통 일이 아닐세. 만에 하나라도 그 말벌들을 조종한 세력이 있다고 한다면,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겠나.”
대한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객잔에 가득했다.
한 사람이 언성을 높이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더욱 높였다.
그러다 보니 저잣거리보다 시끄러운 상황이 되었다.
한편 그런 소란스러움 속에서 묵묵히 식사하는 일행도 있었다.
한구석에 있는 탁자에 앉은 일남이녀. 바로 백소운과 진하림, 그리고 천향이었다.
천향은 객잔 안으로 들어온 후부터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였다.
자연스레 백소운과 진하림도 많은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과장된 면이 많았다.
특히 말벌 떼가 보호막에 튕겨 죽어 나갈 때의 상황은 어처구니없는 설명이 많았다.
그때 마침 실제와 비슷한 이야기가 옆 탁자에서 들려왔다.
“아무튼, 거대말벌 떼는 결국 제거되었지. 우연히 인근을 지나가던 고수가 음파로 모두 제거했는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사라졌다고 하더군.”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면 혹시 또 검마왕을 죽인 그 영웅이 아닌가.”
“무공 수준만 보면 무명객(無名客) 그분일 가능성이 매우 높지. 아, 그리고 최근 소문에 의하면 검마왕은 무명객에게 당해 바로 죽은 게 아니라 내상을 치료하다가 암습을 당해 죽었다고 하네. 교주 자리를 노린 마교 부교주의 짓이라는 말도 있지만, 당사자인 부교주 도마왕(刀魔王)은 극구 부인하고 있다고 하지. 마교 내의 분열을 노린 무림맹 측의 교활한 술책으로 치부한다더군.”
“부인할 수밖에 없겠지. 한데 대패를 당해 휴전을 선언했던 마교가 새 교주를 뽑는다고 하지? 누가 될 것 같은가? 아무래도 도마왕이겠지?”
“지금으로선 그가 가장 유력하지. 무공만보더라도 검마왕과 겨뤄 무승부를 거둔 적이 있었다고 하니까.”
“한데 저번에 탈출한 마녀는 아직 붙잡히지 않았나?”
“추적하는 데 실패했다고 하네. 아무리 천룡궁이라지만 마교 놈들의 은신처가 천하 각지에 퍼져 있어 작정하고 숨으면 찾기 힘들지.”
“아, 그래서 궁반척이 내일 아침 이곳 무한으로 온다고 전해진 것이군. 무림맹에서 인계 받은 마녀를 놓쳤으니 그 사람도 궁주에게 면목이 없겠군.”
“당연하지. 마교 호법 괴추노인이 마녀를 구출해갔다고 하는데, 그것도 궁반척 자신의 주장에 불과하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면 그자가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그건 아닐세. 하지만 항간에는 그가 마녀의 음기를 흡수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다는 소문도 있더군.”
“으음, 그럴 수도 있겠군.”
대한들의 대화가 계속되었다.
백소운은 궁반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눈을 빛냈다.
‘실제 그렇게 될 뻔했었지. 역시 바르지 못한 자에게는 의심을 품는 자가 생기게 마련이구나.’
백소운이 문득 소마녀 임소혜를 떠올렸다.
다시 한번 붙잡혀오면 이젠 정말 신경쓰지 않으려 결심하고 있던 그였다.
그래서인지 궁반척이 추적을 포기하고 돌아온다는 말에 기쁜 게 사실이었다.
진하림이 천향에게 물었다.
“천 호위님. 얻고자 하는 정보는 모두 얻으셨나요?”
“아뇨.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것은 따로 있어요.”
“그게 뭔가요?”
“한 사람에 관한 것이에요. 아가씨께 매우 중요한 인물이지요. 이제 아시겠어요?”
“아! 천룡공자?”
“그래요. 배필이 될지도 모르는 분이니 천룡공자에 관한 사람들의 평가가 궁금하시지 않겠어요?”
천향의 말에 백소운이 눈을 빛냈다.
‘어쩌면 천룡공자의 진짜 인품을 알기 위해 백리 소저가 천 호위로 역용을 했을지도 모르겠구나. 맹주님이 전략적으로 혼인을 추진하니 백리 소저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물론 습격에 대비하는 측면도 컸겠지만······.’
백소운이 그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예상이 맞는다면 하인들에게 부여될 특수 임무란 것도 별다른 게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즉, 백리영 자신이 활동하는 데 편하게 단순히 가림막이 되어주는 정도일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백소운 등 다섯 하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때는 한참 뒤의 일일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모든 게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백소운 자신은 거의 확신하고 있지만, 눈앞에 앉아 있는 천향이 백리영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으음, 짐작만으로 역용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 것 같군. 그렇다면 실제 역용여부를 판별해보면 될 것 아닌가.’
백소운이 뭔가가 떠오른 듯 안색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천천히 금단비공(金丹秘功)을 일으켰다.
이 금단비공은 일종의 내공심법이었다.
금빛을 내는 주원인이기도 했다.
또한, 의념의 발현에 따라 환상공간을 여는 일차 열쇠이기도 했다.
여기서 환상공간은 바로 금단비서와 금단비고를 말한다.
다시 말해 백소운이 금단비서를 보거나 금단비고에 들어갈 때 곧장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금단비공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때문에 사실 금단비공이 익숙지 않았던 처음에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환상공간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싫증이 나도 억지로 금단비서를 익히거나 금단비고 구경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특히 유형검 수련을 완료한 이후 의념을 조절할 수 있게 되자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즉, 금단비공을 일으킴과 동시에 금단비서나 금단비고를 자유자재로 보거나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백소운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금단비공 자체의 효능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상태창과 천리안(千里眼)이었다.
상태창은 궁금한 것에 답해주는 신기한 녀석이었고, 천리안은 궁금한 것을 실제로 볼 수 있는 특수 능력이었다.
백소운이 지금 금단비공으로 펼치려는 비술은 바로 천리안이었다.
상태창으로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내친김에 직접 보고 싶은 것이다.
‘천리안으로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딱 한 번만 보자. 으음, 아니다. 천리안은 무형검부터 제대로 펼칠 수 있다고 했으니, 아직은 천리사(千里沙)가 필요하겠군.’
백소운이 금단비공을 일으킴과 동시에 금단비고에 들어갔다.
그리고 법보(法寶)라 적혀 있는 문을 열고 한 석실에 들어갔다. 그 안에는 수많은 법보들이 담긴 신비로운 항아리들이 있었다.
물론 이 모두가 그의 마음의 작용으로 외부인들은 전혀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천리사 가루를 눈에 뿌리면 상대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던가. 그 말은 역용 전 얼굴을 보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겠지.’
백소운이 조금 둘러보다 어느 순간 천리사라 적혀있는 항아리를 발견했다.
항아리 안을 보니 역시 금빛 가루 같은 것이 수북이 담겨 있었다.
‘그동안 부작용에 대한 우려 때문에 법보를 사용하기를 꺼렸었다. 하지만 저번에 사용한 금단환도 그렇고, 필요한 경우에는 법보든 약재든 무조건 사용해야겠다. 어차피 금단비서의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마당에 관련된 다른 것들을 두려워해서는 말이 안 되지.’
백소운이 천리사 가루를 조금 손에 담아 살짝 양 눈에 뿌렸다.
항아리 표면에 사용법이 적혀 있어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사용법에 따르면 천리사 가루를 눈에 바르면 뭐든지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물론 지금 필요한 것은 상대의 역용 여부 확인인 터라,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진짜 얼굴만 보면 된다. 다른 것까지 알게 되는 것은 지나치다.’
백소운이 의념을 집중한 후 천향의 얼굴을 보았다.
그때였다.
천향의 얼굴이 흐릿해지며 그 속에 감춰둔 본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얼굴은 예상대로 경국지색이었다.
임소혜가 청순하면서도 도발적인 느낌이 강하다면, 지금 보이는 얼굴은 한마디로 성스러운 느낌이었다.
백옥 같은 피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린 듯한 아미에 오뚝한 코. 그리고 탐스러우면서도 앵두처럼 붉은 입술까지.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절세미인의 모습이었다.
‘백리 소저가 틀림없군. 선녀와 같다더니, 제대로 표현한 말이군.’
백소운이 천향, 아니 백리영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다시 그 얼굴이 천향의 것으로 돌아갔다.
백소운이 안타깝게 생각했으나 천리사의 효력이 다 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다른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천리사의 다른 효능은 다음에 시험해봐야겠구나.’
백소운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백리영을 쳐다봤다.
백리영이 미소와 함께 물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백소운이 사과를 하며 시선을 돌렸다.
안 그래도 객잔 입구 쪽에 유독 시끄러운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때 누군가 객잔 안으로 들어오는 한 청년을 보고 소리쳤다.
“천룡공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