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182
석 달 후. 낙양.
천마성에 출정을 갔던 무림맹 무사들이 복귀한 지도 어느새 열흘이 넘었다.
이번 출정은 그야말로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그중 가장 큰 화젯거리는 바로 마교주 귀혈공자의 희생이었다.
천마탑 안에 혼자 남은 그는 지옥맹 무사 삼십 만과 함께 동귀어진하고 만 것이었다.
천마탑은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천하를 어지럽혔던 지옥맹도 멸망하고 만 것이었다.
지옥맹에 가담했던 지옥혈교와 천룡궁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사도맹 역시 매소청 한 사람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고 전멸했기에, 무림에서 남은 세력이라고는 무림맹과 마교 정도였다.
하지만 무림맹과 마교 무사들은 기뻐할 수 없었다.
특히 마교 무사들은 자신들의 교주가 산화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교주의 소식이 들리지 않자, 그제야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함께 천마성에 머물며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던 무림맹 무사들이 낙양으로 돌아간 것도 바로 그때였다.
다만 마교는 교주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태상교주 검마왕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귀혈공자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다.
그래서 여전히 마교주는 귀혈공자, 즉 백소운이었다.
한편 현 무림맹주 백리천은 맹에 복귀하자마자 놀라운 발표를 했다.
무림의 새로운 시대와 인재 발굴을 위해 스스로 맹주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영웅대회를 열어 새 맹주를 선출한 후 자신은 태상맹주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아울러 무림맹 신입무사를 적극적으로 선발해 힘을 키우겠다는 의지도 표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언제든 지옥맹 같은 세력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전 무림의 힘을 결집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전격적인 발표에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등 전통적인 무림방파들은 적극 환영했다.
지난번 출정 때 대거 불참했던 각파 장문인들 역시 영웅대회 참가 의사를 피력했다.
은자림 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따라 무림은 새로운 활기와 긴장이 공존하는 그런 시기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 낙양성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죽립을 깊게 눌러쓴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는 것이 왠지 처음 낙양에 온 사람 같았다.
‘드디어 낙양에 도착했군. 과연 이곳에서 나의 기억을 찾을 수 있을까.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군.’
죽립인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죽립을 벗었다.
평범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이십 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하지만 이 얼굴은 그가 역용한 것이었다.
‘석 달 전 천마성 밖 숲속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내 얼굴은 화상으로 손상이 되어 있었다. 물에 비친 그 모습은 마치 용암에 타들어 간 것과 같았지. 다행히 역용술을 알고 있어 아무렇게나 가짜 얼굴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지만······.’
사내가 걸음을 잠시 멈추고 관도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을 쳐다봤다.
그가 천마성에서 이곳 낙양까지 먼 거리를 온 것은 바로 자신의 신세내력을 알기 위해서였다.
거의 모든 기억을 잃은 그가 자신과 관련해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하심무인이라는 글자였다.
그 외 기억나는 것은 지금의 얼굴을 만들어낸 역용술뿐이었다.
역용술만으로 자신의 신원을 알 수 없었던 그는 부득이 하심무인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내려 했다.
하지만 하심무인의 뜻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흘렀다.
그동안 그는 막일을 해 돈을 모았다.
사실 그가 천마성 밖 숲속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옷은 모두 벗겨져 있었다.
얼굴의 화상을 생각할 때 옷 역시 모두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측되었다.
다행인 것은 얼굴 말고 다친 부분은 아무 데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하심무인에 대한 내용을 알게 된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었다.
그날은 천마성에 주둔해 있던 무림맹 무사들이 낙양으로 복귀하던 날이었다.
사내는 용기를 내어 무림맹 무사들에게 하심무인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 결과 하심무인은 무림맹 총단 하인 출신 무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자신이 하심무인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사내는 그 길로 이곳 낙양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이름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다니. 기해혈에 기이한 힘이 축적된 것을 보면 필시 무공을 배웠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십중팔구 내가 무림맹 총단 하인 출신이었던 것 같구나. 하지만 얼굴이 훼손되었으니 날 알아볼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이를 어떻게 한다? 그래도 이왕 이곳까지 왔으니 총단 하인으로 들어가 보는 게 좋겠구나. 며칠 정도만 지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백의를 입은 예의 사내가 눈을 빛냈다.
어느 정도 계획을 세우자 힘이 났다.
사실 그가 가장 걱정하고 있던 것은 혹시 자신이 지옥맹 출신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숲속에서 깨어나 사람들에게 처음 들은 말이 바로 지옥맹 무사들이 몰살당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지옥맹 잔당들을 모두 토벌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전해준 사람은 마교 무사로, 그는 천마성 외곽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기억을 잃고 있었던 백의 사내는 흠칫했다.
그때부터 모든 것에 조심했다.
누가 물어보면 낭인이라고 둘러댔다.
고급 무공이라 할 수 있는 역용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르지. 진짜 역용술 하나만 알고 있었을 수도······.’
백의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어디서 하소연할 수도 없고. 이번에 무림맹 총단에 들어가 알아보고 별것 없으면 그냥 이곳 낙양에서 평범하게 살아가야겠다. 정말 내가 지옥맹 무사였다면 그런 과거는 기억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테니까.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적은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심무인이었던 것 같으니까. 그렇지 않다면 왜 그 글자만 자꾸 기억난단 말인가. 하지만 계속 하인으로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혹시 내게 가족이 있을까 봐 여기까지 온 것이지만, 사내가 되어서 평생 하인으로 살 수는 없지.’
생각을 마친 백의 사내가 다시 걸음을 걸었다.
일단 무림맹 총단에서 가까운 객잔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총단 하인이 되기도 쉽지 않다고 들었다. 무엇보다 신원이 확실해야 한다고 하던데, 어려움이 많겠구나. 그래도 무림대란이 막 끝나 정식무사와 하인들을 대거 뽑는다고 하니 기회가 있을 것이다.’
백의 사내가 그제야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사용할 이름을 생각했다.
‘그래. 하심무인에서 이름을 따 하심(下心)으로 하는 게 좋겠군. 성은 뭐가 좋을까.’
백의 사내가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하나의 성이 떠올랐다.
‘그래. 백(白)씨가 좋겠다. 가장 먼저 떠오른 성씨이니 어쩌면 내 본래 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이름이 백하심(白下心)이 되는 셈인가.’
백의 사내, 즉 백하심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름을 만들고 나니 그제야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 같았다.
‘이제 돈만 좀 있으면 좋을 텐데······ 막일을 할 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 궁리도 해야겠다. 돈이 있어야 총단 하인이 되더라도 이곳저곳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백하심이 계속 궁리를 하며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더 걸어갔을까.
눈앞에 큰 객잔 하나가 보였다.
편액을 보니 중원객잔(中原客棧)이라 적혀 있었다.
‘저곳이 좋겠군. 무림맹주를 새로 뽑는다고 하더니 무림인들이 상당히 많군. 빈자리가 있을까 모르겠네.’
백하심이 성큼성큼 걸어가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점소이가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나마 며칠 전 돈을 들여 새 옷으로 갈아입었기에 환대를 받는 것이었다.
“소인을 따라 오십시오. 마침 한 자리가 비었습니다.”
점소이를 따라간 곳은 구석진 탁자였다.
이미 세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손님이 가득 찼을 때 합석을 양해하는 것은 오랜 무림의 관례였다.
오히려 그런 합석을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운이 좋으면 강호의 유명인물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탁자에 앉아 있던 사람은 이남일녀로 모두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백하심을 쳐다봤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병장기도 없는 백하심이 한눈에 봐도 무림인이 아닌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림인과 일반인은 원래 합석을 해도 대화를 잘 하지 않는 게 또 하나의 관례였다.
결국 그들은 고개만 조금 끄덕여 준 후 자신들이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백하심은 엽차를 한잔 마신 후 소면과 구운 닭 한 마리를 시켰다.
“실례하겠습니다.”
백하심이 의례상 한마디 하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남일녀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상대로 차기 무림맹주에 관한 이야기였다.
무림을 구하고 산화한 마교주 귀혈공자의 이야기도 나왔다.
백하심이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또 그 귀혈공자 이야기로군. 삼십만이나 되는 지옥맹 무사들과 함께 동귀어진했다고 하니 대단한 인물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계속 같은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군. 기회를 봐서 하심무인에 대해서나 물어봐야겠다. 어느 문파 제자들일까?’
백하심이 고개를 조금 돌려 이남일녀를 유심히 봤다.
그동안 무림인들을 만나면 왠지 조심스러워 말을 걸지 않았던 그였다.
하지만 이곳 낙양까지 오면서 현 강호 정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 낙양이 상대적으로 매우 안전한 곳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당장 자신의 신세내력에 대해 알아내지 못해도 낙양에서 살려고 마음먹은 이유도 그 점에 있었다.
“뭘 보세요?”
이남일녀 중 일녀인 백의소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십칠 팔세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백하심이 쳐다보자 불쾌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미모 때문으로 생각했는지 곧 득의한 미소를 지었다.
요컨대, 일종의 추파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백하심이 말했다.
“어느 문파 제자 분들인지 궁금해서 그러오. 실례가 안 된다면 가르쳐 주시겠소?”
“먼저 자신의 이름부터 밝히는 게 순서가 아니겠어요? 보아하니 무림인도 아닌 것 같은데······.”
백의소녀가 코웃음을 쳤다.
동석한 두 명의 남자 중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말했다.
“우리는 무림맹 총단 무사들이오. 방 무사의 성격이 급해 조금 쌀쌀맞게 대한 것이니 이해하시오. 나는 위징(衛徵)이라 하오.”
“소생은 백하심이라 하오.”
“무림인이오?”
“아니오. 다만 무림맹 총단에 볼일이 있어 왔소이다.”
“무슨 볼일인지 이야기해주겠소?”
위징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코웃음을 치던 백의소녀 역시 호기심을 드러내며 눈을 빛냈다.
“그전에 두 분의 성함을 알고 싶소이다.”
백하심이 미소를 지었다.
무림맹 총단 무사들이라는 말에 그 역시 관심이 커진 것 같았다.
“흥! 우리가 총단 무사라고 하니까 관심이 더 생기나요?”
“방 무사. 무림맹 무사답게 처신해야 하지 않겠소? 제가 소개해드리지요. 이쪽은 방사약(方沙約)이라고 하고, 이쪽은 고화포(高華胞)라고 하지요. 두 사람 역시 총단 무사들이오.”
“그렇군요. 소생이 무림맹 총단에 가려는 것은 하심무인들을 만나기 위해서요. 혹시 하심무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