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21
백리영의 전격적인 파혼선언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미혼술을 미리 간파하고 이를 해소시켰던 백소운은 미소를 지었다.
상황 타개에 백리영이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녀에게 이렇다 할 정감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사람은 바로 소마녀 임소혜였다.
천룡공자가 굳은 안색으로 말했다.
“으음, 이번 혼사는 우리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오. 무림의 평화를 위해 어른들께서 결정한 일이니 무조건 따라야 하오. 아직 백리 소저의 얼굴도 보지 못한 상황에서 그런 일방적인 말씀은 충격적이구려.”
“공자께는 죄송스럽게 생각해요. 원래 처음부터 거절했어야 했는데, 아버님께서 너무 강권하셔서······.”
백리영이 한발 물러섰다.
천향으로 역용해 천룡공자의 인품을 살핀 결과라 되돌릴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거절 의사를 밝히는 것도 매끄럽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장덕수가 말했다.
“맹주님께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천룡궁까지 아가씨를 모셔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일단 천룡궁에 가서 궁주께 직접 말씀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때까지 맹주님께 아가씨의 의향을 전서구로 알리고 답변을 듣는 것도 병행해야 하겠지요.”
“좋아요. 그게 예의에 맞겠지요. 그리고 본맹과 천룡궁의 협력 문제는 제 혼사와는 별개라고 생각해요. 이 기회에 마교 세력을 발본색원하지 않는다면 천룡궁 역시 나중에 위험에 처하게 될 테니까요.”
백리영의 말에 이번에는 궁반척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백리 소저는 처음부터 우리 공자님께 시집갈 생각도 없으면서 동맹을 맺으려 했다는 말씀이군요.”
“그런 게 아니에요. 사실 천룡공자께 약관의 관심은 있었어요. 하지만 직접 만나보니 그 관심마저도 사라진 셈이지요.”
“하하하. 이거 듣자 하니 너무 불쾌하군요. 백리 소저와는 어젯밤 몇 마디 나눠본 게 전부인데, 그냥 얼굴만 보고 싫어진 것이오?”
“얼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오히려 공자께서는 천하제일 미남자이시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인성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본 공자의 인성이 잘못되었다는 말씀이오?”
천룡공자가 언성을 높였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 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한편 백소운은 다른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묵묵히 대화를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유덕이 입을 열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저희는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이놈! 조용하지 못할까? 하인 주제에 어디서 끼어드는 것이냐?”
천룡공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우장으로 유덕의 어깨를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유덕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으윽!”
유덕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발했다.
“형님!”
정기와 막총이 부축하려 하자, 천룡공자의 우수가 다시 움직이더니 두 사람의 어깨를 마찬가지로 후려쳤다.
정기와 막총이 급히 신형을 뒤로 빼려 했으나, 천룡공자의 손이 마치 환상처럼 쫓아와 기어코 타격을 가했다.
정기와 막총 역시 무릎을 꿇고 신음을 발했다.
유덕도 마찬가지지만, 혈도까지 함께 찍힌 것인지 무릎을 꿇은 상태로 꿈쩍도 못 했다.
다만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이 상당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흠흠, 나설 데를 나서야지. 내가 누구라고 버러지 같은 놈들이 끼어들어?”
천룡공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직 서 있는 진하림을 바라봤다.
그녀 옆에는 백소운이 서 있었다. 하지만 별 반응이 없어 아직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유덕 등 세 사람을 무릎 꿇린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그였다.
‘미혼술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원인이 저놈들 때문일 리는 없겠지만, 아무튼 기분 나쁜 놈들이니······.’
천룡공자가 다시 미혼술을 펼치며 물었다.
“계집. 어서 실토하지 못하겠느냐? 무명객과 짜고 백리 소저를 납치하려 한 이유가 무엇이냐?”
“전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있었어요.”
진하림이 간밤에 정신을 잃었다가 대청 앞에서 깨어난 사실을 밝혔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주의 깊게 들었다.
하지만 그 일이 진하림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천룡공자는 이번에도 미혼술이 위력을 발휘하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설마 저놈 때문인가?’
그가 처음으로 백소운을 노려봤다.
백소운은 아까부터 전혀 미동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물론 조금 전에도 미혼술을 무력화시킨 장본인은 그였다.
그는 지금 무릎을 꿇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정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그였다.
한데 외부인에게 공격을 받아 다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리 매사에 태연한 백소운이라지만 이번만큼은 노기가 일어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으음, 분명 경고를 했으니 어느 정도의 대가는 치르게 해야겠구나.’
백소운이 고개를 돌려 천룡공자를 쳐다봤다.
마침 자신을 노려보던 그의 눈과 마주쳤다.
“이놈이! 어디서 눈을 부라려!”
마침 그럴싸한 핑계를 찾고 있던 천룡공자가 노성을 터뜨리며 우장으로 백소운의 어깨를 쳤다.
“으윽!”
백소운이 신음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조금 전 유덕 등 세 사람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만 하세요. 왜 죄 없는 저분들을 공격하는 거죠?”
참다못한 백리영이 항의했다.
한데 대답을 해야 할 천룡공자의 안색이 이상했다.
백소운의 어깨를 친 순간 내부 기혈이 흔들려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으으······ 치료가 다 된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무리했구나.’
주화입마의 전조가 나타난 사실을 느낀 천룡공자가 천천히 기를 돌려 일주천을 시도했다.
얼마 후 기가 회음부 근처에 머물렀을 때.
백소운이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그 여파였을까.
천룡공자가 회음부와 밀접한 중요 부위에 충격을 받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두 손은 배꼽 아래 중요 부위를 잡고 있었는데 매우 민망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커허헉!”
천룡공자가 괴성과 함께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천룡궁 무사들이 급히 그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궁반척이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아무래도 공자께서 아직 내상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기를 터뜨려 충격을 받으신 것 같소이다. 제발 아무 이상이 없어야 할 텐데······.”
“그러게 말이오. 혼사를 앞두고 하필 그 부위를······.”
장덕수가 말을 하다가 실수를 깨달았는지 그만두었다.
하지만 다들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편 백소운은 유덕과 정기, 막총 세 사람을 격공지력으로 암암리에 치료를 해주며 눈을 빛냈다.
‘적어도 일 년간은 남자 구실을 못 하게 될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영구히 못쓰게 만들고 싶었지만······.’
천룡공자가 실려 나가자 대청 안은 매우 시끄러워졌다.
곧장 천룡궁으로 출발할 것인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하지만 궁반척 등과 논의결과 점심 식사 후 바로 출발하기로 중지를 모았다.
어차피 천룡공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라도 천룡궁으로 하루빨리 가는 게 좋다는 논리가 먹힌 것이다.
그렇게 회의가 끝난 후 백리영이 백소운 등에게 다가왔다.
“다들 괜찮으신가요?”
“네. 아가씨.”
유덕 등이 고개를 숙였다.
“모두 제 불찰이에요. 아예 처음부터 혼사를 거부했어야 했는데······.”
백리영이 천향을 제외하고 주위를 물리게 했다.
이미 장덕수와 흑백쌍로, 궁반척 등 지휘부 고수들은 모두 숙소로 돌아간 뒤라, 나머지 무사들은 대답과 함께 대청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천향, 그리고 백소운 일행만 남자, 백리영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제 성격이 좀 그래서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네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특히 천룡공자 그 사람에게는······.”
“무슨 말씀입니까? 어떤 이야기든 누설하지 않을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기력을 되찾은 유덕이 말했다.
“좋아요. 실은 요 며칠간 본의 아니게 여러분을 속인 일이 있어요.”
백리영이 자신과 천향이 서로 역용까지 하면서 역할을 바꿨던 이야기를 했다.
유덕 등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유일하게 이미 알고 있었던 백소운 역시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셨군요. 저희는 전혀 몰랐습니다. 아, 그리고 그런 것까지 털어놓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거짓이 없어야지요. 서로 믿음이 있어야 도움도 줄 수 있고······.”
백리영이 천향을 시켜 유덕 등의 상태를 다시 살피게 한 후 말했다.
“천룡공자의 인품은 아무 죄 없는 여러분을 다치게 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평가가 되었어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는 그 사람에게 시집가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들 아세요.”
“네. 감사드립니다.”
유덕 등 하인들이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감사의 의미는 분명했다.
앞으로도 계속 백리영이 자신들을 보살펴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진하림이 물었다.
“아가씨께서는 왜 이렇게 저희에게 잘 해주시는 건가요? 단순히 이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인가요?”
“호호. 그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지요. 하지만 한 가지 이유가 더 있긴 있어요.”
“아, 그 이유를 알 수 없을까요?”
“말씀드리지요. 사실 몇 년 전에 무맹비고에서 오래된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 약간이지만 초대 무림맹주이셨던 분의 행적에 대해 적힌 내용이 있었어요. 한데 전설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출신이 진짜 하인이라는 내용이었어요. 물론 검증된 이야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저는 그 글을 보고 우리 총단 하인분들을 잘 대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혹시 아나요? 또 한 분의 영웅이 여러분 중에서 탄생할지······.”
백리영의 말에 하인들이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막총이 물었다.
“하지만 이 가점이란 것이 공평성이란 면에서 보면 비판을 당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래요. 하지만 무공의 자질이란 것이 때로는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운 후에야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저는 그 점에 주목해 여러분에게 일단 정식무사가 될 기회를 주려는 거예요. 단지 출신이 불확실하다고 해서 삼류무공만 익히게 한다면 어찌 쉽게 등룡관을 통과할 수 있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조만간 무맹비고 대개방이 있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여러분을 꼭 배려할 생각이에요.”
“아, 정말 이렇게까지 저희를 생각해주실 줄이야. 그저 감사드린다는 말씀밖에는 드릴 게 없군요.”
유덕이 거듭 감사의 인사를 했다.
한편 백소운은 내심 백리영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리고 있었다.
지위가 너무 차이나 다소간 거리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으나, 지금 보니 마음 씀씀이가 남달랐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낙양사흉을 처리할 때 그녀의 행동이었다.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백리영이 말했다.
“아, 한 가지 더 제가 그때 낙양사흉 그자들을 가차 없이 제거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자들의 악행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해 무조건 척결해야 했지요. 진 소저와 관련된 일만으로 처단한 것은 절대 아니었어요.”
백리영이 말을 하며 기를 끌어올렸다.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던 그녀가 얼음같이 냉정하고 엄한 협녀(俠女)의 모습이 되었다.
‘아, 역시 무림맹주의 여식답군.’
백소운이 내심 감탄했다.
동시에 그 역시 느낀 바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무공 수준에 대해서도 재확인했다.
‘역시 높은 수준의 무공을 가진 게 틀림없군. 아마도 무맹비고란 곳에서 상승무공을 배운 것 같구나.’
백소운이 잠시 생각에 잠겨있을 때.
묵묵히 있던 정기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한데 저희가 모는 수레에 정말 중요한 물건이 있는 겁니까?”
“아, 그 점이 궁금하셨군요. 제 개인 물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다지 중요한 것은 없어요. 중요하다고 한 것은 천 호위로 제가 변장해서 여러분과 함께 있으려는 거짓말이었지요. 그게 바로 여러분에게 부여된 특수 임무이기도 하였고요. 결론적으로 여러분은 제가 부여한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셈이에요.”
백리영이 말을 하며 갑자기 면사를 벗었다.
그러자 눈부신 그녀의 미모가 드러났다.
유덕 등이 깜짝 놀라며 넋을 잃은 듯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백리영이 다시 면사를 쓴 후 말했다.
“이만하면 제가 여러분을 속인 데 대한 대가가 되었겠지요?”
“아, 정말 미인이십니다.”
유덕이 진심 어린 칭찬을 했다.
하지만 백리영은 손사래를 쳤다.
“과찬이세요. 사실 미인은 저보다 여기 진 소저예요. 제대로 가꾸기만 한다면 정말 아름다울 거예요.”
“헤헤. 제가요?”
진하림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기뻐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때였다.
대청 밖에서 무사들의 놀란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거대말벌이다!”
“비상이다. 거대말벌 떼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