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222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백하심은 바람을 쐬러 황금장원에서 나왔다.
영웅삼관 통과자의 대표를 뽑는 시합은 내일 열리기 때문에 오늘 하루 뜻하지 않은 휴식이 주어진 덕분이었다.
사실 밤사이 그는 많은 생각을 하느라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 때문에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황금장원 안은 아침부터 어제의 충격적인 발표 때문에 시끄러웠다.
귀혈공자가 곧 백소운이라는 사실.
그것은 오늘 하루 빠르게 천하를 강타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백하심은 이제 왠지 그런 사실에 별 관심이 없어졌다.
자운신녀를 찾아가 무명객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도 미루기로 했다.
‘오늘 하루는 그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용히 지내고 싶구나. 조용한 곳이라면 풍운정(風雲亭)이 좋겠군.’
백하심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가고 있는 풍운정은 작은 호수 앞에 지어진 정자였다.
평소 시인묵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황금장원과도 가까워 반시진이면 갈 수 있었다.
얼마 후 도착한 풍운정에는 평소대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풍광을 감상하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백하심은 그들과 어울릴 생각이 없어 한쪽 구석으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도 노인 한 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백하심은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해 호수를 쳐다봤다.
풍운호(風雲湖)라는 호수였다.
잔잔한 물결이 마음을 평안하게 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결국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집착할 것이 뭐 그렇게 있을까.’
백하심이 상념에 잠겼다.
그가 이렇게 감상적으로 된 것은 바로 어제저녁에 있었던 논란 때문이었다.
백소운과 귀혈공자.
두 사람이 실제로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에 그는 왠지 남의 일이 아님을 느꼈다.
그 느낌은 귀빈각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번민과 허탈로 이어진 것이다.
‘무림맹주고 뭐고 그냥 떠나버릴까. 사실 내가 무명객이었다는 것도 이제 의심스럽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수없이 많은 무공도 뭐 그렇게 중요할까.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말이다.’
생각이 자꾸 비관적으로 흘러갔다.
마음을 비우기 위해 온 것이 오히려 역효과가 난 것이다.
그것이 집착이란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한때 그 집착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지만 다시 새롭게 일어나는 허허로운 감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의노인이 시를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뻐하는 데서 근심이 생기고, 기뻐하는 데서 두려움이 생긴다. 사랑하거나 또 기뻐할 것 없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
백하심이 고개를 돌리자, 백의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여보게. 젊은이. 뭐가 그렇게 근심이 많은가? 훌훌 털어버리게.”
“좋은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어르신께서는 시인이십니까?”
“나 말인가? 나는 풍운노인(風雲老人)이라고 하네. 이곳 풍운정이 내 집이지.”
“아, 네.”
백하심이 미소를 지었다.
풍운노인이 따로 집이 없고 천하를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그를 사로잡았던 번뇌가 깨끗이 사라진 점이 기뻤다.
그 상태가 계속 이어지기 바라는 마음에 가르침을 청했다.
“좀 더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걱정이 무엇인지 말해보게. 구체적으로 말이야. 내가 도움을 주겠네.”
“감사합니다. 사실 제 고민은 바로 저에게 있습니다. 기억을 잃었는데, 그것이 회복되지 않으니 번뇌가 계속 일어납니다.”
“그렇군. 별 것 아니군. 자네가 누구인지는 바로 자네 자신이 알고 있네. 지금 가장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이 바로 자네네.”
“네?”
백하심이 가볍게 놀라며 눈을 빛냈다.
그러면서 자신을 돌이켜 봤다.
풍운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사람은 누구나 도끼를 들고 도낏자루를 찾지. 해답은 가까이 있고 이미 자네가 알고 있네. 누구를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었나? 잘 생각해보게.”
“네.”
백하심이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떠올랐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언젠가부터 비교가 되었던 사람.
바로 백소운이었다.
“생각났습니다. 무림맹 부맹주 백소운 대협입니다.”
“백소운? 처음 듣는 사람이군. 무림맹부맹주라고는 하지만 나는 무림인이 아니라서 말이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그러하네. 나는 내가 관심 없는 일은 내 귀에 들리지 않게 할 수 있거든. 아무튼, 백소운이란 그 사람이 바로 자네네.”
“제가 백소운이라고요?”
백하심이 깜짝 놀랐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폭발 같은 것이 일어나며 백하심이 쓰러졌다.
실신한 것이었다.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 * *
백하심이 깨어난 것은 그가 정신을 잃고 일각 정도 지난 후였다.
“으으······.”
“정신이 드시오?”
“아, 어떻게 된 겁니까?”
“실신을 했었소. 괜찮소?”
“네. 한데 저와 함께 있던 어르신은?”
“무슨 소리요? 혼자 있다가 쓰러지지 않았소? 이쪽에는 원래 아무도 없었다오.”
“네?”
백하심이 의아해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더 이상하게 그를 쳐다봤다.
“꿈을 꾼 모양이구려. 몸이 안 좋으면 집에 가서 쉬시오.”
사람들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 백하심은 혼자가 되었다.
‘이상한 일이구나. 분명 풍운노인이란 분과 이야기를 나눴지 않은가. 내가 바로 백소운이라 하셨지.’
백하심이 눈을 감고 묵상에 잠겼다.
그러자 뭔가 새로운 것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한 얼굴이었다.
한데 그것은 백소운의 것이 아닌가.
백하심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자신의 진짜 얼굴임을 알았다.
순간, 역용이 풀리며 자신의 얼굴이 백소운의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등을 지고 있었기에 그런 변화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백하심은 막힌 것이 뚫리는 것을 느끼며 기억이 되살아나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천마탑에서 어떻게 정신을 잃었고, 얼굴까지 훼손되었는지 모든 과정이 생생하게 복원되었다.
‘내가 정말 백소운이었구나. 얼굴은 기억의 회복과 함께 자연스럽게 회복된 것 같다. 얼굴을 알게 되자 모든 기억도 되살아난 것이고.’
백하심, 즉 백소운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친김에 금단비고를 확인했다.
전과 달리 비고 자체도 보였고, 그 안의 물건들도 모든 것이 예전대로 보관이 되어 있었다.
‘내가 백소운인줄도 모르고 나를 부러워했었다니. 내가 생각해도 우습군. 한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백소운이 잠시 고민한 후 다시 얼굴을 바꿨다.
역용술을 펼쳐 무저공자의 것으로 되돌린 것이다.
‘일단 실력으로 맹주가 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게 해야 모든 사람을 승복하게 할 수 있다. 한데 풍운노인 그분은 누구일까? 정말 내가 꿈을 꾼 것일까. 분명 그분이 어떤 법력을 발휘해 내 기억을 되찾게 해준 것 같은데······.’
백하심이 궁리를 했지만 지금 당장 풍운노인의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천계 인물일지도 모른다. 때가 되면 차차 알게 되겠지.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서 비밀상자부터 열어보도록 하자.’
백소운이 금단비고 안에 있던 천무마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의 품속에는 황금탑에서 발견한 비밀상자가 있었기 때문에 천무마시를 이용해 열면 되었다.
‘비밀상자 안에 있다는 봉인대종과 절대비급은 매우 중요하므로 최대한 빨리 확인해야 한다.’
백소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풍운정에서 내려왔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정도 풍운정에서 멀어지자 경공을 펼쳤다.
바로 오랜만에 펼쳐보는 경공술인 금단비류였다.
휙휙.
그의 신형이 금세 한 점으로 변해 사라졌다.
* * *
철컥.
천무마시를 이용해 여니 비밀상자의 뚜껑이 쉽게 열렸다.
백소운은 조심스럽게 상자 안의 내용을 살펴봤다.
그가 있는 곳은 인근 야산의 어느 동굴 안.
입구에 보호진을 쳐두었기에 외부인의 출입 위험은 없었다.
하지만 마신들의 봉인과 관련한 문제였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신 중 하나인 지옥악마신 한 명을 상대하는데도 부담이 되는 마당에 백 명의 마신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백소운은 어떻게든 마신들의 부활을 막을 생각이었다.
‘봉인을 영구화하든지 아니면 아예 마신들을 소멸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백소운이 눈을 빛내며 상자 안을 봤다.
상자 안에는 예상대로 두 가지 물건이 있었다.
하나는 매우 작은 종이었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모형 종이었다.
마치 장남감처럼 보였지만, 그 재질이 범상치 않았다.
은은한 금빛을 발하는 종.
바로 봉인대종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양피지였다.
백소운은 양피지부터 살펴봤다.
‘이게 바로 절대비급인가.’
양피지를 펴보니 자그마한 글자로 빼곡히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도저히 알 수 없는 글자였다.
마치 고대의 문자처럼 해독이 아예 안 되었다.
‘절대비급은 맞는 것 같은데 내용을 알 수 없구나. 일단 갈무리를 해두자.’
백소운이 양피지를 금단비고 안에 넣어두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봉인대종을 살펴봤다.
하지만 이 역시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한번 흔들어봤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봉인대종을 완전히 파괴하면 마신들을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백소운이 시범적으로 내공을 일으켜 봉인대종에 압력을 가해봤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득이 내공을 높여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지옥검선이 말하기를 봉인대종을 파괴하려면 지성을 이루어 무공의 신이 되어야 한다더니 그게 사실인 것 같구나. 하지만 지성에 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일단 내가 보관하고 있을 수밖에 없겠구나. 봉인대종이 지옥악마신의 손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봉인해제를 시도할 것이다.’
백소운이 금단비고에 넣기 전 다시 한번 봉인대종을 살펴봤다.
일단 파괴가 현재 무공 수준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된 지금 관심이 가는 것은 봉인해제방법이었다.
사실 봉인대종은 봉인해제법보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 역시 알 수 없었다.
‘최소한 지옥악마신은 봉인대종을 이용해 봉인을 해제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어떻게든 이 봉인대종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도 내게는 금단비고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자.’
백소운은 봉인대종 역시 금단비고에 넣어두었다.
이제 남은 것은 천무마시와 빈 상자였다.
봉인대종과 절대비급을 확보한 이상 이 두 가지 물건은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일단 보관하기로 했다.
‘혹시 모르니까 따로 보관해두자.’
백소운이 천무마시와 상자를 금단비고에 넣어둔 후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지옥악마신의 능력을 생각할 때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심스러웠다.
‘이제 무공을 정리하도록 하자. 오늘 황금장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렵겠고, 여기서 밤을 보내고 곧바로 총단으로 가면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