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23
“현무당 특별 조사단 단장 추보승(秋普昇)입니다. 오면서 어제 흑백쌍로 두 분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깐깐한 인상의 노인 추보승이 장덕수와 계박, 궁반척 등에게 인사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걱정이었습니다.”
장덕수가 상기된 표정으로 현 상황을 설명했다.
추보승을 단장으로 한 스무 명 정도의 특별 조사단원들이 주의 깊게 들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사 범위는 어젯밤 습격도 포함되어 있었다.
“으음, 방어막을 펼쳐 도움을 주신 분은 아마도 그 피리의 주인 같군요. 말벌왕인가 하는 그자가 천상옥음이라고 말했다 했던가요?”
“네. 백년죽림에서도 피리 소리는 없었지만 그분이 도와주신 것 같습니다.”
“말벌왕 그자의 말로 미루어 보면 그분은 여자 같군요. 그리고 당금 무림에 지옥맹이란 단체가 없는 것을 생각하면 놈들은 신진 세력으로 판단됩니다. 아무래도 조사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추보승이 간단히 정리한 후 주위를 둘러봤다.
대청 안에는 삼십 명 정도의 주요 고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찾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아가씨와 천룡공자 두 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곧 오실 겁니다. 지금 대공자께서 백리 소저에게 사과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궁반척이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어젯밤 그런대로 운신할 수 있게 된 천룡공자가 백리영의 얼굴을 처음 보고 정신이 나갔다는 것을.
원래부터 순음지체인 백리영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였다.
이제는 눈부신 미모까지 확인한 터라 앞으로 있을 집요한 구애는 불을 보듯 뻔했다.
“천룡공자의 몸 상태는 어떠합니까?”
계박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괜찮으십니다. 아직 후유증이 있긴 하나 움직이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한데 왜 물어보십니까? 관심이 없어 보이시던데…….”
“따질 게 있어 그렇습니다. 어제 보여준 궁 장로의 태도가 천룡궁의 공식 입장인지 물어볼 생각입니다.”
“하하하. 또 그 이야기입니까? 어제 분명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제가 말벌왕 그놈에게 접근해 일격을 가하기 위해 일부러 복종하는 척했다고. 장 대장께서는 아직 강호 경험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흥! 과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지 의문이군요. 아무튼, 본맹은 지옥맹인가 하는 그놈들을 끝까지 추적해 처단할 겁니다. 천룡궁에서 다시 한번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면 동맹은 물 건너간 것으로 생각할 겁니다.”
“듣자듣자 하니까 너무 심하구려. 장 대장 그대가 맹주님이라도 되오? 동맹이 급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쪽이 아니오? 어제 우리 쪽 무사 손실도 상당했다는 것을 잊었소?”
궁반척이 언성을 높였다.
계박이 끼어들어 반박하려던 찰나.
추보승이 그들을 만류했다.
“그만들 하십시오. 지금은 이번 사건의 확실한 배후를 밝히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비명횡사하신 흑백쌍로 두 분의 원한을 갚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젯밤 병력 손실은 어느 정도 됩니까?”
“사망자만 삼백 명 정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어제 긴급소집령을 발동해 다시 무사들을 보강해 현재는 천명 정도로 복원된 상태입니다.”
“잘 되었군요. 그럼 오늘 하루 더 쉬고 내일 천룡궁으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오늘부터 지휘권은 제가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추보승이 품속에서 맹주금패(盟主金佩)를 꺼냈다.
“아…….”
장덕수와 계박 등이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숙였다.
맹주금패는 맹주인 백리천이 직접 하사한 것이었다. 이 금패를 가진 사람의 명이 있으면 무조건 따라야 했다.
원래는 조사에 국한하여 준 것이나, 흑백쌍로가 죽은 특수상황으로 인해 모든 지휘권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서열상으로도 추보승은 현 무림맹 장로 신분을 가지고 있어 격이 맞았다.
“추 단장께서도 천룡궁으로 가실 생각입니까?”
“물론입니다. 반드시 혼사를 성사시키라는 맹주님의 특명을 받았습니다.”
“아가씨께서는 파혼을 거론하셨는데…….”
“저도 압니다. 하지만 맹주께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하하. 역시 백리 맹주께서는 대국을 보실 줄 아시는군요. 공자께서 좋아하실 겁니다. 백리 소저 역시 잠시 토라진 것일 뿐 결국 혼인하게 될 겁니다. 우리 공자께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것이니까요.”
궁반척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추보승이 말했다.
“그럼 저는 보호막의 도움을 처음 받았다던 하인들을 만나보겠습니다. 장 대장께서 직접 안내해주시겠습니까?”
“네. 따라오십시오. 안 그래도 대기를 시켜두었습니다.”
* * *
“흥!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대기를 시켜두는 것이죠?”
진하림이 투덜댔다.
유덕, 정기, 막총, 백소운 네 사람과 함께 객청 연무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연 것이었다.
“하림아. 그 무슨 소리냐? 어제 그 참화를 겪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특히 흑백쌍로 두 분은 장로분들 중에서도 뛰어난 분들이셨다. 한데 그분들이 속절없이 돌아가셨으니, 다들 충격이 클 것이다. 우리는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다 쉬는 데 우리만 이렇게 있어야 하는 게 싫어요. 벌써 점심때가 다되어 가는데…….”
“허허허. 배가 고팠구나. 좋다. 더 고프게 해주지. 안 그래도 나 역시 따분하긴 했다. 따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수련하도록 하자. 그동안 뜻하지 않은 사건이 계속 발생해 수련을 제대로 못 했는데, 지금 점검하도록 하지. 정기 자네는 운이를 좀 봐주게. 육합심법을 이제 가르쳐 줄 때가 되지 않았나?”
“네. 형님. 안 그래도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정기가 미소를 지은 후 담담히 서 있는 백소운을 쳐다봤다.
“지난번에 내가 준 육합전서(六合全書)는 읽었느냐?”
“그게…… 깜박했습니다.”
백소운이 얼굴을 조금 붉혔다.
육합전서는 하심수련동에 비치된 육합계열 무공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선배 하심무인들이 편찬한 것이라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물론 정기가 백소운에게 준 것은 그 필사본이었다.
하심무인들은 다들 이 육합전서 필사본을 한 부씩 가지고 있었다.
수련동에서 수련한 내용을 언제 어디서나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육합전서에는 구결뿐만 아니라 초식을 그림으로 구현해 놓은 부분도 있어, 읽을수록 도움이 되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한데 아예 읽어도 보지 않았다고 하니 정기의 안색이 굳어졌다.
“분명 출발 전에 주지 않았더냐?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아예 읽어 보지도 않았다는 말이냐?”
정기가 엄한 표정으로 추궁했다.
백소운이 당황했다.
아버지 같은 정기가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이란 것을 아는 그였다.
“경황이 없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읽어보겠습니다.”
“으음, 좋다. 하기야 초보 중에 초보인 네가 비급을 본다 해도 뭘 알겠느냐? 하지만 앞으로 네 한 몸을 지키려면 심법이라도 익혀두어야 한다. 이왕 무공을 배우기로 했으니, 앞으로 게으름 피우는 것을 용서치 않겠다. 어제 보지 않았느냐? 무공이 약하면 결국 목숨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겠습니다.”
백소운이 머리를 숙였다.
옆에 있던 유덕과 막총, 진하림 세 사람은 모른 체했다.
그들 역시 처음 무공을 배울 때 선배들의 엄격한 지도를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무공을 배우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정기가 진하림도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무릇 무공을 배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노력이다. 자질도 중요하지만, 진정으로 노력한다면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동네 건달 서너 명 정도는 거뜬하게 제압할 수 있는 그런 실력을 갖추는 게 뭐 그리 어렵겠느냐?”
“노력은 모든 일을 정복한다는 말씀입니까?”
백소운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육합전서 역시 육합심법이 적혀있는 첫 장을 폈다.
“그렇다. 역시 배운 게 있어 이해가 빠르구나. 하지만 무공은 다르다. 아무리 머리에 든 게 많아도 검날을 피하지 못하면 목이 달아나기 마련이다. 자, 각설하고 시간이 없으니 심법 구결을 읽도록 해라. 비록 주해가 군데군데 적혀 있으나 직접 연마한 나나 막총, 그리고 큰 형님이 가르쳐주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연마 시간을 반으로 줄여준다는 이야기다. 무슨 뜻인지 알겠으면 어서 시작해라.”
“네.”
백소운이 천천히 육합심법 구결을 소리 내어 읽었다.
“무릇 육합(六合)이란 하늘과 땅, 그리고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육합심법은 이러한…….”
담담한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다행히 연무장에는 백소운 일행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구결 읽기가 중단되는 일은 없었다.
읽기가 끝나자, 정기가 물었다.
“어느 정도 기억할 수 있겠느냐?”
담담하게 물어본 질문이었다.
하지만 유덕과 막총, 진하림 세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이 고개를 돌려 관심을 표했다.
질문을 던진 정기 또한 속으론 마찬가지였다.
평소 백소운이 글을 배워 박학다식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암기력을 평가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무공 구결은 일반 글과는 전혀 달랐다.
참고로 유덕과 정기, 막총 세 사람은 심법 구결을 외우는데 스무 번은 넘게 봐야 했다.
다만 진하림은 단 세 번 보고 암기했다. 당시 하심무인들이 매우 놀라며 천재라고 칭찬한 것은 지금도 화젯거리였다.
한편 백소운은 읽는 즉시 기억은 물론이고 그 내용까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이야기했다가는 쓸데없는 주목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적어도 세 번은 보고 외웠다고 해야 무난하겠지. 아저씨를 실망시켜서도 안 되고 말이야.’
백소운이 정기의 얼굴을 잠시 봤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과 마주쳤다.
마음 한구석이 철렁했다.
정기의 눈빛에서 자신에 대한 기대감을 느꼈던 것이다.
항상 특별한 녀석이라고 수없이 칭찬하던 그였다.
이미 무공을 배우기에 늦었다고 했지만 분명 특별한 기대를 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백소운은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본 실력이 알려질 것이다. 차라리 아저씨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대놓고 실력을 드러낼 수는 없겠지만…….’
백소운이 망설이자, 정기가 풀이 조금 죽었다.
“왜 말이 없느냐? 구결이 제법 긴 편이니 다 못 외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너의 자질을 정확히 알아야 그것에 맞게 가르쳐줄 수 있지 않겠느냐? 어서 말해보아라.”
“전부 외웠습니다.”
“오! 하하하! 역시 넌 특별한 녀석이다.”
정기가 껄껄 웃었다.
초조했던 마음이 완전히 풀린 모양이었다.
실제 무공 연마에 들어가면 분명 그 속도가 느릴 거로 생각했지만, 내심 암기력만큼은 기대했었다.
실제 백소운이 기대에 부응하자 그가 매우 기뻐한 것은 당연했다.
그때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연무장 쪽으로 왔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아무리 하인들이라지만 분위기도 모르고…….”
장덕수가 옆에 있는 추보승 보기가 무안한 듯 질책했다.
“죄송합니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정기가 깜짝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유덕 또한 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장님 오셨습니까? 제 아우가 실수를 한 점 용서하십시오.”
“아니네. 그럴 수도 있지. 무림의 일이란 어쩔 수 없으니까.”
장덕수가 안색을 풀었다.
옆에 있는 추보승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데 어인 일로?”
유덕이 추보승을 비롯한 조사단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분들은 현무당에서 온 특별 조사단 단원들이시네.”
장덕수의 소개가 있자, 추보승이 말했다.
“조사단장 추보승이네. 자네들에게 물어볼 게 조금 있네. 밀실 같은 곳이 있겠나?”
“아, 네. 마침 객청 지하에 공간이 있는 걸 봤습니다.”
유덕의 말에 함께 따라온 계박이 눈을 빛냈다.
“눈썰미가 좋군. 그곳은 대피 공간인데, 제가 이곳 총지부장이니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렇게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