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28
“천지는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으나 그 작용은 쉬지 않고, 해와 달은 밤낮으로 분주하게 움직여도 그 밝음은 만고에 변하지 않는구나. 그러므로 사람은 한가한 때일수록 다급한 일에 대처하는 마음을 마련하고, 바쁠 때일수록 여유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느니라.”
한 사람.
한 손에 피리를 들고 옛 성현의 글을 암송하고 있는 그는 가히 절세미남이라 할 수 있었다.
다소 유약해 보이는 것이 흠이라 할 수 있었지만, 백옥 같은 피부에 맑은 눈빛은 보는 이를 감탄케 하기에 충분했다.
“공자님. 놈들이 올 때가 되었습니다. 대청으로 가시지요.”
하인 한 명이 후원 정자 밑에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모른 체하고 글을 암송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어. 장주께서 직접 찾아와도 시원찮을 판국에 자네 혼자만 보냈다는 말인가? 딸을 살리기 싫은 모양이군.”
“그게 아닙니다. 지금 장주님을 돕기 위해 영웅분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어, 그분들을 접대하느라 시간을 내지 못하고 계실 뿐입니다.”
“어라. 도움을 주러 온 사람은 오랜 벗 두 분뿐이라고 하더니 대어를 낚은 모양이로군. 이제 나 같은 백면서생은 필요 없다는 것인가.”
“소인보고 자꾸 왜 그러십니까? 벌써 한 시진 째입니다. 도움을 주러 오셨으면 대청으로 가시던가, 아니면 떠나십시오. 그냥 가시더라도 은자 열 냥은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허어. 내가 돈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는가? 사정이 딱해서 왔거늘 내 행색이 초라하다고 이렇게 푸대접할 줄이야. 그래 새로 온 사람들은 누구라 하던가?”
“소인은 잘 모릅니다. 다만 인근 충의보(忠義堡)와 정무문(正武門)에서 고수분들이 오셨고, 무림맹 소속 무인들도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아가씨를 포함해 모두 대청에 모여 있으니 공자께서도 가보시지요. 이제 곧 영웅방 소방주가 들이닥칠 것인데, 여의공자(如意公子)께서 자리라도 지키셔야 사례금을 두둑이 받을 것 아닙니까?”
“무림맹 소속이라고? 누구라 하던가?”
“하심무인들이라고, 오늘 점심때 객잔에서 영웅방 무사들과 대결해 승리했다고 하더군요. 원래 세분이었는데, 한 분이 더 도착해 총 네 분입니다.”
“으음, 좋네. 가보세.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기겠군.”
여의공자가 정자에서 내려왔다.
하인 왕일(王一)이 문득 기분 좋은 향 같은 것을 느꼈다.
‘사향인가. 취향도 독특하군. 어쩐지 생긴 게 꼭 기생오라비 같더라니.’
왕일은 이문충과 함께 이곳 은하장원에 남은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살아남은 호위무사들은 모두 떠났다.
남은 사람은 장주와 그의 부인, 딸, 이문충 네 사람을 제외하고 하인 십여 명뿐이었다.
그나마 하인들의 이탈이 적은 것은 그동안 장주와 장주 부인이 잘 대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 역시 무림고수의 도움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뭘 하는가. 어서 가지. 자네가 앞장을 서야지.”
여의공자가 피리로 앞을 가리켰다.
“네. 공자님.”
왕일이 짜증나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대청으로 안내했다.
여의공자는 그의 뒤를 따라 느긋하게 걸어갔다.
“재미가 있겠어. 재미가······.”
“공자님. 지금 재미를 찾을 때가 아닙니다. 비록 고수분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오셨으나, 영웅방 놈들은 오늘 우리 장원에서 혼례식을 직접 치르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소방주 혼자 오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기야 소인이 이렇게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공자께서는 무공보다 말로 놈들을 타일러 보겠다고 하셨다면서요?”
“난 그저 이곳 사정이 딱해 보여서 왔을 뿐이네. 사실 무공은 전혀 몰라. 하지만 말로 하는 것은 자신 있지. 하기야 무림맹 무사까지 왔다면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어서 가세. 화급을 다투는 상황에 왜 이렇게 꾸물대는 것인가. 지금 잡담할 땐가?”
“네?”
왕일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간을 지체한 것은 바로 여의공자였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왕일이 속도를 냈다.
여의공자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따라갔다.
* * *
“충의보주 강무재(姜務載)라 하오.”
“정무문주 조관(曺款)이오.”
“여의공자라고 합니다.”
강무재와 조관, 그리고 그들이 데려온 무사 이십여 명의 위세는 제법 대단했다.
여의공자가 이번에는 대청 한쪽 탁자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갔다.
한데 그들은 바로 유덕, 정기, 막총, 진하림 네 사람이 아닌가.
왕일이 말한 하심무인들은 역시 그들이었던 것이다.
인사를 나눈 후 여의공자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반갑습니다. 하심무인이라고 하셨습니까? 무림맹 소속이라 장주께서 매우 기뻐하셨을 것 같군요. 한눈에 봐도 다들 협객의 풍모가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사실 저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무림맹 총단 하인 신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객잔에서 우연히 만난 이 집사의 부탁을 받고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필요 없으시다면 지금이라도 가겠습니다.”
유덕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자, 아직 잘 모르고 있었던 강무재, 조관 등이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문충이 급히 말했다.
“겸손의 말씀입니다. 유 대협을 비롯해 이들 네 분은 하나같이 무공이 출중해 이미 무림맹 정식무사로 내정이 된 것과 마찬가지라고 들었습니다. 사실 지금 이곳에 모실 수 없는 분들인데, 제가 간곡히 부탁해 어렵게 모셔왔습니다.”
“하하하. 그러면 무림맹 정식무사나 매한가지군요. 영웅대 부대주 사재홍이 귀하들에게 쫓겨 도망갔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은하장주의 오랜 벗 중 한 명인 청죽선생(靑竹先生)의 물음이었다.
그와 청산객(靑山客) 두 사람은 은하장주와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세 사람 모두 무공도 연마했으나 그렇게 뛰어나진 않았다.
한편 이번에 청죽선생과 청산객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와 준 것은 의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그동안 은하장주에게서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한 면이 더 컸다.
한때 상단을 운영하며 돈을 모은 은하장주와 달리 그들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은하장주는 그런 그들에게 매달 쌀과 은자를 보내줬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위기의 순간 그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은하장주가 말했다.
“여러분께 당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기 계신 하심무인들이 하인이란 사실을 발설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는 저분들을 부끄러워해서가 아닙니다. 최대한 피를 보지 않고 이번 일을 해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놈들이 우리 뒤에 무림맹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순순히 돌아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한데 이 집사에게 들으니 진 소저께서 황금방 소방주와 원한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 아버님을 죽인 자가 바로 그 방국진이에요. 하지만 섣불리 복수하지는 않을 것이니, 여러분께서도 그 정도만 알고 계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번 일도 방국진 그놈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요. 아마 그놈 역시 올 겁니다. 생각 같아서는 놈들을 모조리 없애고 싶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은하장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무림맹 무사들을 데려왔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뻐했던 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먼저 온 충의보와 정무문 무사들의 무공은 그렇게 높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신분이 하인이었다.
매우 실망한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
최대한 정중하게 유덕 등을 대했다.
하지만 정작 놈들이 올 때가 다 되어가니 걱정이 커졌다.
하인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한편 여의공자를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은 기대 이하라는 게 대체적이었다.
물론 그 잘생긴 얼굴은 다들 놀라기에 충분했다.
진하림이 유덕 등에게 살짝 천룡공자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은 무림고수였다.
특히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여의공자의 말은 실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영웅방 소방주 일행이 오면 제가 좋게 말로서 타일러 보내겠습니다. 그들도 사람인데 어찌 도리를 모르겠습니까? 무엇보다 무림맹 소속 하심무인들께서도 오셨으니, 일장훈계를 하면 겁을 먹고 꽁무니를 빼기에 바쁠 겁니다. 이치가 그러하니 다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거 식사 때가 되어서 그런지 배가 출출하군요.”
“하하하. 여의공자께서는 여유가 있어 좋습니다. 실례지만 무공 실력은 어느 정도 됩니까?”
청산객이 다소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공은 모릅니다. 처음부터 밝혔지요. 하지만 모든 일은 말로써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여의공자가 다시 장담하자 좌중의 사람들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는 것이 왠지 성의가 없어보였다. 곧 적이 닥칠 텐데 먹을 것을 찾는 것도 황당했다.
하지만 영웅방 소방주 일행이 언제 올지 모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문충이 급히 하인들을 시켜 식사와 술을 내오게 했다.
술까지 내온 것은 적과 싸우기 전에 한잔 씩 하는 것이 오랜 무림의 관례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무림인 중에는 싸우기 전에 꼭 술을 먹어야 제힘을 발휘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여의공자가 닭다리를 뜯어 먹으며 건배 제의를 했다.
“다들 어깨를 펴고 한 잔씩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쩌면 이미 소식을 듣고 아예 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을 겁니다. 자, 장주님의 건강을 위하여!”
여의공자가 술잔을 들자, 사람들도 마지못해 잔을 들었다.
“위하여!”
여의공자가 목청껏 소리친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인 한 명이 급히 들어왔다.
“장주님. 무명객이란 분이 오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뭐라고?”
은하장주가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이는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놀라지 않는 사람은 여의공자뿐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지금 무명객이라고 하였더냐?”
“네. 장주님.”
“장주. 무명객이라면 얼마 전 검마왕을 죽인 절세영웅이 아니오?”
청산객의 말에 은하장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항간에 결정적 사인은 마교 내부 배신자의 암습이란 말도 있지만, 그분이 검마왕을 물리친 것만은 확실하오. 한데 어떻게 이곳에? 당장 모셔라.”
“잠깐!”
급히 저지한 사람은 바로 정무문주 조관이었다.
“조 문주. 왜 그러십니까?”
“뭔가 이상합니다. 무명객 그분이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겠습니까? 장주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분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저도 솔직히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맞는다면 천군만마의 도움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일 겁니다.”
“으음, 최근 천하 각지에서 가짜 무명객이 출몰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명객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자, 가짜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이지요. 천하에 큰 공을 세우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분이 어찌 이만한 일에 나서겠습니까?”
“그 말씀은?”
“네. 지금 온 무명객은 가짜가 확실합니다. 들이지 말고 쫓아내십시오.”
“쫓아내더라도 확인한 후에 쫓아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은하장주가 미련을 버리지 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영웅방 놈들 앞에서 들통 나면 하심무인들 또한 의심을 살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힘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이 될 겁니다. 하지만 무력으로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영웅방 소방주의 무공은 무림맹 장로와 비슷한데 어찌 그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여기 계신 하심무인들도 아마 어려울 겁니다.”
조관이 유덕을 쳐다봤다.
유덕이 급히 말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저희 무공은 보잘것없습니다. 객잔에서의 승리는 그야말로 천운이 따른 결과였지요. 상대한 무사들도 실은 일반무사들뿐이었습니다. 영웅방 소방주의 무공이 그렇게 높다고 하면 저희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겁니다.”
“장주. 들으셨지요? 저와 강 보주 또한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다른 고수들을 데리고 올 가능성이 높은 것을 고려하면, 결국 우리가 취해야 할 패는 무림맹이란 이름으로 겁을 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무명객을 사칭하는 자를 처음부터 쫓아내는 게 좋다는 겁니다.”
“저도 찬성합니다. 안으로 들여 얼굴을 보게 되면 자칫 속아 넘어갈 수 있습니다. 대놓고 사기를 치는 자를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무공을 시험해보자고 할 수도 없고 말입니다.”
충의보주 강무재까지 찬성하자 은하장주가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