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31
방국진의 죽음으로 사태는 일단락되는 것 같았다.
영웅방 소방주 곽안보가 그의 복수를 하지 않고 철수할 뜻을 거듭 밝혔기 때문이었다.
“사실 황금방이 완전하게 우리 사도맹에 가입된 것은 아니었소. 맹주께서 최종 승인을 해주셔야 하는데, 다들 알다시피 맹주께서는 사사천교의 교주이시기도 한지라 할 일이 무척 많으시오. 그래서 적당한 때를 봐서 본방에서 추천을 하려고 했었소. 아무튼, 황금방 자체에서 복수하는 것은 모르겠으나 우리 영웅방에서 이일로 문제 삼을 일은 없을 것이오.”
“그럼 곽 소방주께서는 다시는 담 소저와 진 소저를 욕심내지 않겠다는 건가요?”
백리영의 물음에 곽안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조금 전 죽은 방국진 그놈의 꼬임에 잠시 빠졌던 것 같소. 정식으로 사과하리다. 담 소저. 진 소저. 용서해주시겠소?”
곽안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의식적으로 백소운의 눈길을 피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나, 조금 전 백소운이 보호강기로 검을 두 동강 낸 것은 강호의 일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림인이라면 꿈에도 그리는 무적의 보호강기.
마치 어떤 것도 뚫을 수 없는 천하제일 갑주를 입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이 어찌 부럽지 않으랴.
“흥!”
담소소와 진하림이 약속이나 한 듯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더 이상의 확전은 피하고 싶은 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담소소는 다시는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데 만족하는 것 같았다.
진하림 역시 원수인 방국진이 죽자 마음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천룡공자 또한 영웅방과의 전면전은 부담되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어찌됐든 방국진을 최종적으로 죽인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한데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니 더는 추궁하기 어려웠다.
백리영이 말했다.
“좋아요. 오늘 일은 이 정도에서 끝내기로 하지요. 맹에서도 사사천교와의 전쟁은 바라지 않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꼭 명심할 것이 있어요. 맹에서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나 오늘과 같은 작태를 수수방관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힘으로 억압해 부녀자를 강제로 범하는 것은 금수보다 못한 짓이에요. 다행히 곽 소방주께서 뉘우친다고 하시니, 모든 책임은 죽은 방국진 저자에게 돌리도록 하지요.”
“으음······.”
곽안보가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한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무명객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 자신이 상대하기 힘든 고수가 천룡공자 한 사람이었다면 절대 참지 않았을 그였다.
그럴만한 실력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비장의 무기를 사용한다면 천룡공자까지도 누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하지만 천룡공자는 차원이 다른 고수이니 강호에서 만나면 절대 피하라는 부친의 당부를 거역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검마왕을 이긴 무명객이 있는 자리였다.
“그럼 가보겠소이다. 오늘 일은 여러모로 유감이오.”
곽안보가 수하들을 이끌고 은하장원에서 나가려는 그때였다.
여의공자가 그들을 저지했다.
“잠깐. 어딜 도망가시려고? 아직 무명객께서 허락을 안 하셨는데······.”
곽안보가 흠칫했으나 무시하고 가려 했다.
여의공자가 다시 말했다.
“무명객님. 저자를 이대로 보내실 겁니까? 사사천교니 뭐니 하지만 그런 이야기와 무명객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죄를 지은 자에게 엄한 벌을 가하는 것은 하늘의 도리입니다. 그러지 않고 저대로 보내주면 또 다른 피해자를 낳을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백소운이 반응을 보였다.
사실 그 또한 곽안보를 이대로 보내 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만 무림맹 소속으로서 백리영의 의사를 존중해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의공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은 하인이 아니라 무명객 신분이 아니던가.
“일단 저자를 꿇어 앉혀 주십시오. 제가 놈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겠습니다.”
여의공자가 엄숙한 표정으로 백소운을 쳐다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한데 의외로 여의공자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백소운이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곽안보를 향해 우수를 뻗었다.
순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곽안보가 마치 무형의 그물에 걸린 듯 허공에 떠서 손발을 허우적거렸다.
결국 여의공자 앞으로 끌려 왔는데, 이미 혈도가 찍힌 상태였다.
쿵.
무릎이 꿇린 곽안보 역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무명객의 무공이 뛰어날 거라고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예 저항도 못 해보고 잡혀 올 지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한편 조금 전 백소운이 펼친 격공섭물(隔空攝物)은 가히 최고의 경지라 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장원 안에 있는 사람 모두를 한 번에 묶어 놓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모두 경악한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경악만으로 끝나서는 절대 안 되는 사람들이 바로 영웅방 무사들이었다.
특히 정십삼을 비롯한 영웅방 장로 세 명의 대처는 상당히 빨랐다.
“소방주님!”
정십삼이 경공을 펼쳐 가장 먼저 따라왔다.
동시에 백소운을 향해 장풍을 날렸다.
쏴아아.
곽안보를 지키지 못하면 나중에 그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그였다.
상대의 높은 무공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나머지 장로 두 명 역시 어느새 검을 뽑아 백소운의 양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
슈우욱, 슉.
갑작스러운 합공.
하지만 오랜 전투 경험으로 인해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어이쿠. 나 죽네.”
여의공자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급히 뒤로 물러났다.
반면 백소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 차례 무형의 기세를 뿜어냈을 뿐이었다.
퍼퍼퍽.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놀라서 보니 정심삽을 비롯한 장로들이 십장 정도 튕겨 나와 바닥에 끙끙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혈도가 찍힌 것 같았다.
장로 둘이 사용했던 장검 두 자루는 두 동강 나 한쪽에 떨어져 있었다.
정십삼이 날린 장력은 흔적조차 없이 소멸된 지 오래였다.
더욱 놀라운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전원 공격을 준비하던 백여 명의 영웅방 무사들이 썩은 짚단처럼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이는 백소운이 격공지력으로 다리 혈도를 찍은 때문이었다.
금단비서 상의 무공인 금단지(金丹指)를 처음 펼친 것이었다.
한편 금단지 역시 팔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마지막 단계인 금단팔지가 펼쳐지면 한 번에 수천 명의 혈도도 찍을 수 있었다.
이는 지력이 날아가면서 분화를 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조금 전 백소운이 날린 지풍도 처음엔 한 가닥이었다.
하지만 영웅방 무사들의 수에 맞게 빠르게 분화하여 일거에 백 명의 무사를 쓰러뜨린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나름대로 고수라 자처하는 추보승과 계박 등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소운의 무공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고수들은 직감적으로 상대의 수준을 몸으로 느낀다. 그렇기에 다들 경악하고 있는 것이다.
영웅방 무사들이 모조리 제압되자, 신이 난 것은 바로 여의공자였다.
“곽안보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이 집사. 어서 이자의 죄를 말해보시오. 아까 분명 이자 손에 죽은 여인이 수십 명이 넘는다고 하지 않았소?”
“네. 맞습니다. 마음에 드는 여자는 끝끝내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며, 말을 듣지 않으면 가문을 몰살시켰지요. 석 달 전 백월장원(白月莊園) 일가가 몰살당한 것도 저자의 짓입니다. 백월장주의 여식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살하자, 화가 나서 그 식솔을 모조리 죽인 것이지요. 하지만 영웅방의 위세가 대단해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고 넘어갔었지요.”
이문충의 폭로에 백리영 역시 안색을 급변했다.
소문은 간간히 들었지만 이 정도였는지는 몰랐던 것이다.
‘아버님께서 마교 박멸에 성공하면, 그다음 차례는 사도맹이라고 하더니 그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힘을 믿고 죄 없는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는 자는 반드시 단죄해야 할 것이다.’
백리영이 담담히 서 있는 무명객을 쳐다봤다.
조금 전 보여준 무위로 인해 그의 정체를 의심하는 일말의 마음조차 싹 가셔 있었다.
대신 지금은 그가 맹을 대신해 정의를 실현해주길 기대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날 어쩔 셈이냐? 여의공자 네놈은 나와 무슨 원수가 졌기에 못 잡아먹어서 난리냐? 본방의 복수가 무섭지도 않으냐? 날 죽이면 아버님께서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곽안보가 목숨의 위협을 느낀 듯 소리를 질러댔다.
특히 부친인 영웅방주 곽문의 이름을 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최소한 이곳 무한에서는 곽문의 이름은 염라대왕과도 같기 때문이었다.
조금의 용서도 없이 적을 가차 없이 죽이는 그의 성격 역시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여의공자가 코웃음을 쳤다.
“흥! 곧 죽을 놈이 터진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용서를 빌어야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는 것을 모르는군. 힘없는 사람들을 죽일 때는 이럴 때가 올 것을 몰랐더냐? 심는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의 무서움을 정녕 몰랐단 말이냐?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절대 빠뜨리지 않는 법이거늘······.”
여의공자가 신이 난 듯 호통을 쳤다.
그 바람에 곽안보가 단숨에 기가 죽었다.
“잘, 잘못했소. 목숨만 살려주시오. 목숨만 살려주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드리겠소.”
곽안보가 백소운을 보며 애원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번에 풀려나면 꼭 이 수모를 갚으리라 다짐했다.
“무명객께서 이놈을 붙잡으셨으니 직접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여의공자의 말에 백소운이 고민했다.
‘죽어 마땅한 자다. 하지만 이 자가 죽게 되면 방국진과 달리 복수로 인해 큰 싸움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럼 그 와중에 아저씨들과 하림이는 물론이고 많은 사람이 위험해질 수 있다. 일단 오늘은 무공폐쇄가 적당하겠구나.’
백소운이 결단을 내린 후 말했다.
“무공폐쇄가 좋겠습니다. 다만 이자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겠습니다.”
백소운이 곽안보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실력으로 겨뤄봅시다. 그대가 패하면 반드시 무공이 폐쇄될 것이오.”
곽안보가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이미 그 역시 물러설 수 없는 상황.
머릿속에는 부친이 구명절초로 전수해준 검초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 검초는 지금 곽문이 연마하고 있는 신공 중 하나였다.
목숨이 위태로울 때만 사용하라던 부친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생사탈명(生死奪命)! 그래 절세고수도 이길 수 있다고 하셨지. 다만 일초승부여야 내가 유리하다.’
곽안보가 검을 겨누며 말했다.
“무명객. 일초로 겨룰 것을 제의한다. 나의 제의를 받아들일 용기가 있느냐? 만약 받아들인다면 오늘 내가 패해 무공폐쇄가 되더라도 복수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어떻게 하겠느냐?”
“좋소. 시작합시다.”
백소운이 무명검을 천천히 뽑았다.
원래는 검까지 뽑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강호 관례에 따라 형식을 갖춰준 것이었다.
그때였다.
여의공자가 나직이 탄성을 터뜨렸다.
“아······.”
하지만 그 탄성은 곧바로 시작된 곽안보의 공격에 묻혀버렸다.
슈우욱.
마치 환상과도 같은 검초가 그의 손에서 뿌려진 것이다.
생사탈명.
바로 그 비장의 검초였다.
‘훌륭하군.’
백소운이 눈을 빛내며 무명검을 내밀었다.
순간, 곽안보는 마치 거대한 벽이 다가오는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금단검법(金丹劍法) 팔초식 중의 일초식.
금단거벽(金丹巨壁)이 펼쳐진 것이었다.
“으윽!”
곽안보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환상 같은 검초를 뿌렸건만 거대한 벽 앞에 허물어져 버렸다. 그 사이 단전 부위에 검을 찔린 것이다.
“앞으로 악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 선행을 쌓으면 이십 년 후에 혹시 무공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세상에는 불가능이란 없으니까. 어서 수하들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시오. 향후 다시 한번 부녀자를 괴롭힌다는 말이 들리면 내 이름을 걸고 그대의 목을 벨 것이오.”
백소운이 무명검으로 허공을 한번 갈랐다.
순간 거대한 기둥 모양의 강기가 무지개 모양으로 일어났다.
“저럴 수가!”
장원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경악한 것은 물론이었다.
너무 놀라 주저앉은 사람들도 상당했다.
백소운이 정십삼 등 영웅방 무사들의 혈도를 풀어주자, 그들은 급히 곽안보를 업고 장원에서 빠져나갔다.
짝짝짝.
어느새 안색을 회복한 여의공자가 박수를 보냈다.
진하림이 동참했다.
백리영 등 모든 사람들이 박수로 백소운에게 경의를 표했다.
“가히 천하제일 영웅의 신위로다.”
여의공자가 무명검을 주시하며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