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35
새벽이 다 되어가도록 임소혜는 깨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숨이 처음보다 훨씬 고르고 안색도 편안했다.
그래서 그런지 본래의 미모 또한 되찾고 있었다.
백소운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데 그의 얼굴은 밤사이 또 달라져 있었다.
평범했던 무명객 얼굴에서 우락부락한 이십 대 중반 사내의 것으로 변한 것이다.
물론 금단만변을 펼쳐 역용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명객 얼굴로 계속 있다가는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언제 어디서 은하장원에 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사실 아무리 직접 검마왕을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무명객은 임소혜에게 원수나 마찬가지였다.
무명객인 것을 알면 분명 책임을 묻고 죽이려 할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 백소운은 지금 적잖이 긴장하고 있었다.
임소혜와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아직 없었던 탓이다.
‘깨어나기 직전 저번처럼 떠나면 되는 것을. 왜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있는 걸까.’
백소운이 자책했다.
상승무공, 그것도 꿈의 경지라는 무형검은 무엇보다 마음의 평정이 중요했다.
정(情)에 이끌리면 그만큼 번뇌도 많아지는 법이었다.
‘번뇌가 바로 보리라 하지 않았던가. 차라리 이 기회에 이 소녀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이 낫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후회 없이 도움을 주고 싶구나. 어쩌면 천하를 위해서 그게 더 유익할지도······.’
그랬다.
백소운은 간밤에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에 도달했다.
소마녀를 위해 부교주 세력을 소탕해주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마교 자체에 좋은 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사실 마교 역시 처음에는 순수한 단체였다.
하지만 그 뜻이 변질되어 오늘과 같은 그런 공포의 대명사가 된 것이었다.
백소운은 그런 마교를 완전히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따라서 지휘부를 교체해 내부 정화를 이루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거참, 내가 무슨 생각을······.’
백소운이 문득 그 또한 집착임을 깨닫고 다시 임소혜의 얼굴을 유심히 봤다.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끌리게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소녀들과 비교가 되었다.
그 소녀들은 바로 진하림, 백리영, 담소소 등이었다.
그 소녀들이 자신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세 소녀 모두 안 지 며칠 안 되는 사이였다.
백소운으로서는 이들 소녀들과의 사랑에 대해 거의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물론 세 명 중 그가 가장 아끼는 사람은 진하림이었다.
처지가 비슷해서인지 벌써 한 가족 같았다.
하지만 아직은 여동생 같은 느낌이 강했다.
백리영은 정반대였다.
처음에는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배울 점도 많고 현명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담소소에 대해서는 아직 별 감정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녀와는 시간이 좀 더 많이 필요해 보였다.
‘모두 부질없다. 아무래도 당분간 여인에 대한 감정은 접어두는 것이 좋겠구나.’
백소운이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임소혜가 깨어난 후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마지막 점검이었다.
살펴본 결과 다른 점은 문제가 없었다. 다만 피리가 조금 걸렸다.
물론 겉으로 봐서는 일반 피리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그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 일단 금단비고 안에 넣어두자. 대신 다른 병장기를 꺼내자. 소마녀를 돕게 되면 시일이 제법 걸릴지도 모르니까.’
백소운이 결단을 내리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피리를 넣어두고 도 한 자루를 꺼냈다.
무명검과 함께 공동 서열 1위에 올라있는 병장기였다.
역시 이름이 없었다.
참고로 금단비고 안의 병장기 중 서열 1위는 특이하게도 세 자루였다.
검, 도, 창 이렇게 세 종류 무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익힌 무공에 따라 병장기의 활용도가 다를 것을 알고 배려해둔 것 같았다.
그중 무명검은 여의공자가 빌려 간 상황이었다.
‘무명도(無名刀)라 부르는 게 좋겠군. 무명도 역시 천하제일도인 것 같다. 그나저나 만약 예상대로 며칠 이상 복귀하지 못하면 어떤 변명을 하지?’
백소운이 잠시 생각하다가 눈을 빛냈다.
‘그래, 무명객의 심부름을 갔다고 하면 되겠구나. 물론 그전에 무명객 얼굴로 백리 소저에게 가서 한마디 해둔다면 아마 별 탈은 없을 것이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백소운의 표정이 밝아졌다.
휴가 복귀가 늦어져 광에 갇힌 경험 때문에 솔직히 걱정이 많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명객 핑계를 대고 그 입증이 된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깨어날 때가 됐는데, 조금 늦는군. 진맥을 좀 해봐야겠다.’
백소운이 임소혜의 손목을 잡았다.
바로 그때였다.
동굴 안으로 한 사람이 빠르게 들어왔다.
건장한 사내였다.
준수한 얼굴에다가 상당히 강인한 인상이었다.
“네 이놈! 어서 사매의 손을 놓지 못할까?”
동굴 속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백소운은 미동도 없이 그대로 진맥했다.
사실 임소혜의 손을 잡는 순간, 동굴 밖의 인기척을 느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라도 자신있는 그였다.
오히려 섣불리 손을 떼면 뜻하지 않은 오해를 살수도 있었다.
“진맥 중이오. 이 소녀를 죽일 셈이오?”
백소운이 차분히 대답했다.
하지만 사내의 주먹은 벌써 백소운의 이마 한 치 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그대로 적중되면 아마도 머리가 박살 날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주먹에 담긴 공력이 대단했다.
‘검마왕에 못지않구나. 기류 또한 유사하다.’
백소운이 보호강기를 조금 더 두텁게 했다.
이제 주먹이 이마에 닿는 순간 반탄력으로 오히려 사내가 쓰러질 것이었다.
하지만 충돌 직전 주먹이 멈췄다.
“왜 피하지 않는 것이냐? 무공을 모르느냐? 사매가 왜 위험하다는 것이냐?”
“어젯밤 우연히 사당 안에 쓰러져 있는 이 소녀를 발견했소. 그래서 이곳에 데려와 치료해준 것이오. 치료는 성공적이었고 깨어날 때가 되었소. 하지만 이 좁은 곳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심맥을 다쳐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오.”
“그랬었군. 일단 너를 믿겠다. 하지만 정체부터 밝혀라.”
“묻는 사람이 먼저 밝히는 게 순서가 아니겠소? 그리고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서로 존대하는 게 어떻겠소? 본인은 올해 스물여섯 살이오.”
백소운이 바뀐 외모에 맞게 원래 나이보다 네 살 많게 이야기했다.
“으음, 좋소. 동갑이군. 혹시 그대는 사매와 내가 어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소?”
“모르오. 다만 추측은 하고 있소. 혹시 그대들은 마교도들이 아니오?”
“그렇소. 이제 그대도 밝히시오. 마교도임을 알고서도 치료해준 것을 보면 적은 아닌 것 같은데······ 아 내 이름은 사자성(沙自省)이라고 하오. 돌아가신 교주님의 셋째 제자요.”
“아······.”
백소운이 탄성을 내었다.
사실 임소혜를 사매로 부를 때부터 짐작했었다. 하지만 정말 검마왕의 제자였던 것이다.
검마왕에게는 모두 세 명의 제자가 있었다.
세 명 모두 출중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검마왕의 아들이 실종된 지 오래인 상황에서 그들 중 한 명이 후계자가 될 거라는 전망도 많았다.
하지만 검마왕은 제자들에게 소교주 자리를 주지 않고 실종된 아들에게 주었다.
이는 제자들의 경쟁심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데 그 중 한명인 사자성이 지금 나타난 것이다.
백소운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사자성이란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무공도 대단하지만 검마왕이 가장 아끼는 제자라고 했었지. 아, 그러고 보니 검마왕이 자신의 딸과 이자를 맺어주려고 한다고 했던가.’
백소운이 문득 기억을 떠올리고 안색을 굳혔다.
왠지 마음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임소혜와 그 사이에 강력한 벽 하나가 생겨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임소혜의 손을 놓았다.
사자성이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소녀는 내 사매요. 교주님의 여식이자 교의 성녀이기도 하며 이름은 임소혜요. 개인적으로 이 사자성이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여인이기도 하오. 그대가 내 사매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면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이오. 혹시 성녀인 것도 알았소?”
“그렇소. 황하삼살인가 하는 그놈들이 지껄이는 것을 들었소.”
백소운이 의심을 피하고자 자신이 황하삼살을 죽인 사실을 밝혔다.
“하하하. 놈들의 시체는 나도 봤소. 정말 통쾌하게 처리했더구려. 그 무공에 탄복했었소. 한데 정말 본교의 교도가 아니오?”
“본인은 철혈객(鐵血客)이라 하오. 선친께서 한때 마교에 몸담으셨소. 아니 마교가 아니라 신교(神敎)라고 불러야 하오?”
“하하하. 상관없소. 마(魔)라는 표현이 강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된 지 오래라, 마교든 신교든 가리지 않고 부르고 있소. 다만 성녀는 반드시 성녀로 부르는 것이 관례요. 그 점만 주의하면 될 것이오. 아무튼, 선친께서 본교 출신이라고 하니 한 식구로 생각하겠소. 다만 아실지 모르겠으나 지금 상황이 매우 엄중하오. 부교주 세력이 작심하고 우리를 제거하려고 하고 있소. 교주님을 암습한 범인 역시 부교주임이 거의 확실해 지고 있소.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소. 사매가 깨어나는 게 우선이니까.”
사자성이 누워있는 임소혜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무얼 하려는 것이오?”
“추적향(追跡香)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오. 거의 소진되었구려. 하마터면 이곳을 찾지도 못할 뻔했소.”
사자성이 미소를 지었다.
임소혜의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백소운은 다시 묘한 감정을 느꼈지만 아까보다는 덜 했다.
집착이 덜 해지자 자신의 마음 상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내가 질투를 했구나. 임소혜란 이 소녀를 위해 갖가지 이유를 대어 도와주려 했던 것도 남녀 간의 감정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보아하니 서로 사랑하는 사이 같은데,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구나. 사자성이란 이 자의 무공이 대단하니 내가 굳이 없어도 될 것 같다. 그냥 돌아가자.’
백소운이 내심 씁쓸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러시오?”
사자성이 의아해하며 묻자, 백소운이 담담히 대답했다.
“이만 가봐야 할 듯하오. 임 소저는 곧 깨어날 것이오. 더는 관여하기 힘들 것 같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지 않소?”
“하기야······ 철혈객 그대의 무공 정도라면 필시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아깝구려. 황하삼살이 대단한 고수는 아니지만 그렇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사자성이 아쉬워했으나 잡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도 속으로 백소운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어찌 됐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밤을 새운 남자였다.
솔직히 지금도 백소운을 죽일까 망설이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황하삼살이 처참하게 죽은 모습을 떠올리면 망설여지는 그였다.
‘그래. 사심으로 이자를 죽여서는 안 된다. 마의 길에도 마도(魔道)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내게는 사부님을 대신해 배신자들을 몰아내고 교를 재정비해야 하는 숙명이 있다. 내 마음에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자.’
사자성이 살심을 억눌렸다.
백소운은 그런 그의 마음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 역시 사자성이 자신을 공격하면 일격에 죽일 생각이었다.
도리를 모르는 자가 임소혜를 보호하는 것은 더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그럼 가보겠소.”
백소운이 막 동굴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임소혜가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
“으으······”
“사매. 정신이 들어?”
사자성이 급히 물었다.
“아······ 삼사형. 삼사형이 절 구해주셨나요?”
“그래. 이제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아, 감사해요. 전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아, 저 사람은?”
임소혜가 뒤늦게 백소운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 수하다. 어서 가서 대사형과 둘째 사형이 있는 곳을 알아보아라. 사모께서 은거하고 계신 곳을 알아내면 더욱 좋다.”
사자성이 백소운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알아서 가라는 뜻 같았다.
‘아직 소마녀가 저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은 모양이군. 그렇다면······.’
백소운이 걸음을 멈췄다.
“사 공자. 왜 남의 공을 가로채려는 것이오? 밤을 새워 성녀를 치료해준 결과가 고작 이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