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37
백소운 일행이 괴추노인을 만난 것은 새벽 무렵이었다.
무한에서 조금 떨어진 야산에 있는 폐장원 안이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마당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괴추노인을 보고 임소혜가 한걸음에 달려갔다.
“많이 다치셨어요?”
사자성이 그의 상태를 살피고 고개를 저었다.
괴추노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안색도 조금 붉어졌다.
바로 회광반조 현상이었다.
“저는 이미 틀렸습니다. 오장육부가 망가지고 혈맥이 모두 뒤틀려 일각을 넘기기 힘들 겁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놈들을 따돌렸고 천라지망도 어긋나게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다만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그만 말씀하세요. 기력을 아끼세요.”
임소혜가 눈물을 흘렸다.
그녀 역시 괴추노인의 생명이 다한 것을 안 것 같았다.
“장사까지만 가면 일단 안심일 겁니다. 그곳은 천룡궁 세력권이라 친위대 고수들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물론 천룡궁에서도 아가씨를 노리고 있지만 그래도 한결 나을 겁니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바로 앞마을에 장사로 가는 무림맹 운송대가 있으니 핑계를 대고 그들과 합류하십시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네. 정말 허를 찌르는 계획이군요. 제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리라는 생각은 아무도 못 할 것이니까요. 좋아요. 역용을 해서 그들 속에 들어갈게요. 그러니 더는 말씀 마세요.”
“쿨럭.”
괴추노인이 기침과 함께 내장 부스러기를 토했다.
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군요. 말년에 아가씨를 호위하며 행복했습니다. 부디 어머님을 만나 교주님의 복수를 하시기 바랍니다. 천마대부인(天魔大夫人)의 병을 고치는 방법은 오직 소교주님을 데려가 보여주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소교주님을 찾을 수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으윽.”
괴추노인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세상을 하직하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입속으로 뭔가 향긋한 것이 들어갔다.
바로 금단환이었다.
보다 못한 백소운이 그를 살리기로 한 것이었다.
“성녀께 소중한 분 같소. 죽지는 않을 것이오. 어찌 죽을 수 있겠소. 이토록 충직한 분이······.”
“아, 그게 정말인가요? 어서 치료해주세요.”
임소혜가 매우 기뻐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백소운은 괴추노인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진기 치료를 했다.
임소혜와 사자성은 밖에서 망을 보며 호법을 섰다.
그리고 한 시진 후 백소운과 함께 괴추노인이 밖으로 나왔다.
도저히 회생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그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성녀님.”
“그냥 계속 아가씨로 부르세요. 어릴 때 생각이 나서 좋던데요? 몸은 어떠세요?”
“이분 덕분에 살아난 것 같습니다. 거동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으나, 당분간 아가씨를 호위하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괴추노인이 안색을 조금 굳혔다.
완쾌되지 못한 아쉬움보다는 자신이 짐이 될까 봐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백소운이 말했다.
“이전 공력을 회복하려면 석 달 정도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들으셨죠? 석 달이라면 굉장히 짧은 시간이에요. 호법께서도 저희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는 게 좋겠어요. 한데 이곳에 아무도 없었나요? 본교의 비밀장원인데 폐장원이 되어 있군요.”
“제가 올 때부터 그랬습니다. 하지만 점검은 하고 있을 겁니다. 기다려보시겠습니까?”
“아니에요. 그럴 시간이 없어요. 어서 출발하도록 해요.”
임소혜가 말을 한 바로 그때였다.
장원 안으로 백여 명의 무사들이 들이닥쳤다.
하나같이 병장기를 든 채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무림맹 놈들이냐?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모두 죽여주마.”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년인 한 명이 소리쳤다.
사자성이 급히 말했다.
“이분은 마교 성녀이시다. 나는 교주님의 셋째 제자이자 마룡대주인 사자성이고. 그대는 누구인가?”
“아······ 성녀님이셨습니까? 향주 장철(長鐵) 성녀님과 사 대주께 인사드립니다.”
털썩.
장철이 무릎을 꿇었다.
수하들 역시 모두 꿇었다.
임소혜가 말했다.
“어서 일어나세요. 이곳 백화장원(百花莊園)은 본교 비밀장원 중 하나로, 특히 돌아가신 아버님께만 충성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알고 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저희는 교주님 직속 비밀무력단체인 천마단(天魔團) 소속입니다.”
“아, 들은 바 있어요. 본교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이를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곳이라 들었어요. 장 향주께선 천마단 휘하 백팔향주 중 한 분인가요?”
“네. 무한지부를 맡아 관리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전쟁에서 패한 후 천마단도 와해 직전입니다.”
장철이 씁쓸한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반란을 제압해야 할 천마단주가 먼저 등을 돌렸다고 했다.
“천마단주를 누가 맡고 있었지요? 워낙 보안이 심해 저도 모르고 있었는데······.”
“마교좌사(魔敎左使) 조길상(曺吉像)입니다.”
“아, 그자가······.”
임소혜가 탄식했다.
이는 사자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길상은 검마왕의 최측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마왕의 암습 의혹이 번지기 시작했을 때 중립을 선언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한데 지금 들어보니 이미 도마왕 쪽으로 붙어버린 것 같았다.
“천마단 무사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단주가 부교주 쪽으로 붙자, 대다수 무사는 천마령을 받고 총단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끝까지 교주님의 복수를 위해 이곳에 남아있었지요. 천하 각지 백팔 지부의 상황도 이곳과 비슷할 겁니다.”
“천마단 각 지부 소속 무사들의 수는 원래 얼마 정도 되었나요?”
“지부마다 대략 천여 명이 평균이었습니다. 저희 지부에 남은 무사들은 지금 제가 데려온 백여 명이 전부이니, 다른 곳도 비슷한 상황일 겁니다.”
“으음, 구할 정도가 배신한 것이군요. 하기야 대세가 그쪽으로 흘렀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임소혜가 한탄했다.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어머님을 찾으러 장사로 가려하는데, 혹시 정보가 있나요?”
“천마대부인 말씀입니까? 저희도 모릅니다. 삼년 전 완전히 자취를 감추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장사에 계십니까?”
“그래요. 지금 바로 우리를 따라오시겠어요?”
“성녀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당연하지요. 저희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교주님께서 생전에 저희에게 베푸신 은혜는 하늘과 같았습니다. 사실 저희 모두는 폐인과도 같았는데, 교주님께서 직접 무공을 회복시켜 주셨지요.”
장철이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검마왕의 은혜를 강조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마교 무공 특유의 부작용으로 그들 모두는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고 했다.
그 결과 폐기 처리되어야 할 그들을 검마왕이 직접 치료해줘 천마단 무사까지 되었다는 것이었다.
“여러분의 충성심을 믿겠어요. 그리고 옆에 계신 분들은 괴추노인과 철혈객이세요. 괴추노인은 본교 호법으로 지금 내상이 깊어 특히 잘 보호해야 할 거예요. 철혈객께서는 저를 구해주신 대공이세요. 대공의 명은 저의 명과 같으니 반드시 따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성녀님. 저희도 말을 타고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장철이 떠날 차비를 하기 위해 수하들과 함께 장원 밖으로 나갔다.
괴추노인이 말했다.
“아가씨. 저들을 정말 데려가실 겁니까? 그럼 무림맹 운송대와 합류하려던 계획은?”
“그 계획은 변함이 없어요. 저들을 우리 일행으로 소개하면 될 거예요. 그렇게 해야 만약의 경우 우리 정체가 탄로 나더라도 탈출할 수 있지 않겠어요? 문제는 어떻게 해야 무림맹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느냐인데······ 대공께서는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세요?”
“으음, 한 문파 사람들로 행세하는 게 어떻겠소? 무명객의 부탁을 받아 도움을 주러 왔다고 하면 환영할 것이오.”
“무명객 그자 역시 원수나 마찬가지인데······ 얼마 전 실제 나타났다는 게 사실인가요?”
임소혜가 단번에 적의를 드러냈다.
백소운이 흠칫했다.
“그렇소이다. 하지만 지금은 부교주 세력을 공동의 적으로 생각하고 잠시 무명객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좋아요. 대공의 말씀에 따르겠어요.”
“사매,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 우리가 병력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천마단 무사들도 있지 않아?”
“백여 명이 되는 무사들을 데리고 우리끼리 가면 그만큼 추적을 당하기 쉬워지는 점도 고려해야지요. 지금으로서는 어떤 경우도 불확실해요. 그럴 바에야 모험을 하는 게 더 유리할 가능성이 높아요.”
임소혜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
이후 다시 수하들과 함께 장원 안으로 들어온 장철에게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다.
장철이 흠칫하더니 말했다.
“사실 성녀님을 먼저 다른 한 곳에 모시려고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천 명 정도의 본교 무사들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아까는 왜 말씀하지 않으셨지요?”
“솔직히 성녀님의 신분에 대해서 의심이 갔습니다. 하지만 이제 확신이 들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곳은 여기서 한 시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설사 무림맹 운송대와 합류한다고 해도 더 많은 무사를 데리고 가는 게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그곳에 대체 누가 있다는 것이죠?”
“무한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던 본교 무사들입니다. 장로 세분이 이끌고 계신데, 산적으로 위장하고 있지요. 세분 장로 역시 천마령에 불복해 신강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으니, 아마 성녀께서 가시면 매우 기뻐하실 겁니다.”
“으음, 천 명이라면 굳이 무림맹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되는 숫자인데······.”
임소혜가 갈등했다.
괴추노인이 말했다.
“일단 한번 가보시지요. 무사들 수가 너무 많아 걱정이라면 그쪽 병력은 은밀히 뒤따르게 하면 될 겁니다. 어차피 장사에 가면 천하에 흩어져 있는 교도들을 모아야 합니다. 그대로 두면 결국 부교주 쪽으로 붙을 겁니다. 적은 병력이 아니니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사매.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친위대 고수들이 막강하지만 무림맹 눈치를 보느라 대병력은 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무사 천여 명 정도만 있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지. 운송대 합류도 무사들 수준을 보고 다시 결정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고 말이야.”
“좋아요. 그렇게 하겠어요. 대공께도 양해를 부탁드려요.”
“알겠소.”
백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셨으면 저희를 따라 오십시오. 앞장서겠습니다.”
장철이 수하들을 데리고 장원을 떠났다.
백소운과 임소혜, 사자성, 괴추노인 역시 마차를 타고 그들을 따라갔다.
두두두.
* * *
“무사 한 명을 먼저 보내 성녀께서 가시는 것을 알렸습니다. 아마 계곡에 들어가면 마중을 나올 겁니다.”
임소혜의 권유로 마차에 함께 탄 장철이 못다 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마차 안에 있던 임소혜, 사자성, 괴추노인 세 사람은 그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마부석에 앉아 있는 백소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 분 장로는 어떤 분들이지요?”
임소혜의 질문에 장철이 곧바로 대답했다.
“성녀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새외삼마(塞外三魔)라고 돌아가신 교주님과 친분이 두터우셨지요.”
“아, 알고 있어요. 새외 무림에서 활동하던 분들이셨지요. 입교 축하연 때 한번 뵌 적이 있어요.”
임소혜의 안색이 밝아졌다.
새외삼마는 무공이 매우 높아 생전에 검마왕이 공을 들여 영입한 고수들이었다.
특히 세 명이 합공을 가하면 검마왕도 물리칠 수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 정도였다.
“사실 부교주 쪽에서도 장로분들께 회유 작업을 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로들께서는 교주님의 죽음에 의문을 표시하며 천마령에 불응하셨지요. 아마 성녀께서 가시면 큰 도움을 주실 것이 확실합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명분은 성녀님께 있는 게 아닙니까? 여기에다가 천마대부인을 찾을 수 있다면 전세는 역전될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반드시 교주님의 복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죽은 검마왕이 생각난 것일까.
장철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 무사 한 명이 말을 돌려 마차로 왔다.
“풍운곡(風雲谷)에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