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4
맹찬이 돌아간 후 하심무인들은 곧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아직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나야 했다.
유덕이 먼저 말했다.
“부총관이 날 핑계로 자네들을 견제하는 것 같네. 하지만 자네들이 참가한다고 해서 나까지 피해 보는 일은 없을 걸세. 날 건드리면 문제가 커질 테니까. 그러니 날 위해서 이번 기회를 포기하려는 사람은 없었으면 하네.”
“어렵군요. 하지만 부총관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차기 총관 자리에 오를 가능성도 크고요.”
정기의 말에 유덕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게. 자네 의사가 가장 중요하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와 막총 두 사람은 이번 기회가 아니면 정식무사가 되는 게 불가능해질 수도 있네. 막총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글쎄요. 저 역시 정기 저 친구와 비슷한 생각입니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으나 여러 가지가 걸리는 것 같습니다.”
막총마저 모호한 대답을 하자 유덕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나? 그렇지. 운이 너도 이의를 제기했으니 말해보아라.”
“네.”
백소운이 대답 후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자신의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소극적인 삶에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이미 이번 운송 임무에 불참하려고 결심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백소운이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어떤 경우에도 참가할 생각입니다.”
“운아. 큰 형님에게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네 녀석 한 명 때문에 피해를 보시게 해서야 되겠느냐? 더욱이 너는 가점을 받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지 않으냐?”
정기가 나무라자 유덕이 그를 제지했다.
“일단 운이 이야기를 마저 듣도록 하자. 어서 계속 말해보아라. 혹시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게 아니냐?”
“맞습니다. 요컨대 우리에게는 아가씨가 계십니다. 아직 전 한 번도 뵙지 못했지만, 간청을 드린다면 제아무리 부총관이 총관이 되더라도 우리를 쫓아내지 못할 겁니다.”
“아가씨께서는 이번에 천룡궁에 가시면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 않더냐? 우리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실 것이다.”
“아닙니다. 제 생각에 아가씨는 반드시 돌아오실 겁니다. 아가씨께서 총단에 계속 계시면 사실 아무 문제도 없지요.”
백소운의 말에 사람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네 말대로만 된다면야 오죽이나 좋겠냐? 최소한 아가씨께서 등룡관 시험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총단에 계셔주신다면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한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정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근거는 없습니다. 직감입니다. 아가씨께서 굳이 천룡궁까지 직접 가신다는 것이 아무래도 혼사를 거절할 명분을 찾기 위해서가 아닌가 해서······.”
백소운의 말에 다들 실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유덕이 고개를 저었다.
“섣부른 생각만으로 중요한 일을 결정할 수 없다. 지금으로선 내일 아가씨께 모든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가장 나을 듯하다. 아가씨께서 천룡궁에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부총관이 어떤 해도 끼치지 못하게 명을 내리고 가신다면 어느 정도 안심을 해도 되지 않겠느냐?”
잠자코 듣고 있던 진하림은 백소운의 의견에 지지를 보냈다.
“저는 백소운님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같은 여자로서 혼인 예물을 보내면서 굳이 직접 가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아가씨께서는 정말로 이번에 검마왕을 죽인 영웅을 기다리시는 게 아닐까요?”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정기가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 일단 우리 중에 이번 운송 임무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부터 확인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먼저 저는 형님에게 피해가 안 간다면 개인적으로 꼭 참가하고 싶습니다.”
단서는 달았지만 정기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자, 막총 역시 의사를 밝혔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진하림이 말했다.
“저도 꼭 참가하고 싶어요. 아직 일차 합격할 실력은 안 되지만 말이에요.”
다음 차례는 백소운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도 참가하겠습니다.”
“으음, 좋다. 또 다른 사람은 없는가?”
유덕이 남은 하인들을 쳐다봤다.
하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망설이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없었다.
보아하니 맹주 여식이 아무리 확실한 보장을 해줘도 모험을 할 것 같지가 않았다.
유덕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우리 다섯 명뿐이겠군. 그리고 정기와 막총 두 동생에게 다시 말하지만 내게 어떤 피해가 와도 그것은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네. 내 이익을 위해 자네들 앞길까지 막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가씨께 더 이상의 부탁을 드리는 것도 실례라는 생각이 드네.”
“형님 말씀은?”
“아가씨께 무리한 부탁을 드리지 말고, 그냥 내일 우리 다섯 명이 총관님께 참가 의사를 확실히 밝히세. 그런 후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세. 가점 같은 것을 너무 기대하지 말고 말이야. 솔직히 불공평하다는 부총관의 말도 일리가 있네. 그러하니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자는 것이네. 혹시 아는가? 그러다가 진짜 큰 공을 세워 떳떳하게 정식무사가 될 수 있을지······.”
유덕의 말에 정기와 막총, 진하림, 백소운이 순순히 따랐다.
“알겠습니다. 형님.”
“고맙습니다.”
특히 정기와 막총 두 사람은 뭔가 후련한 표정이었다.
결론이 나자, 하인들은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백소운 역시 유덕과 정기 등에게 인사한 후 자신의 방으로 올라왔다.
* * *
침구를 정리하고 나무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백소운은 조용히 수련동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토론에는 열심히 참가했었다.
하지만 정식무사가 되는 것 자체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그였다. 그래도 정기를 생각하면 무관심할 수 없었다.
‘아저씨는 내게 아버님과도 같은 분이다. 아저씨가 날 데려와 키워주시지 않았다면 그때 죽었을지도 모른다.’
백소운이 문득 이십이 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벼락이 치던 밤.
정기가 부러진 밑동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을 안고 총단으로 달려오던 모습이 기억났다.
한데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갓난아이였던 그때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
하지만 백소운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도 믿지 않겠지. 물론 처음부터 기억났던 것은 아니지만, 무공이 높아질수록 옛 기억도 점점 좋아지는구나. 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시기까지 기억한다는 것은 정말······.’
백소운은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문제는 그 이전이다. 정작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태어났을 때이니까. 내가 태어난 곳은 어디인지. 나의 친부모님은 누구신지. 나는 어떻게 그렇게 버려지게 되었는지. 지금으로선 금단비서(金丹秘書)에 수록되어있는 그곳이 유일한 단서구나.’
백소운이 정신을 집중하자 그의 몸에서 순간 금빛 기운이 일었다.
금빛 기운은 금세 그의 전신을 감쌌다. 마치 환상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눈앞에 나타난 글자였다.
아까 진하림을 쳐다볼 때 나타났던 바로 그 상태창이었다. 물론 오직 그의 눈에만 보이는 안내글자였다.
백소운은 익숙한 듯 마음으로 승낙했다.
그러자 금빛 기운이 무수한 글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마치 책자와 같았다. 그것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순전히 시각적인 것이었다.
고대 주술에 이와 비슷한 것이 있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정말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백소운은 익숙한 듯 천천히 금빛 책자, 즉 금단비서를 눈으로 넘겼다.
놀랍게도 그의 의념이 명을 내리자, 책장이 넘어가는 것처럼 그 내용이 바뀌고 있었다.
사르륵. 사르륵.
실제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치 비단이 한 겹씩 벗겨지는 듯 글자가 바뀌었다.
그 내용은 바로 무공에 관한 것이었다. 그 오묘함과 신비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백소운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군데군데 드러나는 저자의 이름이었다.
‘천무성자(天武聖者)라. 가끔 무림인들에게 물어봤지만 이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림 역사책에도 언급되지 않았지. 하지만 등선하기 직전의 깨달음으로 새로 무공을 창시했다고 했으니, 어쩌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은자(隱者)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백소운이 담담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책자의 내용을 넘겼다. 물론 아까처럼 마음으로 넘기는 것이었지만.
맨 마지막에 드러난 것은 지도였다.
깊은 산속 동굴 같은 곳이었다. 주위 지형이 몇 개 표시되어 있었다.
‘겨우 이곳과 비슷한 장소를 알아내어 이번 휴가 때 가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한데 그곳에서 검마왕 그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백소운이 며칠 전 마교주 검마왕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천무성자의 유체라도 확인하기 위해 인근을 수색하고 있던 그였다. 물론 자신의 근원을 밝히고자 하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
총단에 복귀했을 때 정기에게 자신을 만나러 갔다고 했던 이야기가 전혀 거짓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지도가 그의 눈에 보인 것도 금단비서에 수록된 무공을 대부분 익혔을 때라 최근의 일이었다.
‘하필 마교 진영이 인근에 있어 그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군. 하지만 검마왕 그자가 먼저 나를 죽이려 해 어쩔 수 없었다. 저절로 풀리도록 가볍게 점혈만 해두었는데, 나중에 죽었다고 하니 아마도 무리하게 풀려 했던 것 같구나. 한데 그자가 바로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는 마교주였었다니······ 최대한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건만, 처음부터 큰 사고를 쳤구나. 앞으론 더욱 조심해야겠다.’
백소운은 번민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비록 적의 수괴라고는 하지만 첫 살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현재 그다지 무림맹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저 어서 신세내력을 알아내고 싶은 마음만 강했다.
‘근본(根本)이 서야 도(道)가 생긴다고 했던가. 아직 내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는 것이 인생사인 것을······.’
백소운은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고 조용히 운기조식을 했다.
‘결국 직접 세상을 몸으로 겪으면서 근원을 알아가야 하는 것인가. 속히 나아가려는 병폐만 없다면 순리에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백소운이 호흡을 다스리며 금빛을 갈무리했다.
동시에 금단비서의 내용도 사라졌다.
실로 신비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지금도 의아스러운 것은 천무성자가 이런 방식으로 무공을 남긴 이유였다.
상태창이라든지 금단비서라든지 이런 특별함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때는 십년 전이었다.
처음 서고 청소를 했던 밤이기도 했다.
너무 놀란 그는 숙소로 돌아갈 생각도 못 하고 서고에서 밤을 지새웠다.
이후 줄곧 서고에서 잠을 청하며 남몰래 금단비서를 익혀왔던 것이다.
그 동안 틈틈이 서고 내의 책도 모두 읽었음은 물론이었다.
‘천무성자라는 그분은 정말 내가 놀라지 않을 거로 생각하셨나.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런 사전 설명도 안 해주시고 말이야. 금단비서뿐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백소운이 생각에 잠긴 그때였다.
그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리며 천장을 바라봤다.
‘고도의 경공술을 가진 자다. 혹시 자객인가.’
그렇다.
하심각 지붕 위를 날아가는 인영의 기파를 느낀 것이다.
스스슷.
백소운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