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49
백소운 일행이 동정장원에 도착한 것은 새벽 무렵이었다.
일행을 안내해 온 서경이 직접 문을 두들기자 소년 한 명이 나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동정어옹께서는 안에 계신가?”
“밤낚시를 가셔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무슨 용건으로 오신 겁니까?”
“우리는 무림맹 사람들이네. 이분은 무림맹주님의 여식 백리 소저이시지. 사사천교 놈들의 추적을 피해 이곳까지 오게 되었네. 어옹께서 오시면 직접 말씀드릴 테니 그때까지 장원 안에 있게 해주게.”
“안 됩니다. 외부인은 일절 출입을 금하라 하셨습니다.”
소년이 거절하자, 서경이 다시 물었다.
“장원 안에 자네 혼자뿐인가?”
“네. 제가 어옹의 수발을 들어드리고 있습니다. 어옹께서 돌아오셔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곳으로 가보십시오.”
소년이 매정하게 문을 닫아버렸다.
쿵.
백소운 일행이 당황한 것은 물론이었다.
“할 수 없군요. 여기서 기다릴 수밖에. 임 소저.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백리영이 임소혜의 의견을 물었다.
이미 그녀가 무공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상황.
하지만 자신을 돕기 위해 나서준 데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라 더는 캐묻지 않았다.
“저 역시 백리 소저와 같은 생각이에요. 밤낚시를 갔다면 지금쯤 돌아오실 것이니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예요. 그리고 장원 안에 아까 그 소년만 있다는 것은 거짓이에요. 하인들로 느껴지는 사람들이 여럿 있어요.”
“저도 느꼈어요. 동정장원에 은자림 고수들이 자주 온다고 들었는데 어찌 그 소년 한 명만 있겠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불쑥 찾아온 저희가 잘못이지요. 동정어옹과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우리 욕심에 찾아온 것이니까.”
백리영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진하림이 말했다.
“그래도 어디선가 무명객님이 우리를 보호해주고 계실 거예요. 위기에 처하면 언제든 나타나 도와주실 테니 너무 초조해하지 마세요.”
“하림이 말이 맞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사사천교 무사들을 일검에 제거했었던 것도 모두 무명객님이 아무도 모르게 도와주신 것 같습니다.”
유덕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사람들이 다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한 떼의 무사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백여 명 정도 되었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백소운 일행을 보고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귀하들은 뉘시오?”
일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백의중년인이 물었다.
서경이 앞으로 나왔다.
“우리는 무림맹 사람들이오. 나는 악양지부장 서경이오. 그대들은 뉘시오?”
“아, 서 지부장님이셨군요. 절 몰라보시겠습니까? 풍운문(風雲門) 문주 고성준(高成俊)입니다.”
“아, 고 문주셨군요. 저번에 한번 인사를 나눴었지요.”
서경이 반가워했다.
풍운문은 악양성 내 무림문파 중 한 곳으로 역시 무림맹 소속이었다.
대의문이 멸문하자 즉시 봉문을 선언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었다.
“사사천교 놈들이 봉문을 선언한 본맹 소속 문파들까지도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이곳 악양에서 최고수는 어옹님이시니까요. 한데 이곳에서 서 지부장님을 뵙게 될지 몰랐습니다. 듣기로 지부 역시 실혼인들에게 당해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던데······.”
고성준이 서경 옆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였다.
서경이 일단 서풍을 소개했다.
“이 녀석은 제 아들입니다. 인사드려라.”
“서풍입니다.”
“자제분이셨군요. 아드님 한 분이 계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부인께서는?”
“제 처는 장사에 있는 처가에 가 있습니다. 천만다행이었지요. 그보다 여러분께 소개해드릴 분이 계십니다.”
서경이 조심스럽게 백리영을 소개했다.
“백리영이에요. 고생이 많으셨지요?”
“아가씨께서 직접 오셨군요. 성 밖에 무사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운송대 무사들이지요?”
“네. 고 문주님. 하지만 먼저 도착한 청룡당 무사들이 전멸을 당해 저희도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서 외곽에 무사들을 그대로 있게 하고 제가 사정을 살피러 은밀히 들어왔었지요.”
백리영이 간단히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악양에 들어온 후 구월대와 사사무적대, 그리고 실혼인들과 싸운 이야기까지 해주었다.
고성준이 깜짝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청룡당 무사들이 전멸한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 때문에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명객의 도움을 받았긴 했지만 실혼인 백 명을 모조리 제거한 것이 아닌가.
물론 무공이 고강한 사사무적대 백여 명을 전멸시킨 것 또한 대단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실혼인을 처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본 것이 큰 의미가 있었다.
“하하하. 그 괴물 같은 놈들을 백여 명이나 제거했다니, 역시 무명객이십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고성준이 흥분했다.
함께 있던 풍운문 무사들도 구세주를 만난 듯 들뜬 표정이었다.
“아쉽게도 중요한 볼일이 있어 떠나셨답니다. 그래서 저희도 이곳에 몸을 피하고자 온 거랍니다. 여기서 영웅분들을 모아 대책을 세우려는 의도도 있었지요. 한데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서 세력을 규합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모르시나요?”
“세력 규합을 시도하긴 했었지요. 하지만 총공격을 받아 모두 궤멸되었습니다. 얼마 전 중소문파 네 곳이 멸문한 것이 바로 그 일입니다. 새로 세력을 규합하는 일은 사실 저희 풍운문이 맡고 있습니다. 한데 무명객께서 다시 떠나셨다고 하니 아쉽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처지를 잘 아니 곧 돌아오실 거예요. 한데 세력을 새로 규합하신다는 말씀은 다른 문파와 연락이 되고 있다는 건가요?”
“네. 오늘 동정어옹의 허락을 받게 되면 이곳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런 후 총단 무사들이 지원올 때까지 버티기로 한 것이지요. 따로 있다가 대의문처럼 멸문을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고성준이 침통한 표정으로 현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최소 다섯 문파가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일이 잘되면 오늘 중으로 전 무사들을 이곳 동정장원으로 옮길 계획이라고 했다.
“으음, 일단 동정어옹께 허락을 맡는 것이 급선무이겠군요. 총군사께서 무사들을 이끌고 오시려면 며칠 더 걸릴 것이니까요. 이곳이 근거지로 확정되면 저도 성 외곽에 주둔하고 있는 무사들을 불러들이겠습니다.”
“장덕수 대장께서 이끌고 계시는 운송대 무사분들이지요? 몇 분 정도 됩니까?”
“칠백 명 정도예요.”
백리영의 말에 고성준이 표정을 밝게 했다.
“적지 않은 병력이군요. 저희도 다섯 문파 무사들을 모두 모으면 그 정도 될 겁니다. 그리고 지금 관망을 하고 있는 중립성향 문파들까지 합치면 상당할 겁니다.”
“중도문파 무사들 말입니까?”
“네. 그들 역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게 다 실혼인의 위력이 너무 강해 벌어진 일이지요. 오래도록 이어온 힘의 균형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무명객께서 실혼인들만 제거해주신다면 해볼 만한 싸움이 될 겁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총군사께서 총단 무사들을 이끌고 오실 때까지는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게 바람직해요. 아무튼 여러분을 여기서 잘 만난 것 같아요.”
백리영이 말을 한 바로 그때였다.
낚싯대를 등에 멘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화에 신경을 써느라 다들 그가 나타난 것도 몰랐다.
“동정어옹님!”
유일하게 얼굴을 본 적이 있던 고성준이 고개를 숙였다.
백리영 등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이는 백소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군. 사람들이 우러러볼 만하다. 어쩌면 맹주님보다 무공이 강할지도 모르겠다.’
“허허허. 내 집 앞에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가? 외부손님들을 안 받는 것을 잘 알 텐데······.”
동정어옹이 흰 수염을 날리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가 외부 손님을 받지 않는 것은 은자림 때문이었다.
은자림에 한번 가입하면 대부분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며 여생을 보내는데, 동정어옹은 예외였다.
그것은 평생 해온 낚시 때문이었다.
도저히 그만둘 수 없어 서약서를 쓰고 다시 동정호로 온 것이었다.
물론 그 서약서 내용은 외부인과 교류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사람들과 만나다가 은자림 위치를 발설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약속은 철저히 지켜졌다.
그래서 오히려 이제는 은자림 고수들이 인근을 지날 때 잠시 들러 쉬는 곳으로 변모한 상황이었다.
“어옹님.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사사천교 그놈들이 실혼인을 내세워 악양 무림인들의 씨를 말리고 있습니다. 제발 며칠간이라도 장원 내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고성준이 애원했다.
“허엄, 이거 참 미안하게 되었네. 사정은 딱하지만 나 역시 약속을 한 터라 어쩔 수가 없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속해있는 은자림은 강호의 은원관계에서 벗어나 있지 않나? 사사천교 그놈들이 괘씸하긴 하나, 우리 은자림이 중원 무림 내부의 일에 관여하지 않은 지 오래라네. 어서 가보게. 괜히 오해를 받으면 나 역시 피해를 볼 수 있으니까 부탁하네.”
동정어옹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장원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어옹께서는 악인을 보면 가차 없이 제거하는 협객이라고 들었어요. 한데 오늘 보니 소문이 와전되었군요. 실망이에요.”
백리영이 소리쳤다.
동정어옹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예쁘게 생긴 아이구나. 아무리 날 자극해도 소용없다. 네 말이 맞지만, 그것도 다 젊었을 때의 이야기지. 백 살이 훌쩍 넘은 내가 어찌 명분도 없이 무림의 일에 관여할 수 있겠느냐? 서장이나 왜국 무림인들 같은 외적의 침입이 있다면 또 모를까 세력 싸움은 별 관심이 없다.”
“이분 백리 소저는 현 무림맹주의 여식입니다. 어옹께서도 맹주님과는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서경이 백리영의 신분을 밝혔다.
동정어옹이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였다.
“아, 그래? 미리 말하지 그랬느냐? 좋다. 네 부친을 생각해 하루만 봐주마. 더 이상은 안 된다.”
“하루는 안 돼요. 최소 사흘은 필요해요.”
“허허허. 녀석. 좋다. 하지만 약속해야 한다. 사흘뿐이다. 사흘이 지나면 스스로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 알겠느냐?”
“네. 어옹님. 감사드려요.”
백리영이 미소를 지었다.
‘사흘 후면 총군사께서 무사들을 이끌고 오실 것이다. 그동안 놈들과 대치하면서 세력을 규합하면 된다. 그 와중에 무명객께서 다시 오시면 남은 실혼인들을 모조리 제거해달라고 부탁드려야지.’
백리영이 나름대로 마음속으로 계획을 세울 동안, 장원 안에서 예의 소년이 나왔다.
“어옹님. 오셨습니까?”
“그래. 어동자(魚童子) 네가 할 일이 많이 늘어났다. 하인들과 함께 이 사람들의 거처를 마련해주어라.”
“이분들을 들이실 생각입니까?”
“그렇다. 다만 사흘간이다. 백리 맹주와 친분이 있으니 그 정도는 은자림에서도 이해해주겠지.”
“알겠습니다.”
어동자가 백소운 일행과 풍운문 무사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드시지요.”
“고맙네. 한데 아까 아무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고성준이 비꼬듯 말하자, 어동자가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계시는 동안 편하게 지내십시오.”
“아닐세. 그냥 해본 소리네. 잘 부탁하네. 하하하.”
고성준이 껄껄 웃었다.
한편 유덕은 아까부터 안색이 계속 어두웠다.
백소운이 물었다.
“유 아저씨. 동생분 걱정을 하세요?”
“그렇다. 아까 보니까 일단 실혼인으로 만들어지면 끝장인 것 같더라.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구해야 하는데, 엄두도 못 내고 있으니······ 피가 마르는 것 같구나. 지척까지 온 셈인데 형이 되어서 아무것도 못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걱정 마세요. 나중에 무명객께서 다시 오실 때 부탁드려보세요. 그리고 이건 제 생각인데 실혼인을 그렇게 쉽게 만들지는 못할 거예요.”
“그 말은?”
“실혼인을 만들려면 아마도 사사천교 총단이 있는 절강성으로 끌고 가야 할 거예요. 그러니 아직 시간이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어느 정도 인원이 되어야 끌고 갈 거예요.”
“운이 네 말대로라면 얼마나 좋겠냐? 아까 보니 총단에서 지원무사들이 당도하면 놈들과 전면전을 벌일 것 같은데, 그때 천운이 따르면 구할 수 있겠지.”
“네. 하지만 무명객께서 그때까지 기다리게 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백소운이 눈을 빛냈다.
그 사이 모든 사람들이 장원 안으로 들어왔다.
대문이 굳게 닫힌 것은 물론이었다.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난 것은 일각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느 새끼가 우리 무사들과 실혼인들을 깡그리 다 죽였어? 어서 문 열지 못해? 여기 숨은 것을 다 알고 왔다.”
소녀의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독기가 담겨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오싹하게 했다.
서경이 안색을 굳혔다.
“사사천교주의 여식 매소청(梅素靑)이 직접 온 것 같습니다. 이번에 부교주와 함께 견문을 넓히기 위해 이곳 악양에 왔다고 들었습니다. 흥분할 때 째지는 목소리가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