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6
백소운이 열변을 토하는 왕지의 설교를 한 귀로 흘리면서 내심 생각에 잠겼다.
지난 십 년간을 서고에서 청소와 독서로 보낸 그였다.
물론 그 와중에 특이한 안배로 무공을 연마하게 되었지만, 강호의 정세에 대해 크게 고민해본 적은 없었다.
일반 무림인들처럼 고수가 되어 명성을 떨치려는 생각도 거의 없었다.
마치 환상과도 같은 금단비서를 익힌 것도 자신의 근원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던 탓이 컸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자신의 무공실력이었다.
‘검마왕도 그렇고 그와 쌍벽을 이룬다는 맹주님도 절세고수다. 아마도 천하에 두 사람을 이길 자는 극히 드물 것이다. 한데 나는 그런 고수들을 어렵지 않게 제압했다. 한 사람은 내게 점혈을 당해 끝내 죽은 것 같고, 한 사람은 일장으로 쉽게 진기를 흩트릴 수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 것일까.’
백소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최근까지 무공을 연마하는 재미로 번뇌가 많이 줄어든 그였다. 하지만 금단비서의 무공을 대성하게 된 이후 생각이 다시 많아졌다.
물론 그 번뇌들이 괴로움만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깨달음도 여러 번 얻었다.
다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아 마치 안개 속을 헤쳐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한 모호함이 이번에 충동적으로 소마녀까지 구하게 된 것이었다.
‘어쨌거나 맹주님께 죄를 지은 것은 분명하구나. 하지만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으니 후회는 없다. 아무래도 정기 아저씨를 정식무사로 만들어드린 후 조용히 맹을 떠나야 할 것 같구나. 한적한 곳에 자리한 후 더욱 더 열심히 수련하면 무공의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끝을 보게 되면 진정한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백소운이 어느 정도 마음을 다스렸을 때.
아침 총조회가 끝났다.
하인들이 각자 일하는 장소로 향하고, 예고대로 하심무인 이십여 명이 따로 남았다.
왕지가 말했다.
“아가씨 혼인 예물 운송은 예정대로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한데 아가씨께서 십년 차 이상 하인 중 등룡관을 통해 정식 무사가 되려는 자에게 가점을 얻을 기회를 주셨다. 이미 전달이 되었을 거로 믿는다. 모두 결정을 했느냐?”
“네. 총관님.”
하심무인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왕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곧 아가씨께서 이곳에 오실 것이다. 그때 한 명도 빠짐없이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도록. 원래는 내가 직접 들으려 했으나, 아가씨께서 직접 듣고 싶어 하신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구나.”
갑작스런 소식에 유덕, 정기, 막총, 진하림, 백소운 이렇게 다섯 명은 서로 뭉쳐 백리영을 기다렸다.
나머지는 참여 포기 의사를 바꾸지 않은 듯 맹찬 옆에 모여 있었다.
그때였다.
소녀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우 평범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하지만 왠지 기품이 느껴지는 소녀였다.
바로 백리영의 호위무사인 천향(天香)이었다.
쌍검을 좌우 허리에 차고 있는 그녀의 전신에서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삼 년 전부터 백리영을 그림자처럼 호위하고 있는 그녀의 사문은 남해검파(南海劍派)였다.
“하하하. 천 호위께서 오셨구려. 아가씨께서는?”
왕지의 물음에 천향이 담담히 말했다.
“간밤의 사건 때문에 방에만 계시라고 맹주님께서 명을 내리셨어요. 그래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이분들인가요?”
“하하하. 그렇소이다. 맹 부총관이 자세히 설명 드리게.”
“네. 총관님.”
맹찬이 대답 후 다시 말했다.
“천 호위의 말씀대로 이들이 바로 총단 하인들이오. 십년 이상 경력을 갖고는 있지만 대부분 자기 분수도 모르고 허황된 꿈을 꾸고 있지요. 그래서 어젯밤 의견을 모은 결과 이번 예물 운송에 아무도 참가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소이다. 그렇게 아가씨께 전해주시겠소?”
유덕이 발끈하며 반박을 하려던 찰나.
천향이 말했다.
“아가씨께서 직접 의사를 듣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강호에 신분이 뭐 그리 중요하나요? 실력만 좋으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지요. 자, 이제 한 분씩 의사를 밝혀주세요. 아가씨께서는 하심수련동에 하루라도 들어가 보신 분은 모두 참여해주시길 바라고 계세요. 가점에 대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말씀하세요.”
맹찬이 흠칫했다.
“하하하.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간밤에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으니까. 한 명씩 말해보게.”
맹찬이 하인들을 쳐다봤다.
그의 눈초리에는 무언의 압박 같은 것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때문인지 선뜻 먼저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맹찬이 득의한 표정을 지을 때.
천향이 말했다.
“좋아요. 이번 운송 임무에 참여할 분은 모두 앞으로 나와 주세요. 그분들 명단을 운송대장께 드리도록 하겠어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그녀의 말에 백소운이 제일 먼저 앞으로 나왔다.
“백소운이라고 합니다. 참여하겠습니다.”
“좋아요. 다른 분도 신청하세요.”
“유덕입니다.”
“정기입니다.”
“막총입니다.”
“진하림이에요.”
백소운을 선두로 총 다섯 명이 결국 참가를 결정하자, 맹찬의 안색이 굳어졌다.
거듭된 경고에도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낀 것일까.
백소운 등 다섯 명을 바라보는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
그래서인지 여러 번의 물음에도 더 이상의 신청자는 나오지 않았다.
천향이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이들 다섯 분을 명단에 올려둘 테니 당장 예물운송 준비반으로 보직을 옮기도록 해주세요.”
“알겠소이다.”
맹찬이 마지못해 말했다.
“그럼. 전 이만.”
천향이 돌아가자, 왕지 역시 총관실로 돌아갔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후임 총관이 될 맹찬에게 이번 일을 맡기려는 것 같았다.
맹찬이 백소운 등 다섯 명을 향해 말했다.
“두고 보자. 운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즉시 네놈들을 모조리 쫓아낼 테니까. 유덕 너도 마찬가지다. 나는 빈말을 하지 않는다.”
* * *
백소운을 비롯한 예물운송 참가 하인들이 호법당에 호출된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원래는 맹찬이 알아서 보내줬어야 했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챙기지 않아 호법당에서 사람이 온 것이었다.
하인들이 호법당 연무장에 도착하자 들어온 광경은 짐수레에 온갖 예물을 담고 있는 모습이었다.
천룡궁에 보낼 물건은 생각보다 많았다. 짐수레도 서른 개나 되었다.
이번 운송 임무의 총책임자인 운송대장을 기다리며 일행은 짐 나르는 것을 구경했다.
이제부터 자신들이 해야 할 일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유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중원표국 쟁자수들이군. 아마도 저리로 배속될 것 같다.”
“당연하겠지요.”
정기가 눈을 빛내며 주위를 살폈다.
수백 명의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백소운 일행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였다.
건장한 체구에 전형적인 무인상을 지닌 중년인이 무사 한 명을 대동하고 다가왔다.
“그대들이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하인들인가?”
“네.”
“으음, 생각보다 인원이 적군. 좋은 기회라는 말을 들었는데······.”
운송대장 장덕수(張德水)가 눈을 빛내며 유덕과 백소운 등을 바라봤다.
옆에 있던 젊은 무사가 말했다.
“다섯 명뿐이니 표국 쟁자수 쪽으로 배속시키면 될 것 같습니다.”
“전궁(全躬)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장덕수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소운 등과 인사도 나누지 않고 가버렸다.
“본인을 따라오시오. 중원표국 쪽에는 미리 말을 해두었지만, 여러분은 이번 임무가 종료될 때까지 임시로 쟁자수와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될 것이오. 아가씨의 특별배려로 참가하게 된 것이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맡은 바 일에 충실하길 바라오.”
“네. 무사님.”
하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비록 드러내놓고 하대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정식무사들과의 신분 차이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특히 이 전궁이란 청년은 한눈에 봐도 이번 운송에서 중한 직책을 맡은 게 분명했다.
사실 그는 운송관(運送官) 직책을 맡고 있었다. 백리영의 호위에 집중하는 장덕수와 달리 예물 보호를 실질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다.
전궁이 쟁자수들이 일하는 쪽으로 백소운 등을 데려가며 다시 말했다.
“이번에 중원표국에서 데려온 자들은 모두 쟁자수들로, 표사 역할은 우리 호법당 무사들이 맡게 될 것이오. 그리고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어젯밤 자객이 침입했소. 게다가 이번에 아가씨께서 직접 가시기 때문에 호위무사들이 대폭 보강이 되었소이다. 여러분은 중원표국 총쟁자수의 명만 잘 따르면 될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자연스럽게 대표가 된 유덕이 공손하게 말했다.
이윽고 쟁자수들이 있는 곳에 도착한 전궁이 한 노인을 소개해줬다.
“총쟁자수 소진(素晉)이라는 분이오. 비록 쟁자수 신분이긴 하나 표사 급 인물이니 알아서 모시도록 하시오.”
“네.”
유덕 등이 다시 대답하자, 전궁이 몇 마디 당부의 말을 한 후 역시 돌아가 버렸다.
총쟁자수 소진이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번에 맹의 정식무사가 될 분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지금은 쟁자수 신분이니 저의 명을 잘 따라주십시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덕이 대답 후 일행을 한 명씩 소개해줬다.
소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따로 짐수레 한 대를 맡기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지시하는 대로 예물을 쌓아주십시오.”
“네. 총쟁자수님.”
유덕과 백소운 등이 일제히 대답 후 시키는 대로 짐을 쌓기 시작했다.
한편 그들이 맡게 될 짐은 대부분 부피가 작은 것들로, 소진이 일부러 신경을 써준 덕분이었다.
“천 호위께서 그러시더군요. 여러분을 아가씨께서 살펴주신다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소진의 물음에 유덕이 대답했다.
“그저 아가씨께서 저희의 딱한 처지를 불쌍하게 생각하신 것이지요. 아무튼,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짐 싣는 게 끝난 것 같으니 이제 다들 숙소로 돌아가 쉬고 계십시오. 내일모레 출발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마음 편히 쉴 수 없을 겁니다. 미리 체력을 보충해주는 것이 좋지요.”
“감사합니다.”
유덕과 백소운 등이 고개를 숙인 후 함께 하심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