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61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두준도는 백소운의 품속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반면 백소운은 태연했다.
하지만 그도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의외로 두준도가 전표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인 것이다.
“어서 말해라. 전표들은 어디에 있느냐? 당장 내놓지 않으면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
두준도가 분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전표는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인 것은 가짜라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럼 비파노인에게 어떻게 정보를 입수하려 했느냐?”
“정보를 듣고 혈도를 찍을 생각이었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방안을 뒤져 보십시오. 제가 돈이 있다면 외부에 숨겨놓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말은 청산유수구나. 하지만 이미 내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 심 호위. 놈의 손가락 세 개를 자르게.”
“지부장님. 차라리 귀가 낫지 않겠습니까? 손가락을 자르면 나중에 실혼인으로 만들어진 후 실혼강기의 위력이 약화될 수 있습니다.”
“으음, 그런가?”
“네. 나중에 놈이 지부장께서 손가락을 자르라고 명한 것을 고문단 고수들에게 알리면,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실혼인으로 만들어질 사람의 신체는 최대한 보존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는 것을 지부장님도 듣지 않았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일단 놈을 데리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 내가 실수할 뻔했다. 네 말대로 하지.”
두준도가 지풍을 날리자 백소운 역시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이놈들을 모두 데리고 실혼비동(失魂秘洞)으로 간다. 사람들은 모두 총단에 실혼인 제조시설이 있는 것으로 알지만, 실제는 이곳 남창에 있지. 기존에 만들어진 실혼인들도 모두 우리 지부에서 관리하고 있는 실혼비동에서 만들어진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렇습니다. 어서 돌아가시지요.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으니 오늘 밤에 실혼비동 주위를 폐쇄하는 특수진이 발동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실혼인이 만들어지는 사흘간 외부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지요.”
심가가 말을 하는 동안 호위 세 명이 자루 하나씩을 꺼내 백소운 일행을 담았다.
“돌아가자.”
두준도가 말을 하며 방에서 나갔다.
심가를 비롯한 호위들이 백소운 일행을 담은 자루를 들고 따라 나갔다.
스스슷.
그들의 신형이 흐릿해졌고, 어느 순간 객잔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그때였다.
홀로 남게 된 비파노인이 천천히 일어났다.
의식을 잃었던 그가 아무렇지 않은 듯 깨어난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실혼인 제조 장소를 알려준 셈이니 나중에 사례금을 청구해야겠구나.”
비파노인이 중얼거리며 방안을 살폈다.
그러다 백소운이 있던 자리에서 전표 한 장을 발견했다.
급히 집어보니 바로 아까 일 층에서 보았던 은자 삼백 냥짜리 전표가 아닌가.
“아······ 약속을 지키고 갔군. 역시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누굴까?”
* * *
지하 광장.
오백 명 정도의 사람들이 며칠 전부터 모여 있었다.
한데 다들 공포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마치 사형 선고를 받아둔 사람들이라 할까.
몰골도 비참했지만, 무엇보다 절망이라는 그림자가 깊게 드리우고 있었다.
한편 지하 광장 주변에는 석벽이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도 석벽에 박혀 있는 야명석 덕분에 시야는 확보된 상황.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자신들의 앞날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우리 모두 죽게 될 겁니다. 실혼인으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최종 신체검사를 통해 절반 이상을 풀어준다는 이야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덩치가 큰 사내 한 명이 소리쳤다.
광장 전체가 감옥인 듯 간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책이 없지 않소? 현재 지하 광장 주위의 통로는 모두 막힌 상황이오. 놈들이 하루 세 번씩 물과 음식을 공급해주고는 있으나, 우리 모두 산공독에 중독되어 그나마 무공이 있는 사람도 거동하기 어렵소. 상황이 이러하니 어찌 놈들을 상대할 수 있겠소?”
“그래도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무림맹 무사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먼저 무림맹 무사 분들이 누군지 스스로 밝혀주십시오. 물론 무림맹 무사 신분이 드러나면 불리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무사 분들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의 사내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옷도 더러웠다. 하지만 먹는 것만큼은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안색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이는 실혼인 제조 과정에서 아무래도 튼튼한 육신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모여 있던 그들이 힘을 모으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한데 그들 중 두 사람은 바로 백소운 등이 애타게 찾던 정기와 막총이 아닌가.
나머지 한 사람은 운송대 쟁자수들을 총괄 지휘하던 소진이었다.
“무림맹 무사 정기라 하오.”
“무림맹 무사 막총이오.”
“중원표국 총쟁자수 소진이라 하오.”
정기 등 세 사람이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밝히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소진이 한쪽에 앉아 있는 청년을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전 운송관님. 이제 신분을 밝히셔도 될 것 같습니다. 운송관님이 저희를 지휘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빛이 바랜 백의를 입은 청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데 그는 바로 운송대 행렬을 이끌었던 운송관 전궁이 아닌가.
그랬다.
그 역시 싸움의 와중에 붙잡힌 것이었다.
당시 실혼인의 실혼강기가 너무 막강해 근처에 있다가 정신을 잃었었다.
나름대로 지휘부에 속하는 그는 그때 이후 침묵을 지키며 때를 기다려 온 것이었다.
전궁이 말했다.
“다들 집중해주십시오. 지난 며칠간 우리는 놈들에게 붙잡혀 악양에서 이곳까지 끌려왔습니다. 내일 최종 선정 작업이 개시된다고 하는 것을 보니, 마침내 운명의 날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바로 실혼인이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우리는 예외 없이 실혼인으로 만들어질 겁니다. 그동안 몇 명이 탈주를 시도하다가 죽음을 맞이했기에, 오히려 인원이 추가되면 추가되지 풀려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이점에 대해 먼저 명확히 아셔야 할 겁니다.”
“옳습니다.”
“뭉쳐야 합니다.”
곳곳에서 찬성 의견이 폭발적으로 나왔다.
전궁이 말을 이어갔다.
“대책을 세우기 위해선 먼저 우리가 처한 상황부터 철저히 파악해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실혼비동이라고 불리는 이곳에 갇혀 있습니다. 이곳 지하광장도 실혼비동의 일부이겠지요. 비동 어딘가에 실혼인 제조시설이 있을 겁니다. 이곳은 기관진식이 무수하게 설치된 곳입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죽음을 맞이한 후 끔찍한 실혼인이 될 겁니다. 둘째,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겁니다. 얼마 후면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마치 돼지를 잡기 전에 살을 찌우려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겠지요. 그때가 아마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가 될 겁니다. 놈들이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제압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사십 대 초반의 한 사내가 일어섰다.
“저는 대의문에서 하인 일을 하던 유석이라고 합니다. 사실 저의 친형님께서도 무림맹 총단에서 일하고 계시지요.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모두 독에 당해 힘을 쓸 수 없는데 어찌 놈들을 상대하시려는지 그 방법이 궁금합니다.”
“아, 혹시 그대가 바로 유덕 형님의 동생분이시오?”
정기가 급히 물었다.
유석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어떻게 제 형님을 아십니까?”
“유덕 형께서는 이번에 무림맹 운송대 행렬에 참여하셨소. 지금은 무림맹 정식 무사가 되셨지요. 유 형님께서 동생분 걱정에 애를 태우셨는데, 다행히 살아있었군요.”
“아, 형님께서 무림맹 무사가 되셨단 말씀입니까?”
유석이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고 매우 기뻐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처와 아들, 딸도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식구입니까?”
“네. 처와 자식들입니다. 저를 포함해 모두 네 명이지요. 어떻게 한 가족이 모두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모두 살아 있어서 다행입니다. 지금은 길게 이야기할 상황이 안 되니 나중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그럴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유석이 현실을 깨달았는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전궁이 말했다.
“조금 전 해주신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우리는 산공독에 당해 내공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건장한 사내들이 대부분입니다. 식사를 가져오는 놈들은 기껏해야 오십여 명뿐이니, 한번 싸워볼 만 할 겁니다.”
“먹을 것을 나눠줄 때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때가 아니면 출구가 금세 닫히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부녀자와 노인은 한쪽에 모이게 하지요.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 측 피해도 막심할 것 같으니까요.”
유석이 상대적으로 노약자가 많은 대의문 소속 하인들을 생각하며 말했다.
한편 소진 역시 찬동했다.
“쟁자수들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 빼고 원래 대부분이 내공이 없던 터라 산공독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다들 힘깨나 쓰기 때문에 대여섯 명이 달라붙으면 한 놈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소진의 말에 사람들이 기대감 어린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모임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전궁의 안색은 오히려 이전보다 어두워졌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살아남는 사람은 불과 몇십 명 정도일 거라는 것을.
그것도 운이 좋았을 경우였다.
그만큼 사사천교 무사들의 무공은 매우 높았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무모한 계획임이 틀림없었다.
‘무공을 잃지 않은 고수가 몇 명만 있어도 좋으련만······.’
전궁이 출구가 있는 석벽 쪽을 바라보는 순간, 석벽이 끼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출구가 열리는 신호였다.
아직 저녁 식사 때가 되지 않았는데 벌써 열리는 것이었다.
“문이 열린다!”
“벌써 먹이려는가?”
사람들이 떠들어댔다.
하지만 아무도 출구 쪽으로 가지 않았다.
이미 겪어봐서 알고 있는 것이다.
출구 앞에 절진이 펼쳐져 있어 함부로 다가가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반면 사사천교 무사들은 이동에 자유로웠다.
아무래도 진의 생로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전궁은 나중에 그들 중 몇 명을 사로잡아 생로를 인도하게 할 계획이었다.
끼이이익.
석벽이 벌어지더니 마침내 동굴 하나가 드러났다.
그리고 무사 백여 명이 세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다.
평소 오십 명 정도의 무사들이 왔었는데, 지금은 배가 된 것이었다.
전궁의 안색이 굳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나중에 식사 때도 저 정도 인원이 오면 도저히 승산이 없다. 앗, 저들은?’
전궁이 끌려온 사람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 잡혀 온 사람들은 바로 유덕, 진하림, 그리고 백소운이었다.
정기와 막총, 유석 등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형님!”
“운아!”
“하림아!”
털썩.
사사천교 무사들이 내동이 치듯 백소운 등을 사람들이 있는 곳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지막 추가자다. 저녁 식사 진행은 한 시진 후다. 푸짐하게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으니, 혹여 딴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고분고분히 우리말에 따르기만 하면 절반은 풀려날 것이다. 아무나 실혼인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겠느냐? 아, 물론 폭동을 일으키는 자는 실혼인으로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반드시 죽이겠다. 그럼 나중에 보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년인이 수하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통로가 닫혔다.
정기와 막총, 유석 세 사람이 백소운 일행에게 달려가 그들을 부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