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72
배 한 척이 장강의 물결을 타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제법 큰 배라 갑판 위에는 백여 명의 사람들이 나와 주위 풍광을 구경하고 있었다.
승객들은 갖가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상인과 무림인이 대다수였다.
한편 갑판 한구석에는 한 청년이 담담히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기도가 매우 차분했다.
한데 그는 바로 백소운이 아닌가.
어제 깨어났던 그가 하루 만에 전격적으로 배를 타고 장사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저와 같이 지나가는구나.’
백소운이 물결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러면서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정신을 차린 후 지난 사흘간의 일들을 들었다.
그 과정에 무림맹을 떠나 자유롭게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재차 피력했었고, 백리영과 자명선생은 흔쾌히 수락했다.
비록 무공을 다시 잃었다고는 하지만 백소운이 언제 다시 무공을 되찾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무엇보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가 보여줬던 무공이 너무나 대단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백소운에 대한 소문은 천하를 강타하고 있었다.
오직 백소운 자신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한편 그가 전격적으로 장사로 가게 된 것은 옥려군과 동정어옹의 부탁 때문이었다.
이틀 전 그들은 장사로 가면서 백소운이 깨어나면 전해달라고 서신을 남겼다.
그 서신 안에는 백소운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임소혜와 괴추노인도 그들을 따라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동했던 백소운은 장사로 가기로 결심했다.
동정어옹 등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명분으로 자연스럽게 무림맹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맑은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오라버니. 무슨 생각을 하세요?”
백소운이 고개를 돌려보니 한 소녀가 그림처럼 서 있었다.
단정하고 깨끗한 백의를 입은 아름다운 소녀.
바로 진하림이었다.
“그냥 강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선실 안에서 좀 쉬지 그랬냐?”
“갑갑해서요. 그나저나 오라버니와 단둘이 이렇게 배를 타고 풍광도 감상하게 되어 너무 좋아요.”
진하림이 미소를 지었다.
백소운 역시 엷은 웃음을 지었다.
진하림이 그와 동행하게 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혼자 떠나려는 그의 수발을 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진하림 역시 전격적으로 하인 신분을 벗어던져 버렸던 것이다.
유덕과 정기, 막총, 그리고 백소운 모두 깜짝 놀랐으나 그녀의 결심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현실적으로도 그녀 역시 십 년 기한을 넘겼기 때문에 백리영이나 자명선생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진하림 역시 무림맹에서 나오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백소운을 따라오게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후회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나와 버리면 나중에 등룡관 시험을 치를 때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 아니냐?”
“그 정도는 각오했어요. 무엇보다 제가 가점을 받을 가능성도 희박한 게 사실이잖아요? 맹의 정식무사 시험을 치르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그것도 오라버니가 맹에 들어갈 때의 이야기예요.”
“날 따라다니겠다는 것이냐?”
“왜요? 그러면 안 되나요?”
“안 될 것은 없지만 사람들이 오해를 할까 봐 그러는 것이지.”
“호호호.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오라버니를 친 오라버니처럼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를 떨쳐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진하림이 활짝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후회막급이었다.
‘내가 왜 마음에 없는 말을 했지? 오라버니가 진짜로 받아들이면 큰일인데······.’
진하림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장사에 무슨 일이 있기에 동정어옹과 옥 소저 등이 급히 간 것이지요?”
“서찰의 내용이 궁금한 것이냐?”
“네.”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지만, 은자림과 관계된 일이라고 알고 있으면 될 것이다.”
“혹시 은자림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요?”
“······.”
백소운이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다.
“피. 알았어요. 더는 묻지 않을게요. 식사나 하러가요. 벌써 점심때가 다 되어 가네요.”
“그렇게 하자. 아까 보니까 선실 안에 국수를 파는 가게가 따로 있더구나.”
“국수도 있고 만두고 있고 없는 게 없어요. 어서 가요. 돈은 아직 많이 남아 있지요?”
“얼마 없다.”
“거짓말. 아가씨께서 주신 돈도 거절하셨잖아요?”
“그랬던가. 역시 하림이를 속일 수는 없구나.”
“당연하죠. 제가 누군데······ 앞으로 당당한 무림여협이 될 진하림이라고요.”
“그래. 인정한다. 가자.”
백소운이 앞장서서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선실 입구에 서른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가게가 있었다.
따로 먹을 것을 준비하지 못하고 배에 탄 승객들을 위한 음식점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작은 공간도 아니었다. 일반 객잔처럼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 빈자리가 없네.”
진하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점원 한 명이 다가왔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마침 저기 두 자리가 비어있군요.”
“고맙소.”
백소운과 진하림이 따라가자, 구석 자리에 두 사람이 식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용모가 출중한 일남일녀였다.
두 사람 모두 검을 차고 있었다.
입고 있는 백의무복도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아무래도 명문정파 제자들 같았다.
아직 하인 시절 습관을 버리지 못한 백소운과 진하림 두 사람이 멈칫한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이내 하인 일을 그만둔 사실을 떠올리고 당당하게 착석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합석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점원의 말에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청년이 고개를 돌려 백소운과 진하림을 쳐다봤다.
“아······.”
백의청년이 탄성을 내며 진하림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물론 미모 때문이었다.
사실 진하림은 이번에 하인 생활을 청산한 후 그동안 입지 않았던 새 옷을 입고 입었다.
당연히 그동안 하인 신분 때문에 일부러 남루한 옷을 입었던 것과 비교가 됐다. 그 미모가 몇 배나 두드러진 것은 물론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직은 서툴지만 약간의 화장도 했다.
그러자 백소운도 놀랄 정도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그동안 여러 사람이 강조한 대로 꾸미고 나니 그 미모가 활짝 피어난 셈이었다.
청년의 옆에 앉아 있던 소녀가 그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오라버니. 그렇게 뚫어지라고 보는 것은 실례예요.”
“아, 내가 실수했구나. 미안하오.”
“아니에요.”
진하림이 싫지는 않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
이를 오해한 걸까.
백의청년이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한자리에 앉은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는 것이 어떻겠소? 소생은 남궁비(南宮毘)라고 하오. 옆에 있는 내 동생은 남궁연(南宮蓮)이라고 하지요.”
“오라버니.”
남궁연이 아미를 조금 찌푸렸다.
자신의 동의도 받지 않고 함부로 이름을 밝힌 것 때문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궁세가주의 두 자식인 이들은 장사에 당도할 때까지 신분을 숨기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한데 남궁비가 약속을 어긴 데다가 그 이유도 진하림의 미모 때문인 것 같아 기분이 상한 것이다.
물론 그녀도 반사적으로 백소운의 얼굴을 보긴 했다.
하지만 겉으로 봐서는 크게 특별난 구석이 없었다.
백소운 역시 미남에 속했으나 절세미남이라고는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무공을 익힌 것 같지도 않아 허리에 찬 검도 그냥 장식용으로 보였다.
한편 진하림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남궁비와 남궁연에 대해서는 그녀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오대세가의 자제들로 후기지수들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어 소문이 자자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남궁비와 남궁연은 각각 강호오룡과 강호오봉 중 한 명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헉, 설마 두 분께서 남궁세가주님의 자제분들인가요?”
“그렇소이다. 두 분께서도 무림인인 것 같은데······.”
남궁비가 진하림에 대한 호감을 보이며 이름과 사문을 말해주길 기다렸다.
백소운이 담담히 대답했다.
“저희는 따로 사문이 없습니다. 백모라고 합니다. 제 동생은 진 씨이지요.”
“아, 백 공자셨군요. 그리고 이분은 진 소저이시고. 만나서 반갑소이다. 하하하.”
남궁비가 소탈하게 웃었다.
성만 밝힌 것이 내심 못마땅했으나, 강호에서는 흔한 일이라 크게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저희도 반갑습니다. 사정이 있어 이름을 가르쳐 드리지 않은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별말씀을. 그래 두 분도 장사에 가는 길입니까?”
“네. 일이 있어서······.”
백소운이 담담히 말했다.
그가 이렇게 신중하게 남궁남매를 대하는 것은 보안 때문이었다.
옥려군과 동정어옹이 함께 쓴 서신의 내용에 따르면 지옥맹으로 추정되는 세력의 공격을 은자림이 받고 있다고 했다.
최근 며칠 동안 은자림 내에서 주요 고수들이 계속 죽어 나가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그래서 아무래도 지옥맹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실혼인처럼 감당하기 힘든 적의 출현을 염려한 동정어옹이 백소운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임소혜와 괴추노인이 따라간 것은 이 기회를 이용해 은자림에 가기 위해서였다.
남궁비가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두 분이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있겠소? 성이 다른데 혹시 연인이오?”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명문정파의 자제답게 음흉한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편 진하림은 좌불안석이었다.
사실 남궁비는 그녀가 오랫동안 동경해오던 남자였다.
천룡공자에 대한 소문도 들었으나 왠지 거부감이 컸고, 그래도 남궁세가의 대공자인 남궁비가 무척 마음에 들었었다.
물론 그 모두가 어린 소녀의 공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름 소중한 추억이었다.
‘소운 오라버니를 만나기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흔들리지 않아.’
진하림이 마음을 안정시킨 후 당당히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이제 시작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연인 사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진하림이 말을 하며 살짝 백소운을 쳐다봤다.
다행히 백소운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인연이란 수시로 바뀌는 법이지요.”
남궁비가 여전히 강렬한 시선으로 진하림을 쳐다봤다.
동시에 백소운을 쳐다봤는데 아까보다 눈빛이 싸늘했다.
‘배에서 내리기 전에 한 번 망신을 톡톡히 줘야겠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진 소저가 내게 마음을 돌리겠지. 생전 처음으로 첫눈에 반한 여자가 나타났는데, 이런 별 볼 일 없는 녀석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지.’
남궁비가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남궁연이 심심한지 입을 열었다.
“악양에서 배를 타신 건가요?”
“네.”
진하림이 오랜만에 대답했다.
이제 그녀도 진정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인 출신인 그녀가 언제 오대세가 자제들과 이렇게 담소를 나눌 수 있겠는가.
“그럼 이번에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든 신진영웅 백소운 대협을 보셨나요?”
“네?”
진하림이 깜짝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백소운을 쳐다봤다.
백소운이 급히 말했다.
“저희도 소문만 들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와 성이 같아서 관심이 가더군요. 하지만 백소운 그분은 무림맹 하인이라고 하던데, 대협 칭호는 과한 게 아닌가요?”
“무슨 소린가요? 그분이 대협이 아니면 누가 대협이란 말인가요? 무림에서 출신이 무슨 소용이에요? 저는 중요한 시기에 사라진 무명객님보다 백소운 그분을 진정한 대협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조금 전에 들었는데 이미 그분은 하인 신분에서 벗어났다고 들었어요. 그야말로 영웅이 강호에 정식으로 출도를 한 셈이지요. 저희가 중요한 일만 없었다면 악양에서 내려 그분을 꼭 뵙고 갔을 텐데, 그게 너무 아쉬워요.”
남궁연이 나무라듯 백소운을 쳐다봤다.
백소운으로서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백소운 그분에 대한 소문이 많이 퍼졌습니까?”
“물론이에요. 벌써 사나흘이 지났으니 무림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거예요. 특히 공포의 실혼인들을 혼자서 제거한 백 대협의 경우라면 그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거예요.”
“그렇군요. 하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무리를 해 공력을 상실했다고 하던데······.”
“호호호! 바보 같은 질문만 하는군요. 백 대협께서는 신과 같은 무공을 펼쳐 보이셨어요. 그런 분은 원래 자신의 실력을 숨기려 하시지요. 그렇게 해야 적들의 방심을 유도할 수 있으니까요. 대화가 안 되는 것 같으니 저는 이만 일어나겠어요. 갑판에 나가 바람이나 쐬어야겠어요.”
남궁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갑판으로 올라갔다.
남궁비가 말했다.
“하하하. 이해들 하시오. 남자를 돌 같이 보던 저 녀석이 백소운 대협 이야기를 듣고 상사병에 걸려서 저런다오. 언제 나도 한번 만나 뵙고 한 수라도 배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제24장] 천룡백수(天龍百秀) 4“아, 그렇습니까? 어디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백 대협께서는 여복도 많군요. 저런 미인의 관심을 받게 되었으니······.”
백소운이 짐짓 농담조로 이야기하자, 옆에 있던 진하림이 눈을 흘겼다.
하지만 그녀 역시 제멋대로 백소운과 연인관계라 말했기에 당당하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얼른 시선을 바로 했다.
백소운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하림아. 네가 남궁 공자의 지나친 관심을 우려해 일부러 나와 연인 사이라고 말한 점을 다 알고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오라버니가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진하림이 전음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전음입밀의 수법을 알고 있었다면 얼른 고맙다고 전음을 보냈을 것이었다.
그때 점원이 국수 두 그릇과 만두 두 접시를 가져왔다.
바로 백소운과 진하림이 시킨 것이었다.
남궁비 역시 남은 음식을 천천히 들며 이야기를 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최근 몇 달간 벌어진 강호의 일들이었다.
그 대부분은 공교롭게도 백소운이 겪었던 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람을 쐬러 갑판 위로 갔던 남궁연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백소운과 진하림, 남궁비의 식사도 끝이 났다.
남궁비가 미리 주문한 술이 담긴 술병을 들며 말했다.
“두 분을 만나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소. 장사에 도착하려면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할 것이니 술이나 한잔합시다.”
“좋습니다.”
백소운이 술잔을 들었다.
남궁비가 술을 따라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남궁연이 눈을 빛냈다.
남궁비가 살짝 내공을 일으켜 술병에 담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가 미색에 빠져 저 사람을 망신주려 하는구나.’
남궁연이 갈등했다.
백소운을 도울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있을 것인가의 선택이었다.
이렇게 갈등하는 이유는 아까 전의 말과 달리 백소운이 그렇게 밉지 않기 때문이었다.
특히 담담하면서도 어딘가 초연한 듯한 기운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아니야. 혹시 고수일지도 모르니 좀 더 지켜보자.’
남궁연이 도움을 주려는 것을 멈췄다.
그때 남궁비가 따라준 술이 술잔에 들어갔다.
술잔을 들고 있는 사람은 백소운.
한데 문제는 남궁비가 술에 내공을 담아 매우 무겁게 만든 것이었다.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술잔을 놓칠 것으로 확신하는 남궁비였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백소운은 아무 이상 없이 술을 받아 마셨다.
남궁비의 안색이 굳어졌다.
‘한 가닥 하는 놈이구나. 괜히 검을 차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군. 하지만 애송이에 불과해.’
남궁비가 백소운을 잠시 노려봤다.
백소운이 무심히 눈을 마주쳤다.
“하하하.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 백 공자의 내공이 이렇게 심후할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허락도 없이 내공을 시험한 점을 사과하겠소이다.”
“별말씀을. 하마터면 술잔을 놓칠 뻔했습니다. 더 이상의 시험은 사양하겠습니다. 강호오룡 중 한 분인 남궁 공자께서 전력을 다하신다면 제가 어찌 버틸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겸손하시구려. 진 소저가 백 공자와 사귀는 이유가 있었구려. 하지만 본 공자는 백 공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좀 더 알고 싶소이다.”
“무슨 말씀인지?”
백소운이 의아해하자, 남궁비가 우수를 내밀었다.
“손바닥을 서로 부딪쳐 조금이라도 뒤로 더 물러나는 사람이 지는 것이오. 물론 앉은 채로 말이오.”
“오라버니! 처음 보는 분께 너무 실례가 아닌가요? 오라버니답지 않게 왜 이러세요?”
남궁연이 남궁비를 나무랐다.
하지만 남궁비의 승부욕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조금 전 백소운이 자신이 따른 술을 아무렇지 않게 먹는 것을 보고 자존심이 크게 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력을 기울여서라도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백소운이 담담히 말했다.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진 것으로 하겠습니다.”
“뭣이?”
남궁비가 분노하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오라버니!”
남궁연이 다시 한번 저지를 했으나, 남궁비는 막무가내였다.
진하림 때문이라도 어떻게든 백소운 보다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슈우욱.
남궁비의 우수가 빠르게 백소운의 가슴 쪽으로 나아갔다.
물론 살기는 없었다.
다만 백소운의 몸에 닿게 하여 자신의 진짜 실력을 보여줄 의도였다.
그때였다.
한 줄기 경력이 조금 떨어진 탁자에서 날아와 남궁비가 날린 장력을 막아냈다.
파앙.
“으윽!”
남궁비가 충격을 받고 의자에 앉은 채 뒤로 쭈르르 밀려났다.
“네놈이 남궁세가 이름에 먹칠을 하는구나. 고얀 놈.”
남궁비와 남궁연이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쳐다보니, 죽립을 쓴 한 중년인이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중년인이 죽립을 천천히 벗었다.
사십 대로 보이는 얼굴이 드러났다.
“숙부님!”
남궁비와 남궁연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년인, 즉 남궁통(南宮通)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비야. 저 청년에게 어서 사과부터 해라.”
“알겠습니다.”
남궁비가 안색을 굳히며 백소운에게 고개를 숙였다.
“백 공자. 내가 심했소. 용서해 주시오.”
“괜찮습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백소운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남궁통을 향해 포권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남궁세가가 배출한 일대고수인 벽력검협(霹靂劍俠) 남궁통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소운의 말에 가게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남궁통을 쳐다봤다.
“저분이 바로 벽력검협이시구나.”
“대단한 고수라고 들었는데······.”
특히 병장기를 찬 무림인 십여 명의 놀라움이 컸다.
“그럼 저 젊은이들이 남궁세가주의 자식들이겠군.”
“남궁 공자가 조금 과했군.”
사람들이 쑥덕거렸다.
남궁통은 그들의 말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의자를 끌고 와 백소운 등이 있는 탁자로 왔다.
“비야. 앉아라.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는데 영 실망이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해라.”
“네. 숙부님.”
남궁비가 정신이 바짝 든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숙부님. 어떻게 된 건가요?”
남궁연이 놀란 표정을 아직 버리지 못한 채 물었다.
그 모습은 다소 냉랭했던 첫 인상과 달리 매우 귀여워 보였다.
남궁통 역시 평소 좋아하던 조카라 안색을 풀었다.
“하하하. 어떻게 되기는? 너희와 마찬가지로 그곳에 가는 중이지. 조부님을 뵙게 될 기회를 놓칠 수가 없지.”
남궁통의 말에 백소운과 진하림이 의아해했다.
남궁통의 조부라면 남궁남매에게는 증조부가 되기 때문이었다.
백소운은 전에 읽었던 강호인명록을 떠올렸다.
“남궁 대협의 조부시라면 혹시 제왕검신(帝王劍神) 그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하네. 젊은 나이에 아는 게 많군. 조부님에 대해 또 무엇을 아는가?”
“제왕검신 남궁백(南宮白) 대협께서는 무림십대고수 중 한 분으로, 남궁세가의 최고 검술인 제왕검형(帝王劍形)을 완성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종적을 감춘 것으로 알려졌는데, 살아계셨던 겁니까?”
“물론이네. 아직 정정하시지.”
남궁통이 말한 그때 진하림이 궁금한 듯 물었다.
“혹시 은자림에 계신 건가요?”
“으음······.”
남궁통이 흠칫하며 안색을 굳혔다.
“그건 나도 모르네.”
남궁통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백소운이 진하림에게 눈짓으로 주의를 준 것은 물론이었다.
그때였다.
갑판 위에서 사람들이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수적이다!”
“장강수로채 수적이다!”
순간,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갑판 위로 올라갔다.
수적들이 공격해온다면 목숨이 위험하기 때문에 일단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올라가 보지요!”
남궁비가 가장 먼저 뛰어 올라갔다.
조금 전의 무안함을 만회하려는 듯 벌써 검을 뽑고 있는 그였다.
남궁통과 남궁연, 백소운, 진하림 네 사람도 그 뒤를 따랐다.
* * *
갑판 위로 올라온 백소운, 남궁통 등은 먼저 배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배 한 척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군함처럼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쾌속선이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 것은 바로 돛대 위에 달린 깃발이었다.
해골 무덤이 그려져 있는 그 깃발은 바로 수적들의 표시였다.
“용왕채(龍王寨) 놈들입니다!”
남궁비가 남궁통에게 급히 보고했다.
일전에 오대세가 자제들끼리 모여 수적들을 소탕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상대했던 수채 중 한 곳이 바로 용왕채였다.
장강수로십팔채 중 한 곳인 용왕채는 소속 수적들이 악랄하기로 유명했다.
재물을 빼앗은 후 남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 역시 몸을 더럽힌 후 죽여 물에 던지는 게 그들의 오랜 관행이었다.
그 때문일까.
용왕채라는 말에 사람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게다가 지금 다가오고 있는 배는 용왕채주가 타고 있는 지휘선이었다.
“아이고. 이를 어째? 다 죽었다.”
“흑흑!”
벌써부터 우는 사람도 여럿 보이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무림인들이 나서게 되었다.
물론 남궁세가 무인들이 중심에 서게 된 것은 당연했다.
“모두들 진정하십시오! 우리는 남궁세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을 지켜드릴 겁니다.”
남궁비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반색하며 몰려들었다.
이제 놈들의 배가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각은 일각 정도.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남궁통이 말했다.
“남궁통이라 하오. 노약자와 부녀자들은 모두 선실 안으로 들어가시오. 무림인들은 각자 병장기를 들고 대기하시오. 적선이 다가오면 놈들의 우두머리를 잡아 물러가게 하는 것이 최선일 듯싶소.”
“벽력검협이시다!”
“남궁세가주의 동생분!”
남궁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승객들이 조금 진정이 되었다.
한편 백소운은 수적들의 배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배 위에는 수적들로 가득했다.
그 수는 어림잡아 오백은 되어 보였다.
반면 이쪽 배에 있는 무림인들은 이십여 명 정도.
물론 남궁통 같은 고수가 있긴 했으나 중과부적인 것은 틀림없었다.
‘이상하다. 단순히 노략질하기 위한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병력이다. 그것도 지휘선이 직접 출동하다니.’
백소운이 의아해할 때.
남궁연 역시 같은 점을 느꼈는지 급히 말했다.
“놈들이 노리는 것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나도 같은 생각이다.”
남궁통이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노약자와 부녀자들은 모두 선실 안으로 들어가고 남은 사람들은 무사 이십여 명뿐이었다.
“지켜보면 알겠지.”
남궁통이 검을 빼 들고 수적들의 배를 쳐다봤다.
그때였다.
지휘선에서 작은 배 한 척이 내려지더니 빠르게 다가왔다.
배 위에는 십여 명의 수적들이 타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크게 소리쳤다.
“우리는 용왕채 영웅들이다! 네놈들 중에 장보도를 들고 있는 자가 있다는 첩보를 듣고 왔다. 장보도만 내놓으면 물러갈 것이니 어서 내놓아라.”
“무슨 장보도 말이냐?”
남궁비가 내공을 실어 소리쳤다.
수적들이 흠칫하며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나는 남궁비라고 한다. 여기 계시는 분은 숙부님 되는 벽력검협 남궁통 대협이시지.”
“으음, 남궁세가 놈들이 타고 있었군.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본채 역시 사도맹 소속으로 무림맹 놈들을 두려워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니까 잔말 말고 장보도를 내놓아라. 안 그러면 모두 죽이겠다.”
“무슨 장보도인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하하하. 아직 그것도 모르느냐? 무림맹 초대맹주가 남긴 무상비급(無上秘笈)이 숨겨진 장소가 수록된 무상장보도(無上藏寶圖)다. 하기야 소문이 퍼진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물 위에 있던 네놈들이 알 리가 없지.”
“무상비급?”
남궁비, 남궁통 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상비급은 고금제일인이라는 무림맹 초대맹주의 무공이 담겨 있는 비급으로,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었다.
한데 그 비급이 있는 장소가 적혀 있는 장보도가 나타났다니 놀랄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수적들에게 당해 수중고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배 위에는 무상장보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 뭔가 잘못 알고 온 것 같은데, 썩 물러가라.”
“후후후! 그건 수색해보면 알겠지. 좀 더 기다려라. 채주님께 보고를 하고 오겠다.”
수적들이 다시 본선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남궁통을 의식한 것 같았다.
“큰일이군. 놈들의 배에서 풍기는 기도가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수적 놈들 외에도 다른 고수들이 타고 있는 것 같다.”
남궁통이 안색을 굳혔다.
백소운 역시 신중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무상장보도가 나타나다니, 심상치가 않군. 그나저나 한바탕 싸움이 불가피할 것 같구나.’
백소운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적들의 지휘선이 천천히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