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8
백소운의 무공점검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공간의 협소성 등을 이유로 실제 무공을 펼쳐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떠올려보는 정도였다.
하지만 마치 환상진법 안에 들어온 것처럼 무공의 위력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쏴아아.
지금 그가 마음으로 펼치고 있는 것은 바로 장법이었다.
금단장(金丹掌).
총 팔 단계로 이우러진 이 장법은 단계가 올라갈수록 그 위력이 배가 되는 특징이 있었다.
백소운이 지금 펼치고 있는 것은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금단팔장이었다.
콰콰쾅.
금빛 환상세계 속에 드러나 있던 작은 야산 하나가 그대로 가루로 변해버렸다.
실로 가공할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으음, 너무 강해 실제 팔 단계로 펼치면 주위 백장 이내 모든 것이 초토화 될 수 있다. 함부로 펼칠 것이 아니구나.’
백소운이 기를 갈무리하며 생각했다.
그리고 어젯밤 마음먹은 대로 새로운 무공의 창안을 시도하려 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서두를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완전히 연마했다고 생각했던 금단비서의 무공들도 조금씩 보완할 게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힘 조절 같은 경우였다.
극상승으로 펼칠 때 공격 범위를 최소화한다든지 하는 것이 꼭 필요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었지. 옛것을 토대로 새것을 창안하는 것이 중요할 듯하구나. 그런 의미에서 다른 일반무공도 배워두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될 듯하다. 사실 내가 익힌 금단비서 상의 무공은 일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지.’
백소운이 생각을 정리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방법으로 익힌 무공들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두 번의 실전경험이 있었다. 그 상대는 놀랍게도 마교주와 무림맹주였다.
백소운이 다시 한번 그들에 대해 생각했다.
‘두 사람의 무공은 현 강호에서 가히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 만일 내게 어떤 안배가 있어 장차 상대해야 할 적이 있다면, 두 사람보다 무공이 높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 아닐까. 그런 고수가 당금 강호에 없다면 혹시······.’
백소운은 창밖을 통해 조금씩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어릴 적부터 그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강호와 똑같은 강호가 다른 곳에 있다는 상상이었다.
미래의 평행세계관(平行世界觀)과 유사했다. 그럼 면에서 그가 생각하는 다른 강호는 평행강호(平行江湖)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 내가 천룡궁에 가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과연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저씨들처럼 무림맹 무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내게 전혀 없지 않은가.’
백소운이 안색을 굳혔다.
천무성자란 사람의 안배로 자신이 금단비서를 익히게 된 것까지는 좋았다.
상승무공을 연마하면서 큰 희열을 맛본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수많은 책을 보면서 지식도 얻었다.
하지만 최근 심경의 변화가 있는 그였다.
주체적인 삶에 대한 욕구.
그래서 아직 명확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천무성자의 유체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찾아갔던 것이었다.
하지만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그 와중에 검마왕과의 싸움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젯밤 그가 구해낸 소마녀까지.
‘그래. 어차피 다시 그녀를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검마왕의 진짜 사인 역시 구태여 다시 알아봐야 무엇 하겠는가. 모두가 부질없는 집착인 것을······ 어제 결심한 대로 무공 연마에만 몰두하자.’
날이 밝아옴에 따라 현실을 깨달은 걸까.
백소운은 자신이 잠시 소마녀의 미색에 흔들렸던 것을 깨끗이 인정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지웠다. 아니 지우려 노력했다.
‘은원과 정이 중첩되면 끝이 없다고 하더니, 벌써 이런 일에 휘말리다니······.’
백소운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려는 시각이었다.
내일이면 천룡궁으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았다.
* * *
총단 내 공동식당은 항상 붐빈다.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들어간 백소운은 하인들이 사용하는 장소로 향했다.
공동식당은 수백 개가 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식무사들과 하인들이 사용하는 식당도 당연히 나누어져 있었다.
지휘부 인물들이 사용하는 특별 식당도 존재했다. 하지만 조장급 이상의 무인들만 출입이 가능했다.
당주나 장로급 고수들은 시비들이 일일이 집무실로 식사를 날라주기 때문에, 실제로 특별 식당을 사용하는 무인들은 대부분 젊은 고수들이었다.
백소운은 아예 정문을 사용하지 않고 하인들이 출입하는 후문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허름하지만 매우 넓은 식당 한 칸이 보였다.
바로 수백 명의 하인이 늘 모여 식사하는 곳이었다.
“운아. 여기다.”
미리 약속이 된 구석진 장소에 정기와 유덕, 막총 세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진하림을 제외하고 백소운이 가장 늦게 온 것이었다.
이제 이곳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진하림이 오면 함께 모여 호법당 연무장으로 가면 되었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백소운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이들은 어제저녁 백리영을 직접 만나서 약조를 받은 이후로 활력이 넘쳐 있었다.
그때였다.
진하림이 쟁반 가득 음식을 담고 나타났다.
원래는 줄을 서서 자율배식을 해야 하는데 특별히 직접 가져온 것이었다.
“다들 모이셨네요. 어서 식사하세요.”
“그래. 하림이 너도 앉아서 먹어라.”
“네. 저도 마지막 점검을 받으러 호법당에 가야 하니까. 헤헤.”
진하림이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백소운 역시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 새벽 마지막으로 몇 명에게 의사를 타진했었네. 하지만 함께 출발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네. 아무리 아가씨께서 다시 약속을 하셨다 해도 확신이 없는 것 같았네.”
유덕의 말에 정기 등이 안색을 굳혔다.
유덕이 어제 방으로 돌아가면서 하심무인 중 몇 명에게 다시 물어보겠다고 했던 것이다.
한데 마음을 바꾼 사람이 전혀 없었던 모양이었다.
“형님. 이제 다른 사람은 생각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어찌 보면 모험보다 안전을 택한 게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으니까요. 문제는 하림이 이 녀석입니다. 운이는 전혀 가망이 없지만 하림이는 운만 좋으면 일차 정도는 합격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신경을 좀 써주는 게 어떨까요?”
정기의 말에 유덕과 막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백리영도 언급했지만 진하림의 자질은 매우 뛰어났다.
조금만 지도를 해준다면 일차 합격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맞는 말이네. 하림이는 내가 틈틈이 지도해주기로 하지. 우리 예상대로 된다면 내가 가장 여유가 있는 상황이니까.”
유덕의 말에 진하림이 매우 기뻐했다.
“감사해요. 아저씨.”
“허허. 녀석. 내가 무슨 고수라도 된 것 같구나. 내가 보기에 하림이 너는 부족한 게 내공인 듯하다. 육합검법의 초식은 상당히 정교하게 익혔으나 내공이 너무 미약해. 그 부분만 좀 더 보완하면 좋을 것이다.”
“네.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내공이란 게 뭐 하루아침에 쌓아지나요? 아저씨들은 그래도 십 년 이상씩은 다 가지고 계시잖아요?”
“으음, 육합심법으로 쌓을 수 있는 내공은 이십 년이 한계다. 그다음부터는 내공의 정순도가 좌우하지. 그리고 이건 말하기 좀 그렇지만 우리가 익힌 내공은 엄밀히 말하면 내공도 아니다. 그냥 기가 조금 뭉쳐진 것뿐이지. 제대로 된 내공심법이 아니라서 강호에서 인정해주지도 않지.”
유덕이 안색을 굳혔다.
하심무인들이 익힌 육합심법(六合心法)과 육합보(六合步), 육합권(六合拳), 육합장(六合掌), 육합검법(六合劍法) 등은 강호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하심수련동에 비치된 육합비급엔 그 주석이 조금 자세히 적혀 있는 점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얼마 후 식사를 마칠 무렵.
식녀 한 명이 황급히 백소운 일행이 앉아 있는 탁자로 왔다.
“하림 언니. 큰일 났어요. 언니 집에서 연락이 왔는데 어머님께서 위독하시데요.”
“뭐라고?”
진하림이 매우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이 충격을 크게 받은 것 같았다.
“그, 그럴 리가 없어. 엄마가 얼마나 건강하셨는데······.”
진하림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금방(黃金幇) 놈들이 들이닥쳐 또 빚 갚으라고 했나 봐요. 어머님께서 돈이 없다고 하시니까 놈들이 그럼 총단으로 직접 받으러 간다 해서, 이를 말리느라 넘어져 머리를 다치셨다고······.”
“아······ 소식을 전한 분은 지금 어디에 있지?”
“이웃 사람 같은데 말만 전하고 가셨어요. 사실 이 내용도 경비무사님 한 분이 대신 전해주신 거예요. 어서 집으로 가보세요.”
“알았어. 고마워.”
진하림이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곧바로 집으로 가기 전에 유덕에게 말했다.
“아저씨. 호법당에는 저 대신 잘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아마도 전 내일 함께 가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럼.”
진하림이 고개를 숙인 후 식당 밖으로 나가려 했다.
정기가 말했다.
“잠깐. 혼자 가는 것은 좀 그렇구나. 형님하고 막총 이 친구, 그리고 나는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운이를 데리고 가거라. 운이 넌 우리 힘이 필요하면 꼭 와서 연락을 해라. 알겠느냐?”
“네. 아저씨.”
백소운이 고개를 숙인 후 진하림과 함께 식당에서 나왔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대문 옆에 나 있는 소문이었다. 하인들이 필요한 물품을 사러 밖으로 나갈 때 이용하는 출입구였다.
물론 그곳에도 경비무사들은 있었다. 하지만 간단한 신분패만 보여주면 쉽게 통과를 시켜주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 *
진하림의 집은 총단에서 조금 떨어진 고지대 빈민가에 있었다.
산비탈에 아무렇게나 지은 초가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녀의 집은 그중 가장 구석에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초가라도 그녀에게는 소중한 집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남동생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하림의 어머니 최씨는 바느질이나 동네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다달이 진하림이 돈을 보내줘서 먹고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십일 년 전의 일을 생각하면 진하림도 최씨도 억장이 무너졌다.
최씨의 남편이 황금방에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해 당시 일곱 살이었던 진하림이 기녀로 팔려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운인지 무림맹 장로 한 사람의 눈에 띄어 기녀가 되는 것을 면했다. 이후 그것이 인연이 되어 총단 하녀로 일하게 된 것이었다.
문제는 그 와중에 진하림의 부친이 황금방에 따지러 갔다가 사망한 일이었다.
그 세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은 그녀였다.
“다 왔어요.”
진하림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싸리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섰다.
백소운은 그저 담담히 뒤따를 뿐이었다.
진하림이 최대한 빠르게 뛰어왔고, 그는 그런 그녀를 바로 뒤에서 따라왔었다. 그런데도 호흡이 전혀 흩트려지지 않았다.
보통 때라면 의아해할 만도 했다. 하지만 지금 진하림은 정신이 없어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덜컹.
방문을 열자, 누워있는 중년 여인 옆에 앉아 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누나!”
소년 진호(眞胡)가 진하림을 보고 소리쳤다.
“엄마는?”
진하림이 급히 물었다.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으셨어.”
총명하게 생긴 진호가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
진하림이 최씨를 흔들었으나 깨어나지 않았다.
“의원은 데려왔어?”
“가망이 없다고 돌아갔어. 옆집 아저씨가 데리고 왔었는데······.”
“아. 날 부른 것도 장 아저씨였구나.”
진하림이 탄식했다.
옆집에서 사는 장씨 사내는 선친과 친구 사이였다.
지금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 역시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