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85
천룡장원.
천룡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곳은 천룡궁주 종리붕의 안가(安家) 중 한곳이었다.
궁주 외에는 누구도 출입이 엄금되어 있는 이곳에 한밤중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바로 총군사 무심선생이었다.
“부인은 안에 계신가?”
“네. 총군사님. 한데 지금 짐을 다 싸놓고 궁주님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곳을 떠날 결심을 굳힌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궁주님 명을 전달하러 왔으니 어서 안내하게.”
“네.”
경계무사가 무심선생을 장원 안채로 데려갔다.
안채에는 기화이초가 심어진 정원이 있었다. 그 정원을 지나니 아담하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한 채의 전각이 나타났다.
무심선생이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 벌써 한 중년여인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십 대로 보이는 그녀는 실로 놀라운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사 모든 일에 달관한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무심선생을 보게 되자, 중년여인 즉 천룡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총군사께서 오셨군요.”
맑은 음성이었다.
지난 일 년간의 기억밖에 못 하고 있는 사람치고는 매우 침착한 어조였다.
“천룡부인을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네. 그래 궁주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제가 떠나는 것을 허락하셨나요?”
“하하하. 뭘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궁주께서 부인을 그동안 각별하게 대하셨는데, 그 은혜를 잊으신 겁니까?”
“일 년 전 절 구해주신 점은 잊지 않고 있어요. 언젠가 그 보답을 할 거예요. 하지만 약속한 일 년이 모두 지났어요. 궁주님께서는 일 년간 제 마음을 얻어 보겠다고 하셨지만, 제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이제 그 약속 기한이 지나 떠나려는 것뿐이에요. 궁주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건가요?”
“그게 아니라 내일 직접 부인을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궁으로 모셔가기 위해 제가 직접 왔습니다.”
“사양하겠어요. 궁주께서 바쁘신 모양인데, 저로서도 예의를 다했으니 이만 떠나도록 하겠어요.”
“지난 기억을 아직 찾지 못하셨는데, 왜 그렇게 서두르시는 겁니까? 특별히 가실 데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이대로 이곳에 있다가는 영원히 제가 누군지 알 수 없을 것 같아 떠나려는 거예요. 밖에서 돌아다니면 저를 알아볼 사람이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러니 저를 막지 말아 주세요.”
“그건 안 됩니다. 궁주께서 반드시 부인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내일 중요한 행사가 예정되어 있는지라 부인께서 없으시면 안 됩니다.”
“무슨 행사지요?”
“그것은 궁에 도착한 후 궁주께서 직접 말씀드릴 겁니다. 내일은 손님들도 많이 오기 때문에 예의에 벗어난 일은 강요하지 않을 겁니다.”
무심선생이 말을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일 특수 미혼약을 조금 먹이면 정신이 몽롱해질 것이고, 깨어났을 때는 이미 혼사를 치른 후일 것이다.’
천룡부인이 말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따라갈 수는 없어요.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떠나겠어요.”
천룡부인이 옆에 놔둔 보따리를 들었다.
보따리 안에는 간단한 옷가지 정도뿐이었다.
그동안 종리붕이 환심을 사기 위해 수많은 보석을 선물했지만, 그 보석들은 모두 방에 남겨두었다.
“부인! 왜 이러십니까? 자꾸 이러시면 강제로 모셔갈 수밖에 없습니다.”
무심선생이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부터 천룡부인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은 그였다.
일 년 전 외유를 나갔던 종리붕이 길가에 쓰러져 있는 천룡부인을 발견해 데려왔을 때부터 예감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종리붕은 그녀의 매력에 빠진 후였다.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그녀를 위해 천룡부인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그런 애정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천룡부인은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위엄 같은 것이 있었다.
종리붕이 함부로 그녀를 대하지 못한 것도 그 이유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점이 더 종리붕의 애를 태웠다.
그 때문에 평소 그의 성격과는 딴판으로 극진히 천룡부인을 대접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약속 기한이 끝나자마자 천룡부인이 떠나려 하자, 강제 혼례를 치르려는 그였다.
“절 강제로 데려가려는 것으로 보아 뭔가 노림수가 있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궁주께 매우 실망이에요. 돌아가시거든 그렇게 전해주세요.”
천룡부인이 응접실에서 나가려 했다.
무심선생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풍을 날렸다.
휙.
혈도만 찍기 위해 제한된 경력이 담긴 지풍이 천룡부인의 어깨를 향해 날아갔다.
무공을 모르는 것으로 알려진 천룡부인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천룡부인이 신형을 비틀어 손쉽게 지풍을 피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무공 또한 장로 수준으로 높은 무심선생이 깜짝 놀랐다.
“무공을 알고 계셨군요.”
“그래요. 덕분에 지난 일 년간 기본적인 무공들을 회복할 수 있었어요. 사실 그 때문에 그동안 장원에 머물렀지요.”
“그럼 기억은?”
“기억은 아직 아니에요. 하지만 무공을 통해 제가 누군지 알아낼 생각이에요. 그러니 더 이상 막지 말아주세요.”
천룡부인이 다시 밖으로 나가려 했다.
무심선생이 벼락 같이 손을 내밀어 금나수법을 펼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지금 천룡부인을 놓치게 되면 종리붕의 질책을 받을 게 분명해 최대한의 공력을 사용한 한 수였다.
하지만 천룡부인은 서두르지 않았다.
미끄러지듯이 뒤로 물러나 무심선생의 손을 피했다.
“무공이 상당하군요.”
무심선생이 매우 놀라며 이번에는 일장을 날렸다.
충격을 줘서라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천룡부인이 피하지 않고 장력으로 맞받아쳤다.
꽈앙.
전각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무심선생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음······.”
놀랍게도 무심선생이 밀려 가벼운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하루 정도 운공을 하면 완쾌될 거예요. 죄송해요.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천룡부인이 고개를 한번 숙인 후 응접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무심선생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무리하면 내상이 깊어져 주화입마에 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천룡장원 안에 있던 경계무사 이십여 명이 들어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부인이 도주하려 한다. 생포해라. 무공이 무척 강하니 합공해야 할 것이다.”
무심선생이 소리쳤다.
천룡부인이 무심히 말했다.
“싸우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저를 막으면 출수하겠어요.”
“모두 부인을 제압하라.”
경계무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천룡부인으로서는 위기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경계무사들까지 공격하고 싶지 않은 그녀였다.
지난 일 년간 자신을 극진히 대우해준 무사들이기 때문이었다.
휙.
천룡부인이 신형을 위로 솟구쳤다.
십장 정도 올라간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경공을 펼쳐 단숨에 장원 담벼락까지 날아갔다.
바로 그때였다.
기세 좋게 장원 밖으로 날아가려던 천룡부인이 한 차례 몸을 떤 후 장원 마당에 떨어졌다.
쿵.
“으윽.”
천룡부인이 신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혼혈을 찍혔기 때문이었다.
무심선생이 무사들과 함께 급히 천룡부인에게 다가왔다.
그때 유령과도 같이 흐릿한 인영 하나가 먼저 천룡부인을 등에 업었다.
“그대는 뉘시오?”
무심선생이 급히 물었다.
어투가 공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도주하려던 천룡부인을 제압해 준 장본인이 바로 새롭게 나타난 흑의 노인이었다.
“본인은 지옥맹 사자로 온 극마도인(極魔道人)이라 하오.”
“아, 그럼 혹시 이번에 궁주님께 동맹을 제의하신 분이오?”
“그렇소. 빈도는 본맹의 장로로 맹주님의 동맹제의를 전하기 위해 왔었소. 한데 궁주께서 확답을 미루고 계시는군요. 늦어도 내일까지는 가부를 들어야 하니 선생께서 힘을 써 주시오.”
“으음, 그 문제라면 좀 더 숙고할 시간을 주시오. 궁주께서는 여러 가지 생각할 부분이 많아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말씀하셨소이다. 한데 어떻게 이곳에 온 것이오? 혹시 천룡부인을 알고 계시오?”
“하하하. 아직 천룡부인이라는 이 여인의 정체를 모르고 계셨소? 내 오늘 밤 군사를 만나러 나왔다가 비밀리에 궁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뒤따라왔었소. 한데 이 여인을 보고 깜짝 놀랐소이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기 때문이었소.”
“천룡부인의 정체가 무엇이오?”
“그것은 궁주께 직접 말씀드리겠소. 그리고 본맹과 동맹을 맺어야 이 천룡부인을 넘겨드릴 수 있다는 것도 미리 밝혀두는 바이오.”
“천룡부인은 본궁의 손님이오. 그리고 궁주께서 아끼는 분이오. 내일이면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궁주님의 부인이 될 분이기도 하오.”
“첩으로 말이오?”
“정실이 될 수도 있소. 정부인 자리가 비어 있으니까. 부인을 인질로 삼아 협상하려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오.”
“하하하. 정말 천룡부인의 정체에 대해 모르시고 계시구려. 정체를 알고 난 후에도 궁주께서 마음이 변치 않을지가 매우 궁금하오. 어서 궁주께 갑시다.”
극마도인이 여전히 천룡부인을 등에 업은 채 천룡궁으로 향했다.
무심선생은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차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대체 천룡부인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저러는 것일까. 단순히 궁주님을 압박하기 위해 부인을 데리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 * *
스스슷.
마치 유령과도 같은 신형 하나가 천룡각 맨 꼭대기에 내려섰다.
때는 삼경이 넘은 야심한 시각.
한 시진 전부터 천룡궁 구석구석을 수색한 그는 바로 백소운이었다.
연회장에서 객청으로 돌아온 후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드디어 천마대부인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은잠술을 통해 각 전각의 비밀스러운 곳을 거의 모두 탐지했으나 흔적이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천마대부인이 있다고 추측한 그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을까. 하기야 따지고 보면 나하고 별 상관이 없는 일이지 않은가.’
백소운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쳐다봤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임소혜, 그리고 천마대부인의 일에 너무 집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때문인지 원래 계획과 달리 무림의 일에도 너무 깊이 개입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애초 무림맹에서 나올 때부터 자신의 신세내력을 알아내기 위해 천무산에 가보려던 계획이 어느 사이 흐지부지되고 있었다.
‘그래, 지옥맹에 대한 연합세력 구축은 굳이 내가 앞장설 일은 아니었다. 내가 없어도 그 일은 백리 소저를 비롯해 무림맹 분들이 알아서 잘할 것이다. 무엇보다 임 소저 일에 너무 깊이 관여하는 것은 무림맹 분들에게 뜻하지 않은 오해를 살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하림이나 세분 아저씨들에게도 피해가 돌아갈 터. 어찌 냉정해지지 못하고 감정에 따라 함부로 움직인단 말인가.’
자책이 조금씩 밀려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금처럼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싶은 욕구가 거셌다.
‘그래.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일단 긍정하고 나 자신을 책망하기를 그만두자. 중요한 것은 바른길을 걸어가는 것.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
백소운이 마음을 다시 바로잡았다.
그러자 마음이 평안해졌다.
평안한 마음으로 그간의 일을 돌이켜보니 전후곡절이 비교적 세세하게 보였다.
‘그래. 이건 일시적 감정이 아니다. 뭔가 특별한 인연이 분명 임 소저나 천마대부인과 나 세 사람에게 있다. 오히려 좀 더 확실히 알아봐야 할 것 같구나. 다만 신중함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백소운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아래를 내려다봤다.
마음이 담담해지자, 기감이 더욱 세밀해지고 있었다.
‘세세한 수색은 그만하고 기감을 동원해 이질적인 느낌을 찾아내 보자. 이상한 점이 있으면 분명 감지될 것이다.’
백소운이 지붕 위에서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정신을 집중했다.
바로 그때였다.
천룡궁 안으로 한 대의 마차가 급히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마차 앞에는 한 흑의노인이 여인 한 명을 업고 있었다. 경공이 너무 빨라 일반 천룡궁 무사들은 두 사람을 보지 못하고 마차만 볼 수 있었다.
백소운이 흑의노인의 등에 업혀 있는 중년여인, 즉 천룡부인에 집중한 것은 물론이었다.
재빨리 천룡부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천마대부인은 아니다. 하지만 역용을 한 것 같구나.’
곧바로 천리안을 가동하니 그녀의 본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임소혜로부터 들은 천마대부인의 얼굴과 똑같았다.
‘천마대부인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