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93
백소운과 진하림이 정흥의 부탁을 수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관 무사 삼십여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인근 큰 마을들에서 소집된 정예 무관 무사들이었다.
마적의 출현이 인근 마을 모두에게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 뿌리를 뽑기 위해 온 선발대 격이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중년인이 말했다.
“제왕무관(帝王武館) 관장 풍부(豊富)라고 하오. 마적 놈에게 당한 내용은 들었소이다. 지금 놈들에게 붙잡혀 간 부녀자는 총 몇 분 정도 되오?”
“오십 명 정도입니다. 어서 빨리 구해주십시오. 날도 저물었는데 놈들이 무슨 짓을 할 줄 모르는지라······.”
정흥이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잡혀간 부녀자 중에는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도 있었다.
정흥과 그의 여동생은 원래 이 마을 사람이 아니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남매끼리 의지하며 장사에 살던 그들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한 사건 때문이었다.
일종의 도주라고 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여동생의 미모 때문이었다.
흑사문 무사 한 명이 우연히 여동생을 보고 강제로 데려가려는 것을 정흥이 그 무사를 죽인 후 이곳 마을로 온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일 년 전이었다.
이후 정흥은 동생과 함께 촌장 집에서 머물며 마을 일을 도우며 살았고, 오늘 촌장이 사망하자 그 대행까지 맡게 된 것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꼭 구출해주십시오. 물론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정흥이 고개를 돌려 마을 젊은이 십여 명을 쳐다봤다.
그들 대다수는 마적의 침입 당시 마을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마적들과 싸우다 상처를 입고 쓰러져 정신을 잃은 정흥 같은 이도 있었다.
하지만 무관 무사들의 반응은 기대 이하였다.
“사정은 딱하지만, 우리만으로 마적 떼를 소탕하는 것은 역부족이오. 지금까지의 정보에 의하면 이번 마적단은 보통 마적들이 아니오. 그 수가 삼백여 명이나 되는 것도 있지만, 더욱 큰 문제는 놈들의 무공이 최근 열 배 이상 높아졌다는 점이오. 지금 인근 정파 무림인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니, 내일 아침이면 무사들이 도착할 것이오. 그때 총공격을 가한다면 그분들을 구출할 수 있을 것이오.”
“내일이면 너무 늦습니다.”
정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풍부는 지금 당장 공격을 가할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했다.
수적으로도 열세이지만 무공 역시 현재 마적들에 비하면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미안하오. 하지만 우리만으로 공격을 가했다가는 전멸을 피하기 힘들 것이오. 그렇게 되면 잡혀 있는 부녀자들 역시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배제 못 하오.”
“하지만 오늘 밤 놈들에게 유린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 이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정 안 가시겠다면 우리만이라도 가겠습니다.”
정흥이 흥분했다.
하지만 마을 젊은이들만으로 마적을 소탕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그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진하림이 물었다.
“열 배라면 혹시 놈들도 지옥맹 고문단으로부터 무공을 배운 건가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소?”
“얼마 전 지옥맹의 도움으로 무공이 높아진 흑사문 무리를 만난 적이 있었어요. 그들도 마찬가지로 열 배 이상 무공이 높아져 있었지요.”
“그렇군요. 한데 두 분은 어떤 분들이십니까?”
풍부가 백소운과 진하림 두 사람의 허리에 걸린 검을 쳐다봤다.
백소운이 차고 있는 검은 무명검이었고, 진하림이 차고 있는 검은 다름 아닌 숙녀검이었다.
그녀에게 군자검과 함께 서열 2위인 보검을 준 이유는 안전 때문이었다.
백소운 옆에 있으면 진하림이 위험에 처할 경우가 많아질 텐데, 그때마다 그가 구해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숙녀검은 여러 효능이 있는 검이라 분명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 듯했다.
진하림은 당연히 매우 기뻐했고 아까워서 아직 몇 번 뽑아보지도 않았다.
정흥이 급히 말했다.
“이분들은 무림인들로 우연히 마을을 지나가다가 저희를 돕기 위해 남으셨습니다.”
“백 공자라고 불러주십시오.”
“진하림이에요.”
백소운과 진하림이 포권으로 인사했다.
풍부 역시 가볍게 포권했다.
“뜻밖에 무림인분들이 계셨구려. 두 분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보시오? 무작정 공격하면 전멸이 예상되는데도 마적들을 소탕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글쎄요. 무작정 공격하다가 더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미리 자포자기하여 희망을 버린다면 지원 무사들이 오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바로 공격을 가해야 한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하하하. 보아하니 무명소졸 같은데 무슨 힘이 있어 마적들을 소탕할 수 있겠소? 아까 보니 이름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던데, 그대가 유명한 무림고수라면 몰라도 아무런 명성도 없는 그대만 믿고 공격할 수는 없는 일이오. 부녀자들의 정절이 훼손되는 것은 나도 유감이지만, 앞으로의 희생을 줄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오. 자칫 섣부르게 공격을 가했다가는 놈들에게 경각심을 주게 되고, 심하면 지옥맹 고수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을 것이 아니겠소? 상황이 그렇게 되면 인근 마을 전부가 쑥대밭이 될 것이오. 그대가 그 모든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겠소?”
“제가 명성이 있다면 함께 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백소운이 담담히 말했다.
속으로는 혼자 갈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녀자들을 데리고 올 사람들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웬만하면 데려가고 싶은 것이 지금 그의 심정이었다.
“그렇소. 그래 그대의 이름부터 들어봅시다. 백 공자라 하셨는데, 설마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백소운 대협은 아닐 것이고······.”
“오라버니가 바로 백소운 대협이세요. 얼마 전까지 천룡궁에 있었지요. 그곳에서 지옥맹 장로를 비롯해 척살대 놈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섬서성 쪽으로 가던 중이었어요.”
진하림의 말에 풍부는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헉! 정말로 백 대협이란 말씀입니까?”
풍부가 입을 다물지 못하며 확인을 구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백소운입니다.”
백소운이 담담히 말한 후 우수를 들어 마당 한쪽 구석에 놓인 큰 바위 하나를 가리켰다.
순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그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실로 가공할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풍부를 비롯한 무관 무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비록 지금 무관 무사들이지만 언젠가는 무림에 정식 진출하여 명성을 날리는 것이 목표인 사람들이었다.
한데 무림인 중에서도 최근 천하제일인으로 우뚝 선 백소운을 실제로 보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제가 대협을 몰라뵙고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무리하지 않는 것도 때로는 필요한 일이지요. 하지만 부녀자들의 딱한 사정을 외면하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저와 함께 마적을 소탕하러 가시겠습니까? 아, 물론 놈들은 저 혼자 제거할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부녀자들을 무사히 데려오면 될 겁니다.”
“당연히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도 싸움에 참여할 겁니다. 강호에 소문이 퍼질 것인데 어찌 비겁하게 뒤에 물러나 있겠습니까?”
풍부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백소운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생기자 향후의 평판을 우려하는 것 같았다.
진하림이 말했다.
“저도 가겠어요. 그보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요. 놈들의 근거지는 알고 계신가요?”
“네. 추측되는 곳이 있습니다. 사곡(蛇谷)이라고 독사들이 자주 출몰해 인적이 드문 장소인데, 그곳에서 놈들을 봤다는 약초꾼이 있습니다.”
정흥이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연신 백소운을 보며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산골 마을에 살지만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 큰 마을에 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곳에서 백소운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대협만 믿겠습니다. 제 딸이 놈들에게 잡혀갔으니 꼭 구해주십시오. 늘그막에 얻은 하나뿐인 자식인데 시집이라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놈들에게 당하기 전에 제발······.”
마을 사람 중 오십 대로 보이는 사내가 와서 눈물을 흘리며 백소운의 손을 잡았다.
“알겠습니다. 위치를 알려주시면 제가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림이 너는 이분들과 곧바로 따라오너라. 알겠지?”
“네. 오라버니.”
진하림이 생긋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백소운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아직 실력이 미천한 그녀였다.
물론 숙녀검 때문에 무공이 두 배로 높아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시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사곡은 저쪽입니다.”
정흥이 상세한 설명을 해주자, 백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먼저 가볼 테니 여러분도 따라서 오십시오. 혹시 외곽 경계를 맡은 놈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니 조심하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그놈들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네. 그럼.”
백소운이 말을 마친 후 그 자리에서 흐릿하더니 연기처럼 사라졌다.
실로 놀라운 경신술이 아닐 수 없었다.
“아! 역시 백 대협이시군.”
“천하제일인이시니 꼭 성공하실 것이다.”
“늦지 않아야 할 텐데······.”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웅성거렸다.
“이럴 시간이 없어요. 우리도 출발해요.”
진하림이 말을 하며 숙녀검을 뽑았다.
순간,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맑은 금속음이 울렸다.
검명이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정신이 바짝 들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백 대협과 함께 다니는 이 분도 보통이 아닐 것 같구나.’
풍부가 급히 호응을 했다.
“진 소저 말씀대로 모두 출발하라.”
정흥 역시 마을 청년들을 데리고 합세한 것은 물론이었다.
해는 져서 이미 어두웠지만 그들의 희망은 꺾을 수 없었다.
* * *
“단장님. 계집을 데려왔습니다. 오늘 잡아 온 부녀자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계집이니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래? 어서 들어오너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산돼지같이 생긴 흑의대한이 소녀 한 명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마적단 단장 혈마적(血馬賊)은 탐심이 가득한 눈으로 벌벌 떨고 있는 백의소녀를 바라봤다.
“하하하. 너무 떨지 말거라. 우리 마적단은 이제 예전의 마적단이 아니다. 지옥맹 고문분들의 도움으로 강한 무력집단으로 거듭났지. 조만간 장사 일대 무림을 공격하기 위한 선봉장 역할을 할 것이니, 그때가 되면 나는 어엿한 한 방파의 방주가 될 것이다. 하기야 네년이 그런 사실을 알 수가 없겠지. 그래 이름이 무엇이냐?”
“흑흑. 살려주세요. 제발······.”
백의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그것참. 우는 모습이 더 매력적이구나. 좋다. 일단 너를 오늘 밤 품은 후 나의 미래를 설명해주마. 중요한 것은 절대 이전처럼 몸을 취한 후 바로 죽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쌍도끼. 그분들은 돌아가셨느냐?”
“네. 단장님. 한데 지옥맹 고문 분들이 준 단약을 모두 먹었는데 괜찮을까요? 배신을 막기 위해 일 년에 한번 해약을 먹어야 하는 독약이라고 하던데, 애들이 모두 그 점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무릇 큰일을 이루는 데는 희생이 따라는 법. 언제까지 우리가 정처 없이 떠돌면서 마적 생활을 할 것이냐? 천하통일이 이루어지면 영구적인 해약을 준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따르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하기야 선택의 여지도 없었지요. 말을 안 들으면 몰살시키겠다고 했으니. 그럼 전 물러가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저희도 알아서 한 명씩 골라서 즐기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쌍도끼가 물러난 후 혈마적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백의소녀에게 다가갔다.
“제발······.”
백의소녀, 즉 정수심(鄭壽審)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늘 의지가 되었던 오빠 정흥도 옆에 없어 더욱 두려웠다.
‘오라버니······.’
정수심이 정흥을 떠올리며 순간 결심을 굳혔다.
‘오빠. 미안해. 먼저 부모님 곁으로 가야 할 것 같아. 나 대신 열심히 살아줘.’
“후후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귀여운 계집!”
혈마적이 옷을 벗으며 정수심에게 다가갔다.
정수심이 눈을 감고 혀를 깨물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혈마적이 쓰러졌다.
정수심이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혈마적이 눈을 뒤집은 채 절명해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옆에 한 청년이 그림같이 서 있었다.
바로 백소운이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소저를 구하러 온 사람이니까. 나머지 분들은 어디에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