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96
“후후후! 더 발악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어서 태극신고를 내놓아라.”
“태극신고는 우리에게 없다. 이미 다른 통로로 화산파에 전달 중이다. 몇 번을 말해야 알겠느냐?”
피투성이가 된 김기성이 소리쳤다.
그의 옆에는 이미린과 화미앙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서른 명에 달하는 동방표국 표사들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단 한 명.
지옥맹 고문단 고수라는 자에 의해 무차별 도륙을 당한 것이었다.
물론 지옥맹 고수 혼자만이 온 것은 아니었다.
흑사문주를 비롯한 흑사문 무사 백여 명이 김기성 등을 포위하고 있었다.
“계속 발뺌을 하면 오로지 죽음뿐이다. 지옥사자(地獄使者)님. 나머지 놈들도 모조리 죽여주십시오.”
흑사문주의 말에 지옥사자라 불린 흑의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옥맹에서 파견한 백여 명의 지옥사자 중 한 명으로 수라객(修羅客)이라 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겠군. 한데 저 계집은 화산파 장문인의 딸인데, 죽여도 괜찮겠소?”
“화백웅 그놈도 어차피 죽여야 할 자가 아닙니까? 이미 천하대란이 시작되었으니, 마음을 굳게 하고 대업에 충실하십시오.”
“송 문주. 고맙소. 흑사문이 본맹 휘하 에 들어온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이번에 태극신고만 입수하면 맹주께서도 큰 상을 내리실 것이오.”
“감사합니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군요. 중원통일이 달성된 후 우리 흑사문이 장사를 다스릴 수 있게만 해주십시오. 그때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좋소. 믿겠소. 자질이 아까워 본맹 휘하로 들이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군.”
수라객이 기형도를 비스듬히 들고 앞으로 나왔다.
김기성이 품속에서 구슬 하나를 꺼냈다.
“마지막 남은 겁니다. 다시 한번 보호진을 펼치겠습니다.”
김기성이 말한 후 바로 구슬을 앞으로 던졌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안개 그물과도 같은 보호진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벌써 이곳에서 세 번째 터뜨린 구슬이었다.
“내게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수라객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기형도를 휘둘렀다.
순간, 도강이 흘러나와 보호진을 파괴해버렸다.
콰콰쾅.
“이놈!”
김기성이 벼락같이 일장을 날렸다.
동시에 이미린이 소매 속에 감추어두었던 우모침을 날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회를 노리던 화미앙이 검초를 뿌렸다.
그녀의 검법은 옥녀검법(玉女劍法)으로 옥녀심공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수라객의 무공이 너무 높아 결국 최후의 절초를 펼친 셈이었다.
“후후후! 제법이군. 하지만 아직 멀었다.”
수라객이 기형도를 반원형으로 휘둘렀다.
순간 강력한 도강이 부채꼴로 생겨나며 김기성 등 세 사람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그뿐이 아니었다.
수라객이 날린 도강은 마치 해일처럼 상대를 향해 나아가 타격을 주고 말았다.
“크윽!”
“으윽!”
김기성, 이미린, 화미앙 세 사람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하지만 아직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태극신고를 찾지 못했을 때를 대비하는 것 같았다.
“어서 뒤져보시오.”
“네.”
흑사문주가 고개를 숙인 후 수하들로 하여금 김기성 등 세 사람의 소지품을 검사하도록 했다.
태극신고는 그 신축성이 놀라울 정도로 좋아 평상시에는 엄지손가락 하나의 크기로 줄여서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
“몸속 깊숙이 숨겨두었을 가능성이 크니 세 사람 모두 옷을 벗겨라.”
“존명.”
흑사문 무사들이 눈요기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매우 기뻐했다.
“다가오지 마라!”
화미앙이 소리쳤다.
하지만 수라객이 지풍을 날려 그녀를 비롯해 세 사람 모두의 혈도를 찍어버렸다.
그때였다.
뭔가 흐릿한 것이 나타나 화미앙 등을 막아섰다.
한데 그는 바로 백소운이 아닌가.
“네놈은 누구냐?”
흑사문주가 소리쳤다.
백소운의 경신술이 놀라워 흠칫하는 그였다.
“무명소졸이오.”
백소운이 담담히 말했다.
수라객이 안색을 굳혔다.
“혹시 백소운 그놈이냐?”
“어떻게 알았소?”
“역시 그랬었군. 네놈 말고 내 이목을 속이고 이렇게 나타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잘 만났다. 네놈 목에 엄청난 상금이 걸려있었는데 그 주인공이 내가 될 것 같구나.”
수라객이 말과 달리 옆에 있는 흑사문주에게 눈짓했다.
“먼저 공격하시오. 놈이 진짜 백소운인지 확인해야겠소.”
“그게······.”
흑사문주가 주저했다.
하지만 수라객이 눈을 부라리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위급할 때 도와주셔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놈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놈이라······.”
“알고 있소. 어서 공격하시오.”
“네.”
흑사문주가 고개를 숙인 후 일제히 공격을 명했다.
“놈을 죽여라!”
“존명!”
흑사문 무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들고 백소운에게 다가갔다.
백여 명이라는 수적 우세와 뒤에 받치고 있는 수라객의 무공을 믿는 듯 점점 자신 있어 하는 표정들이었다.
특히 지금 그들이 펼치는 공격진은 수라객으로부터 특별히 전수받은 것이었다.
진법의 원리를 가미해 공격력을 열 배 이상 강화할 수 있는 것으로, 개개인이 이미 열 배 이상 강해져 있는 상태라 어떤 고수라도 상대할 수 있는 무적의 진법이었다.
‘지옥진(地獄陣)이라면 제아무리 천하제일검이라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흑사문주가 득의한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옆을 보니 수라객 역시 기형도를 앞으로 내밀어 언제든지 도강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빠질 수는 없지. 백소운 저놈은 지옥맹의 척살대상 일호이니 이번에 공을 세우면 큰 상은 물론이고 매우 유리해질 것이다. 잘하면 장사 일대를 넘어 호남성 전체를 우리 흑사문이 다스릴 수도 있으리라.’
흑사문주가 소매 속에 감춰 두었던 비수 한 자루를 꺼냈다.
그 비수는 십 년 전 우연히 한 병기점에서 구입한 것으로 녹이 슬어 있어 팔리지 않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남달리 병기를 보는 안목이 있었다.
한눈에 보통 비수가 아닌 것을 깨닫고 바로 구입했었다.
그리고 오랜 연구결과 그 비수가 상승고수를 상대할 때 유용한 암기라는 것을 알아냈다.
물론 그 발사방법도 알아냈다. 유일한 단점은 단 두 번밖에 발사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원수라 할 수 있는 정파고수를 죽이는 데 그중 한 번을 사용했다. 나머지 한 번은 구명절기로 남겨두었다.
한데 오늘 그 마지막 한 번을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필시 백소운 저놈은 수라객에게 신경을 집중할 것이다. 비록 오늘 이 자리에서 수하들이 모두 죽어도 백소운 저놈을 죽이면 남는 장사다.’
흑사문주가 다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흑사문 무사들이 일제히 백소운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쏴아아. 슈우욱.
동시에 수라객이 도강을 날렸다.
백소운이 그대로 태연히 서 있었기에 함께 공격을 가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흑사문주 역시 비수를 날렸다.
그가 날린 비수의 이름은 암흑비수(暗黑匕首)로 그 자신이 지은 것이었다.
쐐애액.
암흑비수는 가장 늦게 발사되었지만 백소운의 몸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놀랍게도 수라객이 날린 도강보다 더 빠른 속도를 보인 것이다.
백소운은 여전히 태연했다.
암흑비수의 가공할 예기에 흠칫했지만 예정대로 무형강기를 폭발시켰다.
다수의 상대를 대적할 때 가장 효과적이란 것이 판명된 공격이었다.
꽝.
지축이 흔들리는 진동과 함께 엄청난 폭음이 일었다.
무형강기가 암흑비수를 두 동강 내는 순간, 수라객이 날린 도강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흑사문 무사들의 공격 역시 지옥진의 위력 덕분에 가공했다.
주위에 있던 나무 수백 그루가 그대로 뽑혀 나가는 등 반경 십장 이내가 초토화된 것은 물론이었다.
“크윽!”
“으윽!”
흑사문주를 비롯한 흑사문 무사 백여 명이 가공할 열기로 인해 그대로 녹아내리며 절명했다.
문제는 수라객이었다.
이미 그 모든 것을 예상한 듯 기형도를 백소운에게 날려 충격파를 완화한 후 신형을 솟구쳤다.
백소운이 무명검으로 기형도를 쳐내는 순간, 그가 수직으로 낙하하며 우수로 정수리를 내리쳤다.
정확히 말해서 수강이 먼저 발출되었다. 수강은 병장기의 도움 없이 펼치는 강기로 상승고수가 아니면 흉내도 못내는 것이었다.
‘역시 보통 놈이 아니구나. 방심하다가는 내가 당한다.’
백소운이 강력한 압박을 느끼며 좌수를 높이 들어 수라객의 우수를 막아냈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손이 부딪혔다.
한데 마치 자석처럼 두 손이 붙은 채 떨어지지 않는 게 아닌가.
수라객의 신형이 거꾸로 되어 있었기에, 두 사람의 몸이 일자로 붙은 셈이었다.
‘내공 대결이군.’
백소운이 공력을 올려 수라객의 내공에 대항했다.
내공 대결은 가장 위험한 대결방식 중우 하나로, 일반적으로 조금이라도 높은 내공을 가진 자가 승리하게 된다.
반대로 패배한 사람은 대개 사망에 이르게 된다. 이는 상대의 공력이 한번 몸속으로 들어오면 혈맥이 파괴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한꺼번에 물이 쏟아져 둑이 터지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멈추는 순간 상대의 공력이 물밀 듯이 들어와 혈맥을 파괴하기 때문에 절대 그만둘 수 없었다.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서로 약속을 해서 동시에 중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도 상대를 신뢰할 수 없어 실현이 매우 어려웠다.
물론 공격이 강한 제삼자가 나서 두 사람을 떼어놓는 방법도 있었으나, 내공 대결을 벌이는 고수들 대부분이 상승고수이기에 그런 고수를 찾기 어려웠다.
단순히 두 배 이상의 공력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니라 최소한 네 배의 공력을 지녀야 모두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으음, 생각보다 내공이 강하다.’
백소운이 안색을 굳혔다.
그도 그럴 것이 지옥맹 고수들의 수준이 가늠이 되지 않았다.
천룡궁에서 지옥맹 장로 극마도인을 처치했을 때 그가 지옥맹의 최고수 반열에 올라있다고 판단했었다.
한데 지금 보니 수라객이란 자의 무공이 극마도인보다 높았다.
‘지옥맹에서는 무공 수준과 직책과는 큰 관련이 없는 것인가. 108 괴수왕 그자들도 그렇고, 또 어떤 고수들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백소운이 다소 답답함을 느끼며 공력을 높였다.
순간, 균형을 이루며 대치를 하던 수라객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럴 때 지옥사자 두세 명만 더 있어도······.’
수라객이 안타까워했다.
백소운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지금이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지옥사자들은 각자 임무를 맡고 천하 각지로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할 수 없구나. 맹주께서 전수해주신 필살공(必殺功으)로 놈을 척살할 수밖에. 놈을 죽이게 되면 내가 살고, 그러지 못하면 죽는다.’
수라객이 필살공을 펼치자 그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백소운이 흠칫했으나 계속 공력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수라객의 몸이 부풀어 오르며 혈맥 또한 넓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전세가 역전되어 백소운의 혈맥이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동귀어진 수법이구나. 이대로 버티면 승리해도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다.’
백소운이 갈등했다.
하지만 곧바로 결단을 내려 잠력까지 모두 폭발시켰다.
꽈아아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수라객의 신형이 그대로 터져버렸다.
피와 뼈, 그리고 내장 부스러기 같은 것이 사방으로 흩어져 절명한 것이다.
“휴우······.”
백소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옥맹 고수들과 싸우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느낌이었다.
이후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김기성, 이미린, 화미앙 세 사람의 혈도를 풀어주고 금단환까지 먹여 치료를 해주었다.
“감사해요. 역시 천하제일검 백소운 대협이시군요.”
“객잔에서 몰라뵌 점 죄송해요.”
“백 대협께 감사드립니다.”
화미앙, 이미린, 김기성이 다투어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 못했다.
동행했던 동방표국 표사들이 전멸했기 때문이었다.
지원을 요청하러 떠났던 표사 한 명까지도 죽었다는 사실을 백소운에게 들었을 때 그들의 슬픔은 더 했다.
하지만 마냥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아가씨. 표행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김기성의 말에 이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희생을 당하신 표사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표행은 꼭 완수할 거예요.”
“표물은 안전한가요?”
화미앙의 물음에 이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표물은 제 뱃속에 들어가 있어요. 특수 대법을 통해 넣어둔 것이라 화산에 도착하면 빼드릴게요.”
“아······.”
화미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김기성이 말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떠나도록 하지요. 백 대협. 일행은 어디에 있습니까?”
“날이 밝으면 여기로 올 겁니다. 얼마 남지 않았군요.”
백소운이 어느새 동이 터오기 시작한 하늘을 쳐다봤다.
“좋아요. 그럼 그분들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기로 하지요. 백 대협께서 화산까지 동행해주실 건가요?”
“물론입니다. 표사들을 모두 잃으셨는데 더는 모른 체할 수 없겠군요.”
“감사해요. 하지만 표행 중 목숨을 잃은 것은 표국 사람들의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보다 일행분들이 올 때까지 표사분들을 묻어 드리고 싶은데, 도와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감사해요.”
이미린이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있어 백소운은 신이 보내준 사람과도 같았다.
‘그래도 이분이 있어 다행이다. 화산까지 동행해주신다니 정말 기쁘구나. 부디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제32장] 격동강호(激動江湖) 4백소운 일행이 악양에 도착한 것은 이틀 후였다.
“다시 돌아왔군요.”
진하림이 악양 성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백소운, 진하림, 정흥, 정수심, 김기성, 이미린, 화미앙 이렇게 총 일곱 명을 태운 마차는 천천히 관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는 열 명까지 태울 수 있을 정도로 넓어 일행을 모두 태우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한편 일행이 많아짐에 따라 백소운은 마부 역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정흥과 김기성 두 사람이 마부 일을 전담했다.
백소운은 주위 경계를 맡았다.
이는 태극신고를 노리는 놈들이 더 나타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지금까지는 아무 일이 없었다.
“객잔에 들러 건량과 육포, 물 등 필요한 물품을 사야겠어요.”
이제 완전히 살림꾼이 다 된 진하림의 말에 백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식사 시간도 다 되었으니, 객잔에서 점심도 먹고 조금 쉬었다 가는 게 좋겠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습니다. 안 그래도 이곳 악양에서 대사형을 만나기로 했어요. 이왕이면 대사형과 만나기로 한 객잔으로 갈 수 있을까요?”
화미앙의 말이었다.
그녀는 마차를 타고 오면서 여러 표식을 남겼었다. 그 결과 화산파 대제자와 연락이 닿은 모양이었다.
“물론입니다. 화산까지 갈려면 아직 멀었으니, 고수 한 분이라도 더 있으면 도움이 될 겁니다.”
“대사형 한 사람이 아니에요. 대사형이 맹의 와룡대 대주 자리를 맡고 있어, 와룡대원들이 대거 도움을 주기로 했어요.”
“그게 정말인가요? 표물 운송은 우리 동방표국 힘만으로 해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너무 죄송한데요?”
이미린이 얼굴을 조금 붉혔다.
하지만 자발적인 외부 도움을 받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특히 동방표국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중원이 타국이라 현지인들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표사분들의 희생이 그렇게 컸는데, 최대한 많은 인원이 합류해 위험을 분산하는 게 당연하지요. 마침 맹주께서 이번 일을 아시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라고 명하셨다니, 더욱 잘된 일이에요.”
화미앙이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많은 와룡대원들이 합류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표정으로 봐서는 적은 수는 아닌 것 같았다.
진하림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태극신고란 것이 어떤 효능이 있기에 지옥맹에서 탈취를 하려는 것이죠? 맹에서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봐서 그 위력이 매우 뛰어날 것 같은데······ 제가 너무 주제넘은 질문을 했나요?”
“아니에요. 진 소저. 백 대협도 계시니 이번 기회에 간략하게나마 말씀드리지요. 사실 태극신고는 그 자체만으로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 말씀은?”
“우리 화산파에 태극봉(太極棒)이란 것이 있어요. 악귀나 괴수를 몰아내는 힘을 지닌 법보이지요. 한데 태극봉으로 일종의 북인 태극신고를 두드리면 악귀의 근원까지 제거할 수 있다고 해요.”
“근원이라 하면 놈들의 근거지를 알아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백소운의 물음에 화미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세한 것은 저도 모르지만 그것도 가능하다고 보고 있어요. 아버님께서는 말벌 등 지옥맹의 괴수 출현에 대해 들으시고, 이번에야말로 동방에 있는 태극신고를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을 굳히셨던 것이지요. 아, 물론 태극신고 자체에도 다른 여러 가지 효능이 있어요. 예를 들어 적의 침입을 미리 알려주는 등 매우 필요한 기능이지요. 다만 무형검의 경지에 오른 절대고수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전해지지요.”
“놈들의 근거지를 알아낼 수 있다면 사태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놈들이 위협을 느낄 만하군요.”
백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진짜 싸움은 지옥맹의 108 괴수왕과 하게 될 것이다. 원체 수가 많으니 혼란도 극에 달하겠지. 태극봉과 태극신고는 그런 위기 상황에서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맹에서 무공으로 안 되니까 법보로 승부를 보려는 것 같은데, 잘한 일인 것 같군. 그나저나 태극신고 자체의 효력은 무형검의 고수만이 실현 가능하다고 하니 더욱 궁금해지는구나. 기회가 되면 시험해봐야겠다.’
백소운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마차는 화미앙의 안내를 받아 한 객잔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바로 그녀의 대사형을 비롯해 와룡대원들과 만나기로 한 곳이었다.
“조금 일찍 온 것 같은데, 식사부터 하도록 해요. 어서 내리시지요.”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화미앙과 백소운을 필두로 일행이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예약이 되어 있는지 점소이는 그들을 이 층 특실로 안내했다.
* * *
화산파 대제자이자 와룡대주인 정기탁(鄭基濁)이 나타난 것은 백소운 일행이 점심 식사를 막 마쳤을 때였다.
“대사형! 어서 오세요.”
화미앙이 그를 반겼다.
생각보다 늦는 것 같아 애를 태우던 때라 반가움이 더한 것 같았다.
그녀가 재빠르게 정기탁을 사람들에게 소개해주면서 통성명이 이루어졌다.
“정기탁입니다. 반갑습니다.”
정기탁이 거듭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가 가장 관심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단연 백소운이었다.
“백 대협의 명성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무공이 가히 신의 경지에 달해 있는데다가 덕망 또한 높다고 하더군요. 오늘 직접 뵈니 명불허전입니다. 앞으로 백 대협께 무림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계속 부탁드립니다.”
“과찬이십니다. 능력이 부족한데 소문만 과장된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백소운이 겸양을 하면서도 의지를 밝혔다.
덕담이 끝나자, 화미앙이 물었다.
“대사형 혼자 오신 거예요? 대원들하고 함께 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오다가 일이 생겨 다른 곳으로 대원들을 보냈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장강수로채 놈들이 이곳 악양을 노리며 오고 있다는구나. 다들 알다시피 악양은 얼마 전까지 우리 무림맹과 사도맹이 혈전을 벌였던 곳이다. 놈들이 지옥맹의 도움으로 만든 실혼인 때문에 많은 목숨을 잃었지. 하지만 여기 계신 백 대협 덕분에 전세를 만회했고, 결국 사도맹이 물러가자 이곳 악양은 다시 본맹 세력이 우세한 지역으로 변했지.”
“거기까지는 알고 있어요. 한데 왜 갑자기 장강수로채 놈들이 쳐들어온다는 것이죠?”
“그게 이번에도 동정수로채 놈들 때문이다. 사도맹 놈들이 자기네들 총단으로 물러간 후 이곳에 남아있던 본맹 무사들이 동정수로채를 공격해 화근을 없애려했고, 동정수로채가 이에 반발해 장강수로채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지.”
“장강수로채 중 어느 수로채가 온 건가요?”
“십팔채 모두가 왔다고 하는구나. 신임 총채주가 직접 삼만 수적을 거느리고 왔다는데, 믿기 어려워 일단 부대주 인솔 하에 대원 백여 명을 동정수로채에 보냈다.”
“동정수로채는 본맹이 장악하고 있나요?”
“그렇다. 동정수로채 놈들이 우리 공격을 받고 쫓겨 가다가 다시 되돌아오고 있는 셈이지. 물론 장강수로채 수적들과 함께 말이다.”
“보통 일이 아니군요. 아직 백리 소저와 총군사님 등 천룡궁에 가셨던 분들이 이곳 악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텐데······ 지휘는 어느 분이 맡고 계시지요?”
“태상호법께서 맡고 계시다. 하지만 무사들 수가 타 지역 지원 문제로 줄어들어 오천 정도뿐이라, 놈들에 비해 수적으로 밀린다고 할 수 있지.”
“장강수로채 그놈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요. 그동안 사도맹에 속해 있으면서도 반독립적으로 행동해 소탕 작전을 미루고 있었는데, 이런 복잡한 시기에 야욕을 드러내다니.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걸까요? 수적들이 아무리 수가 많아도 고수들 앞에서는 맥을 못 출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네 말도 맞다. 원래라면 아무리 놈들의 수가 많아도 우리에게 승산이 높지. 하지만 놈들 역시 지옥맹의 도움으로 열배 이상으로 강해졌다면 말이 달라지지. 이미 사도맹 탈퇴와 함께 지옥맹 휘하로 들어갈 것을 공표했다고 하니, 최소한 놈들의 야심이 호남성과 호북성 두 곳에 있는 것은 명확하다.”
정기탁이 말을 하며 백소운을 쳐다봤다.
지금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도 아무래도 백소운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백소운은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별말이 없었다.
이미린이 말했다.
“상황이 심각하군요. 표행은 저희가 알아서 진행할 테니 대주께서는 그곳 일에 신경 쓰시는 것이 좋겠어요.”
“아닙니다. 사실 제가 직접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이번 싸움부터 태극신고를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부님께서도 지금 악양으로 오시고 계시니, 표물을 이곳에서 인계받는 것으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버님께서 오시나요?”
“그렇다. 장강수로채 수적들의 무공이 너무 높아진데다가 그 수가 많아 총단 병력으로 감당이 안 될 것으로 판단해, 맹주께서 각파에 지원을 요청하신 것 같다. 물론 화산에서 이곳까지 오시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나, 지금 예상으로는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
“표물은 반드시 장문인께 전달하기로 되어 있어요. 장소는 화산이든 이곳 악양이든 상관없지만 말입니다.”
이미린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화산파 장문인의 여식과 제자이지만 계약대로 이행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사부님께서도 그러실 생각입니다. 어차피 태극신고만으로는 저희가 바라는 위력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사부님께서 가지고 오실 태극봉에 기대를 걸고 있지요.”
“좋아요. 그럼 저희는 장문인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과 함께 있겠어요. 물론 필요하다면 장강수로채와의 싸움에도 참여해드리겠어요.”
“그럴 필요까지야. 동방표국 두 분께서는 안전한 곳에서 사부님을 기다리면 될 것 같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표물을 훼손할 수도 있으니까요.”
“좋아요. 하지만 전장에는 가 있겠어요. 그래야 장문인께서 오시는 대로 표물을 인계할 수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한데 백 공자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솔직히 제가 직접 온 것은 표물 문제도 있었지만 백 대협의 초빙이 더 큰 목적이었습니다. 놈들 중에는 지옥맹 고문단 고수가 여럿 있고 신임 총채주 역시 지옥맹 출신이라는 소문이 들리고 해서······.”
“고문단 고수라면 아마도 지옥사자들일 겁니다. 여기 오면서 지옥사자 한 명을 처치했었는데, 나머지 지옥사자들의 수가 상당한 것 같았으니까요.”
“으음, 지옥사자라. 들어본 것 같습니다. 백 대협. 어떻게 이번에도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 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백 대협께서 가시면 무사들의 사기가 매우 올라갈 겁니다.”
“상황이 그 정도라면 잠시 들르기로 하지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장기전이 되면 계속 남아 있을 거라는 보장은 못 드립니다.”
“아, 감사드립니다. 이제 곧 상황을 알아보러 간 대원 한 명이 올 것이니, 자세한 사정을 듣고 출발하도록 하지요.”
정기탁이 말한 그때였다.
그의 말대로 와룡대원으로 보이는 청년무사 한 명이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대주님.”
“한 대원. 어떻게 되었소?”
“상황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척후의 보고에 의하면 장강수로십팔채 수적 삼만 명이 일제히 남하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합니다. 곧 놈들이 들이닥칠 것 같다고 하니 어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소.”
정기탁이 안색을 굳혔다.
“기껏해야 오천 정도로 생각했는데, 정말 삼만 명이라니. 지원무사들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도 힘들 것 같습니다. 일단 저를 따라 모두 동정수로채로 가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요.”
백소운이 수락하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정기탁이 한조(韓調)라는 대원과 함께 앞장서자, 백소운 일행도 객잔 밖으로 나왔다.
마차에 모두 탑승하자, 정기탁과 한조가 각각 말을 타고 앞장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럇!”
마차 역시 빠른 속도로 따라갔다.
두두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