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Emptiness RAW novel - Chapter 99
백소운이 장강수로십팔채 함선 백오십여 척을 발견한 것은 해질 무렵이었다.
거리상으로는 동정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아 막 좁은 물길로 들어서려는 지점이었다.
‘척후의 보고대로 위세가 대단하구나. 지금 내가 막지 못하면 달리 대책이 없다.’
백소운이 은신술을 펼쳐 모습을 감춘 채 눈을 빛냈다.
판자 하나에 올라서 있는 그는 빠른 물살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무려 삼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게다가 아까 괴어왕과 혈괴어를 제거할 때 무리를 해 공력이 안정되지 않았다.
‘으음, 놈들의 지휘선을 노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겠군. 지휘선이 침몰되면 수하들도 주춤할 것이다. 그때 각개격파를 해나간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
이미 무림맹 무사들이 상당한 피해를 본 상황이기에 백소운 역시 살계를 펼치기로 마음을 굳혔다.
곧이어 그의 눈에 다른 배 보다 서너 배는 더 큰 지휘선이 들어왔다.
바로 지옥대공자와 지옥염라가 있는 그 배였다.
휙휙휙.
백소운이 신형을 날려 지휘선 쪽으로 날아갔다.
공력을 최대한 끌어모으기 위해 은잠술도 풀었기 때문에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지휘선을 비롯해 배 위에 타고 있던 수적들이 일제히 백소운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적이다!”
“저놈을 죽여라!”
백소운이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선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쏴아아.
그의 장력에는 무서운 힘이 담겨있어 아무리 지휘선이라도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강력하게 날아가던 장력이 지휘선을 둘러싸고 있는 붉은 안개에 부딪혀 그대로 소멸하여 버린 것이다.
지옥대공자와 지옥염라, 각 수채의 채주 등 지휘선에 타고 있던 고수들이 갑판 위로 올라온 것은 그 직후였다.
안 그래도 그들은 곧 동정협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 준비를 하려던 찰나였다.
“웬 놈이냐?”
지옥염라가 허공에 떠 있는 백소운을 보며 소리쳤다.
그는 지옥맹의 총순찰이면서 장강수로십팔채의 총군사였다.
지휘선 주위에 쳐둔 지옥수호진(地獄守護陣)이 가동되었음을 느끼고 급히 그 원인 제공자로 백소운을 지목한 것이었다.
스스슷.
지휘선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걸까.
백소운이 신형을 움직여 지휘선 위로 내려섰다.
차차차착.
동정수로채 수적들이 일제히 다가와 그를 포위했다.
지휘선에 타고 있던 그들은 모두 각 수채에서 최고의 무공을 지니고 있던 자들이었다.
십팔채의 채주 역시 지휘선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지휘선의 무력이 함대에서 최고인 것은 당연했다.
한편 지난번에 백소운에게 죽임을 당한 용왕채주는 새로운 인물로 바뀌어 있었으나, 거기까지 신경 쓸 상황은 아니었다.
“본인은 백소운이라 하오.”
백소운이 담담히 말하자, 지옥대공자를 비롯한 사람들이 놀라며 웅성거렸다.
지옥염라가 말했다.
“총채주님 예측대로 백소운 저놈이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쩌기는. 죽여야지. 놈이 제 발로 무덤을 찾아왔구나.”
지옥대공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지옥사자들이 거의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지라 여유가 있어 보였다.
‘놈의 기세가 너무 강해 승리를 거둔다 해도 내가 내상을 입을 수 있다. 확실히 하려면 지옥사자들이 올 때까지 조금 시간을 끌 필요가 있겠군.’
지옥대공자가 눈을 빛내며 백소운을 쳐다봤다.
“그대가 백소운이었군. 본인은 장강수로십팔 총채주 지옥대공자라 하오.”
“총채주말고도 다른 신분이 있을 듯한데, 혹시 지옥맹 출신이오?”
“하하하! 역시 눈치가 빠르군. 바로 그렇소. 어차피 알려질 테니 말씀드리리다. 본인은 지옥맹의 소맹주이기도 하오. 이번에 동정수로십팔채를 본맹의 휘하 문파로 들이면서 내 특별히 총채주 직함을 직접 맡게 되었소.”
“소맹주? 생각보다 중요한 분이셨구려. 그래 지옥맹주가 부친이 되시오?”
“그렇소. 백 공자.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미 대세는 기울었소. 본맹의 힘은 막강하며 중원 무림은 우리를 막을 힘이 전혀 없소. 어떻소? 우리와 손잡고 함께 대업을 이루어가는 것이. 백 공자가 원한다면 본맹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도 있을 것이오.”
“중요한 직책이라면 부맹주 자리라도 내주겠다는 말씀이오?”
“하하하. 그렇소이다. 아버님께서도 분명 찬성하실 것이오. 지금 보니 백 공자께서도 생각이 있으신 것 같구려. 잘 생각하셨소이다. 듣자 하니 무림맹에서 나왔다고 하던데, 굳이 무림맹에 종속될 필요가 있겠소?”
“종속이 아니라 정의의 문제요. 오늘 그대들은 괴어왕과 혈괴어를 동원해 또다시 이천 명 가까운 무림맹 무사들을 죽였소. 내 비록 무림맹 소속은 아니나 맹 소속 하인 출신으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오.”
“괴어왕과 혈괴어는 어떻게 되었소?”
“놈들은 이미 죽었소. 하지만 진정한 원흉은 그대가 아니오?”
“후후후! 백소운! 괴어왕을 죽였다고 기고만장하구나. 그렇다. 내가 괴어왕과 혈괴어로 하여금 선봉을 맡게 했다. 한데 네놈에게 모조리 죽었다니 내 어찌 복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네놈은 오늘 이곳에서 반드시 죽는다.”
지옥대공자가 눈짓하자, 지옥염라가 수적들에게 명을 내렸다.
“놈을 죽여라. 놈은 혼자이니까 계속 공격하면 반드시 힘이 빠져 빈틈이 보일 것이다. 놈을 죽인 자에게는 황금 백 냥의 상금을 내리겠다.”
지옥염라의 말에 수적들이 일제히 눈을 빛냈다.
황금 백 냥은 엄청난 금액이기 때문이었다.
지옥대공자 옆에 모여 있던 각 수채의 채주들 또한 관심을 기울이는 표정이었다.
지옥대공자가 차륜전 방식으로 백소운의 힘을 빼려 한다는 것을 간파한 그들은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수적들이 백소운을 제압하지 못하면 다음 차례는 자신들이 될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눈을 부릅뜨고 빈틈을 찾기 시작했다.
백소운은 굳이 무리하게 지옥대공자부터 제압하려 하지 않았다.
‘지옥사자들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 모양이구나. 오히려 잘됐다. 이번 기회에 지옥사자들까지 모조리 제거한다면 몇 달 정도는 중원무림이 평화로울 것이다.’
백소운이 무명검을 고쳐 잡았다.
그러면서 금단비고 안에 있던 암기 하나를 꺼냈다.
바로 다수를 상대할 때 효력이 큰 금단생사침(金丹生死針)이란 것이었다. 비록 하나의 침에 불과하지만 일단 발사되면 계속 개수가 불어나는 특징이 있었다.
즉, 생사침을 발사하면 적의 수에 따라 계속해서 두 배로 불어나는데, 그 한계는 시전자의 공력에 달려 있었다.
게다가 워낙 강해 상대에게 꽂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관통하는 특징이 있었다.
따라서 하나가 두 개로, 두 개가 네 개로, 네 개가 여덟 개 이런 식으로 가용할 수 있는 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지옥사자 수가 백여 명이라고 가정할 때 최대한 공력을 아껴야 한다. 비록 상승고수를 상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금단생사침이 공력을 최대한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백소운이 망설이지 않고 금단생사침을 날렸다.
휙.
너무 작고 그 속도가 빨라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 다가온 수적 한 명이 목을 관통당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그 순간, 금단생사침은 두 개로 불어났다.
마치 눈이 달린 듯 또 다른 표적을 쫓아간 침들은 곧바로 두 명의 수적을 더 죽였고, 즉시 네 개로 불어났다.
이런 식으로 여덟 개, 열여섯 개 등으로 계속 불어났다.
동시에 쓰러져 절명하는 수적들의 숫자가 늘어난 것도 물론이었다.
하지만 초반에는 크게 표가 나지 않았다.
수적들이 원체 많았다.
게다가 명을 받고 다른 배에서도 수적들이 속속 지휘선으로 넘어왔다.
따라서 초반에는 백소운의 무명검에 목이 달아나는 수적들이 훨씬 많았다.
스걱.
스스슷.
마치 유령처럼 수적들 사이를 파고든 백소운이 무명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어김없이 대여섯 명의 목이 날아갔다.
수적들이 미친 듯이 병장기를 휘둘렀으나, 백소운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렇게 일각 정도 지났을까.
이제는 확연히 금단생사침에 의해 목숨을 잃은 수적들의 숫자가 훨씬 많아졌다.
마치 빠르게 날아다니는 반딧불처럼 금빛 기운이 담긴 침이 번뜩일 때마다 수적들이 우수수 쓰러져 절명했다.
“크윽!”
“으윽!”
지휘선 위에 수적들의 시체가 산더미 같이 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지옥대공자는 꿈쩍도 안 했다.
지옥염라가 급히 전음을 보냈다.
「소맹주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수적들이 벌써 천 명 가까이 죽었습니다.」
「지옥사자들은 어디에 있소?」
「지금 막 악양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지옥조가 한꺼번에 지옥사자들을 태운 게 주효해 일각 후면 이곳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일단 각 수채의 채주들로 하여금 내가 가르쳐준 합격진을 펼치게 하시오. 지금 보니 일반 수적들로는 도저히 놈을 죽이기 어려울 것 같소. 암기 때문에 공력 소모도 극히 적은 것 같고. 차라리 무공이 높은 채주들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소.」
「그러면 채주들은 모두 죽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우리 쪽 사람으로 교체할 계획이었소. 죽어도 전혀 아깝지 않소.」
「그렇군요. 역시 영명하십니다.」
지옥염라가 고개를 끄덕인 후 옆에 있는 채주들을 향해 말했다.
“수하들이 저렇게 죽어 나가는데 채주들께서 가만히 있어야 하겠소. 소맹주께서 전수해주신 암흑사신진(暗黑死神陣)으로 놈을 죽이시오. 총채주님의 명이시오.”
“존명!”
십팔채 채주 열여덟 명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 후 백소운에게 다가갔다.
수적들이 기다렸다는 듯 급히 물러났다.
“백소운! 네놈이 사내라면 암기 공격은 그만하고 우리와 겨뤄보자. 우리 십팔 채주들의 합격진을 막아낼 용기가 있느냐?”
“좋소.”
백소운이 좌수를 위로 올리자, 수백 개로 늘어난 금단생사침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췄다.
공격을 중지한 것인데, 언제라도 다시 가동될 수 있었다.
신임 용왕채주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사실 지옥맹 고수로 채주 중에서 유일하게 지옥맹 출신이었다.
이는 지옥대공자가 비록 총채주가 되었지만 그가 계속 수적들을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옥맹 고수 한 명을 공석이 된 용왕채주 자리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백소운! 그래도 양심은 있구나. 그 암기들이 아니었으면 너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
“불필요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대결이나 합시다.”
백소운이 무심한 표정으로 무명검을 전방을 향해 뻗었다.
채주들 또한 빠르게 반원형으로 백소운을 포위했다.
한데 용왕채주를 가운데 둔 그들의 포진 형태가 특이했다.
서로 간의 간격이 거의 없이 붙어있었던 것이다.
‘진기로 몸을 이었구나. 한 사람에게 공력을 모아 공격을 가해올 모양이군.’
백소운이 안색을 굳혔다.
채주들의 개개인의 무공이 열 배 이상 높아진 데다가, 그들의 공력까지 하나로 모은다면 절대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반원형의 공격진인 암흑사신진 자체의 위력이 가미되어 있었다.
채주들의 진기를 자신의 몸에 모으는 데 성공한 용왕채주가 들고 있던 검을 앞으로 뻗었다.
이는 백소운과 마찬가지 모습이었다.
“한 번의 대결로 마무리가 될 것 같구나. 죽기 전에 할 말이 있느냐?”
용왕채주의 물음에 백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다시 태어나면 협의(俠義)를 아는 사람이 되도록 하시오. 그대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오.”
“네놈이 정말!”
용왕채주가 버럭 화를 내며 검봉에 모인 공력을 발사했다.
마치 악마의 불길처럼 강렬한 불기둥이 백소운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백소운 또한 바로 검강을 날렸다.
장엄한 금빛이었다.
꽈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