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117)
신의 메스-117화(117/249)
117화 새로운 세계 (3)
“승객 여러분들 중에 의사 선생님 안 계십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인지, 승무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야?”
“사고라도 난 건가?”
승무원의 목소리에 잠을 깬 승객들이 웅성거렸다.
“제, 제가 의사입니다만…….”
박상우는 안대를 벗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어 보였다.
“정말이십니까? 의사 선생님이세요?”
구세주라도 만난 듯 승무원이 득달같이 박상우 곁으로 달려왔다.
“명성병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지금 응급환자가 발생했는데, 상태가 조금 심각합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환자는 어디 있습니까?”
“퍼스트 클래스 쪽에 있어요.”
“일단 가시죠. 상태가 어떤지부터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내해 드릴게요.”
“네.”
승무원은 박상우의 뒤를 따르며 환자의 상태를 설명했다.
“승객분은 조금 전에 샌드위치를 드셨는데…… 갑자기…….”
퍼스트 클래스에 있던 승객이 발작을 일으키며 호흡 곤란 증세를 보이자 승무원들이 응급조치를 했고, 그래도 차도를 보이지 않자 박상우가 타고 있던 비즈니스 클래스로 나온 것이었다.
환자는 6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백인 여성.
목 주위 피부 점막에 두드러기 증세가 심했다.
“하악! 하악!”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여자의 초점은 점점 흐려져 갔다.
박상우는 환자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대 보았다.
‘뭐야? 위징(Wheezing: 천명)이 들리잖아? 그렇다면 기관지까지 에데마(부종)이 심하다는 건데…….’
박상우는 입을 벌려 목 안쪽으로 살펴보았다.
천명이란, 숨을 쉴 때 부종 때문에 좁아진 기관지를 따라 공기가 통과할 때 들리는 특징적인 호흡음이었다.
박상우는 황급히 그녀의 팔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큰일이군. 혈압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어!’
갑작스러운 피부 발진에 위징, 게다가 저혈압이라니.
혈압계 없이도 환자의 혈압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박상우였다.
그 순간, 그녀의 이마에 나타난 붉은 숫자.
[57분 32초, 31초, 30초, 29초…….]그녀의 잔존 수명은 채 1시간이 되지 않았다.
“어, 언제부터 이런 증세를 보였습니까?”
박상우는 고개를 들어 승무원을 쳐다봤다. 이미 머릿속에 떠올린 병명은 있었지만, 다시 한번 확인코자 하는 것이었다.
“조금 전에 간식을 드시고 한 10여 분 지났는데, 갑자기 승객분이 쓰러지셨습니다.”
‘음식을 먹고 짧은 시간에 발병?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 과민성 쇼크)가 틀림없다!’
박상우는 승무원들에게 지시하며 응급조치를 진행했다.
“옷을 느슨하게 해 주시고, 평평한 곳으로 옮겨 주십시오. 그리고 수건도.”
“네.”
수건을 받아든 박상우가 돌돌 말아 다리 밑에 끼워 넣었다.
“흠, 의료 키트 있으면 가져오시고, 그리고 앰부백도 좀 있으면 가져다주세요.”
박상우는 신속히 승무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승무원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기품 있는 옷차림, 외모까지 고풍스러운 환자였다.
창백하게 변해 버린 환자는 거친 숨을 계속 몰아쉬며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이젠 온몸에 두드러기가 퍼져 입술 주위까지 번져 있었다.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승무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여기 있습니다.”
박상우는 승무원들이 전달한 의료 키트를 받아들었다.
“앰부백 사용하실 수 있으시죠?”
박상우는 앰부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승무원에게 물었다.
“응급조치 시간에 배워 뒀습니다.”
“환자에게 산소마스크 씌우시고, 산소 주입해 주세요. 일정한 간격으로 천천히 눌러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에피네프린(혈압상승제)이 있어야 해! 떨어진 혈압을 올려야 한다!’
박상우는 한참이나 의료 키트를 뒤적거렸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에피네프린이 보이지 않았다.
“에피네프린 없습니까?”
박상우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네? 에피네프린, 그, 그게…….”
승무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없어요? 항히스타민은요? 베타2 항진제는 있습니까?”
“그…… 그런 건 없고, 소화제나 두통약, 뭐 그런 정도 간단한 것들만 준비해 둔 터라…….”
승무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게 말이 됩니까? 이 환자는 지금 아나필락시스예요! 뭔가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은 겁니다! 장거리 비행을 하는데 두드러기 치료제조차 구비되어 있지 않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지금 이대로 두면 이분 죽습니다!”
“하……아악, 하……아악!”
이젠 거친 숨소리마저 잦아드는 환자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사무장이란 남자가 다가와서 말했다.
“어, 어떡하죠? 이, 이분은 꼭 살려야 합니다. 우리 항공사의 VVIP이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빨리 혈압을 올려야 합니다. 지금 병원에도 갈 수 없는 상황인데, 안 그러면 이분 돌아가신다고요!”
박상우는 윗옷을 벗고 셔츠 소매를 둘둘 말아 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환자의 팔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맥박이 요동친다!’
박상우의 미간이 자연스레 일그러졌다.
“호……혹시, 이게 필요하신 겁니까?”
그 순간, 한 노신사가 자리에서 일어나곤,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자가 사용이 가능한 에피네프린 주사였다.
“혹시, 저혈압 환자십니까?”
박상우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제가 심각한 저혈압이라서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건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노신사는 박상우에게 주사기를 내밀었다.
“물론입니다. 이게 우리가 찾던 물건이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
절망적인 순간에 정말 구세주처럼 나타난 노신사의 저혈압 덕분에 환자를 살릴 수 있었다.
“아이고, 다행이네요.”
박상우는 주사기 바늘이 나오는 쪽을 아래로 쥐고, 상단부에 있는 안전 캡을 땄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환자의 대퇴부에 주사기를 푹 찔러 넣고는, 딸깍 소리가 날 때까지 팔을 흔들었다.
“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제 환자분은 사실 수 있는 건가요?”
사무장은 거의 울상이 되어 버린 표정으로 물었다.
“일단 응급조치를 했으니까, 혈압은 돌아올 겁니다. 문제는 기도를 비롯한 온몸의 부종인데, 항히스타민은 없다고 했죠?”
“죄송합니다.”
난감한 듯, 사무장의 눈가에 주름이 가득 잡히는 순간이었다.
“음…… 혹시, 와인은 있습니까?”
“와인이요? 갑자기 술은 왜 찾으시나요?”
승무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군소리 말고 가져다주기나 하세요! 그게 환자를 살리는 특효약입니다. 어서 와인을 가져오세요.”
“아, 알겠습니다.”
이가 없다면 잇몸으로, 항히스타민이 없다면 케르세틴이 풍부한 와인으로 대체하려는 박상우였다.
프로보놀 구조를 가진 케르세틴(Quercetin)은 비만 세포(Mast Cell)를 안정되게 해서 극렬한 히스타민 반응을 진정시켜 주는 물질이었다. 그래서 음식 알레르기에 항히스타민제처럼 쓰일 수도 있는 물질이었다.
아직 임상 시험 단계에 있지만, 상당히 안전하고 독성도 없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효과적일 수 있었다. 박상우는 와인을 이용해 환자의 피부 발진과 입의 부종을 가라앉히려는 생각이었다.
“선생님, 여기 있습니다.”
승무원이 박상우에게 와인 두 병을 가져다주었다.
의료 키트에서 깨끗이 소독된 거즈를 꺼낸 박상우는 거즈에 와인을 흠뻑 묻혀 환자의 입가에 흘려보내 주었다.
“뭐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도 거즈에 묻혀 환자 몸 주변을 좀 닦아 주세요.”
멍하나 서서 박상우를 지켜만 보고 있던 승무원들의 모습을 본 박상우가 턱짓으로 거즈를 가리키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알겠습니다.”
승무원들은 박상우의 지시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으으으으!”
그 순간 의식이 돌아왔는지 환자가 엷은 신음을 내뱉었다. 또한, 얼굴에 조금씩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는 건, 혈압이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진입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곧 박상우의 응급조치가 효과를 봤다는 뜻이었다.
“맥박 거의 돌아왔습니다. 이제 환자분도 괜찮으실 겁니다!”
환자의 팔에 손을 올려 본 박상우는 맥박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들어 승무원들을 쳐다보았다.
“브라보!”
“만세!”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승객이 양팔을 들어 올려 소리를 지르자, 덩달아 다른 승객들 역시 환호했다.
“저,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사무장은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직 안심할 순 없습니다. 공항에 연락해서 앰뷸런스를 대기시켜 두라고 하세요. 바로 병원으로 이송해야 합니다.”
“그렇게 조치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이 환자분이 드셨다는 샌드위치 좀 부탁드립니다. 한번 확인해 볼 게 있습니다.”
“네. 승무원님, 샌드위치 좀 가져다주세요.”
사무장이 승무원에게 말하자, 승무원은 곧장 샌드위치를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승무원이 가져온 건 흔하디흔한, 참치와 채소가 섞인 평범한 샌드위치였다.
“그런데…… 이건 뭐죠?”
박상우는 샌드위치 안을 뒤적거리다가 무언가를 찾아 꺼내 들었다.
“땅콩 같은데요?”
“아니, 참치 샌드위치에 땅콩이 왜 들어간 건가요?”
“그, 글쎄요.”
그 순간, 막 깨어난 환자가 박상우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저, 저에겐 땅콩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조금은 편안해졌지만, 환자는 여전히 힘겨운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바로 이거였군요. 환자분은 땅콩 알레르기로 아나필락시스가 온 겁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땅콩 알레르기 있는 분들이 땅콩을 섭취하면, 급격히 쇼크가 오는 경우가 흔하거든요.”
박상우는 샌드위치 속에 있던 땅콩을 들어 올리며 설명했다.
“그, 그게 왜 거기 들어 있었지?”
당황한 표정의 사무장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공항에 도착하면 이 환자분이 뭘 드셨는지, 얼마나 드신 건지 정확히 기록해서 메모를 전달해 주십시오. 그리고, 에피네프린이나 항히스타민 정도는 장거리 비행에는 필수입니다. 물론 특정 음식 알레르기 반응도 미리미리 체크를 해 두십시오.”
“죄송합니다. 추후에는 꼭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저한테 죄송할 건 없습니다. 환자 분은 따뜻한 담요로 체온을 유지시켜 주시고, 항시 옆에서 증세를 확인하셔야 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증세 보이면 저한테 알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자, 잠시만요.”
박상우는 몇 가지 당부 사항을 남긴 후 자리로 돌아가려 했지만, 환자가 박상우의 팔목을 잡았다.
“아직 어딘가 불편하십니까?”
“아, 아니요.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성함이라도…….”
“박상우라고 합니다.”
“의사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은혜는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은혜라면 저분이 더 큰 역할을 하셨어요.”
박상우가 에피네프린을 건네준 노신사를 가리켰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환자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세워, 노신사를 향해 목을 까닥거렸다.
“아닙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천만다행입니다. 저 의사분이 정말 침착하게 응급조치를 하더군요. 대단했어요!”
“그런 것 같아요. 앞으로 훌륭한 의사가 될 것 같아요.”
환자는 멀어져 가는 박상우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