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118)
신의 메스-118화(118/249)
118화 새로운 세계 (4)
박상우가 도착한 곳은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Washington Dulles International Airport)으로, 워싱턴 도심에서 서쪽으로 42㎞ 떨어진 곳에 자리한 국제공항이었다.
‘이 정도면 인권 유린 수준 아니야?’
박상우는 기분이 매우 나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비행기에서 내림과 동시에 온몸을 샅샅이 수색당했으니 박상우의 기분이 유쾌할 리 없었다.
9·11사태 이후 까다로워진 입국 수속을 하느라 기진맥진해졌고, 14시간의 시차에 응급환자까지 치료했으니, 박상우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박상우가 12번 게이트를 빠져나갈 무렵이었다.
“박상우 선생님?”
마중 나오기로 한 앤드류 박을 기다리던 박상우를 향해, 조금 전에 비행기 안에서 만났던 사무장 김석현이 아는 척을 했다.
“아, 사무장님.”
“아까 공항에서 한참을 찾았는데, 어느새 안 보이시더라구요.”
김석현이 박상우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 다름이 아니라, 좀 전에 우리 승객분을 치료해 주셔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고요. 저희 항공사의 조그마한 보답이니 받아 주십시오.”
김석현은 박상우의 손에 흰색 봉투를 넘겨주었다.
“이게 뭡니까?”
“무료 항공권입니다. 나중에 필요하실 때 꼭 쓰십시오.”
“아니,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아닙니다. 다샤 씨는 우리 항공사의 VVIP 고객이십니다. 선생님이 아니셨다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김석현은 몸서리를 치며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박상우는 봉투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그분은 근처 병원으로 옮긴 겁니까?”
“조금 전에 앰뷸런스를 태워서 존스 홉킨스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모두 선생님의 덕분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가 살았어요.”
김석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존스 홉킨스? 하긴, 여기서 제일 가까운 종합 병원이 존스니까.’
“다행이군요. 그분은 뭐 하시는 분이시길래, 그렇게 특별하게 대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미국에서도 엄청난 재력가의 부인이시라고 하더라고요. 그, 뭐지? 무슨 어린이 심장 재단? 이사장이라고 하기도 하고……. 심장 재단 일로 한국에 들어오셨다는데, 하마터면 끝장날 뻔했습니다.”
김석현은 여전히 진정이 되지 않는지 횡설수설하며 설명했다.
‘어린이 심장 재단이라고? 설마 GH(Good Heart) 재단은 아니겠지…….’
미국 최대의 어린이 심장 재단 GH! 전 세계적인 자선단체로, 지금까지 아프리카부터 남미, 동남아 등 수천 명의 어린이 심장병 환자들을 무상으로 치료해 준 비영리 재단이었다. 조현오 교수의 꿈이 바로 GH 재단 같은 어린이 심장병 재단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박상우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 되시고, 저는 바빠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석현은 고개를 숙여 깍듯이 인사했다.
“아, 참! 다샤 여사 측에서 한사코 선생님의 인적 사항을 물어 오셔서, 명성병원에서 근무하시는 의사 선생님이라고만 말씀드렸습니다. 괜찮으시죠?”
김석현이 몇 걸음 걷던 몸을 돌려 박상우를 바라봤다.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좋은 여행 되십시오.”
김석현이 환하게 웃으며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박상우 앞에 차 한 대가 끼익 소리와 함께 멈춰 섰다. 연식이 적어도 10년은 넘어 보이는, 조금 낡은 중형차였다.
“박상우 선생?”
차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내렸다. 그는 존스 홉킨스 심장센터 바이스 센터장을 맡고 있던 한국계 미국인, 엔드류 박이었다. 박상우를 픽업하기 위해 공항에 온 것 같았다.
아무리 조현오 교수와의 각별한 인연이라고 해도, 한국에서 온 파견 의사를 픽업하기 위해 심장센터의 바이스 센터장이 나온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맞습니다. 제가 박상우입니다.”
각종 심장학회 세미나 및 유명 저널에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한 유명 교수였기에, 박상우가 엔드류 박의 얼굴을 모를 리 없었다.
“맞군요! 사진보다 훨씬 잘 생겼네? 저 엔드류 박이에요.”
한 손에 든 사진과 박상우의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는 엔드류 박은 박상우에게 손을 내밀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갑습니다, 교수님! 이렇게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평소에도 그를 존경하고 있었던 박상우였기에, 자연스럽게 광 팬 모드로 바뀐 그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였다.
“영광은 무슨……. 짐부터 이리 주세요.”
엔드류 박은 박상우를 향해 손을 내젓곤 짐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엔드류 받은 박상우에게서 캐리어를 받아 트렁크에 실었다. 너무도 소탈한 모습을 보여 주자, 박상우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느라 고생했어요. 타요.”
엔드류 박은 손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 내며 운전석에 앉았다.
“알겠습니다. ……저, 문이 잘 열리지 않는데…….”
아무리 손잡이를 당겨 보아도 차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 그게 좀 오래돼서 말을 안 들어요.”
엔드류 박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그가 운전석에서 한 발을 들어 문을 몇 번 걷어차자 가까스로 조수석 문이 열렸다.
“이제 됐네. 타요.”
엔드류 박은 고개를 빼꼼 내밀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허름한 점퍼 차림에 폐차 직전의 포드 차, KFC 할아버지를 연상시키는 푸근한 외모에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가 존스 홉킨스 병원 심장센터의 바이스 센터장이었다.
존스 홉킨스 병원의 심장부인 심장센터 바이스 센터장은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개교 이래 단 세 명의 한국 시민권자만이 대학원을 졸업한 학교.
수십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학교.
‘최초’라는 수식어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이 학교 부속 병원의 바이스 센터장은 아무에게나 허용되는 그저 그런 자리가 아니었다.
권위와 자부심, 부와 재력을 누릴 수 있는 그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엔드류 박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권위주의와 독선으로 점철된 국내 의학계를 볼 때, 엔드류 박의 모습은 박상우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네.”
조금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한 박상우도 문을 열고 차에 탔다.
“차가 좀 누추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박상우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우리 딸내미가 차 좀 바꾸자고 난리도 아니에요.”
“아, 네.”
“흠, 근데 아직 이놈이 쓸 만하긴 합니다. 뭐, 다니는 데 지장 없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아…… 우리끼리 있을 땐, 한국말로 해도 돼요.”
엔드류 박은 유창한 발음으로 한국어를 구사했다.
“감사합니다. 한국어도 잘하시네요?”
의외로 유창한 발음에 박상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미국에 산다고 해도, 검은 머리가 노란 머리로 변하는 건 아니니까요. 비록 내가 미국 시민권자이긴 하지만, 제 몸에 뜨거운 조선의 피가 흐릅니다.”
“그렇군요.”
엔드류 박은 박상우의 생각 이상으로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나저나, 좀 전에 보니까 상우 씨도 영어를 곧잘 하던데, 영미권에 좀 사셨나요?”
“아뇨. 한국에서 틈틈이 배워 뒀습니다.”
단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는 박상우의 발음은 독학으로 배운 영어치고는 매우 훌륭했다.
“정말? 발음이 훌륭하던데?”
엔드류 박도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박상우를 바라봤다.
“과찬이십니다.”
“아니에요. 발음이 아주 좋아요. 일단,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건 여기서 큰 도움이 됩니다.”
“그렇습니까?”
“가뜩이나 이 바닥은 인종차별이 심한 곳인데, 얼굴 누런 동양인들이 발음까지 어눌하게 하면 환자들이 말을 듣질 않아요. 대개, 주치의를 바꿔 달라고 난리를 치죠.”
“그렇군요.”
미국 의학계만큼 인종차별이 심한 분야도 없었다. 백인들의 차별은 그렇다 치더라도, 흑인과 히스패닉계의 차별과 함께 이중고를 겪어야 하는 동양계 의사들이었다.
“상우 군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의사가 ‘어, 어떻게 와, 왔습니까? 어, 어디가 아……프시나요?’ 이렇게 발음이 떠듬떠듬 어눌하면, 환자가 신뢰감을 가지겠어요?”
엔드류 박은 힐끗 박상우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신뢰가 별로 안 생기겠죠.”
박상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면에서, 상우 군은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겁니다.”
엔드류 박은 박상우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하하 웃었다.
“감사합니다.”
“자, 출발합니다! 여기서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릴 테니까, 피곤하면 눈 좀 붙이셔도 됩니다.”
엔드류 박은 뻑뻑한 소리를 내는 기어를 주행 위치에 놓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박상우가 멀뚱멀뚱 창밖을 내다보고 있자, 엔드류 박이 말을 걸었다.
“그러면 미국이 처음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흠, 고생 좀 하시겠네.”
“곧 적응되겠죠.”
“조 교수님은 여전하시죠?”
10년 전 샌프란시스코 심장학회에서 만나 지금까지 연을 유지하고 있는 엔드류 박과 조현오 교수는 박상우가 미국에 올 수 있도록 가교를 해 주었던 두 사람이었다.
“당뇨병을 좀 앓고 계신 것 말고는 괜찮습니다.”
“저런, 평생 친구를 몸속에 지니고 계시는구먼.”
엔드류 박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쯧쯧 혀를 찼다.
“혈당 조절은 잘하고 계시니 괜찮을 겁니다.”
“그래요. 워낙 철저하신 분이니까, 관리도 잘하실 겁니다. 자! 이제 도착했군요. 내리세요.”
한 시간쯤 지났을까? 쭉 뻗은 고속도로를 내달려 도착한 곳은 볼티모어로, 메릴랜드주 최대의 공업 도시이자 항구 도시였다.
엔드류 박은 다운타운 인근의 한 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이 호텔에 묵고, 내일부터는 병원 내 스텝 기숙사에서 기거하게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엔드류 박은 설명과 함께 트렁크에서 짐을 꺼냈다.
“이리 주십시오.”
그 모습에 박상우가 달려갔다.
“아, 아니에요. 멀리서 오느라 피곤할 텐데, 오늘은 제가 서비스를 좀 하지요. 내일부터 고생할 텐데…….”
엔드류 박은 고개를 내저으며, 짐을 들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박상우도 그 뒤를 멋쩍은 표정을 한 채 따라 들어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체크인을 마치고 객실로 이동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푹 쉬도록 해요.”
“볼티모어가 야경이 참 좋네요. 짐 정리하고 밖에 잠깐 나가 보겠습니다.”
박상우는 커튼을 펼치며 밖을 내려다보았다.
“야경이 멋지긴 하지.”
“네?”
“낮과 밤이 확 달라지는 게 바로 이곳입니다. 애초에 볼티모어가 워낙 위험한 도시이기도 하고, 이 주변에 슬럼가가 형성되어 있으니 함부로 돌아다니다간 총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괜히 밖에 나가지 마시고 호텔 안에 계시는 게 좋아요.”
엔드류 박이 박상우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네.”
“그러면 내일 제 연구실에서 봅시다. 살아 있으면 말이에요.”
“네?”
“농담입니다, 농담! 편히 쉬어요!”
“아, 감사합니다.”
잠시 후, 대충 짐을 정리한 박상우는 침대 위에 벌러덩 몸을 내던지곤 생각에 잠겼다.
‘세계 최고의 의학 명문, 존스 홉킨스라…….’
박상우로서도 아직 실감 나지 않는 일이었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여 보았지만, 오늘 밤은 쉬이 잠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