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119)
신의 메스-119화(119/249)
119화 헬프 미, 살려 주세요 (1)
엔드류 박과 함께 심장센터장을 만나러 온 박상우는 떨리는 마음으로 존스 홉킨스 대학 병원 심장 클리닉 센터의 원장실을 찾았다.
“어서 오세요.”
심장센터장 루카스 마틴은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선 굵고 훤칠한 외모와 깊고 푸른 눈이 인상적인, 전체적으로 잘생긴 백인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박상우도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루카스 마틴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현재 미국심장학회의 수장을 맡고 있을 만큼 명망 높은 써전일 뿐만 아니라, 6년 후인 2010년에는 노벨 의학상을 받을 석학 중의 석학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기에, 천하의 박상우라 할지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요, 제가 영광입니다. 여기 엔드류 박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서 어떤 분인가 궁금했는데, 이렇게 젊고 잘생긴 분이셨군요.”
루카스 마틴은 엔드류 박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아, 전 거짓말은 못 합니다. 제가 본 흉부외과 써전 중에선 제일 잘생긴 것 같은데요?”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카스 마틴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랐던 박상우의 얼굴도 어느새 벌겋게 달아올랐다.
동양인이란 선입견을 품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봐주는 모습이 사뭇 낯설었다.
“게다가 수련의들이 우리 과를 외면해서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능력 있는 박상우 군이 와 줘서 마음이 든든합니다.”
외과를 기피하는 현상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아무리 미국의 명문인 존스 홉킨스라 할지라도 흉부외과에 지원하는 레지던트는 많지 않았다. 물론, 흉부외과가 개설된 47개의 종합 병원에 지원하는 레지던트가 20여 명인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비교될 바가 아니긴 하지만.
20년째 레지던트를 받지 못하는 종합 병원이 한두 개가 아닌 씁쓸한 대한민국의 의료 현실이었다.
“맞습니다. NEJM에서 논문을 메인 페이지로 장식할 만큼, 상우 군은 능력이 출중한 써전이에요. 이번 상우 군의 논문을 바탕으로, 우리 병원에선 임상 시험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물론 정식 레지던트 과정을 밟아 가면서 말입니다.”
엔드류 박이 스티브 마틴에게 박상우를 추켜세웠다.
“저도 박상우 군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미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고 들었는데, 수련의 과정을 다시 시작해도 괜찮겠어요?”
루카스 마틴은 조심스럽게 박상우의 의중을 파악했다.
“상관없습니다. 선진 의료 시스템을 경험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다행이군요! 한국도 이미 의료 분야에선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걸 인정합니다. 다만, 우리 나름의 원칙과 체계가 있는 것이니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박상우 군처럼 훌륭한 인재를 우리 병원에 모시게 돼서 너무나 영광입니다.”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학연, 지연, 혈연에 점철된 우리나라 의학계.
진골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차별과 홀대를 받았던 박상우였다.
곁가지로 살며 멸시받았던 그였기에, 스티브 마틴의 진심 어린 환대에 가슴이 뭉클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앞으로 엔드류 선생이 잘 좀 보살펴 줘요. 아무래도 이곳 생활이 어색할 테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원장님.”
심장센터장 루카스 마틴과의 기분 좋은 첫 만남과 함께, 존스 홉킨스에서의 생활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 * *
며칠 동안 병원의 여러 시스템을 익히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박상우가 업무를 마치며 퇴근하려던 중, 엔드류 박이 그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오늘 저녁에 우리 집으로 와요. 애 엄마가 박 선생 환영 파티를 준비했다네요?”
“환영 파티요?”
“당연히 환영 파티를 열어야죠. 이쪽 한인회에서도 상우 씨가 존스 홉킨스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아마, 오늘 다들 모일 거예요.”
“그렇군요.”
“뉴욕이나 워싱턴 쪽엔 넘쳐나지만, 이곳 볼티모어엔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많진 않아요. 상우 군이 좋아할 만한 음식으로 준비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저녁에 들러요.”
“감사합니다. 꼭 가겠습니다.”
이례적으로 존스 홉킨스의 정식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온 박상우였기에, 한국에서와 달리 모든 사람의 관심 대상이자 화제의 중심이었다.
그렇게, 박상우는 조금씩 미국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엔드류 박의 초대로부터 한 달 후가 됐을 무렵, 본격적으로 시작된 박상우의 임무는 심장 클리닉 센터 ICU(중환자실) 근무였다. 한국에서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건 별개로, 미국에서 심장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레지던트 생활을 다시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이곳에서 성공할 것이다.’
학벌, 지연, 혈연과는 별도로, 오로지 실력만으로 자신의 능력을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지금까지 쌓아 왔던 경험과 지식이 있기에, 박상우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 * *
뭔가 미국은 특별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달리, 미국의 ICU는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는 시설이었다. ICU가 각각 독립된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말고는 말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이번 환자는 마이오카디얼 인펙션(Myocardial Infarction: 심근경색) 환자로서…….”
“식단은 환자에 신체 상태에 맞게, 앞으로 이렇게…….”
회의실에 모여 심도 있게 토론하는 의료진들의 모습은 한국에선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의사, 간호사, 약사, 심지어 영양사까지 한데 모여 수시로 논의를 한다는 것.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의사 독단으로 처리되는 일 없이, 회의를 통해 결정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선 있을 수도 없는 광경이었고, 이것이 바로 존스 홉킨스와 명성대학교 병원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금요일 밤, 휴일이었지만 특별히 할 일도 없었고, 자신이 맡은 환자의 상태도 확인할 겸 박상우는 ICU에 들렀다.
박상우가 첫 주치의로 맡은 환자는 티모시라는 이름의 60대 중반 백인 남자였다.
병명은 아올틱 애뉴리즘(Aortic Aneurysm: 대동맥류)로, 일자로 곧게 뻗어야 할 대동맥 일부분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질병이었다. 중재 수술로 부풀어 오른 부위에 대퇴동맥을 통해, 스탠트 그라프트라는 인조 혈관으로 혈관 내부를 덧댄 상황이었다. 수술은 잘 끝난 상황이었고 곧 있으면 일반 병실로 옮길 환자였다.
“하이, 티모시.”
박상우는 환자를 만나자마자 반갑게 인사했다.
“…….”
오늘이 두 번째 만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박상우와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소리 좀 들어 보겠습니다.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박상우는 침상으로 다가가 주머니에서 청진기를 꺼내 들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당장 여기서 나가, 이 원숭이 새끼야!”
그때, 티모시가 박상우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경멸의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저는 원숭이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박상우는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에도 흥분하지 않으며 침착함과 평정심을 유지했다.
박상우는 반복해서 청진기를 가져다 대 보았다.
“역겨운 손 저리 치워! 이 병원엔 대체 노란 원숭이들이 얼마나 많은 거야!”
박상우에게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티모시는 손가락으로 한쪽 눈 밑을 늘이며 더욱 모욕적인 언사로 박상우를 조롱했다.
“그렇게 원숭이를 보고 싶으시면, 빨리 나으셔서 동물원에 가셔야죠. 이러시면 평생 원숭이는커녕, 아무것도 보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티모시는 모욕적인 발언을 멈추지 않았지만, 박상우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여유로운 자세로 그를 대했다.
“꺼져! 이거나 먹고 꺼지라고! 이 노란 원숭아!”
박상우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되레 부아가 치밀어 오른 티모시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침상 밑에 놔둔 바나나를 들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박상우가 올 때에 맞춰 미리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티모시 씨, 저는 신장이 별로 안 좋아서 이렇게 칼륨이 다량으로 포함된 바나나는 먹지 않습니다. 게다가, ICU에 이런 음식물을 반입하시면 안 되죠. 이건 제가 잘 보관해 뒀다가 퇴원하시면 돌려드리겠습니다.”
박상우는 흔들림 없이 유연하게 대처하며 노련한 베테랑의 면모를 보였다.
“집어치워! 나가! 당장 여기서 꺼지라고!”
피가 올라 더욱더 붉어진 얼굴의 티모시가 박상우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티모시 씨, 일단 진료 거부로 기록해 두겠습니다. 지금 티모시 씨의 행동은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공지하며,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주치의 교체를 요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상우는 차트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 듯, 씩씩거리는 티모시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티모시 씨, 당신은 지금 심장 수술을 한 환자입니다. 이렇게 흥분하시면 건강에 해로우니까 진정하십시오. 금일중으로 주치의 교체 신청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내일 다시 들르겠습니다.”
“나가라고! 너 같은 동양인 의사는 필요 없어!”
“아, 하나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원숭이들이 적어도 싸구려 옥수수 크래커는 먹지 않습니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냉소적인 눈빛을 보이는 박상우가 그의 말을 은유적으로 맞받아쳤다.
옥수수 크래커(Corn Cracker)는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가난한 백인 농부를 비하하는 표현이었다.
“뭐? 지금 뭐라고 했어? 옥수수 크래커?”
티모시가 발끈하며 일어나려는 순간, 에에엥 하는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코드 제로, 코드 제로. 현재 원내에 있는 흉부외과 의료진들은 즉시 ER로 와 주십시오. 코드 제로, 코드 제로!”
긴급환자가 응급실로 실려 온 모양이었다.
“응급 환자가 생겨서 가 봐야겠습니다. 내일 뵙죠.”
티모시의 발언을 무시한 채, 박상우는 황급히 응급실로 향했다.
* * *
흉부외과 응급실에 다다르자, 스트레처 카에 실려 들어오는 60대 중반의 흑인 여자가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응급 환자입니다. 우리 병원 의사십니까?”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박상우의 모습에, 당직 인턴인 스티브가 그를 제지하며 물었다.
“흉부외과 레지던트 라이언 박입니다.”
박상우는 윗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라이언’은 엔드류 박이 지어 준 박상우의 미국식 이름이었다.
“그렇군요.”
신분증을 보여 주고 나서야, 스티브도 길을 비켜 주었다.
“사, 살려 주세요. 전 죽고 싶지 않아요.”
그 순간, 누워 있던 흑인 여자가 박상우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눈의 초점도 흐릿한 상황이었기에 박상우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였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녀의 손아귀가 얼마나 셌던지, 팔목이 다 시큰할 정도였다.
“시티 결과는 나왔습니까?”
손을 간신히 떨쳐 낸 박상우가 스티브에게 물었다.
“아올틱 다이섹션(Aortic Dissection: 대동맥 박리)이 의심됩니다.”
스티브가 CT 촬영 결과를 보여 주며 물었다. 그의 말대로 대동맥 박리가 틀림없었다.
CT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단순히 대동맥 박리만이 아니라는 듯, 어느 정도 파열이 진행됐는지 심장 곳곳에 피가 고여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 환자, 지금 이대로 두면 30분 이내로 죽는다!’
CT를 유심히 살펴보던 박상우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잔존 수명: 29분 23초, 22초, 21초, 20초…….]그 순간, 환자의 이마에 붉은색 숫자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박상우의 예상대로, 이 흑인 환자의 잔존 수명은 채 30분이 되지 않았다.
“지금 바로 수술을 해야겠습니다.”
“네?”
깜짝 놀란 스티브의 눈이 부릅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