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124)
신의 메스-124화(124/249)
124화 어린 왕자, 크리스 (4)
“어서 오십시오, 이사장님.”
교수진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이사장의 등장에 적잖이 놀란 모습이었다. 홍해가 갈라지듯, 이사장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좌우가 갈라졌다.
“허허, 중요한 회의를 하는데 제가 불청객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토니 이사장은 머쓱한 듯 지팡이를 짚고 앞쪽으로 나왔다.
“아닙니다, 앉으시죠.”
엔드류 박이 토니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요즘은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는군요. 무슨 말씀들을 나누고 계셨던 건지,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토니 이사장은 들고 있던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내일모레 있을 환자 수술에 관한 의견을 나누던 중입니다.”
스탠리 교수는 토니에게 다가가 양손을 모으며 공손하게 설명했다.
“5살짜리 엑토피아 코르디스(심장 전위증) 환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심장이식 수술부터 인조 심장 수술 등, ‘최초’라는 수식어를 수도 없이 가지고 있는 토니의 업적은 대단함을 넘어 경외심까지 불러일으켰고, 그렇기에 토니 이사장은 모든 써전들의 우상이자 전설이었다.
그런 그 역시, 크리스 수술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네. 크리스 군 수술 절차에 대해 협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웠던 거죠?”
“조금 문제가 생겨서, 의견을 교환하는 중이었습니다.”
“의견 교환이라……. 표준 절차를 밟아서 원칙에 맞게 수술하면 되는데, 이렇게 소란스러울 이유가 있을까요? 밖에서 들어도 시끄럽던데 말입니다.”
토니 이사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게…… 중요한 이슈가 하나 생겨서 그렇습니다.”
스탠리 교수의 표정이 잔뜩 굳어져 있었다.
“이슈요? 설명을 좀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알고 싶군요.”
토니의 말에, 스탠리 교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이내 열었다.
“사실, 수술 과정을 협의하는 과정에 중요한 변수 하나가 생겼는데…….”
스탠리 교수는 크리스가 파브리병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박상우의 발언을 조심스레 설명했다.
“그렇군요. 그래서 회의실 안이 소란스러웠던 건가요?”
토니 이사장은 솜사탕처럼 하얀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리를 해야 했는데…….”
스탠리 교수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스탠리 교수가 미안해할 건 없습니다. 그러니까, 라이언 선생의 말은 크리스 군이 파브리병을 앓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으니, 수술을 연기하자는 거죠? 맞습니까?”
토니 이사장은 박상우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맞습니다. 다만, 아직 확인된 바는 없는 상황이라…….”
“그런데, 이상하군요. 왜 라이언 선생의 진단이 이슈가 되어야 하나요?”
토니는 스탠리 교수의 말허리를 냉정하게 잘라 버리며 물었다.
“그, 그게…….”
스탠리 교수는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루카스 교수님.”
토니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있던 루카스 교수를 쳐다봤다.
“네, 이사장님.”
“뭐가 문제라는 거죠? 왜 라이언 선생의 진단이 문제가 된다는 겁니까?”
“그, 그게…….”
루카스 교수 역시 곧바로 응대할 수 없는지, 우물쭈물하며 얼굴을 붉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라이언 선생도 우리 병원의 의사 아닌가요? 그의 진단에 근거가 있다면, 왜 라이언 선생의 발언을 무시하는 걸까요?”
토니 이사장은 의료진들을 날카롭게 응시하며 물었다.
그러나 다들 아무 말 없이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크리스 군이 파브리병에 걸렸다면 수술을 미루는 것이 맞는 건가요, 틀린 건가요? 리암 교수님, 말씀해 보세요.”
의료진들을 향해 냉소적인 시선을 흩뿌리던 토니 이사장이 리암 교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
뜻밖의 질문에 리암 교수는 입을 열지 못했고, 벌게진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게 뭐 어려운 질문이라고 그렇게 묵묵부답입니까? 말씀해 보세요. 크리스 군이 파브리병을 앓고 있다면 무리하게 수술을 강행해야 하느냔 말입니다. 아니면, 수술을 연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크리스 군의 검사부터 하는 게 맞지 않는지 묻고 있습니다!”
토니 이사장은 답답함을 숨기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크리스 군이 파브리병을 앓고 있다는 확진이 되면, 가장 먼저 병을 완화시킨 후에 수술하는 것이 맞습니다. 감염이나 부작용의 가능성이 크니까요.”
그제야, 리암 교수도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죠? 근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겁니까? 크리스 군의 유전자 검사를 해서 파브리병이 확진된다면 그 치료를 우선해야죠. 그게 합리적인 순리 아닙니까?”
토니는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그, 그래도, 이번 수술은 국내 모든 의학계가 주목하고 있고, 언론 또한 초미의 관심사인 데다가……. 일개 레지던트의 말만 믿는다는 것이…….”
리암 교수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우물쭈물 말을 더듬었다.
“일개 레지던트여서가 아니라, 동양인 라이언이 한 말이라 그렇겠죠! 아닙니까?”
토니 이사장이 리암 교수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그,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으세요.”
근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토니 이사장은 지팡이를 짚고 단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망나니가 메스를 잡으면 사람을 죽이고, 의사가 메스를 잡으면 그 사람을 살리는 겁니다. 라이언 선생의 국적이 어디든, 그의 직위가 무엇이든 간에, 라이언은 크리스의 주치의입니다. 그가 크리스 군의 신변에 이상을 감지했다면 당연히 경청하고 확인해야죠. 이런 식으로 담당 주치의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려서야 되겠습니까?”
근엄한 목소리가 회의실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
의료진들은 고개를 숙인 채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에만 바빴다.
“우리 병원은 환자를 이용해 장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크리스 군을 살리는 것이 우선입니까? 아니면, 매스컴을 통해 장사하려는 것이 우선입니까? 말씀들 해 보십시오.”
토니 이사장은 안경을 벗더니 냉소적인 시선으로 주변을 응시했다.
“다 제 불찰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나무라려는 건 정말 아닙니다.”
토니 이사장은 스탠리 교수의 사과에 고개를 내저었다.
“라이언 선생, 한국의 속담에 ‘세 살짜리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토니 이사장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박상우에게 말을 걸었다.
“맞습니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 해서,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한자성어입니다.”
“그렇군요. 저도 참 좋아하는 문구입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그리고 그 답이 맞는다면, 편하게 인정하세요. 그 사람이 나이가 어린 사람이든, 동양인이든 상관없는 겁니다. 여러분, 여기는 사람의 병을 고치는 병원이지, 물건을 파는 마트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토니가 단상에서 내려왔다.
“…….”
쑥스러운 듯, 의료진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파브리병이 맞다면 뭐…… 당연히 수술은 연기해야 하는 것 아냐?”
“맞아. 괜히 수술했다가 실패하기라도 하면…….”
조금 전까지와 비교하면 180도 바뀐 상황이었다. 그만큼 토니 이사장 이사장의 권위는 대단했다.
그렇게, 박상우를 향해 성토했던 의료진들의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라이언 선생!”
다들 천천히 회의실을 빠져나갈 무렵, 토니 이사장이 발길을 멈춰 뒤를 돌아봤다.
박상우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네?”
“내가 라이언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어요?”
“저녁이요?”
뜻밖의 식사 초대에 깜짝 놀란 박상우가 되물었다.
“우리 마나님이 라이언 선생한테 큰 은혜를 입었다고, 입이 닳도록 라이언 선생을 모셔오라고 성화여서요.”
“은혜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박상우는 아직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쯧쯧. 라이언 선생 아니었으면, 하마터면 홀아비가 될 뻔했어요.”
“……혹시, 사모님의 성함이 다샤인가요?”
박상우는 ‘알레르기’란 단어에 비행기에서의 일을 퍼뜩 떠올렸다.
“맞아요, 다샤! 그 여자가 제가 17살에 만난 제 첫사랑이죠!”
토니 이사장은 목젖이 드러나도록 크게 웃었다. 비행기 안에서 박상우가 목숨을 구해 준 여자는, 다름 아닌 토니의 아내이자 GH(Good Heart)재단을 맡고 있는 다샤 이사장이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마이클은 빠글빠글한 머리를 움켜쥐며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박상우는 또 한 명의 소중한 인연을 만들 수 있었다.
* * *
며칠 후, 혈액 검체를 이용한 DBS(Dried Blood Spot) 검사 결과 크리스는 파브리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심장 수술보다 먼저 파브리병을 치료하기로 하였다.
흉부외과 병동에서 유전자 센터로 옮기 크리스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인 다나 역시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았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지금까지 여성의 경우는 단순 보인자만 존재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의학 유전자 센터의 엠마 교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결과지를 살펴보며 연신 놀라움을 표현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라이언의 말대로, 보인자가 아니라면 학계에 보고될 내용이에요. 라이언 이 친구, 완전히 괴물이네요.”
곁에 있는 에릭 교수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재만 해도 파브리병의 유전 변이를 가진 여성을 환자가 아닌 단순 ‘보인자’로 생각했으니, 다나가 남성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증세를 보인다는 것을 밝혀낸 것은 매우 놀라운 발견이었다. 지금도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ERT 치료를 해야겠죠?”
“당연하죠.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것 아닙니까?”
ERT(Enzyme Replacement Therapy)는 ‘효소 대체 요법’으로, 파브리병을 치료하는 유일한 치료법이었다.
“하지만 정맥 주사 형태라, 환자가 2주마다 내원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죠.”
“그래서 말인데…… 그걸 경구용으로 만들면 어떨까요? 효소가 완전히 고갈된 환자에게는 해당되지 않겠지만, 크리스같이 일부 효소가 생성되는 환자일 경우는 경구용 치료제가 더욱 효율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와우!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군요. 우리 센터에서 적극적으로 연구해 봅시다. 그나저나, 이런 훌륭한 생각을 어떻게 하셨어요? 경구용 치료제가 나오게 되면 굉장히 효과적일 겁니다.”
엠마 교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흠, 그, 그게…… 그냥 뭐, 파브리병을 연구하다 보니…….”
에릭 교수는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박상우가 에릭 교수에게 제안한 치료법.
현재로선 굉장한 반향을 일으킬지도 몰랐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박상우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