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159)
신의 메스-159화(159/249)
159화 가난한 예술가 (3)
“아닙니다.”
“그래도…….”
“하하하, 정 그러시면 나중에 제 그림도 한 장 그려 주세요. 초상화를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거야 당연하죠. 제가 어떻게 선생님의 은혜를 잊겠습니까? 한 장이 아니라 100장이라도 그려 드리겠습니다.”
“하하,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혹시 저도 그림을 좀 볼 수 있을까요? 민우가 워낙 자랑을 많이 해서 너무 궁금합니다.”
“아이고, 이 녀석이 별것도 아닌 거로 선생님을 귀찮게 해 드렸나 보네요. 그거야 어려울 것 없죠. 화랑에 연락해서 표구를 좀 해서…….”
“아뇨, 지금 바로 그려 주실 건 없어요. 그냥 그림만 보고 싶어서요.”
“아, 그렇다면야. 내일 당장이라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전인수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 * *
박상우는 전인수의 병실에서 나와서 자신의 연구실로 발길을 옮기던 중, 백설아 간호사를 만났다.
“교수님!”
그녀는 박상우를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번에 입원한 전인수 환자 병원비, 교수님께서 보증해 주셨다는 소문 들었어요. 정말 멋지세요!”
백설아 간호사는 엄지를 추켜세우며 싱그러운 보조개를 보여 주었다.
“소문이 벌써 났어요?”
“네, 다들 대단하다고 난리예요.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정말 최고세요.”
백설아 간호사는 수줍은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별일도 아닙니다. 그냥 강박관념처럼, 내 환자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어서 그랬어요.”
박상우는 짐짓 시큰둥한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와, 멋지다! 교수님, 전 이렇게 시크하게 웃으시는 게 너무 멋져요. 잠시만요!”
백설아 간호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박상우의 옷소매를 끌어당기곤 황급히 비상구 쪽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교수님,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되세요?”
“별일 없긴 한데, 왜요?”
“혹시 시간 되시면, 저랑 음악회 보러 가시지 않을래요? 친구가 서울 시향에 있는데, 연주회 티켓을 줘서요.”
그녀는 연주회 티켓을 들어 올리며 방긋 웃었다.
“전 클래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저보다는 다른 분들과 가는 편이…….”
“그래서 하는 연주회예요. 클래식을 대중에게 알린다는 의미로, 유명한 팝이나 가요처럼 친숙한 곡을 연주한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같이 가요, 교수님! 저도 예전에 가 봤는데, 클래식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고요.”
백설아 간호사는 말끝을 살짝 올리며 콧소리를 냈다.
“난 소음하고 음악도 잘 구별하지 못하는데…….”
박상우는 연신 난색을 보였다.
“같이 가요, 교수님! 네? 이미 교수님 모시고 가겠다고 친구한테도 말했단 말이에요. 그 친구가 교수님 팬이거든요!”
“네? 제 팬이요?”
“예전에 에이즈에 걸린 환자를 수술하시면서, 한창 화제가 되셨었잖아요. 그때부터 교수님 팬이 된 친구인데, 제가 교수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니까 꼭 같이 와 달라고 어찌나 떼를 쓰던지……. 그래서 이번엔 꼭 모시고 가겠다고 했어요. 같이 가요, 네?”
백설아 간호사는 박상우의 양팔을 붙잡고 흔들어 댔다.
“하아, 난감하네요. 알겠어요. 특별한 일 없으면 그렇게 해요. 언제죠?”
“정말이죠? 이번 주 토요일 오후 4시예요. 장소는 서조동 예술의 전당이고요. 그러면, 표는 교수님이 가지고 있어 주세요.”
“이걸 왜 나한테 줘요.”
“그거 없으면 저도 못 들어가니까 알아서 하세요. 혹시 몰라서 저당 잡아 놓는 거예요.”
그녀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폭 파인 보조개는 언제나 보는 사람에게 청량감을 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와! 신난다! 그러면 3시 반에 크리스털 홀 앞에서 봬요.”
“그래요.”
“저 먼저 가 볼게요, 교수님!”
백설아 간호사는 뛸 듯이 기뻐하며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갔다.
* * *
“뭐야, 박상우!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백설아 간호사가 나간 후, 박상우는 한 템포 늦게 문을 열고 나오다가 그 모습을 우연히 천기수에게 들켜 버렸다.
“뭐, 뭐가?”
“아니, 너 지금 딱 걸렸어. 지금 백 선생이 거기서 나오고 딱 10초 만에 네가 나왔어. 지금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천기수는 가자미눈을 뜨며 박상우를 흘겨보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연히 비상구 계단에서 만났을 뿐이야.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아니야. 이거 달달한 냄새가 코끝에 진동하는 걸 보니, 수상해. 솔직하게 말해라. 나중에 걸리고 나서 개망신당하지 말고.”
“미친놈, 그럴 시간 있으면 환자라도 한 번 더 봐라. 난 과장님이 찾으셔서 먼저 간다.”
박상우는 몸을 돌려 허리춤에 감췄던 티켓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딱 걸렸어. 내가 너 밥 먹을 때, 무슨 반찬에 제일 먼저 젓가락이 가는지까지 다 아는 놈이야. 어딜 나를 속여? 지금 저 주머니에 뭘 쑤셔 박은 거지? 아무래도 냄새가 나, 냄새가!”
천기수는 매의 눈으로 박상우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연신 중얼거렸다.
* * *
이틀 후, 박상우는 전인수 병실 다시 찾았다.
“선생님, 정말 이 그림 하나만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전인수는 박상우에게 약속한 것처럼, 황금색 보자기로 곱게 싸인 그림 한 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요. 충분합니다. 제가 풀어 봐도 되나요?”
“당연하죠.”
보자기를 풀고 그림을 보자마자, 박상우의 눈동자가 부풀어 올랐다.
“와, 멋지네요! 제가 비록 그림에는 문외한이고 무식해서 미술적으론 잘 모르지만, 적어도 환자분이 민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잘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세상 해맑은 미소를 띤 채로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있는 민우의 초상화. 미술적 가치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린 사람의 정성과 사랑이 묻어나는 그림이었다.
“어느 아빠들인들 저와 다를까요. 애 엄마를 일찍 보내고 혼자 키운 불쌍한 녀석이죠. 저 녀석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미네요.”
전인수는 어느새,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니까 더욱더 힘을 내셔서 빨리 건강을 회복하셔야죠.”
안타까운 마음에 박상우는 전인수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이왕 이렇게 선생님께 큰 신세를 진 거, 저도 한번 살아 보겠습니다. 그래야 선생님께 은혜도 갚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은혜는요, 무슨! 전 그저 제가 맡은 환자를 치료할 뿐입니다. 그나저나, 이 그림을 진짜 제가 가져도 되나요? 소중한 아드님의 초상화인데.”
박상우는 그림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물론이죠. 그림이 아니라 간을 빼 달라고 한들, 제가 주저하겠습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그림이 너무 맘에 드네요.”
“마음에 드신다니 저도 정말 다행입니다.”
전인수는 그제야 작게 미소를 띠어 보였다.
* * *
박상우는 진료를 마치고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와, 바닥에 놓은 그림을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해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컴퓨터를 켜고 누군가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띠리리링!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왔다.
-오, 아들! 보내 준 사진은 잘 봤어.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존스 홉킨스 이사장의 아내, 다샤였다. 박상우를 ‘아들’이라고 부를 만큼,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가까웠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박상우 역시 그녀를 양모로 받아들였다.
“어떠세요, 이 그림?”
워낙 그림에 조예가 깊은 그녀였기에, 박상우는 전인수의 그림 감정을 부탁했다.
“아주 멋진 그림이야. 사진으로 봐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아이의 미소, 그리고 절묘한 포즈도 참 좋아. 게다가 빛의 각도와 강도에 따라 미묘하게 변화를 준 색감이 대단해! 누가 이런 멋진 그림을 그린 거지?”
“그렇게 좋은 그림인가요?”
“그럼, 대단하고말고! 마치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의 ‘두 자매(Two Sisters)’를 본 느낌이랄까? 어쨌든,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누구야?”
다샤의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었다.
“아, 그게 사실은…….”
박상우는 다샤에게 전인수가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뭐? 이런 훌륭한 그림을 그린 화가가 수술비가 없어 생사가 위태롭다니! 말도 안 돼!”
다샤는 어이없다는 듯 짧게 탄식하곤 소리를 내질렀다.
“그래서 말인데요, 어머니. 이 그림이 그렇게 예술적 가치가 높은 그림인가요?”
“당연하지! 이 그림은 내가 욕심이 다 날 만큼 멋진 그림이야. 지금 당장 갤러리에 올려놔도 100만 불은 받을 수 있는 그림이지.”
“그러면, 제가 이 그림을 미국으로 보내 드릴 테니까, 그림 감정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혹시 돈이 된다면 팔아 주셔도 좋습니다.”
“그냥, 이 그림은 내가 구매하면 안 될까?”
“안 돼요.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평단에서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거든요. 어머님이 아시는 갤러리에 정식으로 올려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흐음, 그래. 내가 잠시 그림에 눈이 멀었구나. 이런 그림일수록 많은 사람이 보고 감동해야겠지. 오케이! 내가 뉴욕에 있는 리버 하우스 관장을 한번 만나 볼게. 그림은 최대한 빨리 보내 주렴.”
‘리버 하우스’는 미국 최고의 갤러리란 명성이 자자한 곳으로, 댜샤의 친구인 미쉘 팰트로가 관장으로 있는 갤러리였다.
“알겠습니다.”
‘돈을 벌자고 마음먹었으면 스포츠 토토를 하든 주식을 하든, 아니면 로또를 사든 수십억, 수백억을 벌 수도 있었어. 하지만 기적적으로 다시 얻은 2회차 인생을 결코 헛되이 보내고 싶진 않아.’
박상우가 전인수의 그림을 탐낼 이유는 전혀 없었다.
* * *
“조심히 다뤄 주세요. 귀한 물건이니까, 흠집 나지 않게 신경 써 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박상우는 다샤가 섭외한 전문 운송 업체를 통해 그림을 보냈고, 그로부터 며칠 후 토요일.
단 1분도 늦지 않게, 3시 30분에 정확히 예술의 전당에 도착했다.
박상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백설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어머, 교수님! 수트가 너무 잘 어울리세요! 너무 멋져요!”
멀리 박상우가 보이자 단숨에 달려온 백설아가 환하게 웃었다.
“그, 그래. 백 선생도 다른 사람 같네.”
박상우는 붉어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에 붉은색 립글로스로 포인트를 준 옅은 색조 화장을 한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톡 터질 것처럼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매번 화장기 없는, 올린 머리에 유니폼만 입은 모습을 본 박상우였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요? 저 예뻐요?”
싱그럽게 웃는 그녀의 양 볼에 보조개 꽃이 피었다.
“어? 어어. 난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호호호, 저예요. 저!”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병원에서 보였던 침착하고 냉정했던 그녀와 180도 다른, 청순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럼 얼른 안으로 들어가요. 교수님!”
그녀의 팔이 순식간에 박상우의 겨드랑이를 파고들었다. 박상우는 의도치 않게, 뭔가 물컹거리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어? 그, 그래.”
백설아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목까지 빨개진 박상우를 잡아끌었다.
잠시 후,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자 가요와 팝의 명곡이 크리스털 홀을 가득 채웠다.
“Mother Mary comes to me~!”
익숙한 곡이 흘러나오자, 여러 청중이 어깨를 들썩이며 호응해 주었다.
“교수님, 오늘 여기 오시길 잘했죠?”
팔꿈치로 박상우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던 백설아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물었다.
‘정말 병원에서와는 다르군. 이 사람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그 모습을 보곤, 박상우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