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179)
신의 메스-179화(179/249)
179화 환자는 환자일 뿐 (2)
천기수는 지원 차, 평소에 친분이 있던 정형외과 과장 윤민욱 교수를 찾았다.
“이봐, 천 교수. 아무리 지 원장의 제자라고 해도, 이번에 과장은 박 교수가 되어야 하는 것 아냐?”
윤민욱 교수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물었다.
“물론이죠. 레퍼런스나 수술 성공률, 학회 논문 게재 수, 기타 등등…… 어디 하나 밀리는 것도 없고. 박 교수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죠.”
천기수 역시, 박상우가 흉부외과 수장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물론 홍 교수가 우리 학교 출신이고, 심장 이식 쪽으로 나름의 강점이 있다고는 해도, 박 교수에게 비빌 정도는 아니지. 만약 박 교수가 흉부외과 수장이 된다면, 우리 병원 개원 이래 최초로 다른 학교 출신 과장이 되겠군. 우리 병원 역사를 박 교수가 다시 쓰겠어.”
“정말요? 다른 학교 출신은 과장으로 선출된 적이 없었어요?”
천기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단 한 번도 없었지. 뭐, 예전에 한두 차례 그럴 뻔했는데, 그때도 마지막엔 고배를 마셨지, 아마?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병원이 어디 그렇게 녹록한 곳인가?”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그래도 이번에는 좀 다를 거예요. 박 교수가 워낙 빛이 나야 말이죠. 교수님도 한 표 주시는 거죠?”
천기수가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어허, 이 사람, 이거 불법 아닌가?”
“에이, 불법은 무슨 불법이에요? 될 사람을 밀어주자는 거죠.”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수들이 찍어 줄 텐데 뭘.”
“그래도, 만사 불여튼튼이라 했습니다. 한 표 꼭 부탁합니다.”
“천 교수, 이렇게 대 놓고 선거운동하면 원장한테 밉보이는 거 아냐? 괜히 나서지 말고 조용히 있지 그래?”
윤민욱 교수가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보였다.
“저처럼 새털같이 가벼운 사람한테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가뜩이나 박봉으로 힘들어 죽겠는데, 잘리면 개원이나 하죠.”
“개원은 뭐 쉬운 줄 알아? 괜히 눈에 띄어서 불이익당하지 말고 자중하게나.”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수님의 소중한 한 표, 의미 있게 행사해 주시길 바랍니다.”
천기수는 윤민욱 교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알았다고! 나중에 술 한잔 거하게 쏘는 거야?”
“물론이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극정성으로 박상우의 로비에 앞장선 마당발 천기수 덕분에, 분위기는 천천히 박상우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 * *
마침내 다가온 흉부외과 과장 선출 투표일.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명성병원의 교수들이 대회의실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야, 이게 누구야? 너 정말 내 친구 박상우 맞냐?”
박상우가 시크한 검정 슈트를 차려입고 있자, 그의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온 천기수가 너스레를 떨었다.
“괜찮아? 정장은 거의 입어 보질 않아서 어색하네.”
“멋져! 졸라 간지난다. 그나저나, 얼굴색이 왜 그래? 떨리냐?”
천기수는 박상우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며 물었다.
“뭐, 약간…….”
박상우도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사람은 사람인가 보다. 천하의 박상우가 긴장을 다 하고.”
“그러게 말이야. 별생각 없었는데, 막상 투표일이 오니까 긴장이 좀 되네.”
“걱정 마라. 오늘의 주인공은 너니까, 취임사나 잘 생각해 둬. 버벅거리지 말고, 내 이름 석 자 넣어 주는 것도 잊지 말고.”
천기수는 박상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긴장을 풀어 주었다.
“그래, 최선을 다해야지. 이만 가자.”
“알겠습니다요, 박상우 과장님!”
“과장은 무슨 과장이야, 아직 투표도 안 했는데.”
“된 거나 다름없어. 늦겠다, 가자.”
연구실에서 나온 박상우와 천기수는 본관 10층 대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제부터는 박 과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복도에서 마주친 신경외과 박현중 교수가 박상우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 아닙니다. 교수님!”
갑작스러운 상황에, 박상우는 정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허허, 그렇게 겸손할 것까진 없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역대 최연소 과장으로 등극하는 건가?”
그 누구도 박상우의 당선을 의심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박상우와 다른 후보, 홍성주 교수의 출마 입장 발표가 끝난 후 투표가 시작되었다. 투표권을 가진 교수들이 하나둘 투표소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투표함을 개표하겠습니다!”
모든 투표가 마무리된 시점, 분위기는 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투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총투표 인원 103명 중 기권 13명, 유효 투표수 90명으로, 투표 결과는…….”
모든 개표가 완료되고, 결과는 인사관리 위원장인 홍장현의 손에 넘겨졌다. 모든 교수의 시선이 그의 입을 향했다.
홍장현 위원장은 전달받은 메모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몇 번의 헛기침이 있고 난 후, 홍장현이 투표 결과를 발표했다.
“결과는…… 박상우 교수 44표, 홍성주 교수 46표. 2표 차이로 홍성주 교수가 차기 명성병원 흉부외과 과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웅성웅성!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개표 조작’을 외칠 것 같은 상황이었으나,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기에 축하 박수조차 터져 나오지 않았고, 모두 박상우의 표정만 힐끗힐끗 훔쳐보고 있었다.
“이게 말이 돼? 개표 오류가 있었던 것 아니야?”
“그러게 말이야. 이건 좀 심한데……. 홍성주 교수를 찍은 사람이 이렇게 많다고?”
“기권은 또 왜 이렇게 많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나?”
“그러게 말이야. 나도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홍성주를 찍었다는 교수들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으나, 흉부외과 과장 자리는 그의 몫이 되었다.
“위원장님, 이의 있습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천기수가 번쩍 손을 들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개표 상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니, 양측의 참관하에 재검표를 요청합니다.”
“기수야, 됐어.”
“아니, 이대로는 못 물러나지! 시팔, 2표 차라는 게 말이 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승인하겠습니다. 양 측 참관인,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천기수와 함께 홍성주 교수 측의 참관인을 중심으로 검표를 다시 시작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이게 뭐야…… 말도 안 돼!”
모든 투표용지를 확인한 천기수는 안경을 벗더니 허탈한 표정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참관인은 모든 확인을 마치셨습니까?”
“네.”
“네.”
“그러면, 다시 발표하겠습니다. 차기 흉부외과 과장으로 홍성주 교수가 당선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인사관리 위원장이 의사봉을 힘차게 내리쳤다.
짝, 짝짝, 짝짝짝.
박수 소리가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홍성주 교수님, 단상으로 올라오셔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네, 위원장님.”
짝짝짝짝!
박상우가 그를 향해 박수를 보내고 나서야,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어,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와서 사실 얼떨떨합니다.”
홍성주 교수는 단상에 올라가, 상기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야, 정말 괜찮은 거야?”
그 모습을 보고, 천기수가 박상우의 팔을 툭 건드렸다.
“그럼 어떡해? 단상에 올라가서 이건 음모라고 소리칠까? 괜찮아. 네가 신경 많이 써 줬는데, 그건 좀 미안하게 됐네.”
오히려 박상우가 천기수를 위로해 주었다.
“아, 시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기권표가 왜 이렇게 많아? 이번 투표는 분명히 우리가 이기는 판이었는데, 도대체 원장 이 늙은 여우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천기수는 뒷머리를 거칠게 긁적거리며 짜증을 냈다.
* * *
흉부외과 과장 선출일로부터 일주일 전.
지동철 원장은 김 실장과 함께 선거의 판세를 확인했다.
“김 실장, 지금 상황이 어떤 것 같습니까?”
“아무래도 박상우 교수의 당선이 유력해 보입니다. 워낙 유명세가 높은 사람이라, 이변이 없는 한…….”
“그래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이상하군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심각한 표정의 김 실장과 비교하면, 지동철 원장의 표정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홍 교수가 대외적으론 이름값이 있다 해도, 외부에서 영입된 인재라지지 기반이 없는 데다가…….”
“예전에 아돌프 히틀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지동철 원장은 뜬금없이 아돌프 히틀러를 들먹였다.
“글쎄요.”
“‘생각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그들을 관리하는 정부에게는 얼마나 좋은 일인가?’라는 말을 했죠.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지동철 원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김 실장을 응시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차차 아시게 될 겁니다. 자, 이 자료를 참고해서 활용해 보세요.”
지동철 원장은 테이블 위에 서류뭉치를 툭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게 뭡니까?”
“정형외과와 신경외과, 그리고 어디더라? 비뇨기과 쪽 일부 교수들 자료인데, 티 나지 않을 만큼만 많이들 해 드셨던데?”
지동철 원장은 서류를 이리저리 들춰 보았다.
“아! 이런 방법이 있었군요? 정형외과와 신경외과면, 아무래도 박 교수의 지지 기반인데…….”
이제야 이해가 되는 듯, 김 실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거야, 김 실장이 알아서 판단하시면 됩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생각이 많으면 못 써요. 생각을 비우기 가장 좋은 방법은 권리를 포기하는 거겠지요?”
지동철 원장은 목젖이 훤히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원장님, 한 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 박상우 교수를 그토록 미워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게 궁금합니까?”
지동철 원장은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솔직히 박 교수가 실력도 있고, 원내에선 신망도 두텁잖아요? 게다가, 대외적으로 우리 병원을 위해 공헌한 바도 크지 않습니까?”
“미워하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전 박 교수를 미워하지 않아요.”
지동철 원장은 고개를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그, 그러면 왜……?”
“미워한다는 감정도, 그 사람에게 애정이 있을 때나 나오는 감정 아닙니까? 난 박상우 같은 자가 싫습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싫어요. 그를 보고 있으면 온몸의 세포가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게 뭐, 문제가 될까요?”
지동철 원장은 미간을 좁히며, 김 실장을 섬뜩하게 응시했다.
“아, 아닙니다.”
“그래요. 난 그자가 흉부외과 수장이 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니까, 알아서 잘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원장님.”
“언감생심입니다. 기껏해야 곁가지 주제에, 감히 어울리지도 않는 자리를 넘봐?”
지동철 원장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 * *
“박 교수님,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왔군요.”
홍성주 교수는 박상우에게 다가와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하다뇨?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앞으로 우리 흉부외과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감사드립니다. 제가 아는 게 많지 않아서, 박 교수님께서 잘 좀 도와주십시오.”
홍성주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 박상우에게 악수를 청했다.
“네.”
박상우는 짧게 답하며 손을 마주 잡았다.
이렇게, 윤상부 교수의 은퇴 선언으로 공석이 되었던 차기 흉부외과 과장 선거는 커다란 이변을 낳은 채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 * *
선거가 끝난 후, 지동철 원장은 박상우와 홍성주를 자신의 집무실로 호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