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183)
신의 메스-183화(183/249)
183화 환자는 환자일 뿐 (6)
띠띠띠띠!
조용한 중환자실에선 기계음만 울리고 있었다.
환자의 온몸을 뱀처럼 휘감은 각종 선이 보였다.
지동철 원장의 딸, 지윤정은 여전히 산소마스크에 의지한 채 잠들어 있었다. 대수술을 치른 그녀는 한눈에 봐도 매우 수척했다.
“환자 몸 상태는 좀 어때?”
중환자실에 온 박상우는 당직을 서고 있던 김민준의 어깨를 툭 치며 지윤정의 상태를 물었다.
“교수님 오셨어요? 조금 전까진 잠도 못 들고 괴로워하다가, 진통제를 맞고 겨우 잠들었습니다. 생각보다 굉장히 힘들어하네요.”
김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으니, 당연히 그렇겠지. 바이탈은 어때?”
“아직 스폰테니어스 레스피레이션(Spontaneous Respiration: 자가 호흡)을 할 단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군. 소변은 잘 보나?”
“아뇨, 아직은……. 생각보다 회복이 더디네요.”
김민준은 차트를 다시 한번 살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번 볼까?”
박상우는 청진기를 꺼내 들고 지윤정의 가슴에 대 보았다.
“렁(폐) 사운드도 별로 좋지 않네. 아직도 부종이 좀 남았나 보군.”
박상우는 청진기 소리를 들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기는 어느 정도 가라앉은 것 같은데, 아직 폐에 물이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김민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차트를 확인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민준의 말에, 박상우가 질문을 툭 던졌다.
“라식스(이뇨제의 일종)를 투여해서 심장의 부담을 줄여 줘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김민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굿! 맞는 말이야. 그래야 풀모너리 에드마(Pulmonary Edema: 폐부종)도 가라앉을 거야. 수술은 잘 끝났으니까, 약 쓰면서 좀 더 상황을 지켜보자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수술의 후유증인지 환자가 가끔 딜리뤼움(Delirium: 섬망)을 호소합니다.”
“심장 수술을 받는 경우엔 가끔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도 해. 크게 문제 될 건 없으니까, 혹시라도 발작이 심하면 아티반(Ativan: 진정제) 투여해 줘. 내성이 생길 수 있으니까 자주 쓰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아직 나이도 어린 환자인데, 후유증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김민준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최선을 다했으니까, 나머지는 오롯이 이 환자의 몫이야. 우린 환자가 회복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돕기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교수님.”
“그럼 수고하고. 아, 그런데 잠은 제대로 자는 거야? 한두 시간도 못 잔 거 같은데? 얼굴도 누렇게 뜨고 말이야.”
박상우는 김민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펠로우 생활이 다 그렇죠, 뭐. 그래도 두 시간보다는 더 자고 있습니다.”
김민준은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정도면 양호하네. 나 때는…….”
“격일로 두 시간씩 주무셨다는 말씀을 하시려고 했죠?”
김민준은 박상우의 말을 재빨리 가로챘다.
“어? 어떻게 알았어?”
“맨날 천 교수님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잖아요.”
김민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여간 그 인간은……. 오늘도 수고하고, 가능하면 4년 차 애들하고 교대도 하고 그래. 밥도 잘 챙겨 먹고. 계속 그러다간 못 버티고 쓰러진다? 우린 아프면 안 되는 사람들이야.”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교수님…….”
김민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뗐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면 커피 한잔하실 수 있으십니까?”
“지금?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박상우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특별한 건 아니라서, 잠시면 됩니다. 저도 당직을 서야 하니까요. 괜찮으시다면 시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환자도 안정적인 것 같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당이 떨어져서 기운이 없었는데, 달달한 다방 커피나 한잔할까?”
“네, 교수님.”
“좋아, 내 연구실로 가지.”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중환자실에서 빠져나와, 박상우의 연구실로 향했다.
* * *
“교수님, 둘둘둘 맞죠?”
김민준은 언제나 그랬듯, 익숙한 솜씨를 커피를 탔다.
“오케이!”
김민준은 들고 온 커피를 박상우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교수님, 여쭤보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역시 밤에 마시는 커피는 다방 커피가 최고야.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표정이 비장해? 말해 봐.”
박상우는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홀짝거리며 물었다.
“원장님도…… 이젠 교수님 능력을 인정하시겠죠?”
김민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왜? 내가 윤정 양을 살려서? 자신의 딸을 살려 줬으니 이제는 그만 괴롭힐 거다, 뭐 그런 말인가?”
박상우가 커피를 홀짝거리며 피식거렸다.
“아닐까요? 무남독녀에 금쪽같은 딸을 살려 줬는데……. 이젠 조금 달라지시겠죠. 원장님도 양심이 있다면 말입니다.”
김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과연 그럴까?”
하지만 박상우의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솔직히, 이 상황에서도 교수님을 괴롭히면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 딸의 생명의 은인인데요.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아무 이유 없이 홀대하는 건 하지 말아야겠죠. 지난 과장 선거도 원장님이 미리 손을 써 둔 거라는 소문이 파다해요. 이게 무슨 치졸한 짓이에요, 정말!”
김민준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구겼다.
“민준아, 나도 뭐 하나만 묻자.”
박상우는 김민준을 응시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넌 지금까지 환자들을 치료할 때, 뭔가를 바라고 했어? 내가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를 구해 드렸으니까 앞으로 평생 은혜 갚으세요, 그렇게?”
“당연히 아니죠. 하지만, 이번 케이스는 그런 경우와 다르잖아요.”
“아니, 하나도 다르지 않아. 난 원장님의 딸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신경 쓴 것도, 덜 신경 쓴 것도 없어. 그저, 환자일 뿐이야.”
“하아…… 교수님 말씀이 백번 맞는 말이긴 하지만…….”
김민준은 답답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내 생각해 주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이것 하나만 기억해 주면 좋겠어.”
“어떤 건가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이번 일을 잘했다고 해서, 원장이 달라질 거란 생각은 쉽게 하지 마.”
“…….”
박상우의 말에 김민준은 낙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민준아, 손 내밀어 봐.”
“손이요?”
뜬금없는 박상우의 말에, 김민준은 어색하게 손을 펼쳐 보였다.
“네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건 바로 이 손이야. 네 열 개의 손가락은 네 생각대로 움직일 거란 걸 명심해. 손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아. 네가 노력한 만큼, 환자를 살려낼 수 있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너는 칼잡이로 살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어. 앞으로 더욱더 공부하고 노력해. 그다음은 내가 책임지마.”
박상우는 김민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네, 교수님.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 말에, 김민준은 박상우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자 다짐했다.
* * *
다음 날, 지윤정이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이자 지동철 원장은 박상우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박 교수, 이거 받게나.”
지동철 원장은 서랍을 열고 봉투 하나를 꺼내, 박상우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그냥 우리 딸 목숨값이라고 해 두지.”
지동철 원장은 박상우의 시선을 외면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돈 봉투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돈이란 말씀이십니까?”
“알아보니까, 지금 사는 집이 원룸이라면서? 대 명성병원의 교수가 그래서 되나. 이 돈 보태서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해.”
“받을 수 없습니다.”
박상우는 지동철 원장의 제안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지금 우리 윤정이 목숨값이라고 하지 않았나. 난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뻣뻣하게 굴지 말고 받아 두라고.”
“아뇨. 제가 이 돈을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그래서 자네를 싫어하는 거야. 무슨 사람이 이렇게 꽉 막혔나? 숨 쉴 틈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난 자네만 보면 숨이 여기까지 턱턱 차올라! 답답해서!”
지동철 원장은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잡고 흔들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원장님께선 윤정 양의 부모로서 수술비를 결제하셨고, 전 급여를 받으면 되는 겁니다. 제가 원장님께 이 돈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어휴…….”
지동철 원장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별도로 할 말이 없으시다면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이제 곧 회진 돌 시간이라서요.”
“알겠네. 이건…… 내가 보관해 둘 테니까, 언제라도 마음 바뀌면 가져가라고! 영 내키지 않으면 어디 양로원에라도 가져가서 기부하든가!”
짜증이 나는지, 지동철 원장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박상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며,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 교수, 잠깐만.”
그 순간, 지동철 원장은 박상우를 멈춰 세웠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자네가 우리 딸을 살려 준 건, 부모로서 한없이 고마운 일일세.”
“의사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난 여전히 자네가 못마땅하거든? 그러니까 앞으로도 행동거지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야.”
지동철 원장은 냉소적인 시선을 흩뿌리며 박상우를 향해 말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박상우는 지동철 원장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감정의 변화도 없이 말했고, 이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사람하곤. 하여간, 나하고는 안 맞아! 저렇게 성질이 나빠서야 무슨 큰일을 하겠다고.”
지동철 원장은 인상을 찡그리며 혀를 쯧쯧 찼다.
그리고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김 팀장, 나야.”
-네, 원장님.
지동철 원장의 전화를 받은 건 구매팀의 김용덕 팀장이었다.
“언제더라…… 지난번에 반려시킨 심장 MRI 구매 건 있지?”
-아, 네. 흉부외과 박상우 교수가 기안 올린 것 말씀이십니까?
“그래그래, 그거.”
-그건 왜 찾으십니까? 이미 반려 처리돼서 폐기처분했는데요?
“그거, 다시 작성해서 보고 올려.”
-네?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데 왜 갑자기…….
“뭐가 갑자기야? 자료가 없으면 박 교수한테 연락해서 기안 다시 올리라고 하면 되잖아.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아…… 알겠습니다, 원장님.
그렇게 전화를 끊은 지동철 원장은 주먹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옛 속담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했던가? 그 인간에게 받기만 하고 넘겨 버리는 건 있을 수 없지! 심장 MRI가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비싼 장비 사다가 본전도 못 찾으면 그땐 정말 아작을 내 버릴 거야. 어휴 이 골칫덩어리, 골칫덩어리!”
* * *
박상우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띠링!
그 순간, 메일이 도착했다는 벨 소리가 울렸다.
“교수님께서 무슨 일이시지?”
발신인은 박상우가 존스 홉킨스 의대에 있던 시절 은사였던 심장센터장, 앤드류 박이었다.
박상우는 메일을 확인해 보았다.
[상우 군, 잘 있나? 멀리서나마 자네의 엄청난 활약상을 생생하게 접하고 있다네. 자네는 이곳에서도 히어로야. 다름이 아니고, 내가 상우 군에게 특별한 기회를 주려고 이렇게 메일을 보냈다네…….]안부를 묻는 말로 시작된 앤드류 박의 메일은, 박상우에겐 일생일대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찬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