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232)
신의 메스-232화(외전 13화)(232/249)
외전 13화. 오로지 실력만이
2022.03.24.
박상우는 윤주태 원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가구는 새 가구가 좋지만, 사람은 옛사람이 좋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 원장님이 이 병원을 계속 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요?”
“그렇습니다. 전 의사지, 경영자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메스만 잡고 살았던 사람이 주판알을 어떻게 튕기겠습니까? 제 옆에서 도와주십시오.”
“진심입니까?”
박상우의 표정에서 진심이 묻어나자, 윤주태 원장도 조금은 노기가 가라앉았다.
“네. 제가 차트 보는 데는 빠삭해도, 재무제표 같은 건 까막눈입니다. 아무것도 몰라요.”
“흠, 그거야 뭐. 재무팀에서 알아서 하는 거고.”
“그래도 있어 보이려면, 조금은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구한 날 의학서적이나 들춰보던 놈이라 그런지, 그런 쪽 공부는 영 안 되더라고요. 그리고 전 숫자만 보면 아주 두드러기가 나는 사람입니다. 원장님은 그런 걸 어떻게 하시는 건지, 진짜 대단하십니다.”
“그거야 뭐. 하다 보면 다 하는 거죠. 흠흠, 차라도 한잔 드시죠. 홍차 괜찮으십니까? 인도에서 넘어온 게 좀 있는데.”
“네.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아까던 홍차를 내올 만큼, 윤주태 원장의 노기는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잠시 후, 자리에 앉아 홍차를 홀짝이던 윤주태 원장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정말 절 유임시켜 줄 생각이십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왜 실없는 소리를 하겠습니까?”
“지난번 김민준 교수 수술 건 때문에 제가 불편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전혀요. 원장님 입장에선 충분히 그렇게 하셨어야 합니다. 원장님이 막지 않았다면, 전 일단 저지르고 봤을 겁니다. 원장님께서 한 번 더 생각할 시간을 벌어주신 거고, 덕분에 임상시험이라는 아이디어도 떠올리게 되었죠.”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합니다. 그냥 무식하게 덤벼들었으면, 지금쯤 경찰 조사를 받고 있었겠죠?”
“그거야 뭐. 우리 병원 법무팀에서 그렇게 놔두겠습니까? 어떻게든 해결했겠죠.”
“그래도,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하마터면 함께한 사람들까지 골치 아프게 만들 뻔했으니까요.”
박상우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영치금은 두둑하게 넣어 드리려고 했는데, 기회가 날아갔군요.”
“어휴, 농담이라도 그런 말 마십시오. 지금도 오금이 저립니다.”
“하하하, 처음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으시더니, 오늘 보니 그것도 아니네요.”
“사실 그때도 제정신은 아니었습니다. 살리고 싶어서 어떻게든 해 보려 한 거죠.”
박상우는 양 손바닥으로 자신의 어깨를 문질거리며 말했다.
“허허허, 박 교수, 아니 이사장님이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평소처럼 박 교수라고 불러 주십시오. 이사장은 무슨 이사장입니까? 저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옷입니다.”
“그래도 될까, 박 교수?”
확실히, 원주태는 학습효과가 뛰어난 것인지 자연스럽게 호칭을 변경했다.
“네, 원장님. 그렇게 불러 주시니, 이제야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네요. 여태까지 하이힐 신고 100미터 달리기라도 하는 기분이었어요. 아주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제가 앞으로 많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사장이신데, 그 자리에 맞는 권위가 있어야 할 테니까요.”
“네. 저는 원장님만 믿겠습니다. 아! 그리고 말 놓으셔도 된다니까요. 보는 눈들이 있으니, 공식 석상에서만 체면 세워 주시면 됩니다.”
“그, 그러지, 알겠네. 밥은 먹었나?”
“아뇨. 아직 식전입니다.”
“좋아! 그러면 나가지. 장어탕 아주 기가 막히게 하는 데를 알거든.”
윤주태 원장이 옷걸이에 있던 옷을 걸치며 말했다.
“좋습니다. 저도 장어라면 아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거든요.”
“하하하, 사람! 이렇게 털털한 면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군. 자, 가지.”
“네. 아! 원래 밥값은 먹으러 가자고 하는 사람이 쏘는 거 아시죠?”
“당연하지. 내가 쏘겠네.”
윤주태 원장은 박상우를 향해 연신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박상우가 이사장 자리에 취임한 후 상전벽해가 되리라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살생부가 돌아다닌다는 둥, 명성 소속 사람들은 지방 분원으로 유배를 갈 거라는 둥, 설왕설래가 이어졌지만 특별한 변화는 전혀 없었다.
원장 윤주태를 비롯해서 제일 먼저 경질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기획실장 한선수 이사 등, 주요 부서의 경영진들은 모두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목이 달아날 것이라며 전전긍긍하던 몇몇 과의 수장들 역시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박상우는 조용히 강했다.
그들에게 기회를 줬을 뿐이지,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니었으니까.
박상우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닌, 밑에서부터의 개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총교수회의가 열렸다.
“일단 우리 교수님들의 왕성한 논문 집필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렇지! 우리가 그 분야만은 국내 탑이지 아마?”
“맞습니다. 서운대도 우리보단 아래죠.”
박상우가 논문 얘기를 꺼내자 교수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연간 논문 편수는 국내 1위, 전 세계 의대를 기준으로도 18위에 랭크될 만큼 우리 의과대학의 왕성한 논문 활동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박상우의 말에, 교수들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하지만 이어진 박상우의 말에,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다만, 칭찬은 여기까지입니다.”
“……뭐야?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러는 거야?”
“글쎄……. 논문에 관한 한 더 할 얘기는 없을 텐데? 우리는 독일의 쾰른 의대보다도 순위가 높은걸.”
웅성대는 사람들 틈으로, 박상우의 말이 비집고 들어왔다.
“세계 18위가 대단해 보이십니까? 우리가 과연 우리보다 아래에 랭크된 쾰른 의대보다 나은 곳일까요? 그렇다고 세계 의학계가 우리 명성을 인정해 주겠습니까?”
“…….”
“이 지표를 NEJM, MST, 메디컬 사이언스지 등 세계 10대 의학저널에 게재된 편수로 바꿔 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제가 명성을 떠난 이후로, 단 세 편의 논문만이 이곳에 게재되었습니다. 그나마도, 지금 병상에 누워 있는 김민준 교수의 논문이 두 편이었죠.”
치욕적이었다.
박상우가 명성을 떠난 지 5년, 그동안 세계 10대 의학저널에 등재되었던 논문은 단 3편뿐이었다.
박상우의 지적에 교수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독일의 쾰른이, 영국의 케임브리지가, 그리고 미국의 존스홉킨스가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로지 오래된 전통만으로 그 위치를 차지했다고 생각하세요? 우리 병원의 역사도 이제 한 세기를 넘길 즈음이 되었습니다. 실력으로 승부하십시오. 실력이 없다면 권리도 없는 겁니다.”
마치 책임을 물으려는 듯한 말에,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아, 지금 우리 엿 먹이려는 거지?”
“어쩐지 그동안 조용하더니만…….”
“권리가 없다는 건, 책임도 없다는 걸 의미하죠. 의사로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건, 그 존재가치가 없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직관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이 다 써 놓은 논문 표지만 바꿔서 발표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교수라는 무기로 수련의들, 심지어 학부생들의 금쪽같은 시간을 강탈하지 마십시오. 올해 우리 학교에서 발표된 24개의 논문 모두 표절 아니면 쓰레기입니다.”
표절이란 말에 교수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야? 아무리 이사장이라고 해도 지금 저건…….”
“장현수 교수님!”
박상우는 불만을 토로하려던 내분비학과 장현수 교수를 지명했다.
“네, 네!”
“최근 KES(대한내분비학회)에 ‘갑상샘호르몬 및 성장호르몬 결핍의 원인과 영향’이란 논문을 발표하셨죠?”
“그, 그렇습니다.”
“그 논문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2007년 메디컬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마이클 러셀 교수의 논문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새로운 발견이나 연구 세부 내용이 있다면 말씀해 보십시오.”
“지, 지금 표절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뇨. 표절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 그게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갈래 중에는 팬픽이라는 게 있죠. 독자가 잘 나가는 소설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의 설정을 기반으로 원작과 다른 흐름의 에피소드를 창작하는 걸 말하죠.”
“그래서요?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아무리 잘 써도 팬픽은 소설이 아닙니다. 그저, 일종의 감상문일 뿐이죠. 팬픽이 소설이 아니듯, 감상문도 논문이 될 수 없는 겁니다. 똑같은 주제와 실험, 결과. 같은 결과를 냈다는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더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죠. 나아가려 하지 않았기에, 교수님의 논문은 우리 대학 도서관을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똑같은 결과를 내보인 마이클 러셀 교수의 논문은 메디컬 사이언스 커버를 장식했는데 말입니다.”
“…….”
“반박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오늘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이에 대해 토론할 수 있습니다.”
박상우는 그렇게 말하며, 단상 위에 논문 더미를 수북하게 쌓아 올렸다.
“……아닙니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개망신을 당한 장현수 교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존경하는 교수님들! 지금부터 제 얘기를 명심하십시오. 논문을 쓰는 데 수련의들의 힘을 빌리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논문을 준비하는 것도 분명 공부가 되고, 수련의들에겐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다만, 그들의 금쪽같은 시간을 할애해 쓰인 논문이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숫자 늘리기를 위한 논문은 쓸 필요가 없습니다. 구색을 위한 논문도 필요 없습니다. 일 년간 단 한 편의 논문만 발표하더라도, 혁신적이고 참신하며 의학적 가치가 있는 논문을 발표해 주십시오. 단 한 편이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박상우는 잠시 말을 멈춘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인턴을 뽑을 때 명성대 출신에게 주던 가산점은 없애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실력을 갈고닦아서 키워나가야 할 때입니다. 외고 출신이라고 해서 대학 입학 때 가산점을 주는 일은 없는 것처럼, 특정 출신들에게 가산점을 주는 일은 없도록 부탁드립니다. 이상입니다.”
짝, 짝짝, 짝짝짝!
박상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윤주태 원장과 윤상부 진료 부원장이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 모습에 나머지 교수들도 눈치를 보며 박수를 쳤고, 그렇게 총교수회의가 끝났다.
밖으로 나온 교수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뭐라도 씹어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아, 미치겠네. 그러니까, 세계 10대 저널에 등재될 논문을 쓰라는 거고, 그걸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거지?”
“어쩐지 그냥 넘어가나 싶더니만. 어디 NEJM이 동네 구멍가게냐? 메디컬 사이언스가 그냥 논문 가져다주면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실어 주는 데야?”
“하아, 그렇긴 한데 할 말도 없잖아? 열람해 보니까 박상우 이사장 논문 편수만 40편이 넘던데?”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도 한번 하면…….”
“그게 NEJM, MST, 메디컬 사이언스지 딱 세 곳에서만 발표한 양이야.”
“그래. 거기 세…… 뭐? 뭐라고?”
깜짝 놀란 교수들이 눈을 크게 떴다.
“뭘 그렇게 놀라? 진짜라고. 다른 곳에 발표한 논문 수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어.”
“헐, 이건 뭐…… 할 말이 없군. 논문이야 그렇다 치고, 인턴 뽑을 때 명성대 출신들한테 가산점 주지 말라는 건 말이 되나?”
“아까 박상우 이사장이 말했잖아? 외고 출신이라고 해서 대학 입학 때 가산점을 주진 않는다고. 그거랑 똑같다고 했는데 차 교수는 뭘 들은 거야?”
“하아, 그러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뭘 어떻게 해? 오로지 학부 성적만 반영해야지.”
“아니, 명성이랑 지잡대랑 수준이 같을 수 있나?”
“이봐. 차 교수! 솔직히 그건 박상우 이사장 말이 맞아. 지방대든 명성이든, 의대 가려면 고등학교 때 전교 1, 2등 하는 애들 아니야? 차이가 나 봐야 얼마나 나겠어?”
“음, 아무리 그래도…….”
“게다가 솔직히, 지방대 교수들도 다 우리랑 한솥밥 먹던 동료들이잖아? 그들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평가할 수 있나? 난 아니라고 봐.”
“그건 그렇긴 하지만…… 워낙 전례가 없는 일이라서 그렇지.”
“글로벌 시대야. 솔직히 바뀌어야 할 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
박상우는 조금씩, 자신의 신념과 의지대로 대학병원을 바꿔 가고 있었다.
* * *
박상우가 명성의 두꺼운 벽을 조금씩 허물어 가고 있을 즈음, 청와대로부터 연락이 왔다.
-박상우 교수님이십니까?
“네. 접니다. 누구십니까?”
-청와대 비서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