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33)
신의 메스-33화(33/249)
33화 너는 내 운명 (4)
“그, 그래도…….”
장영은이 슬며시 손을 뺐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에이즈라는 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절망적이지는 않아요. 당뇨병이나 고혈압처럼, 관리만 잘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실제로 에이즈가 완치되었다는 학계 보고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아이 아버님께 연락해서 검사부터 받게 하세요.”
“후, 애 아빠와는 인연을 끊은 지 몇 년 됐어요. 지금은 외할머니가 돌봐주고 있습니다.”
‘앗! 그랬던가?’
그 부분까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박상우였다.
“아, 그러시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어머니한테 연락해서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할게요.”
그녀의 표정이 좀 전보다 한결 밝아졌다.
“그나저나 의사 선생님은 제가 두렵지도 않으세요?”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환자분이 귀신도 아닌데 두려울 이유가 뭐예요? 전혀요!”
박상우가 양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후후, 그런가요? 처음이네요. 저한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준 의사! 아무튼,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선생님의 위로가 저한테는 정말 큰 힘이 되었어요.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은혜는요, 무슨? 그런 말씀 마시고 내일모레 있을 수술을 위해서라도 몸 관리 잘하십시오.”
“흐음, 과연 제가 살아서 뭘 할 수 있을까요? 그 수술을 받고 산다 한들 평생을 손가락질당하면서 살 텐데요.”
‘당신은 에이즈 감염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손가락질 받을 일은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이즈는 불치병이 아니라 만성질환일 뿐이에요. 그리고 아직 정확한 결과도 나오지 않았으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의사 선생님도 계시는군요. 선생님! 염치없는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해 보십시오.”
박상우를 쳐다보는 간절한 눈빛. 그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할 수 없었다.
“혹시, 혹시나 잘못된다면 우리 지훈이 좀 돌봐주실 수 있습니까?”
“흠, 그럼 우선 저하고 약속 하나 해 주십시오. 모레 있을 심장 수술 반드시 받겠다고요! 약속해 주신다면 저도 답을 드리겠습니다.”
“네. 약속드리겠습니다.”
장영은 환자가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훔쳐 내며 눈물을 닦고는 박상우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사대로라면 문제가 생길 리가 없잖아? 장영은 환자나 그의 아들 지훈이나,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았으니까 내가 그 아이를 책임져야 할 일도 없을 터.’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약속드리죠. 그럴 리야 없겠지만 환자분이 잘못되신다면 아드님을 제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드려요!”
장영은 환자가 박상우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장영은 환자의 이마에 쓰여 있던 잔존 수명이 사라져 버렸다.
‘됐어! 숫자가 사라졌다! 이렇게 되면 이 여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이유는 없겠군!’
박상우가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 * *
심장 수술 하루 전, 흉부외과 수련의 당직실.
‘박상우! 넌 지금 환자를 살리고 싶은 거냐? 아니면 출세하고 싶은 거냐?’
박상우가 자문하며 거울을 뚫어지라 응시하지만 거울 속의 박상우는 대답이 없었다. 박상우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드르륵!
그 순간, 천기수가 당직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양손엔 커다란 가방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상우야, 나 지금 집으로 간다. 결과 나올 때까지 6주간은 집에 처박혀 있어야 해.”
심각한 표정의 천기수.
“그래. 너무 걱정 마라. 에이즈가 그렇게 쉽게 감염되는 병은 아니야.”
“장영은 환자, 설마 에이즈에 걸린 거 이미 알고도 수술받으려고 숨긴 거 아니야……?”
“야! 천기수! 너 진짜 어이없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 일이 장영은 환자 잘못이야? 네가 IV 잡다가 실수한 거면서 왜 그 여자 탓을 하는데?”
“아, 몰라, 몰라, 몰라! 지금 머리 복잡하니까, 나한테 더 뭐라고 하지 마. 어휴…….”
천기수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쾅!
“박 선생님! 큰일 났어요.”
그 순간, 박은정 간호사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당장 308호실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그 병실 환자들이 난리가 났어요!”
“난리요? 무슨 난리가 났다는 거예요?”
박상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그게. 어떻게 알았는지, 장영은 환자와는 같은 병실을 쓸 수 없다면서 병실을 옮겨 달라고 난리예요. 빨리요! 빨리!”
“후, 그래요?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당연하지, 나라도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
천기수가 당연하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너, 나랑 같이 병실로 갈래? 아니면, 여기서 조용히 사라질래?”
“사라질게. 하여튼, 너도 조심해라.”
“알았다. 그럼 나중에 연락하고!”
“박은정 선생님, 갑시다.”
“네.”
박상우는 박 간호사와 함께 서둘러 당직실을 나섰다.
308호 병실 앞에 도착하니, 언성을 높이는 환자들과 그 보호자들의 성난 목소리가 문밖까지도 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아! 의사 양반,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잘됐네. 도대체 이게 말이 됩니까?”
보호자로 보이는 한 남자가 박상우를 보자 화난 얼굴로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이 되지 않다뇨?”
“지금 그렇게 시치미를 떼실 때가 아닙니다. 저 환자, 에이즈에 걸렸다면서요?”
또 다른 한 여자가 비어 있는 장영은 환자의 침대를 가리켰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를 바보로 아나? 그렇게 시치미 떼신다고 될 일이 아니야, 이미 병원에 소문이 좍 퍼졌다고요!”
“그게, 아직 확진된 것도 아니고, 에이즈 바이러스라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예상과 다른 변수에 당황한 박상우가 어떻게든 그들을 설득하려 했다.
“됐고! 아무튼 우리는 이미 결정을 했습니다. 우리를 다른 병실로 옮겨 주든지, 저 여자를 격리하든지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해 버릴 겁니다. 우리를 호구로 아나?”
금세라도 폭동을 일으킬 것 같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에 게거품을 물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일단 진정들 하시고요. 제가 과장님과 상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상의고 뭐고, 지금 당장 병실을 바꿔 달란 말입니다. 우리는 단 한 시간도 저 더러운 여자와 함께 있을 수가 없다고요!”
“그러게 말이야. 어쩐지 반반하게 생긴 게, 남자 여럿은 홀리게 생겼더라니!”
카아악, 퉤!
심지어 어떤 이는 가래를 모아 바닥에 뱉기도 했다.
최악의 상황. 분노한 그들의 마음을 진정시킬 방법이 없어 보였다.
“제발 진정들 하십시오. 최대한 빨리 대책을 내놓겠습니다.”
“우리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당장 조치해 주지 않으면 원장실로 쳐들어갈 겁니다.”
좀처럼 그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은 듯했다.
“네. 알겠습니다. 위에 보고부터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박상우가 성난 환자들 사이에서 황급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때마침 힘없이 걸어오는 장영은 환자의 모습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환자분, 잠시 저랑 같이 가시죠.”
박상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네?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뇨. 다른 게 아니라 내일 수술에 대해서 좀 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가 대충 둘러댔다.
“아…… 네.”
일단 그녀를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 * *
조현오 교수 연구실.
“교수님, 일단 장영은 환자를 1인실로 옮겼습니다.”
박상우가 조현오 교수 연구실로 들어왔다. 조현오 교수의 재량으로 장영은 환자를 1인실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병실 환자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수고했어.”
조현오 교수가 난감한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흠,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을 것 같아. 방금 원장을 만나고 왔는데, 수술 절대 불가 통보를 받았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일단 내일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좀 더 설득해 봐야겠어! 그러니까 자네는 장영은 환자, 정상적으로 수술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길 바라네.”
“교수님, 정말 외람된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박상우가 정자세를 취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뭔가? 말해 보시게.”
“네. 자칫 모든 책임을 교수님이 지셔야 할지도 모르고, 수술 중에 감염이라도 된다면 치명적일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이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수술을 감행하시려는 이유가 뭔가요?”
“후후후. 자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아직 외우고 있나?”
뜬금없는 조현오 교수의 질문.
“아, 네. 외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외워 보시게나.”
조현오 교수가 팔짱을 끼며 의자 깊숙이 앉았다.
나는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는 환자가 알려 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의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여기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박상우가 차분하게 히포크라테스 선서 전문을 낭독했다.
“그래. 바로 이거라네.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난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환자를 살릴 것이야. 그 환자가 에이즈 감염자이든 아니든 내게는 중요하지 않아. 그와는 관계없이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는 그 환자를 살려야 하는 것이니까. 게다가 수술하면서 이만한 위험에 노출되지 않은 적이 있었나?”
후후후, 조현오 과장이 웃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
박상우가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이만하면 자네 질문에 답이 될 수 있을까?”
조현오 교수가 고개를 들어 박상우를 바라보았다.
‘조현오 교수! 당신의 의로움에 경의를 표합니다. 다만, 당신을 존경하지만 전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은 진정한 의사가 될 수는 있겠지만 성공한 의사는 될 수 없으니까요!’
“네. 충분한 답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내 말을 이해했다니 고맙군!”
띠리리링, 그 순간 벨 소리가 울렸다.
“교수님! 회진 시간입니다.”
흉부외과 치프, 정현웅 선생의 전화였다.
“그래, 그래. 곧 나감세. 잠시만 기다려!”
“네. 교수님!”
“박 선생,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 수술을 할 생각이야. 그러니까 박 선생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 마음을 단단히 먹도록 해. 일단 회진부터 돌고, 원장실로 가서 다시 설득해 볼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좋아! 자네가 있어 힘이 나는구먼. 그럼 바쁠 텐데 나가 보도록 해.”
“네. 교수님!”
조현오 교수에게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서며, 박상우가 눈을 빛냈다.
‘교수님! 교수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 뜻을 펼치실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죠! 저 역시 당분간은 교수님이 필요하니까요!’
엘리베이터에 올라선 박상우는 13층 버튼을 눌렀다. 13층은 조영철 원장의 집무실이 있는 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