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43)
신의 메스-43화(43/249)
43화 날개 잃은 천사 그리고 격투기 선수 (1)
장영은 환자 사건으로 어수선했던 병원 분위기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고, 박상우 역시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다만 그 사건 이후로 적어도 박상우 면전에 대고 ‘곁가지’라 칭하는 사람은 없었다.
흉부외과 수련의 당직실, 레지던트 3년 차 신정국이 차트를 정리하던 박상우에게 물었다.
“너 다음 주부터 소아 흉부외과 ICU에 들어간다면서?”
“네, 선생님.”
“그러면 오늘은 그만 퇴근해라.”
“네? 저 이번 주 풀당인데요?”
“소아 흉부외과는 지옥이다. 아마도 마음고생이 심할 거다. 그러니까 집에 가서 푹 쉬어. 월요일부터 죽었다, 생각해라.”
“알겠습니다.”
“그래, 애인은 있냐?”
신정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툭 던졌다.
“아, 아뇨.”
“한 명 만들어 놔라. 이 팍팍한 레지던트 생활에 달콤한 안식처 하나 있어야지. 아무튼, 주말 잘 보내라.”
“네, 선생님!”
흉부외과 레지던트 1년 차에게 주어진 주말 휴식.
본래라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풀당(풀 당직)에 토요일 늦게 퇴근해서 일요일 오전에 출근하고, 당연히 일요일도 당직을 서야 했다. 그런데도 박상우는 주말 휴식을 받았다. 이 모든 상황이 박상우의 급변한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박상우는 집에 가도 그를 반겨 줄 사람이 없고, 맞아 줄 사람도 없었다. 딱히 휴가를 받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지만, 그는 신정국의 말에 순순히 응했다.
‘자중하고 또 자중하자.’
지금은 병원의 모든 시선이 박상우에게 쏠려 있을 터였다. 괜히 불응하여 도드라질 필요는 없었다. 박상우는 당분간 자중하며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다.
* * *
박상우는 병원 옥상의 난간에 기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제법 날씨가 선선해졌다.
“후우…….”
그가 하늘을 향해 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지나간 일들을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갑작스러운 사고와 과거로의 회귀. 그 직후부터 환자들의 이마에서 정체불명의 숫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숫자들은 환자의 잔존 수명을 의미했다.
‘제길, 믿고 싶지 않지만…….’
박상우가 바닥에 널브러진 돌멩이를 툭툭 걷어찼다.
그런 환자들을 살려 낼 때마다 이상한 현상이 생겨났다. 은서를 살렸을 때는 아무런 기구 없이 혈압을 체크할 수 있었고, 이번 장영은 환자의 경우에는 직관적으로 환자의 산소 포화도를 알 수 있었다.
환자의 잔존 수명이 보인 뒤 살려 낼 때 뭔가 특별한 능력이 생긴다는 것. 젊은 시절로 회귀한 후 박상우에게 벌어지고 있는 기현상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하지만 깊은 고심도 잠시, 박상우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지는 듯했다.
‘이상한 현상이긴 하지만 나쁜 건 아니잖아?’
박상우는 위급한 환자를 살리고 그로 인해 수많은 반사 이익을 얻었다. 그렇게 기어들어 가려고 애썼던 이사장 자택을 힘 하나 안 들이고 들어갔다. 그것도 융숭한 식사 대접과 함께.
‘그래! 일단은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자.’
“야, 박상우! 아직도 거기 있었네?”
그 순간 갑자기 한 사람이 말을 걸어 왔다. 동기 김인선이었다. 그녀가 캔커피 두 개를 양손에 들고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어, 인선아.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아까 의국에 가는데 네가 옥상으로 올라가는 것 같더라.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여태 있네?”
김인선이 박상우에게 캔커피를 건네었다.
“생각 좀 정리할 게 있어서.”
“후후후, 하긴 요즘 너한테 일어나는 일들이 정상적이지 않았으니 혼란스럽기도 하겠지.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나쁠 것도 없잖아.”
김인선이 가느다란 목을 드러내며 꿀꺽꿀꺽 캔커피를 마셨다. 드러난 그녀의 목선이 생각보다 매력적이었다.
‘선머슴인 줄 알았는데 여성스러운 면이 있었네.’
“…….”
“상우야. 사실 나, 너한테 거짓말했어.”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후, 김인선이 뜬금없이 말을 툭 던졌다.
“거짓말? 무슨 거짓말?”
“음, 사실 지난번에 닉털로피아(Nyctalopia: 야맹증) 있다는 거, 그거 거짓말이야.”
“뭐? 왜 그런 거짓말을?”
– 상우야, 내 손 좀 잡아 줄래?
– 어? 왜, 왜?
– 특별한 이유는 아니니까 좀 잡아 줘. 어두워서 그래. 사실, 나 야맹증이 있거든.
– 어, 그, 그래.
며칠 전 병원 전체 정전되었던 날, 당직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사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어.”
김인선이 박상우를 향해 밝게 웃었다. 입가에 파인 보조개가 싱그러웠다.
‘귀엽군. 도도함으로 이름을 날렸던 천하의 김인선이 이때는 꽤 귀여웠네.’
같은 나이지만, 실제로는 회귀 전 오랜 세월을 살아와 노련한 박상우의 눈엔 그저 어린아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특별한 거? 그게 뭔데?”
“음, 나 사실 널 보면 볼수록 많이 놀랐어. 처음 너 봤을 땐 무뚝뚝하고 이기적인 범생이 느낌이었거든.”
“후후후, 잘 봤네. 맞아. 범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기적인 건 맞아.”
박상우가 빙그레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아니! 넌 절대 이기적인 사람이 못 돼.”
“왜지? 난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말해 줄까? 왜 네가 이기적인 사람이 아닌지.”
“그러게, 내가 왜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지?”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일이면 즉시 뭔가를 하지만,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되는 일에는 굼벵이보다 더 느린 법이야. 그런데 지난번 조폭 환자 때도 그렇고, 이번 장영은 환자 때도 누구보다 헌신적이고 신속하게 움직였어.”
김인선이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누구든 그런 상황에선 나와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야.”
“아니! 절대 그렇게 못 해. 그건 이기적인 사람은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어. 네가 그렇게 처절하게 움직일 때 그저 멀뚱멀뚱 지켜만 봤던 수많은 사람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지. 그게 이번 수술 때 내가 군소리 없이 너를 따랐던 이유야.”
김인선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녀를 나이 어린 애송이로만 대하던 박상우의 마음에 신선한 자극으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꿈보다 해몽이지만, 그렇게 봐 준다니 고맙네. 그건 그렇고 그 특별한 이유가 뭐냐니까? 왜 말을 빙빙 돌려.”
“그런 게 있어. 넌 아직 어려서 말해 줘도 모를걸?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거야. 흠, 앞으로 종종 특별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맘 단단히 먹어라. 박상우!”
김인선이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관록 있는 박상우에게는 여전히 빤히 보일 뿐이었다.
“그래.”
“아, 그리고 날 어린애 보듯 바라보는 그 눈빛, 나 너무 싫어. 우리 아빠랑 얘기하는 것 같거든. 그러니까 앞으로는 좀 삼가길 바라. 그럼 난 먼저 내려간다.”
김인선이 손을 흔들며 옥상 입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 그, 그래.”
박상우가 물끄러미 멀어져 가는 김인선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김인선이 나가고 난 뒤, 박상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김인선, 넌 내가 누군지 몰라. 몸에 기생충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배가 고파. 항상 허기지고, 아무리 속을 채워도 채워지지 않지. 난 이기심이란 기생충을 항상 품고 있는 사람이야. 네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 * *
그리고, 월요일.
3년 차 신정국의 말대로 소와 흉부외과 중환자실은 천사들이 사는 지옥이었다. 좌우로 정렬한 앙증맞은 작은 침대 위에 날개 잃은 천사들이 누워 있었다.
이곳에 들어와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ASD(Atrial Septal Defect: 심방중격 결손증)나 VSD(Ventricular Septal Defect: 심실중격 결손증)와 같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태어나서부터 지옥을 경험하게 된 안타까운 아이들이었다.
이 많은 환자 중 유독 박상우의 시선을 끄는 한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올해로 7세가 되는 최윤성이라는 남자아이였다.
심장을 관통하는 굵은 수술 절개선이 가슴 위아래로 길쭉하게 나 있었다. 게다가 여리디여린 가슴 곳곳에 튜브들이 곳곳을 찌르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동맥과 희미한 정맥엔 혈압과 정맥압을 측정하는 서늘한 측정선들이 윤성이의 가냘픈 혈관을 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밖에 심전도, 산소 포화도 등 각종 심장 수치를 측정하는 선들이 마치 가느다란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뱀처럼, 이 어린 천사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우리 윤성이 대견하구나.”
주사를 놓는 정 간호사가 윤성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헤헤, 뭘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윤성이 말대로 아무것도 아닐 리 없었다.
젓가락만큼 굵은 주삿바늘을 찔러 대도 이를 악물고 참아 내며, 아이는 아프다는 소리도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윤성이는 꿋꿋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고통 속에 괴로워하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씩씩하게 버텨 내고 있었다.
박상우는 유난히 어른스러워 보이는 이 아이에게 마음이 쓰였다.
“윤성아. 주사 안 아파? 아프면 소리 지르고 울어도 괜찮아. 억지로 참을 필요 없어.”
“…….”
윤성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왜? 울면 엄마한테 혼날까 봐 그래?”
“삼촌, 우리 엄마 하늘나라에 있어. 그래서 내가 아무리 울어도 못 들을걸?”
병원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윤성이는 의료진들을 친근하게 대했다. 박상우의 호칭은 어느새 삼촌이 되어 있었다.
“아, 미안! 미안해. 윤성아.”
박상우가 당황스러워했다.
“아니야, 삼촌! 괜찮아. 자주 있는 일인데 뭐.”
“그, 그래……. 그러면, 왜 안 우는 거야? 주사가 무척 아플 텐데. 소리 지르거나 울면 좀 덜 아프거든.”
박상우가 퍼렇게 멍이 든 윤성이의 팔뚝을 어루만져 주었다.
“우리 아빠 때문에 그래.”
“아빠? 아빠가 왜?”
“우리 아빠는 아무리 맞아도 절대 안 울어. 그리고 아빠가 항상 말씀하셨어.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고 했어. 태어날 때 한 번 울고, 부모님 돌아가실 때 한 번 울고, 그리고 뭐더라…….”
윤성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냘픈 미간을 찌푸렸다.
“후후후, 나라가 망했을 때?”
“맞아. 그게 생각이 안 났어. 흠, 태어나서 한 번 울었을 거고, 엄마가 하늘나라 갔을 때 한 번 울었으니까 난 더 울면 안 돼. 우리나라가 망할 이유는 없잖아! 그치, 삼촌!”
윤성이가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며 박상우를 응시했다.
‘뭐야? 아빠가 맞아도 안 울어? 윤성이 아빠가 조폭인가?’
“그, 그렇지. 그나저나 윤성아, 미안한데 아빠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
박상우가 윤성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 우리 아빠는 격투기 선수야. 지금 시합 때문에 일본에 가 있거든.”
박상우는 왜 자신이 윤성이의 아빠를 한 번도 볼 수 없었는지 알아채게 되었다.
“정말? 진짜 멋지다.”
“그럼, 그럼. 우리 아빠가 얼마나 멋진데. 우리 아빠 이름이 최상호인데 엄청 유명해. 삼촌, 이것 좀 볼래?”
윤성이가 침대 밑에 감춰 뒀던 사진 몇 장을 꺼내 들었다.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환호하는 한 남자가 보였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윤성의 아빠는 격투기 선수, 최상호였다. 강인한 근성으로 열 번 넘어져도 열한 번 일어난다는 의미로 ‘오뚝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선수였다.
박상우는 사진을 보자마자 윤성이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최상호 선수가 윤성이의 아빠였구나. 우리 윤성이 정말 좋겠네. 삼촌도 최상호 선수 팬이야.”
사실 박상우는 단 한 번도 격투기 경기를 본 적이 없었기에 최상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정말?”
그 말에 표정이 꽃처럼 활짝 핀 윤성이.
“그럼. 대한민국에 최상호 선수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박상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윤성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 *
며칠 후.
“무슨 소리 못 들었어?”
“글쎄요. 소아 흉부외과 ICU에서 나는 소리인 것 같은데?”
박상우가 간호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청각을 곤두세우는 순간, 얼마 지나지 않아 3년 차 선생님들이 쏜살같이 그의 앞을 지나쳐 갔다.
“야, 박상우! 너, 거기서 뭐 해? 어레스트야! 빨리 튀어와!”
그중 걸음을 멈춘 한 명이 뒤를 돌아 박상우를 향해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