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56)
신의 메스-56화(56/249)
56화 무명 여배우 (3)
“기수야, 어떻게 됐어?”
“박 선생님, 저 이은주 간호사입니다.”
높은 톤의 목소리만으로도 긴박한 상황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어떻게 선생님이? 기수는 어떻게 된 겁니까?”
게다가, 전화를 건 사람은 천기수가 아닌 이은주 간호사였다. 분명 사고가 터진 것이 틀림없었다.
“천 선생님이 좀 긴장하신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역시나 천기수가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이은주 간호사가 에둘러 말했다.
“미치겠군! 알겠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안 계십니까?”
“네. 지금은 그렇습니다. 아무리 방송을 해 봐도 내려오는 의사 선생님이 안 계세요. 게다가 신정국 선생님은 지금 응급 수술 들어간 상태고요. 누군가는 제세동을 쳐야 하는데…….”
“후, 이 일을 어쩌지?”
“박 선생님, 제가 제세동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시죠.”
단정적인 목소리.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녀였다.
“네? 그건 병원 내규에 위반됩니다. 잘못되면…….”
“괜찮습니다. 이럴 때 일 하라고 전문 간호사 직함을 받은 거니까요! 그나저나 저야 상관없지만, 제가 제세동을 하면 박 선생님도 징계를 받으실지 모르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오히려 이은주 간호사가 박상우를 걱정했다.
“저 역시 그런 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곧 있으면 간호사님 승진 심사가 있으실 텐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미국의 경우 전문 간호사 제도가 있어 전문 간호사 자격을 딴 간호사가 일정 부분 의사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국내에도 명목상 전문 간호사 제도가 있긴 했지만, 그 역할은 제한적이고 미미했다. 그만큼 의료 영역에서 의사들의 권위는 넘사벽이었다.
보수적인 명성대 병원의 원칙상, 아무리 전문 간호사라 할지라도 제세동을 실시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실제로 제세동 지시를 내린 레지던트, 담당 레지던트 그리고 담당 교수까지도 징계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그깟 승진, 해 봤자 일만 더 힘들고 월급도 쥐꼬리만큼 오르는데요 뭐.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고, 지금은 환자만 생각하시죠? 얼른 오더나 주세요. 이러다 한수지 환자 큰일 나요.”
다급한 상황에서 결정하기 쉽지 않았겠지만, 이은주 간호사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그래. 이은주 간호사라면 해낼 거야.’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지금 바로 제세동 하세요! 끝나고 나시면 바로 연락해 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 끊겠습니다.”
‘잘돼야 할 텐데…….’
박상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입술을 맞부딪혀 푸르르 소리를 내었다.
그가 안절부절 방 안을 서성거렸다.
잠시 후,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은주 간호사의 전화였다.
“이 선생님! 어떻게 됐습니까?”
“후, 선생님! 한수지 환자 심장 돌아왔습니다.”
“다행이군요! 정말 고생하셨어요!”
박상우가 왼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야 뭐,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박상우는 피식거리며 말하는 이은주 간호사에게 한없이 고마웠다.
“그러면 지금 한수지 환자 누가 봐 주고 있나요?”
“지금 신정국 선생님이 내려오셔서 봐 주시고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지금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아니에요. 신 선생님이, 환자 괜찮으니까 내일 천천히 올라오라고 전하래요.”
“알겠습니다. 일단 일찍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바로 올라가고, 아니면 내일 아침 첫차로 올라가겠습니다.”
“네. 환자 상태 양호하니까 너무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천천히 올라오세요.”
“알겠습니다.”
‘다행이야. 정말!’
박상우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외투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괜찮아야 할 텐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박상우가 서둘러 상경했다.
* * *
“와, 왔냐?”
박상우가 흉부외과 당직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잔뜩 풀이 죽은 천기수가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이제 막 도착했어. 어제 고생 많았다.”
박상우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고 의사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난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봐.”
천기수가 거칠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무래도 어제 일을 자책하는 듯 보였다.
“너무 자책하지 마. 긴장하면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환자가 무사하니 다행이야.”
박상우가 부드럽게 천기수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아냐. 아무래도 심각하게 고민을 해 봐야 할 것 같아. 수백 번, 수천 번 연습했는데, 막상 환자를 보니까 머릿속이 하얘지더라고. 차라리 의사 때려치우고 엄마 가게나 도와드려야 할까 봐.”
천기수가 허탈한 날숨을 뿜어냈다. 그러더니 안경을 벗고 눈을 꾹꾹 눌렀다.
“쓸데없는 소리 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 차차 나아지겠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넌 처음부터 잘했잖아!”
“난 천재니까.”
박상우가 엄지를 들어 자신을 가리키며 방긋거렸다.
“재수 없는 새끼! 그래. 너 잘났다.”
“농담이야, 인마. 너 좀 웃으라고 신소리 한번 했다.”
“아냐.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항상 너 보면서 느끼는 건데, 난 아무래도 의사가 체질에 안 맞나 봐.”
천기수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배부른 소리 그만하고. 나는 이준술 교수님 방에 좀 다녀올게. 신정국 선생님께는 나 좀 늦는다고 말씀드려 줘.”
“이준술 교수님 방에? 거길 왜?”
천기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긴, 자수하러 가야지. 내가 이은주 선생님한테 제세동 지시했잖아. 우리 병원에서 간호사가 제세동 시도하는 거, 내규에 걸리는 거 몰라? 가서 자진 납세 하련다.”
박상우가 미리 써 둔 자술서를 천기수에게 내보였다.
“안 가도 돼.”
천기수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안 가도 된다니?”
“벌써 신정국 선생님이 가셨다.”
“신 선생님이? 왜?”
박상우는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만, 본인이 이은주 간호사에게 제세동 지시했다고 했대. 넌 언제 신 선생님을 그렇게 구워삶아 놨냐?”
“그게 무슨 소리야? 선생님이 왜?”
“나도 그게 심히 궁금하다. 너나 나나 신 선생님 덕분에 살았다. 신 선생님이 우리 구세주다.”
천기수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 선생님이?’
“다들 여기 있었군.”
박상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신정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어떻게 되신 겁니까?”
박상우와 천기수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하지 마. 잘 해결됐으니까. 그나저나, 상우는 모처럼의 오프를 그렇게 망쳐서 어떡하니?”
신정국이 박상우를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흘렸다. 그는 오히려 박상우의 안부를 물었다.
“아닙니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
“신경 쓰지 말래도. 환자 살리는 게 중요하지, 그깟 내규가 뭔 대수라고! 잘 해결됐으니까 너무 걱정들 하지 말고, 오늘도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해야지!”
신정국이 박상우와 천기수의 어깨에 양팔을 걸쳤다.
“아…… 네.”
천기수와 박상우는 머쓱한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 자. 오늘도 보람차게 하루를 시작해 봅시다. 기수는 김연순 할머니한테 좀 가 보고, 상우는 나 좀 보자.”
신정국이 활짝 웃으며 손바닥을 마주쳤다.
* * *
지난밤, 이준술 내과 과장실에서 이준술과 신정국이 마주 앉아 있었다.
“이번 이은주 간호사가 제세동 한 사건, 자네가 지시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환자가 브이텍이 온 상황이라 위급했기에 제가 이은주 간호사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물론 수술을 마치는 대로, 제가 가서 마무리는 했고요.”
“담당의가 있었을 거 아냐?”
“박상우 선생은 오프라 지방에 내려가 있는 상황이었고, 천기수 선생은 감기몸살 증세가 너무 심해 조치할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확실한 거야?”
상벌 위원장이자 내과 과장인 이준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 이번 일의 모든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신정국이 고개를 끄덕여 의지를 내보였다.
“알았네. 뭐, 이번이 처음이고 환자도 별문제 없으니, 내가 알아서 처리함세. 앞으로는 좀 주의하도록 해.”
“네. 과장님.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아버님은 잘 계시지? 한번 뵈러 가야 하는데 말이야.”
“아, 네. 건강하게 잘 계십니다.”
명망 높은 의사 집안 출신의 금수저, 신정국. 대대로 우리나라 의학에 큰 획을 그었던 그의 조부와 부친 신상현. 국내 최초로 관상동맥 우회술에 성공했다.
최초의 심장 이식 수술에 인공 심장 수술까지. 신 씨 가문이 이뤄 낸 신화와도 같은 업적이었다. 이러한 위업은 명성대 병원 내에서도 무시 못 할 존재감으로 작용했을 터였다. 이준술 입장에서도 이 정도 사안으로 신정국에게 징계를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 * *
둘은 흉부외과 병동의 하늘공원에 올랐다.
“마셔.”
“네. 감사합니다.”
신정국이 캔 커피 뚜껑을 따 박상우에게 내밀었다.
“오늘 일, 정말 감사합니다.”
“됐어. 그런 공치사 듣겠다고 한 거 아니니까.”
“아니, 그래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무슨 나라를 구한 독립투사도 아니고, 그 얘기는 이쯤 해 두고, 어제 한수지 환자 치료하다 보니까 이상한 점이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널 부른 거야.”
꿀꺽, 커피를 마시는 신정국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요?”
“혹시 한수지 환자가 D&C(경관 확장과 자궁 소파술)를 받은 적이 있나?”
D&C 수술!
유산으로 인해 자궁 내에 남아 있는 태아의 잔류물을 처리하는 수술이었다.
“아뇨. 전 병원 진료 내역에는 없는데요.”
“이상하군. 어제 한수지 환자가 부정 출혈이 심하더라고. 아무래도 자궁 파열이 의심되던데.”
“네? 자궁 파열이요?”
박상우는 예상치 못한 신정국의 말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래. 아무래도 한수지 환자, D&C 수술을 받은 게 틀림없어. 진료 기록이 없다면…… 어쩌면 말이야. 불법 시술을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는걸?”
심각한 표정의 신정국이 연신 입술을 잘근거렸다.
‘한수지가 임신했었단 말인가? 만약 임신 중독 증세를 보였다면 그게 DMCP의 원인이 될 수도 있겠는데…….’
“후, 일단 알겠습니다.”
“산부인과 쪽에 컨설트 넣어 봐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
“네. 바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박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항생제 투여하고 도부타민 걸어 두긴 했는데, 만약 비위생적인 도구를 이용해 수술을 받았다면 자궁 천공에, 심지어 패혈 쇼크로 이어질 수 있어.”
신정국의 진단은 적절했다. 일례로, 원치 않게 생긴 아이를 유산하기 위해 옷걸이를 이용해 낙태 시도를 한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부적절한 시도가 있었다면 자궁에 천공이 생겼을 가능성이 컸다. 만약, 한수지가 불법 D&C 수술을 받았다면 제대로 소독되지 않은 기구로 인해 온갖 합병증과 감염병에 노출되었을 확률 또한 높았다.
‘한수지가 임신을? 진료 기록에는 없는 것으로 볼 때, 불법 시술을 받았다는 건데……. 왜일까? 일단, 한수지를 만나 봐야 할 것 같군.’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래, 수고하고. 한수지 환자, 꼭 산부인과에 컨설트 넣어라. 나, 윤 교수님 방에 간다!”
“네. 알겠습니다.”
신정국은 떠나는 순간, 끝까지 환자를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 겨우 레지던트 4년 차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학적 지식과 사명감은 남달랐다.
‘신정국 교수, 이미 이때부터 진정한 의사였어!’
박상우는 멀어져 가는 신정국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