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57)
신의 메스-57화(57/249)
57화 무명 여배우 (4)
한수지는 각종 링거를 주렁주렁 매단 채 잠들어 있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데다, 하루 사이에 몰라보게 야윈 모습이었다.
‘어쩐지 헤모글로빈 수치가 이상하게 낮았어!’
D&C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자궁 속에 남은 조직 때문에 출혈이 계속해서 있었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몸은 점점 더 쇠약해질 것이고, 결국 심각한 빈혈을 유발할 것이었다.
‘그런데 왜? 왜, 자신이 임신했던 사실을 숨겼을까?’
한수지는 파리해진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박상우는 링거를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수지야. 1인실 자리 나왔단다. 자리 옮기자.”
그 순간 경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한수지가 속한 소속사의 대표, 김영철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1인실? 그게 무슨 소리야?’
“조용히 좀 하시죠. 지금 환자분 깊이 잠드신 것 같은데…….”
“아니에요. 선생님. 저 충분히 잤습니다.”
한지수가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일어났다.
“자리가 빨리 나왔네요?”
“그러게. 나도 너를 이런 곳에 두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 다행히 자리가 났다고 하니까, 옮기자.”
김영철이 침대 쪽으로 다가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병실을 옮긴다뇨?”
“아직 전달받지 못한 모양인데, 우리 수지, 오늘부터 1인실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1인실로요?”
“그래. 오늘부터 한수지 환자, VIP 병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병실로 들어온 신정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박상우는 신정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 한쪽에서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 수지, 언제쯤 퇴원 가능합니까?
– 퇴원이요?
– 네. 사실 지금 입원해 있는 병실 입원료도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 하지만, 수술해야 할 겁니다.
– 수술이요? 수술비가 얼마나…….
– 글쎄요. 큰 수술이라 비용이 만만치는 않을 겁니다.
– 정말 큰일이네. 회사 사정도 안 좋은데…… 어떻게, 수술하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요?
박상우는 김영철을 향해 미심쩍은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언제나 돈 문제를 앞세우던 모습만 떠올라서, 박상우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환자분. 일단, 병실 정리되는 대로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네. 선생님!”
“정밀 검사도 다시 받기로 하셨으니까, 지금 이후부터는 금식하세요.”
신정국이 차트에 뭔가를 적어 넣으며 당부했다.
“알겠습니다.”
“자, 자! 우리 수지, 그동안 고생 많았네! 지금부터는 편하게 지내자.”
김영철이 부산하게 짐을 챙기며 너스레를 떨어 댔다.
“어떻게 된 건가요?”
병실을 빠져나오자마자, 박상우가 신정국에게 물었다.
“뭐? 아, 병실?”
“네. 좀 전에 VIP 병실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거기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글쎄…… 경과야 나도 모르지만, 그렇게 결정이 된 것 같더라고. 뭐, 환자 입장에선 다행인 거 아니야?”
신정국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긴 한데…….”
하지만, 박상우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우린 치료만 열심히 하면 돼.”
신정국이 박상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박상우는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지 자꾸 고개를 돌려 병실을 쳐다보았다.
* * *
박상우가 의아함을 느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며칠 전, 한수지는 김영철과 돈 문제로 심하게 다툰 바가 있었다.
“대표님, 저, 저 좀 살려 주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살리려고 하니까 병원에 데리고 온 거 아냐?”
“그, 그게 아니라…… 수술비가 너무 많이 나와서…….”
“음, 그래. 나도 그건 잘 아는데, 너도 알다시피 우리 회사 사정이 요즘 어렵잖냐.”
“지난번, 드라마 출연료도 아직 받지 못했…….”
“얘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가 그 드라마에 널 꽂으려고 얼마나 투자를 했는지나 알아? 네 출연료 가지고는 간에 기별도 안 와. 얘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릴 하네?”
토마토처럼 벌게진 김영철의 얼굴은 터질 것만 같았다.
“대표님, 부탁합니다. 저,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수술만 하면 살 수 있다고 하니, 제발 절 좀 살려 주세요.”
한수지는 김영철의 팔에 매달려 애원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안 떨어져?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내가 몹쓸 짓이라도 한 것 같잖아?”
김영철은 거칠게 한수지의 팔을 뿌리쳐 냈다. 그러더니 주변을 살피며 헛기침했다.
“그럼 저는 어떡하죠……?”
“사정은 딱하지만, 우리도 어쩔 수 없어. 방법은 찾아보마. 딱히 뾰족한 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김영철은 재킷을 매만지며 냉정하게 일어섰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이걸 보시죠.”
한수지가 천천히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비치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은 조금 전과 사뭇 달랐다. 무언가 작심이라도 한 듯했다.
툭, 한수지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건 USB와 몇 장의 사진이 동봉된 봉투였다.
“이게 뭐야?”
김영철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보시면 알아요.”
“뭐, 뭐야! 이게?”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김영철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그는 주변을 살피며 황급히 내용물을 봉투 안으로 집어넣었다.
“너, 미쳤어? 이거 어디서 구한 거야?”
김영철 대표는 스폰서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정·관계 유력 인사들의 술 접대 자리에 꾸준히 신인급 연기자들을 들여보냈다. 물론 그 안에 한수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가 내놓은 카드는 성 접대 현장을 담은 몇몇 사진들과 USB였다.
김영철이 목소리 톤을 낮추고 으르렁거렸다.
“저도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걸로 뭘 어쩌겠다고!”
김영철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했다.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제 수술비하고 앞으로 살아갈 생활비만 해결해 주세요.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넘기고 고향에 내려가 쥐 죽은 듯이 살게요. 그게 전부예요. 대표님, 제가 이걸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한수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가녀린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정말 아무도 모른다는 거지?”
한수지를 응시하는 김영철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네. 정말이에요.”
“우리 수지, 순둥이인 줄만 알았는데, 이런 재주가 있었네? 그래, 험한 세상 살아가려면 이 정도 준비는 해 둬야지. 그러니까, 병원비만 대 주면 조용히 살겠다 이거지?”
“네. 정말 저 바라는 것 아무것도 없어요. 돈도 싫고 스타가 되는 것도 싫어요. 동생이랑 고향에 내려가 살고 싶어요. 살려 주세요.”
“누가 들으면 내가 널 죽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들리겠다.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
김영철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절 도와주시는 건가요?”
“당연히 내가 널 도와야지, 누가 돕겠니? 네 재능이 아깝지만, 네 뜻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그러더니 김영철이 사진과 USB가 담긴 봉투를 움켜쥐었다.
“감사합니다.”
“음, 다시 묻자! 이게 원본이지?”
김영철이 손가락으로 봉투를 가리켰다.
“물론이에요.”
“복사본이 따로 있는 건 아니겠지?”
“절대 없습니다.”
“그래, 그래. 없어야지. 당연히 없어야지. 만약에 그런 불손한 것이 존재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건지 알지?”
김영철이 한수지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
한수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알았다. 회사 사정은 어렵지만 내가 사재를 털어서라도 수술비를 대 줄 테니까, 너무 걱정 마. 나, 그렇게 매정한 사람 아니야!”
김영철이 말라비틀어진 한수지의 손등을 톡톡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 * *
한수지가 옮겨 간 병실은 하루 입원료만 100만 원이 넘는 VIP 병실이었다.
“채혈 좀 하겠습니다.”
“네.”
박상우는 한수지의 팔을 탁탁 치더니 고무줄을 묶고 바늘을 꽂았다.
“이따 오후에 심장 초음파 검사 있으니까, 금식하시고요. 내일은 혈관 조영술 검사가 있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궁 천공이 의심되어, 산부인과 진료가 예약되어 있습니다. 잠시 후에 산부인과 병동으로 오십시오.”
“네.”
“검사가 끝나면 교수님께서 수술 일정을 잡으실 거예요. 그동안 술, 담배는 물론이고 자극적인 음식도 드시면 안 됩니다.”
박상우가 의료용 튜브에 채혈한 피를 담으며 말했다. 의사로서 원론적으로 내뱉는 말들이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서, 선생님…….”
박상우가 발걸음을 돌리자 한수지가 그를 멈춰 세웠다.
“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니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러나 한수지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뭔가 말을 하려다 삼켜 넘기는 듯했다.
‘분명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는데…….’
“……알겠습니다.”
박상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쿵!
“죄, 죄송합니다.”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박상우는 한 중년 여성과 부딪치고 말았다.
“아, 아니에요.”
부딪치는 바람에 그녀의 가방이 열렸고 그 안의 내용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쪼그리고 앉아 흐트러진 물건들을 주워 담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또르르르~.
당황한 박상우가 그녀의 물건을 주워 담는 순간, 앰풀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인슐린?’
앰풀을 주워 든 박상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아주머니 건가요?”
박상우는 앰풀을 주워 건네주었다.
“아, 네.”
그녀가 황급히 가방 속에 앰풀을 집어넣었다.
“당뇨병이 있으신가요?”
“네. 제가 얼마 전에 당뇨병 진단을 받아서요.”
“그러시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한수지 씨가 입원한 병실 맞나요?”
여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한수지가 입원한 병실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여기가 한수지 씨 병실입니다. 가족분이세요?”
“아뇨, 아뇨. 저는 간병인이에요. 오늘부터 제가 한수지 씨 간호를 하기로 했거든요.”
‘뭐? 간병인까지?’
“……그렇군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박상우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 * *
이틀 후.
박상우는 TS 당직실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갑자기 바뀐 김영철 대표의 태도. 도대체 무슨 일일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해도 박상우의 마음 한쪽이 무거웠다.
‘분명 한수지 환자는 임신한 적이 있고, 무허가 의료진에게 수술을 받았던 게 틀림없다! 그게 CCMP의 원인이 되었을 테고…….’
의문점들은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박상우는 떨쳐 내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신경 끄자.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잖아. 난 그냥, 환자를 치료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띠리리링.
그 순간,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이은주 간호사의 전화였다.
“박 선생님! 한수지 환자가 좀 이상합니다.”
“어떻게 이상하다는 거죠?”
“급작스럽게 전신 경련을 일으키더니 코마(Coma: 혼수상태)가 왔어요. 빨리 병실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은주 간호사는 계속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코마요? 원인이 뭐죠?”
“글쎄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지금 부정맥 증세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내려갈게요.”
박상우는 서둘러 가운을 걸치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코마라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