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59)
신의 메스-59화(59/249)
59화 무명 여배우 (6)
“……알겠습니다. 일단은 돌아갈게요. 하지만 생각해 주셔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저는 환자분을 지켜야 하는 의사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전 항상 한수지 씨 편이니까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쉬세요.”
박상우가 천천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그날 밤, 박상우는 한수지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그녀의 병실을 찾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어!’
한수지는 초췌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박상우는 한참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PKG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혈압은 나쁘지 않고, 맥박도 안정을 되찾은 것 같네.’
박상우가 볼펜을 들고 차트에 수치를 적어 넣었다.
그 순간, 한수지가 눈을 떴다.
“선생님!”
그녀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잠을 자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뇨! 그냥 누워 계셔도 됩니다.”
박상우가 양손을 뻗어 그녀를 다시 누이려 했다.
“괜찮습니다.”
박상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수지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보였다.
“흐으음…….”
그녀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수지가 양팔로 몸을 지탱하며 힘겹게 일어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걱정되는 듯, 박상우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습니다.”
“아…… 네.”
박상우는 여전히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선생님!”
그 순간, 한수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박상우를 불렀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네?”
“제가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아…… 네. 말씀하시죠.”
“아뇨. 여기서 말씀드리긴 그렇고, 좀 조용한 곳으로 갔으면 하는데요.”
“그래요? 아직 회복이 덜 되셔서 가능하시면 병실을 벗어나시면 안 됩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여기서 말씀하시죠.”
“아뇨. 좀 답답하기도 해서…… 찬 바람을 좀 쐬고 싶어요.”
박상우는 한수지의 태도 변화에 사뭇 놀란 듯했다.
‘심경의 변화가 있나 보군.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옷을 좀 따뜻하게 입으시는 게 좋겠군요.”
박상우는 곧 옷장에서 외투를 꺼내 한수지에게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네. 그러면 휴게실로 가시죠.”
한수지는 핏줄이 툭툭 튀어나와 앙상해진 손으로 박상우의 팔을 잡고 일어났다. 박상우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부축했다.
* * *
박상우는 한수지와 함께 8층 하늘공원으로 올라갔다. 심장병 환자가 버티기엔 조금은 쌀쌀한 날씨였다. 한수지는 입술이 파래진 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거라도 좀 드시죠.”
휴게실에서 따뜻한 음료를 사 온 박상우가 한수지에게 음료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힘겹게 한 모금을 넘긴 한수지가 힘없이 대답했다.
“저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선생님, 염치 불고하지만, 그 전에 약속 하나만 해 주세요.”
“약속이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들어드리겠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박상우가 커피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네. 그러면 말씀드리죠. 사실, 제가 이 병원에 입원하게 된 이유는…….”
한수지가 천천히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녀가 털어놓은 비밀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일부러 이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겁니까?”
한수지는 박상우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명성대학교 병원에 입원했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에이즈로 진단받았던 환자를 살렸다는 기사를 보고 용기를 내 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결국, 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건가요?”
“맞아요. 지금 저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회사 대표님도 매니저도, 심지어 저를 치료했던 다른 의사들도 믿을 수가 없어요.”
흔들리는 눈망울. 뭔가 엄청난 공포심에 사로잡힌 눈빛이었다.
‘이 여자, 뭔가 있어!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잖아!’
떨리고 있는 건 눈동자뿐만이 아니었다. 무릎 위에 얌전하게 올려 둔 그녀의 주먹도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드르륵, 박상우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정말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뭐든 돕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말씀해 보세요.”
“그러면 말씀드리죠.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하나…….”
한수지는 청색증 때문인지 시퍼렇게 변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러면 말씀드릴게요. 제가 ‘나인식스’에 들어간 건 재작년 겨울이었어요…….”
어느새 지난날을 회상하던 한수지의 눈망울이 젖어들었다.
* * *
“후, 수지야. 진짜 제대로 된 배역 하나 따내기 정말 힘들다.”
김영철이 고개를 들어 담배 연기를 공중에 흩뿌렸다.
“제가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아냐, 아냐. 넌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어. 이번에 미니시리즈 「복수」에 캐스팅된 선미 있잖냐. 그게 연기냐? 발로 해도 그것보단 나아! 그 배역은 네가 딱인데 말이야. 내가 끗발에서 밀렸다. 미안하다, 수지야.”
김영철 대표가 안타까운 듯 이마를 문질렀다.
“아니에요. 대표님은 최선을 다하셨어요. 제가 연기력이 부족해서 그래요. 대표님 잘못이 아니에요.”
“후, 그래서 말인데…….”
김영철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한수지의 눈치를 봤다.
“말씀하세요.”
“오해 없이 듣길 바란다. 이 바닥이 원래 빽 없고 줄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한텐 개미지옥이야. 너도 그건 잘 알지?”
“네. 그래도 장혜리 선배님처럼, 연기가 뒷받침되면…….”
“얘가 아직도 순진한 소리 하네. 장혜리가 연기만으로 그렇게 큰 줄 알아? 장혜리 스폰이 누군지 알아?”
답답하다는 듯이 김영철이 손사래를 쳤다.
“네?”
“아아, 됐고.”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 바닥은 돈 아니면 줄! 둘 중 하나는 있어야 버티는 곳이야. 아무튼, 너도 알다시피 거지 똥구멍에서 콩나물을 빼 먹는 게 낫지, 우린 자금이 부족하니 아무래도 동아줄 하나를 잡아야 할 것 같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곁가지가 아닌 동아줄을 다이렉트로 잡을 기회를 내가 줄 테니까, 넌 그걸 잡기만 하면 되는 거야. 이번 기회를 절대로 놓치면 안 돼!”
탐욕에 물든 김영철의 눈동자가 번뜩거렸다.
* * *
“그래서, 그 별장에 갔단 말입니까?”
“네. 저도 워낙 절박한 상황이라 거부할 수 없었어요. 정·관계 인사들이 모인 점잖은 자리니까 술 시중만 들면 된다고 했거든요.”
방송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BK 엔터테인먼트’의 송해진 회장이 주최한 자리였다. 정·관계 유력 인사들이 그의 별장에 모여 만찬을 벌였고, 몇몇 신인급 연예인들이 그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차출된 것이었다. 그리고 한수지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술 시중만 들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한수지의 낯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러곤 곧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네, 말씀드릴게요. 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요. 그 이후로…….”
그날 이후, 한수지는 수차례 송해진 회장의 별장에 차출되었다. 단순히 술 시중만 드는 것이 아니었다. 고압적인 지위를 이용한 강제적인 관계 요구. 그들은 가녀린 한수지의 정신과 육체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
침통한 표정의 박상우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혹시 그 일로 인해 원치 않은 임신을 했던 건가?’
“한수지 씨, 뭐 하나만 여쭤볼 테니 솔직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박상우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네. 인제 와서 감출 게 뭐가 있겠어요. 뭐든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수지가 작심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혹시 그 일로 인해서 임신하셨습니까?”
“……맞아요. 그 일로 인해 원치 않는 임신을 했었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랬군요. 그래서 임신 중절 수술을 했던 거고요?”
“네. 대표님이 강제로 수술을 받게 했어요.”
“김영철 대표 말이죠? 혹시 무허가 의사에게 수술을 받았던 겁니까?”
“네. 제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앞으로 출연할 드라마에도 치명적이고, 상대에게 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랬습니다.”
“상대라면 송해진 회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꿀꺽, 박상우가 목울대를 꿀렁거렸다.
“…….”
한수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미친 것들!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런 짓을 하다니. 결국, 임신 중독이 DCMP의 원인이었던 거야!’
“그런 일이 있었군요.”
박상우가 양 주먹을 말아 쥐었다.
“서, 선생님,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제 주변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은…….”
한수지는 치료를 받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USB와 파일을 김영철 대표에게 건넸던 사실을 고백했다.
“후…… 그, 그걸 그 사람에게 주면 어떡합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두려웠어요.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았으니까요.”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부터 하죠.”
“아뇨. 그러면 어쩌면 전 죽을지도 몰라요. 절대로 신고하면 안 돼요!”
격앙된 그녀의 목소리. 울부짖는 그녀의 눈망울에는 분노와 절망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박상우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난감한 표정의 박상우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런데, 제가 파일을 하나 더 가지고 있어요.”
“네? 파일요? 김영철 대표에게 줬다고 했잖아요?”
“혹시 몰라서 복사본을 하나 남겨 뒀거든요.”
“그래요? 그 파일 어디 있습니까?”
불행 중 다행으로, 한수지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말 저를 도와주실 수 있는 거죠? 지난번에 선생님이 에이즈 환자를 치료하시는 모습을 보고 희망을 걸었어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시 여쭐게요. 저, 정말 도와주실 수 있나요?”
박상우를 응시하던 한수지의 눈망울이 마구 흔들렸다.
“물론입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한수지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어요.”
한수지가 박상우의 손을 펼치고는 그 위에 USB를 올려놔 주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확인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이 사실은 절대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네. 선생님! 저, 저 좀 살려 주세요. 이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뿐입니다.”
“알겠습니다.”
* * *
박상우는 흉부외과 당직실로 돌아와, 노트북에 한수지가 넘겨준 USB를 꽂았다.
“하~아~.”
망연자실한 표정의 박상우가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의자에 몸을 내던졌다.
한수지가 넘겨준 동영상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인들의 얼굴이 화면에 선명하게 떴다. 그들의 온갖 변태적인 행위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동영상이었다. 심지어 강제 마약 흡입까지…….
한수지에게 강제로 코카인을 흡입하게 했고, 그녀가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성폭행을 일삼았던 것이었다.
‘이, 이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참담한 심정의 박상우가 손바닥으로 마른 얼굴을 문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