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6)
신의 메스-6화(6/249)
6화 양 갈래 머리 소녀 (1)
“아, 네. 교수님.”
“좋아. 그 정도면 됐어.”
조현오 교수가 놀라움과 만족스러움이 동시에 묻어 있는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네.”
박상우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목례했다.
“장원대학교 출신이네?”
휘리릭, 조현오 교수가 이미 출력해 놓은 박상우의 신상 명세를 들춰 봤다.
“네. 강릉에 있는…….”
“아니, 아니,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게 아니야. 난, 자네가 우리 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걸 묻는 게 아니라고. 난 출신 학교 따윈 관심 없다고.”
고개를 숙인 채, 조현오 교수는 서류를 넘겨 보았다. 사실, 병원 내에서 혁신적이며 합리적인 교수는 조현오 교수가 유일하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는 항상 명성대학교 병원의 폐쇄적인 분위기를 깨부수려 했으며, 그로 인해 곧잘 윗선들과 마찰음을 내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네?”
박상우가 눈을 크게 떴다.
“학부 성적이 상당히 우수하다는 뜻이야. 음, 거기 뇌신경외과에 이상필 교수라고 있지 않나?”
“네. 계십니다.”
“후후후, 이 교수가 나와는 절친이야.”
“아, 그러십니까?”
“흠, 이 인간, 성격 더럽기로는 이 바닥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어떻게 용케 버텨 냈네?”
조현오 교수가 코끝을 매만지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아…… 네.”
박상우는 이상필 교수와 조현오 교수가 친구 사이인 것을 오늘에야 알 수 있었다. 그가 당황한 듯 말끝을 길게 늘였다.
“흐음, 그나저나 어때? 인턴 생활은 할 만한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러운 톤. 조현오 교수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박상우를 응시했다.
“네. 아직까진 견딜 만합니다.”
“후후후,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되는데? 지금이야 의욕이 넘쳐 펄펄 날아다닐 때 아닌가? 아직까진 견딜 만해서는 안 되지.”
응급실 사건 이후, 박상우는 이미 조현오 교수의 심중에 들어와 자리 잡고 있었다. 호불호가 명확한 조현오의 성격을 고려할 때, 응급실 사건은 박상우에겐 하늘이 내려 주신 기회인 셈이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감격인지 통쾌함인지, 박상우가 터져 나오는 미소를 가리려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제 곧 전공을 선택해야 할 텐데, 생각해 둔 과가 있나?”
조현오 교수가 조금씩, 박상우에게 호감을 보였다.
“흉부외과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상우가 입술을 떼었다.
“왜?”
조 교수는 고개를 살짝 비틀고 눈매를 좁혔다.
“네?”
“왜 흉부외과냐고? 다들 돈 안 되는 과라고 피하는데 굳이 흉부외과에 들어오겠다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 거야. 돈 되는 과들도 많은데.”
조현오 교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콧등을 찡그렸다.
“다른 장기에 비해 흉부 쪽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고 촌각을 다투는 게…….”
“아니, 아니. 그런 입에 발린 소리 말고, 자네가 흉부외과에 지원하는 진짜 이유를 묻는 거야.”
그 순간, 떠오르는 기억.
박상우가 회귀 전 기억의 한 조각을 더듬거렸다. 앞에 앉아 있는 조현오 교수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뼈아픈 충고. 그가 그 기억을 떠올려 냈다.
* * *
– 자네는 왜 심장을 하트로 표시하는 줄 아나?
– 하트의 모양이 심장을 닮아서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아니, 아니. 틀렸어. 예부터 사람들은 사랑이 가슴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지. 사랑을 담는 그릇, 그게 하트야. 우리 몸에서 생명, 즉 사랑을 담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릇이 무엇이겠나. 바로 심장이지. 그래서 심장을 하트로 표시하는 거지. 내가 왜 자네한테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는지 아나?
– 아뇨. 잘 모르겠습니다.
–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 말 잘 듣게. 따라서 흉부외과 의사는 손으로 수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거야. 그런데 자네는 손은 있는데 가슴이 없어. 환자의 진심을 읽어 내는 맑은 눈이 없다는 거야. 오로지 출세욕만을 담은 혼탁한 눈동자만을 가졌을 뿐이지. 지금 자네가 나를 쳐다보는 눈빛, 그 눈빛이 변하지 않는 한 결코 좋은 의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내 평생의 지론이야. 이것이 바로 자네가 흉부외과 과장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지.
조현오 교수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 과, 과장님!
박상우에겐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기억이었다.
* * *
“네. 그럼 외람되지만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손으로 치료하는 의사가 아닌 가슴으로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뭐? 하하, 하하하.”
마치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 듯한 박상우의 말에 조현오 교수가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놀라움을 감추려는 의도인지 얼굴 근육을 움직여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박상우 역시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하하하, 자네. 혹시 바둑 좋아하나?”
바둑. 바둑광인 조현오 교수가 한 수를 제안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을 열었다는 증거일 터. 그의 의중에 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노력했던 박상우 입장에선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 회귀 전, 조현오의 눈에 들기 위해 미친 듯이 배워 두었던 바둑 실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네. 조금 둘 줄 압니다.”
“얼마나?”
“한 2, 3급 정도 됩니다.”
“후후후, 좋아. 내일 오프지?”
“네.”
“그러면, 우리 집으로 와. 나와 바둑 한 수 하면서 콩국수나 먹자고. 우리 집사람이 콩국수 하나는 기가 막히거든.”
“네. 교수님!”
조현오 교수 아내의 콩국수를 맛볼 수 있다는 건, 조현오 교수의 마음에 들었다는 뜻. 박상우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상기된 박상우의 표정과 만족스러워하는 조현오의 표정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 * *
잠시 후.
삐거덕.
박상우가 병원 옥상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 가벼워 보였다.
틱, 어깨를 들썩이며 캔 커피 뚜껑을 따는 그의 손길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직도 좀 전에 느꼈던 희열이 가시지 않은 듯하다.
박상우는 난간에 기대 캔 커피를 마시며 하늘을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잔존 수명? 그건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그것도 잠시, 박상우의 미간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잠시 잊었던 응급실에서의 기억. 박상우가 환자의 이마에 새겨졌던 숫자를 떠올렸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과거의 젊은 나로 돌아온 것도 믿을 수 없는데, 잔존 수명이라니? 게다가 모든 사람의 잔존 수명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는데? 오직 그 환자에게만 보였어. 내가 환영을 본 건가?’
박상우가 신경질적으로 앞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다. 아무튼, 나는 과거의 젊은 나로 돌아왔고 지금부터는 새로운 삶을 영위해야 한다. 이상한 현상들이야 차차 이유가 밝혀지겠지!’
빠지직, 박상우가 쥐고 있던 캔을 우그러뜨렸다.
* * *
새벽 1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 박상우가 천기수와 함께 천천히 병원을 빠져나왔다.
“상우야! 오늘도 졸라 보람찼는데, 한잔 어때?”
천기수가 박상우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걸쳤다.
“흐음, 나 오늘 몸 상태가 별론데.”
“자식, 진짜 아팠나 보네?”
천기수의 표정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미안해. 다음에 한잔하자.”
“그래, 그래.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으면 한잔하자. 참, 내일 너 오프잖아? 뭐 해?”
“조 교수님 댁에 가기로 했어.”
“와우, 이 축복받은 새끼! 계 탔네? 조 교수, 집에 사람 안 들이기로 유명하잖아. 이거, 이거, 완전 간택받은 건데?”
툭툭, 천기수가 박상우의 볼을 살짝 두드려 주었다.
“글쎄.”
“글쎄긴 인마. 암튼, 축하한다.”
천기수가 자신의 어깨로 박상우를 툭 건드렸다.
“고맙다.”
“너도 오프잖아. 넌 뭐 해?”
“후우, 우리 오마님이 어디서 순박한 시골 아가씨 하나 섭외했나 보더라. 나 내일 선 본다.”
푹, 내키지 않는 듯 천기수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었다.
“후후후, 잘해 봐라.”
“잘하긴 뭘 잘해? 보나 마나 뻔하지. 우리 엄마 여자 보는 눈 너 잘 알잖아. 당신과 닮은 여자들을 어디서 그렇게 잘도 수배해 오시는지.”
툭, 데구루루
천기수가 바닥에 깔린 돌부리를 걷어찼다.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인상을 구겼다.
“후후후. 감사한 줄 알아라. 난 그런 엄마도 없다.”
“어…… 어. 미안.”
천기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민망한지 얼굴을 문질렀다.
“아냐, 아냐. 신경 쓸 거 없어. 아무튼, 내일 선 잘 보고. 모레 보자.”
“그, 그래. 암튼 감기 얼른 나아라. 모레부턴 흉부외과다. 진짜.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야.”
천기수가 멀어져 가는 박상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래.”
뒤돌아선 채, 박상우도 손을 들어 흔들었다.
잠시 후.
‘내가 과거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환자들의 이마에 잔존 수명이 보이기 시작했어. 분명, 이 둘이 무관하지만은 않은데…….’
박상우가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멍하니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도착한 곳은 어이없게도 박상우가 살던 곳. 언덕바지에 서 있는 낡은 빌라, 옥탑방이었다.
‘뭐야? 여긴…….’
후우우, 주변을 돌아보며 깜짝 놀란 박상우가 허탈한 듯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끼릭, 박상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우편함에 손을 넣고는 더듬거렸다.
‘있어!’
손끝에 느껴지는 금속 재질. 자신이 인턴 시절 우편함에 넣어 두었던 현관 열쇠였다.
박상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현관 키를 쳐다보고는 피식거렸다.
‘진짜 내가 과거로 오긴 했나 보군.’
틱,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켜니 예전에 살던 모습 그대로였다.
박상우는 우두커니 서서 주변에 시선을 흩뿌렸다. 그가 거울을 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이제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피부가 잠시 일그러졌다 팽팽히 살아났다. 거울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는 26세 박상우가 틀림없었다.
‘정말 모든 것이 되돌려졌어.’
박상우가 책장에 꽂힌 책들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보기도 하고 서랍장을 열어 보며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인정해야 하는 건가?’
벌러덩, 상우는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피곤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 * *
다음 날.
‘앗, 오늘 교수님 댁에 오라고 했는데…….’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던 박상우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길, 늦겠어!’
탁상시계를 집어 들어 시각을 확인한 박상우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는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그가 모퉁이를 돌아 버스 정류장 맞은편, 건널목에 멈춰 섰다.
‘진짜 변한 게 아무것도 없군.’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널목 앞, 편의점. 그 옆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문구점. 그리고 박상우가 가끔 들러 머리카락을 자르던 미용실까지 20년 전 그대로였다.
‘진짜 내가 돌아왔어!’
흐음, 박상우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띠링, 띠링, 띠링.
그 순간, 건널목 신호가 바뀌었다. 박상우가 파란불이 켜진 것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동시에, 맞은편에서 두 모녀가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엄마와, 5~6살쯤 돼 보이는 귀여운 꼬마 숙녀였다.
“어, 엄마. 나 정말 프린세스 인형 사 주는 거야?”
“그럼. 우리 은서. 많이 아야 했으니까 엄마가 저기서 사 줄게.”
아이 엄마가 건너편 문구점을 가리켰다.
‘이상하네? 아이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하지?’
힐끗 아이의 안색을 살피던 박상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어디 아픈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는지 박상우가 아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순간, 아이가 고개를 돌려 박상우를 쳐다보았다.
[잔존 수명: 2시간 34분 12초, 11초, 10초, 09초……·.]째깍째깍, 마치 초침 소리가 귓전을 흔드는 듯했다.
아이의 잔존 수명은 2시간 34분 12초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또다시, 잔존 수명이 보였어! 그렇다면 환영이 아니란 거야?’
박상우가 건널목 한가운데, 멍하니 서서 아이의 이마를 응시했다.
끼이익!
“야, 인마! 죽고 싶어!”
그 순간, 신호가 바뀌었고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가 출발했다. 운전자가 얼굴을 내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면서도 박상우의 시선은 건너편 아이의 이마에 쓰인 붉은 숫자에 고정돼 있었다.
‘이, 이게 환영이 아니라면? 저 아이, 이대로 두면 죽는다!’
꿀꺽, 박상우가 마른침을 삼켜 넘기며 목울대를 꿀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