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60)
신의 메스-60화(60/249)
60화 무명 여배우 (7)
‘……맞아! 그 사건이었어!’
박상우가 영상 속에 등장한 정·관계 인사들의 면면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머릿속 깊숙이 숨어 있던 회귀 전의 기억이 선명히 튀어나왔다. 일명 ‘한수지 사건’이라 불린 희대의 스캔들이었다.
당시 한수지는 가지고 있던 성추행 동영상을 증거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그땐 그 누구도 그녀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한수지를 협박, 공갈이라는 죄목으로 궁지에 몰아넣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절대로 가만둬서는 안 돼! 반드시 죗값을 치르도록 해야겠어!’
박상우가 억세게 쥐고 있던 양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띠, 띠, 띠, 띠.
박상우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저예요.”
“이게 누구야. 천하의 박상우 선생 아니셔. 웬일이야, 이 밤중에. 내가 보고 싶어서 전화한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야?”
박상우가 전화를 건 사람은 박앤정의 수석 변호사, 윤석현이었다.
“형님, 제가 형님께 선물 하나 드리려고요. 마음에 드실 겁니다.”
“선물? 그게 무슨 자다가 봉창 뚫리는 소리야? 선물이라니? 뜬금없이 전화해서.”
“전화로 말씀드리긴 그렇고 한번 뵈었으면 하는데,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흠,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만 네가 만나자고 하면 당연히 만나야지. 내가 그쪽으로 갈까? 아니면 우리 회사로 나올래?”
“여기보다는 제가 형님 회사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긴히 상의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 그래라, 그럼. 언제 볼래?”
“내일 점심에 시간 괜찮으세요?”
“내일 점심이라……. 괜찮아. 그럼 한 시쯤 와라. 그때 시간이 좀 날 것 같으니까.”
“네.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
전화를 끊은 박상우가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잖아!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고 사람을 죽이려 해? 도저히 용서되지 않는다.’
* * *
다음 날, 박앤정 윤석현 시니어 변호사실.
국내 최고 법률 회사의 시니어 변호사답게 윤석현 변호사실은 화려했다. 현대적인 분위기의 인테리어로 명품 가구들이 즐비해 있어, 고급스러운 호텔과도 같았다.
“변호사님이 회의 중이셔서, 이쪽에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윤석현 변호사의 개인 비서가 그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아…… 네.”
안내를 받은 박상우가 그의 방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돈이 좋긴 좋구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사무실 주변을 둘러보던 박상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고, 생명의 은인 아니셔! 오랜만이다 상우야.”
잠시 후, 윤석현 변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박상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네. 형님!”
“어디 보자, 우리 아우님 얼굴 좀 보자. 아이고, 그동안 고생이 많았나 보네. 얼굴이 수척한데?”
윤석현이 박상우의 양팔을 잡고는 안색을 살폈다.
“수련의 생활이 뭐 다 그렇죠. 딱히 고생이랄 것도 없습니다.”
“아냐, 아냐. 얼굴이 너무 까칠하네. 보약이라도 한 재 달여 먹여야 하는 거 아냐?”
“후후후, 말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잘생긴 얼굴, 이러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겠어.”
윤석현 변호사가 박상우의 볼을 가볍게 잡고 흔들었다.
“앉아.”
잠시 회포를 푼 뒤, 박상우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네.”
“우리 아우님이 무슨 선물 보따리를 들고 찾아오셨으려나? 흥미진진한데?”
윤석현은 소파에 몸을 내던지며 물었다.
“형님, 일단 약속부터 하시죠. 무조건 도와주신다고.”
“도대체 뭔데 이렇게 진지 모드야? 좋아. 말해 봐. 간, 쓸개라도 내놓으라면 다 내놓을 테니. 어차피 죽을 목숨, 네가 살려 놨잖아. 그 빚은 갚아야지.”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박상우가 한수지와 관련된 일련의 일들을 차분히 설명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생각보다 심각한 선물인데?”
박상우의 얘기를 듣던 윤석현 변호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는 듯했다. 그가 몸을 파묻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성 상납에 강제 유산까지……. 김영철 대표는 한수지를 짓밟고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직은 정황만 포착된 상황이지만, 간병인을 이용해 독살을 시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파렴치한을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어서 이렇게 형님을 찾아온 겁니다.”
말하는 내내 말아쥔 박상우의 두 주먹이 부들거렸다.
“그래서? 나보고 한수지의 변호를 맡아 달라는 거지?”
윤석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네.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다만…….”
“다만 뭐? 수임료 때문에?”
“네. 솔직히 송구스럽지만, 수임료를 드릴 만큼 여유는 없어서요.”
“내 목숨 값이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나? 그런 건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너한테 진 빚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이자도 되지 않으니까.”
“감사합니다, 형님.”
“그나저나, BK 엔터테인먼트 송 회장이라……. 정·관계에 워낙 인맥이 넓은 인간이라 만만치 않을 듯싶은데…….”
윤석현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턱선을 매만졌다. 엔터테인먼트의 대부, 송 회장이라면 쉽게 쑤실 만한 상대는 분명 아니었기에 섣불리 덤벼들 수 없는 소송이었다.
“그래서 제가 형님을 찾아온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게 나한테 주는 선물이라는 거야?”
“네. 이 정도면 형님 이름 석 자 대차게 날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아닙니까? 저는 형님이 반드시 승소하실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민사뿐만 아니라 형사 소송까지 진행해 주십시오. 반드시 단죄해야 합니다.”
박상우가 볼 양옆이 툭툭 튀어나올 정도로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
“음, 너한테 이렇게 장담해 놓고 쪽팔리게 꽁무니 뺄 수도 없고……. 좋아! 한번 해 보자. 똥인지 된장인지 아직은 구분하기 힘들지만, 이 정도 시나리오면 변호사 타이틀 걸고 도전해 볼 만도 하지. 그래. 하자!”
마음의 결정을 한 듯 윤석현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박상우가 그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지금의 정황만 가지고는 승소를 장담할 수 없어. 현재로선 한수지 그 여자의 일방적인 진술만 있는 거니까. 일단, 내가 기초 조사부터 좀 해 보고…….”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도 승산 없는 게임, 덤벼드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제가 형님께 결정적인 스모킹 건을 쥐여 드리겠습니다.”
박상우가 윤석현의 말허리를 잘랐다. 만면에 지은 웃음이, 자신감을 내보이는 듯했다.
“스모킹 건? 진술 말고 뭘 더 가지고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내 말이 맞냐?”
“송 회장, 김영철 이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잡을 치명적인 덫이죠. 이걸 보시죠.”
박상우가 윤석현에게 USB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말씀드렸잖습니까? 스모킹 건이요. 보시면 압니다.”
“그래? 좋아! 얼마나 먹음직스러운 게 들어있나 보자.”
틱, 윤석현이 자신의 노트북에 USB를 삽입했다.
곧이어 재생되는 화면을 응시하던 윤석현 변호사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윤석현 변호사는 속이 타는지 바짝 마른 입술 주위에 침을 둘렀다.
– 죄, 죄송해요. 회장님, 전 이런 자리인지 몰랐어요.
– 너 이년, 이리 안 와? 죽고 싶어!
만취한 송 회장이 한수지를 강제로 유린하는 장면이 담긴 생생한 파일이었다.
“아 놔, 이거 환장하겠네. 어디서 이런 왕건이를 물고 왔냐, 상우야!”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모습으로 볼 때 그 역시 적잖이 분노하는 듯 보였다.
윤석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창가로 가더니 블라인드를 내려 시야를 차단했다.
“상우야, 이 파일 어디서 난 거야?”
윤석현이 양복 상의를 벗어 던지며, 넥타이를 풀어헤치더니 셔츠 소매를 둘둘 말아 올렸다.
“한수지 본인에게서 받은 겁니다. 다행인 게, 한수지 씨가 나름대로 방어는 하고 있었더라고요.”
“이 파일의 내용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있어?”
또다시 윤석현이 입술에 침을 둘렀다. 심각한 상황에 적잖이 긴장한 모습이었다.
“한수지가 김영철 대표에게 복사본을 넘겼으니 적어도 그는 알고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지금쯤 송 회장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수도 있죠.”
“아냐. 이 파일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김영철에겐 부담이 되었을 거야. 쉽게 송 회장에게 오픈하기 힘들지. 자칫 자신의 밥줄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 말이야. 송 회장이 이 사실을 알아 봐야 자신에게 좋을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
“직감상 아직 송 회장에게 보고가 된 것 같지는 않고, 어떻게든 김영철 대표 본인이 모든 걸 해결하려 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만 흘러가 준다면 훨씬 편한데 말이야.”
윤석현 변호사가 사무실을 서성거리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게 원본이 확실하다는 거지?”
윤석현이 노트북에서 뽑은 USB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게 원본이에요. 확실합니다.”
“좋아. 승산이 있다, 상우야. 사실 좀 전까지만 해도 어려울 거로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아. 힘 좀 있다고 이런 식으로 초갑질을 하는 인간들은 가만둬선 안 되지.”
윤석현 변호사가 어금니를 굳게 깨물며 말했다.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솔직히 네 말만 들었을 땐 반신반의했는데, 이제 확신이 생겨. 분명 송 회장이라면 쉬운 상대는 아닐 거야. 저쪽도 수단과 방법 안 가리고 변호인단을 꾸릴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내 눈으로 가진 자의 만행을 똑똑히 지켜봤는데, 변호사 때려치우는 한이 있어도 덤벼 봐야지.”
윤석현이 셔츠를 돌돌 말아 올리며 말했다. 꿈틀거리는 팔뚝이 이 사건에 대해 강한 의지를 품은 듯 보였다.
“잘 부탁합니다, 형님. 다만, 단순히 보상 차원의 승소만을 말씀드리는 건 절대 아니라는 사실만 명심해 주십시오.”
“물론이야. 나도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BK 송 회장 이 인간, 이것 말고도 세금 포탈에 비자금, 자금 횡령 등 온갖 구린내만 풍기고 실체가 없던 인간이라 다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탈탈 털어 봐야겠어.”
윤석현 변호사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맞습니다.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해 주십시오.”
“그래. 박앤정은 물론이고 검찰 쪽에서도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다 동원해 보련다.”
“형님만 믿겠습니다. 아, 그리고 수임료는 얼마나………”
“그런 거 필요 없어! 난 나쁜 놈들 다 때려잡으려고 이 바닥으로 들어온 거야. 그깟 돈 몇 푼 받겠다고 이런 사건 맡겠니? 나, 돈 많아!”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상우야. 이 바닥은 너처럼 순수한 애가 발 담글 만큼 깨끗하지가 않다. 괜히 구정물 튈지 모르니까 넌 이쯤에서 빠져.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좋아, 지금부터 폭풍처럼 몰아쳐 가 볼까?”
윤석현 변호사가 박상우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 * *
“사무장님, BK 송 회장 자료 좀 부탁합니다. 뭐든 다 찾아봐 주세요. 불법적인 요소가 있는 거면 뭐든지 알아봐 주십시오. 하다못해 길거리에서 침을 뱉었는지, 담배꽁초를 버린 적은 없는지까지 탈탈 털어 주셔야 합니다.”
“네, 변호사님!”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빨리 움직입시다.”
파죽지세(破竹之勢)!
스모킹 건을 손에 쥔 윤석현 변호사는 망설임이 없었다.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으며 질풍 가도를 달렸다. 그는 곧바로 소송을 착수하여 신속히 기초 자료를 확보해 송 회장을 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러니까, BK의 송 회장을 치겠다는 거지?”
박앤정의 박상돈 대표 변호사가 윤석현 변호사가 준비한 자료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네. 이런 사건일수록 폭풍처럼 휘몰아쳐야 할 것 같습니다. 단칼에 치고 들어가야 빠져나갈 여지를 남기지 않아요. 대표님!”
윤석현 변호사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윤 프로! 자신 있어? 상대는 천하의 BK야.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도리어 역공을 당할 수도 있어.”
안경 너머로 윤석현 변호사를 응시하는 박상돈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윤석현 변호사의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