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62)
신의 메스-62화(62/249)
62화 섬마을 소녀 (1)
“그래.”
“근데, 반응이 왜 그리 덤덤해?”
“안 덤덤하면 어쩔 건데?”
“아 시팔, 이런 식의 반응이면 졸라 짜증 나지. 나만 속물이냐? 넌 뭐 슈바이처의 후손이라도 되냐?”
“그건 또 무슨 궤변이냐?”
“아 놔. 이런 걸 왜 하는 거냐?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이렇게 한 이 주일 봉사 갔다 오면 그동안 쌓인 똥은 누가 다 치우냐고! 대충 한 달은 풀당 때려야 할걸? 아주 뒈지는 거야.”
천기수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뭐, 이런 봉사활동 하는 척이라도 해야 국가 정책 자금 타지.”
“그러니까! 내 말이! 솔직히 정기적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게 어디 있냐고! 우리나라는 이런 게 문제야, 문제!”
천기수가 정부 정책까지 들먹이며 투덜거렸다.
현무도 의료 봉사활동!
현무도는 남해 해천에서도 배를 타고 5시간은 더 들어가야 나오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300여 명의 섬 주민이 거주하는 현무도. 작은 보건소가 존재하긴 했지만, 워낙 환경이 열악해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현무도에 명성대 병원에서 의료진을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회귀한 박상우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일이었다.
정부 정책 자금 평가 점수를 높이기 위해 명성대 병원에서 기획한 단발성 봉사활동으로, 신임 간호사, 인턴, 레지던트 1, 2년 차 의료진이 파견되었다.
자발적 참여를 원칙으로 했지만 누구 하나 자발적으로 참여한 수련의들은 없었다. 과마다 인원 할당량이 내려왔다. 레지던트 4년 차 이상 의사들은 당연히 열외였고, 만만한 수련의들은 울며 겨자 먹는 격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박상우, 천기수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우리 과 차출 인원은 너하고 나, 단둘이다. 시팔! 우리가 동네북이냐? 왜 맨날 우리만 쳐 대고 난리인데?”
다 먹은 아이스바를 쪽쪽 빨던 천기수가 나무막대를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어떡하겠니? 까라면 까야지. 그렇다고 우리가 버틸 수 있는 짬이 못 되잖아? 이번 기회에 천당 가는 표 끊는다고 생각하자.”
“아 놔. 우리가 화투판 흑싸리 껍데기도 아니고 이런 일은 맨날 우리 담당이냐?”
“이왕 가게 된 거, 좋은 마음으로 가자.”
“너나 좋은 마음으로 가라. 난 그렇게 못 하겠다. 가뜩이나 뱃멀미 심해서 뒈지는데…….”
천기수가 볼멘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가기 싫어?”
“두말하면 잔소리지. 죽어도 가기 싫다. 거기에 호프집이 있냐, 뭐가 있냐? 아주 2주 동안 ‘나 죽었다’ 하는 거라고.”
“인선이가 가는데도?”
“뭐, 뭐라고? 인선이가 왜?”
천기수는 인선이란 말에 화들짝 놀랐다. 남몰래 그녀를 짝사랑하는 그였기에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으리라.
“나도 몰라. 차출 대상자는 아닌데, 이번에 자원했다더라.”
“그, 그래? 그렇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긴 하는데…….”
안색을 바꾼 천기수가 허리춤을 당겨 올렸다.
“왜? 인선이가 간다니까 마음이 달라지냐?”
“달라지긴 인마! 뱃멀미야 뭐, 약 먹으면 되고. 공기 좋고, 물 좋은 데 가서 힐링하고 오면 좋은 거지. 거기 갔다 오면 심폐 기능도 불여튼튼이라더라.”
“미치겠군. 너 너무 티 나는 거 아냐?”
박상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게다가, 비록 눈 가리고 아웅이긴 하지만, 낙후된 지역에서 봉사하는 것도 나름 얼마나 의미가 있냐?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내가 얼마나 이 기회를 기다렸는데.”
천기수의 태도는 뻔뻔스럽게 좀 전과는 180도 바뀌어 있었다.
“말은 청산유수네. 여튼, 그렇게 알고 있어라. 괜히 이것저것 가져갈 생각 말고 필요한 거만 챙겨. 괜히 술 같은 거 꿍쳐 두지 마라. 걸리면 바로 상경이야.”
“그래, 그래.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고! 난 306호 김 할머니 병실에 가 봐야겠다.”
천기수는 능청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 할머니 너 무척이나 귀여워하시더라. 가서 잘 보살펴 드려.”
“그러게 말이다. 할머니가 유독 나만 그렇게 찾네? 병원에 그렇게 의사가 많은데도 말이야. 하여간, 이놈의 인기는…….”
이내 한결 밝아진 표정의 천기수가 휘파람을 불며 당직실을 빠져나갔다.
“단순하긴.”
박상우가 웃으며 그런 천기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현무도 의료 봉사활동이라…….’
잠시 후,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박상우가 눈을 감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 전, 이번 봉사활동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당시 의료 봉사활동의 리더였던 정현웅을 찾아간 박상우는, 다짜고짜 거부 의사를 밝혔다.
– 뭐야? 왜?
정현웅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꼈다. 그러더니 박상우에게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었다.
– 소모적인 단발성 행사라서 의미를 찾을 수 없을뿐더러, 제가 이런 형식적인 봉사활동에 참여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전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 소모적인 단발성 행사? 누가 그래?
–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봉사활동도 아니고 정부 정책 자금 때문에…….
– 시끄러워, 새꺄! 아주 저 혼자 졸라 잘났지? 그럼 참여하는 우리는 병신이라서 가는 거냐?
못마땅한 표정의 정현웅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 그게 아니라…….
– 뭐가 그게 아니라야? 네 동기들은 쌔빠지게 고생할 때, 너 혼자 살겠다는 거 아냐? 누가 네 속을 모를 것 같아?
정현웅이 비아냥거렸다.
–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다만…….
– 개소리하지 마. 빠지고 싶으면 빠져. 다만, 그로 인해 생기는 불이익은 오롯이 네 몫이란 걸 명심해라. 알았어?
정현웅이 말끝마다 박상우의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표면적으론 강제성이 없는 행사였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면 정현웅도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평소에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정현웅이 순순히 허락할 리가 없었다.
– 네. 그런 건 제가 알아서 감수하겠습니다.
– 하여간, 졸라 재수 없는 곁가지 새끼! 저 혼자 살겠다고 동기들을 배신해? 하여간 근본 없는 것들은, 이래서 안 되는 거야. 꺼져 새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정현웅이 박상우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 네. 그럼 허락하신 거로 알고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 하여간 저 새낀 얼굴만 봐도 재수가 없어.
정현웅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회귀 전, 조직의 충성스러운 개였던 박상우. 하지만 이때만 해도 비상식적, 형식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는 강단이 있었다. 그러나 점차 조직의 힘을 체험하게 되고 결국, 그 조직의 생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참석해야겠어. 굳이 사람들의 눈 밖에 날 이유가 없잖아.’
박상우가 앉아 있는 의자를 빙글 돌려 보았다. 괜히 튀는 행동을 해서 미운털이 박힐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박상우에게 이번 의료 봉사활동에 참여할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2주간의 봉사활동을 마친 후, 의료진이 원대에 복귀한 때였다.
박상우가 당직실로 들어서자 천기수가 짐을 싸고 있었다.
– 기수야. 이러지 마. 네 잘못이 아니잖아. 이런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 아니! 난 비겁했어. 그렇게 민주를 그냥 놔둬서는 안 되는 거였어. 그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천기수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보였다.
– 인선이 말 들어보니까, 불가항력이었다고 하더라. 넌 최선을 다한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건 쓸데없는 자기 학대야.
– 아니야. 어떻게든 민주를 데리고 육지로 나와야 했어. 수술만 받게 했으면 살 수 있었어. 살 수 있었다고! 모든 건 다 내 책임이야. 시팔, 난 의사도 아냐. 아니, 사람도 아니라고!
천기수는 자신을 말리던 박상우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기수에게는 백혈병을 앓고 있던, 어린 나이에 안타깝게도 숨을 거둔 여동생이 있었다. 천기수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을 무척이나 아끼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래서인지 기수는 섬마을에서 만난, 심장병을 앓고 있는 민주라는 아이에게서 동생과 비슷함을 느껴 정을 주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천기수는 당시 아이가 앓던 심장병을 치료해 내지 못했다. 그는 그 아이를 살릴 수 없었던 자신을 계속해서 자책했다.
극도의 이기주의자였던 박상우는 회귀 전에는 기수가 느끼던 슬픔이 피부에 와닿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기수의 슬픈 심정이 사뭇 이해되는 듯했다.
회귀 전엔 눈에 보이지 않던, 보이지만 신경 쓰지 않던 주변 사람들의 속사정이 이제야 그에게도 하나둘씩 와닿기 시작한 것이다.
‘……그땐 왜 몰랐을까?’
자책하듯 박상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기수와 민주라는 여자아이,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번 봉사활동에 참여해야겠어.’
눈을 뜬 박상우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 * *
흉부외과 치프 신정국을 리더로 한, 의료 봉사 단체 「나눔」이 명성대학 병원 정문 앞에서 발대식을 했다.
마치 외국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조영철 원장을 비롯한 각 과의 과장들과 교수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이번 의료 봉사활동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이사장님의 뜻에 따라 우리 명성대 병원은 최고의 의료진들을 중심으로…….”
조영철이 봉사대원 앞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봉사대원들을 격려하는 건지, 이사장의 숭고한 뜻을 추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이 씨, 뭔 잔소리가 저렇게 길어. 다리 저려 죽겠는데. 고등학교 조회 시간도 아니고 이게 뭐야?”
연설이 길어지자 천기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기자들도 와 있잖냐. 이런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고 생색 좀 내자는 거지 뭐. 그냥 우리가 좀 참자.”
박상우가 단상 옆에서 촬영하고 있는 기자들을 가리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봉사활동가라니? 난 지난 일주일째 풀당이었다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기도 힘든데.”
천기수가 몸을 배배 꼬며 코끝에 침을 발랐다.
“야, 천기수! 누가 들으면 그 말 진짠 줄 알겠다? 상우나 나야말로 풀당이었어. 내가 알기론 넌 병실보다 수술실에 더 오래 있었잖아. 하여간 뺀질 대왕이라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김인선이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천기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몰래 빈 수술실에 들어가 단잠을 잤던 천기수를 탓하는 모양이었다.
“앗! 아파!”
“짜샤! 아프라고 차지, 그럼 왜 차?”
김인선이 손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했다.
“자! 이제 출발합시다.”
어느덧 길었던 조영철 원장의 일장 연설이 끝나자 봉사대장 신정국이 손을 들어 올렸다.
의료진들은 ‘명성대 의료 봉사대 나눔’이란 플래카드가 적힌 버스로 탑승했다. 신정국과 박상우를 포함한 의사 10명, 이은주 전문 간호사를 포함한 간호사 10명에 초음파, 심전도 등 기본적인 의료 장비까지, 작지 않은 규모가 발대식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 * *
5시간에 걸쳐 도착한 해천, 그곳에서도 배를 타고 3시간은 더 들어가야 모습을 드러내는 현무도였다. 아침 6시에 출발한 버스는 12시가 다 되어 해천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간단히 점심을 때운 봉사대원들은 곧바로 해천 선착장으로 이동해 현무도로 들어가는 배에 탑승했다.
“우웩, 우우우우웩!”
천기수가 갑판 난간에 매달려 연신 구역질을 해 대었다. 누렇게 뜬 그의 얼굴을 보니 적잖이 고생하는 모습이었다.
“와! 이거 실화냐? 천기수 주변에 갈매기 떼 모여드는 것 봐라. 점심에 뭘 처먹은 거야?”
“그러게? 오늘 갈매기들 포식하겠는걸?”
“하하하!”
그런 천기수의 모습을 지켜보며 봉사대원들이 박장대소했다.
잠시 후, 어느덧 시간이 흘러 현무도에 도착했다.
“와,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나?”
“그러게 말이야. 지상낙원이 따로 없네. 무릉이 어느메뇨, 내 여긴가 하노라!”
수려한 경관에 취한 사람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현무도는 아직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천연의 요새였다. 아담하고 깨끗한 백사장과 그 주변에 울창하게 펼쳐 있는 송림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향긋한 솔향이 퍼지자 그간의 여독도 단숨에 풀어지는 듯했다.
“어서 오쇼잉. 먼 길 오시느라 솔찬히 고생했겄오.”
“아닙니다. 고생은요, 뭘.”
섬마을 이장 장국진이 신정국을 포함한 의료진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섬마을 주민들이 모두 나왔는지 노인부터 꼬마 녀석까지 그 구성도 다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