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Scalpel RAW novel - Chapter (66)
신의 메스-66화(66/249)
66화 섬마을 소녀 (5)
그날 저녁, 신정국이 옷을 챙겨 입으며 숙소를 나섰다.
“내가 이은주 선생님과 함께 이장님 댁에 가 볼게. 배편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 좀 해 보고. 가능하면 민주 데리고 육지로 가서 치료를 받게 해야지.”
“‘가능하면’이 아니고, 반드시 데리고 가야 합니다. 선생님!”
천기수가 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알았어.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넌 밤새 민주 상태나 잘 살펴봐. 급성 심내막염이 맞다면 구토와 오한을 동반할 수 있으니까.”
“네. 선생님. 우리 민주, 부탁합니다.”
“잘 해결될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하여간 우리 천 선생님 마음 씀씀이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신정국과 같이 일어난 이은주 간호사가 천기수를 위로했다.
“아, 그건 그렇고, 너 며칠째 무단으로 캠프를 이탈했는데, 한 번만 더 이러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알아들어? 우리가 여기 놀러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신정국이 단단히 주의를 시켰다.
“네. 죄송합니다. 앞으론 주의하겠습니다.”
천기수는 면목이 없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알았다. 배편이야 문제없을 거다. 영 안 되면 해양 경찰에라도 연락해서 응급 수송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야단을 친 후에 위로의 말도 건넬 줄 아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신정국이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래. 좋은 소식 가지고 올게.”
신정국은 천기수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숙소를 나섰다.
천기수는 민주를 자신의 숙소로 데려와 돌보고 있었다.
“기수야, 민주는 좀 괜찮니?”
박상우가 민주가 있는 방을 찾았다.
“열은 좀 떨어진 것 같아. 근데, 아이가 너무 못 먹어서 큰일이네. 이러다가 탈진 올 것 같아.”
민주의 팔을 감고 있는 수액의 속도 조절 버튼을 만지작거리는 천기수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괜찮을 거야. 신정국 선생님이 이장님을 만나러 가셨으니까 내일이면 큰 병원으로 옮길 수 있을 거다. 제대로 된 병원에서 치료만 잘 받으면 완치가 가능한 병이야.”
박상우는 위로의 말을 건네었다.
“그래야지. 당연히 그래야 해. 그나저나 해천 쪽에 제대로 된 병원이 있나 모르겠네. 워낙 작은 동네라서.”
“거기도 준종합병원은 있으니까, 일단 그쪽으로 옮겨서 응급조치 취한 후에 우리 병원으로 이송하면 될 거다.”
“그래. 그러면 되겠네! 미리 조현오 교수님께 말이라도 해 둘까?”
천기수는 밝은 표정으로 민주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니, 아니. 지금은 그럴 단계는 아니야. 모든 일은 절차가 있으니, 그렇게 서두를 것 없어.”
박상우가 핸드폰을 꺼내 드는 천기수를 만류했다.
“그, 그런가?”
천기수는 박상우의 말에 슬그머니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천기수.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얘기? 무슨? 여기서 해.”
“아냐. 여긴 좀 그렇고 밖에서 얘기하자.”
“민주 놔두고 어디를 가? 여기서 말해.”
“해열제 처방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잠시면 되니까 나랑 밖에서 얘기 좀 해.”
박상우가 도리 짓을 하며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그래.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천기수의 시선은 여전히 민주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 * *
“어떻게 된 거야?”
인근 해변가에 다다르자, 박상우가 천기수에게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내밀었다.
“뭘?”
“민주 말이야. 그 아이는 어떻게 아는 거냐고. 이곳에 아무런 인연이 없는 네가, 지인이 있을 리가 없잖아.”
박상우는 회귀 전에 기수가 민주에 관해 말하는 것을 몇 번 들은 바는 있었지만, 알고 있는 점이 단편적인 정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좀 더 두 사람의 관계를 알기 위해 모른 척하며 물었다.
“그냥 알게 됐어.”
커피잔에서 김이 올라와 천기수의 안경 렌즈가 뿌옇게 흐려졌다. 안경을 벗은 천기수가 옷소매로 렌즈를 문질렀다.
“그게 말이 돼? 며칠째 캠프 이탈해 놓고 갑자기 민주 데리고 나타나서 이 난리를 만들어 놨는데, 무슨 해명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내가 무책임하게 군 건 잘못했다고 생각해. 그런데…… 어휴, 그게 그렇게 됐다니까…….”
천기수는 우물쭈물하며 뭔가 말하려다 거둬들였다.
박상우는 천기수가 말하기 고민하는 이유를 대략 알고 있었기에 내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대충은 알고 있다, 기수야. 감출 필요 없어.’
그래서 기수에게서 마음의 짐을 덜어 주고자, 부드럽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뭐? 나한테까지 하지 못할 말이 뭐가 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너와 민주 사이에?”
“사실은, 여동생 생각이 나서…….”
박상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기수의 입에서 여동생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답답한 심정을 박상우에게나마 털어놓고자 하는 듯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천기수의 눈빛이 잦아들었다.
“여동생이라니?”
“사실 여동생이 있었는데, 내가 8살 때 죽었어. 백혈병으로…….”
“그렇구나. ……민주가 네 여동생을 많이 닮았나 보구나.”
박상우는 천기수가 여동생을 일찍 보냈다는 사실은 대략 알고 있었지만, 20년 지기 절친이었음에도 자세한 상황은 알고 있지 못했었다. 왜 그리도 주변인들에게 관심이 없었는지 박상우는 갑작스레 후회의 마음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곧 슬픔에 빠져 있는 천기수를 위로하기 위해 덤덤한 듯 말을 내뱉었다.
“그냥 허무하게 보내 버리고 말았지. 그 당시에는 운동회건 소풍이건 나 혼자였어. 다른 애들은 엄마 아빠랑 같이 와서 즐겁게 지내고 맛있는 음식도 먹는 게 얼마나 부러웠던지…….”
천기수의 눈이 점점 흐려지는 듯했다.
“…….”
그 모습에 박상우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땐 나보다 기은이를 더 챙기는 부모님이 야속하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기은이한테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게 항상 여기를 아프게 하더라.”
천기수가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
박상우는 이전에는 천기수가 아무리 가슴 아파해도 공감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저 마음을 나누며 천기수의 손을 따스히 잡아 줄 뿐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민주를 보게 됐어. 백사장에서 놀고 있는 그 아이를 보니까 기은이 생각이 나더라고. 제길!”
천기수가 발밑에 놓인 모래더미를 흐트러뜨렸다.
박상우가 어렴풋이 예상하던 천기수의 마음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랬구나. 무척 속상했겠네. 민주가 그렇게 돼서.”
박상우는 천기수의 어깨에 손을 올려 다독여 주었다.
“근데 신기하게 녀석이 나를 졸졸 따라다니더라고……. 하는 짓이 옛날 기은이랑 너무 똑같잖아. 기은이도 내가 학교 갈 때면 집 앞까지 따라 나와서, 학교 가지 말고 자기랑 놀자고 떼를 썼거든.”
지난 추억을 떠올린 천기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쳤다.
천기수는 민주와 만나게 된 사연을 꺼내놓으며 얘기하는 내내 눈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래서, 아이와 놀아 주느라고 그랬던 거야?”
“그래. 워낙 정에 굶주려서 그런지, 나를 친오빠처럼 따르더라고. 그냥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인마! 나한테는 귀띔이라도 했어야지. 그래야 나도 네 실드라도 쳐 줄 거 아냐? 왜 넌 맨날 하는 일이 그 모양이야? 쓸데없이 욕이나 얻어 처먹고, 등신아!”
박상우는 물론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천기수가 알 리 없을 터였기에 끝까지 모른 척하며 짐짓 다그치는 척하며 말했다.
“미안하다. ……그렇게 됐다. 그런데 낮에 어르신이 하신 말, 진짜일까? 진짜로 그 미친 여자가 민주 엄마가 맞나?”
“그 여자, 미친 거 아니야.”
잠시 뜸을 들인 박상우가 말을 내뱉었다.
“그렇지! 미친 여자 아니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는데.”
깜짝 놀란 천기수의 입에서 커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 민주 엄마라는 여자, 무슨 사연이 있는 줄은 모르겠는데, 미친 척할 뿐이지 절대로 정신 나간 사람은 아니라고.”
박상우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놔. 미치겠네. 좋아, 백번 양보해서 네 말이 맞다고 치자. 넌 원래 재수 없게 잘난 놈이니까. 하지만 왜 멀쩡한 사람이 미친 척을 해?”
천기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글쎄.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직감적으로 느낀 건데, 아이가 아픈 것과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야. 하지만 이것도 추측일 뿐이지, 딱히 근거는 없어.”
박상우가 입술을 가늘게 만들며 소리를 냈다. 그러곤 미간을 좁히며 턱을 매만졌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민주 엄마가 멀쩡하면 민주가 죽기라도 한대? 그게 말이 되냐?”
‘멀쩡하면 아이가 죽는다? 그래. 충분히 개연성 있는 생각이야. 반대로 말하면, 민주를 살리기 위해 고의로 미친 척을 했다는 거잖아! 이거 분명, 뭔가 있다!’
박상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야, 너희들 거기서 뭐 해? 신정국 선생님이 빨리 숙소로 오래! 긴히 할 얘기가 있으시단다.”
고요한 정적을 깨는 굵직한 목소리. 박상우의 동기, 한기철이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가자, 기수야.”
“그래.”
두 사람은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이장댁에 다녀온 신정국과 이은주, 박상우와 천기수가 숙소 안으로 들어가자 냉랭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박상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글쎄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걸.”
“심각하다뇨? 뭐가 심각하다는 겁니까? 이 선생님!”
천기수는 이은주 간호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배편을 마련해 줄 수 없다네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배편을 마련할 수 없다뇨? 애가 죽어 가는데!”
천기수가 버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말이야. 지금이 밀물 때라 파도가 높아서 위험하대. 그래서 들어올 수 없다고 하더군.”
“그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예요. 그러면 응급 환자가 생겨도 치료도 못 받는다는 겁니까?”
천기수가 게거품을 물며 발악했다.
“천 선생님, 진정해요. 아무래도 이 섬마을은 이장이란 사람이 절대적 존재인 것 같아요. 그 사람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게 어딨어요? 그 사람이 무슨 절대자예요? 사이비 교주예요? 말도 안 돼.”
쾅, 천기수가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리쳤다.
“선생님, 차라리 해천 경찰서나 소방서 쪽에 연락을 해 보는 것 어떨까요? 아니면, 해양 경찰 쪽에라도…….”
“소용없어.”
신정국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왜 소용이 없다는 겁니까?”
“저희가 전화해 봤어요. 해천 경찰서에…….”
이은주 간호사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경찰서에서 뭐라고 하는데요?”
“아까 말했듯이 이 마을은 이장이란 사람의 왕국이 틀림없는 것 같아요. 경찰들도 이장과 똑같은 말을 하더라고요.”
“뭐라고요?”
“자기들은 이장의 지시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네요.”
“뭐라고요? 다들 미친 것 아냐? 어린아이가 죽어 가는데 이장의 지시? 그게 말이 됩니까?”
박상우가 답답한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모르겠어요. 게다가 우리한테 경고까지 하더군요.”
“뭐라고요?”
박상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코끝을 찡그렸다.
“마을 일에 관여하지 말란다. 그러다 큰일 치른다고. 마을 일은 이장이 알아서 처리한대. 민주도 마찬가지고.”
신정국이 이은주 간호사를 대신해서 답했다.
“뭐라고요? 이장이 의사입니까? 어떻게 민주를 알아서 한다는 건가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죠?”
더 참을 수 없었는지 박상우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섬마을 사람들, 다들 미친 게 틀림없어. 민주 엄마가 미친 게 아니라, 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죄다 미친 거야.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천기수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