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104
104. 응양봉(鷹揚峯) 반사곡(盤蛇谷)
한편 소영은 중주이고와 함께 단숨에 십여 리 길을 달려 갔다. 그러자 상팔이 돌연 발걸음을 멈
추고 입을 열었다.
“형님, 좀 쉬는 게 어떻소?”
소영이 주위를 돌아 보니 왼편에 우거진 숲이 보였다. 그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걷기가 힘드오?”
상팔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우리가 무이산으로 가는 길은 수백 리에 달하니 도중에 심목풍의 첩보망에 걸리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변장을 한다면 많은 번거로움을 면할 수 있을 것이오.”
소영은 곧 그 말에 동의했다.
“그렇소. 정말 이번 길은 제발 편안하게 아무런 일도 없었으면 좋겠소.”
상팔은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형님은 가짜수염을 붙이고 수금원으로 변장하고, 소제는 마부로 가장하며 두제는 짐꾼으로 꾸미
면 좋을 것이오.”
두구는 몹시 후회스러운 듯 소리쳤다.
“한 가지 잊은 일이 있소!”
소영은 그를 바라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그 두 마리의 큰 개를 데려 오지 않은 것이오.”
수 년 간 두 마리의 주개는 중주이고와 함께 행동하며 이미 영성(靈性)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중
중이고와 두 마리의 개들 사이에는 어느새 깊은 정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상팔은 두구를 위로했다.
“무위도장은 세심하므로 그 개들을 잘 보살펴 줄 것이니 염려 말게.”
두구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두 분 형님의 뜻대로 되길 바라겠소이다.”
세 사람은 숲속에서 각기 변장을 하였다. 그들은 본래의 정체를 가린 뒤 길을 재촉하여 부지런히
무이산을 향해 달려 갔다.
소영은 달리면서 악소채와 옥소랑군의 약속만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그 삼 개월 안에
금궁에서 나올 수 없어서 형산으로 달려 갈 수는 없었으나 속으로는 이 일을 잊지 못하여 전력을
다해서 길을 재촉했다.
무이산은 천 리에 가까울 정도로 뻗쳐 있어서 봉우리가 무수히 많았다. 세 사람은 마른 양식을
준비하고 산속으로 깊숙히 들어 갔다. 이날 점심 때쯤 무이산 밑에 당도하였다.
상팔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한 바위를 찾아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형님, 우리는 그 나무 상자 안의 지도를 좀 보아야겠소이다. 소제가 듣기로는 금궁은 비록 무이
산에 있다지만 아무래도 주붕 부근에 있지는 않는 것 같소이다.”
그리고 보니 세 사람은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여기까지 오는 도중 한 번도 그 나무 상자를 열어
보지 않았던 것이다.
소영은 품 안에서 그 상자를 꺼내서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세 치 가량 되는 황금색 열쇠가 비스듬히 들어 있었고 그 열쇠 밑에 하얀 비단 헝겊이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소영은 천천히 금열쇠를 꺼내고 비단 헝겊을 집어 펼쳐 보았다. 그 비단에는 다만 한 마리의 독
수리가 그려져 있었다. 그 날카로운 주둥이와 강철같은 발톱의 형상은 매우 위맹스러웠고, 독수리
밑에는 머리를 치켜 든 한 마리의 큰 뱀이 혀를 반 자쯤 내밀고 있었다. 이 한 폭의 응사상박(鷹
蛇相博)의 그림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으나 금궁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는 듯했다.
소영은 미간을 찌푸리고 비스듬히 바라 보았으며 상팔과 두구도 넋을 잃은 듯 기웃이 들여다 보
고 있었다.
맨 먼저 두구가 가볍게 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것은 가짜 열쇠가 아닐까요?”
소영은 강력히 부인했다.
“악누님이 어찌 내게 가짜 열쇠를 줄 리가 있겠소? 다만 우리의 견식이 모자라 이 그림 속의 뜻
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오.”
그는 악소채를 마음 속으로 그지없이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어느 누구든 그녀를 중상하는 것을 원
치 않았다.
상팔이 천천히 말을 받았다.
“형님의 말씀이 옳소이다. 이 그림은 의미가 심각하므로 우리는 차근차근 검토해 봐야 되겠소이
다.”
소영은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이 금궁의 열쇠는 천하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므로 이 그림도 자연 쉽사리 풀 수 있는 것이 아
니라고 생각하오.”
상팔은 두구를 힐끗 쳐다 본 다음 나직이 말하였다.
“이 흰 비단이 이미 누렇게 변해 있는 것을 보아 분명히 연대가오래된 것이오. 단지 우리가 그
안의 비밀을 해독 못하는 것이 안타깝구려.”
두구가 불쑥 말했다.
“상형의 주보를 감별하는 능력은 천하에 누구도 따를 수 없소.”
상팔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지만 이 서화를 감별하는 능력은 없는걸…..”
갑자기 소영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옳지! 이 한 폭의 그림은 분명히 일종의 산세의 형태를 암시하는 것이오. 우리는 다만 이 그림과
같은 산세를 찾으면 될 것이오. 그곳에는 반드시 금궁이 있을 것이오!”
그러자 상팔도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그렇군요. 형님의 추리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이 그림이 암시한 산세의
형태를 빨리 찾아야겠소이다.”
소영은 다시 생각에 잠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것은 그렇다고 치고 나는 도저히 이 그림과 금궁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요.”
두구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이 그림이 금궁과 관련이 없다면 이 금열쇠와 그림은 모두 가짜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슬그머니 생각은 했지만 조금 전의 실언으로 소영이 발끈 화를 내는 것을 보았기 때
문에 더 이상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상팔이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형님, 소제가 몇 마디 당부할 게 있는데 소제를 과히 책망하지 마시오.”
“천만에! 어서 말해 보시오.”
“이 무이산은 천 리나 뻗쳐 있어 비록 이러한 산세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우리는 온 무이산을 뒤
지며 찾을 수는 없잖소.”
그 말에 소영도 마음 속으로 동감하였다.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군. 바로 이 무이산 속에 이러한 곳이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무슨 수로
그것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상팔이 소영을 지그시 바라 보며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소제에게 한 가지 묘안이 있는데 최상의 대책은 아니오나 이처럼 바다에서 바늘을 건지는 식보
다는 나을 것이외다.”
소영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무슨 고견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우리는 나뭇꾼이나 사냥꾼을 찾아 이렇게 생긴 형세가 있는가의 여부를 물어 보는 것이 어떻겠
소?”
소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대답했다.
“지금 기왕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으니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겠소.”
“형님은 이곳에서 쉬고 있으시오. 소제가 부근에 몇몇 나뭇꾼과 사냥꾼을 찾아서 물어 보겠소.”
“좋소. 그러나 일찍 돌아 오시오. 괜히 걱정을 하지 않게 말이외다.”
“많아도 한 시간이면 곧 돌아 와서 보고하겠소.”
그는 몸을 일으켜 순식간에 사라졌다.
두구는 몸을 일으켜 삼 장쯤 떨어진 곳에 있는 불쑥 튀어 나온 큰 바위 위로 올라 갔다. 그는 사
방을 살펴 본 다음 다시 바위 아래로 내려가 한 곳의 길목을 지키고 섰다.
그는 험악하고 허위에 꽉찬 강호에서 오랫동안 겪어 왔기 때문에 누가 뒤에서 쫓아 올까 조심이
되어 곳곳마다 의심을 두고 각별히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소영은 아직도 그 독수리 그림을 골똘히 바라 보며 속으로 줄곧 중얼거리고 있었다.
‘만약 이 금열쇠가 가짜였다면 악 누님이 절대로 나에게 주었을 리가 없다. 그녀는 나의 지혜로
분명히 이 그림이 비밀을 풀 수 있다고 믿고 주었으리라. 내가 만약 이 비밀을 풀지 못한다면 금
궁에 들어 서지 못할 뿐 아니라 악 누님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번뇌한 나머지 들고 있던 그림을 무심중에 땅에다 떨어뜨렸다. 그러자 뜻밖에도 독수리의
발이 돌연 그 그림의 위치에서 움직였다. 소영은 가슴이 두근두근하여 재빨리 그림을 집어 들어
손으로 그 독수리의 다리를 밀어 봤다. 그러자 갑자기 기이한 일이 나타났다. 조금 전에 움직였던
그 독수리의 다리가 놀랍게도 쭉 뻗쳐 나오는 게 아닌가!
분명히 아래로 향한 독수리의 다리가 그림에서 움직여 놀랍게도 흰 비단 위에 튀어 나온 것이다.
놀라서 넋을 잃다시피 바라 보는 소영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비단 위로 튀어 나온 독수리의 다리 아래에 자잘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 뜻밖의 발견은 소영으로 하여금 미칠 듯이 기쁘게 만들었다. 그는 그 그림을 가슴에 안고 껑
충껑충 뛰며 큰소리로 외쳤다.
“발견했다. 나는 발견했다!”
길목에서 파수를 서고 있던 두구가 급히 달려 오며 다급히 물었다.
“형님! 왜 그러시오?”
소영은 겨우 진정하였으나 목소리는 아직도 흥분에 떨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금궁의 소재를 발견하였소!”
두구는 어안이 벙벙해 다그쳐 물었다.
“어디에 있소?”
소영은 그림을 펼쳐 보였다.
“바로 이 그림에서 알았소.”
두구는 재빨리 다가 서며 그것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 독수리의 그림은 여전하며 뱀도 그대로 머
리를 들고 있어 별로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이상한 듯이 물었다.
“형님, 소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소이다.”
“이 그림에는 이상한 장치가 되어 있더군요.”
소영은 손을 내밀어 독수리의 발을 밀어 붙였다. 그러자 두구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것을 읽었
다.
“응양봉…. 반사곡…..”
“그렇소. 우리는 다만 그 응양봉과 반사곡의 소재지만 알아 낸다면 곧 금궁을 찾을 수 있을 것이
오.”
두구가 감탄하듯 소영을 바라 보며 말했다.
“이것은 하늘이 형님을 금궁에 들어 가도록 도운 것입니다.”
그러자 소영은 걱정이 되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응양봉은 어디에 있을까?”
두구가 그를 위로했다.
“그것은 쉽소이다. 단지 지명을 알기만 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외다.”
그때 상팔이 한 노인을 업고 급히 달려 왔다.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순식간에 소영 앞에 당도했
다.
“이 노인은 무이산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살았으므로 산중의 형세와 지리에 훤해 극히 소상히 알
고 있소이다. 그래서 데리고 왔으니 이 노인에게 그 그림을 보여 주시오.”
그 노인은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 오고 얼굴에는 주름이 겹겹이 잡혀 있어 대략 칠십이 넘은
듯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 무이산 중에서 오랫동안 사셨습니까?”
노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 곳에서 살았으니 근 칠십 년은 될 거요.”
“그러면 할아버지께서는 무이산의 지형을 훤히 아시겠군요?”
“백 리 안에 일초일목을 다 기억하고 있소이다.”
“그럼 할아버지께 묻겠는데 응양봉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그 노인은 입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응양봉…. 응양봉….”
그러나 그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두구가 싸늘하게 물었다.
“그럼 반사곡은 어디오?”
“반사곡…… 반사곡…..”
노인은 다시 중얼거리는 것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나는 만사곡(萬蛇谷)은 알고 있지만 반사곡이라는 것은 들어 본 일이 없소이다.”
소영이 급히 물었다.
“만사곡이라구요?”
“그렇소. 그 곳은 매우 깊은 골짜기입니다. 그 안에 뱀이 워낙 득실거려 만사곡이라 합니다. 비록
세상에서 제일 가는 뱀잡이의 명수라 해도 감히 그 만사곡 안에는 들어 가지 못합니다.”
소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독수리의 발 아래는 분명히 반사곡이라고 씌어 있었으니 만사곡과는 다를 것이다.’
그때 두구가 다시 싸늘하게 물었다.
“노인장, 우리가 묻는 곳은 반사곡입니다. 상다리를 하고 앉을 때의 그 반(盤)자 입니다.”
그의 음성은 항상 냉랭하여 귀에 거슬렸기 때문에 그 늙은 나뭇꾼은 흘끗 그를 쳐다 보더니 머리
를 저으며 대답했다.
“모르겠소이다. 나는 이곳에서 자라 이곳에서 늙었으나 반사곡이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소.”
소영은 또박또박 말하였다.
“응양봉 반사곡은 응당 한 곳에 있을 테니 할아버지께서 응양봉을 모른다면 자연 반사곡도 모르
시겠지요.”
“내가 모른다면 아마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소영은 할 수 없이 그 노인을 도로 상팔에게 데려다 주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자 돌연 그 노인이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무슨 봉이라고 했지요?”
소영은 다시 기대를 걸고 말했다.
“응양봉입니다. 나는 독수리의 응(鷹)자와…..”
그의 말을 막으며 노인은 머리를 다시 흔들었다.
“음은 비슷하나 역시 다릅니다. 내가 잘못 들었군요.”
소영은 기대에 찼다가 다시 실망하여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할아버지께서 말하려는 것은 무슨 봉우리입니까?”
그는 천천히 말했다.
“인연봉(姻隊峯)이라고 합지요. 유래가 깊은 봉우리지요. 한 쌍의 남녀가 서로 깊이 사랑하였으나
쌍방의 가장이 허락을 하지 않고 그들을 갈라 놓았답니다. 그러나 그 남녀의 사랑은 강렬하여 죽
어도 헤어질 수 없을 정도였지요. 그래서 그들은 서로 약속을 하고 집을 도망나오려다 그만 발각
되어 그 절봉 꼭대기까지 쫓기게 되었지요.”
소영이 말허리를 꺾고 입을 열었다.
“청춘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데 집에서는 어째서 반대를 했을까요?”
노인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양쪽 집안은 원래 원수지간이어서 툭하면 싸움을 벌였습니다. 한 번 싸움이 끝나면 쌍방은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지요. 그 한 쌍의 남녀는 쌍방 족장(族長)의 자녀들이었으니 결혼을 허락할
리가 없지요.”
소영은 가볍게 탄식하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째서 그 봉우리가 인연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나요?”
나뭇꾼 노인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 남녀는 결국 그 낭떠러지로 뛰어 내렸습니다. 깎아지른 듯 깊이가 천 길에 달하는 곳으로 두
사람이 손을 꼭잡고 뛰어 내리는 것을 본 쌍방의 가족은 크게 감동하여 앞을 다투어 그 낭떠러지
밑으로 달려 가서 두 남녀의 시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나뭇꾼 노인은 이야기를 중단하고 길게 한숨을 짓더니 다시 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시체를 찾지 못했을 뿐더러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지요. 그러는 동안에 이
들의 가족은 마음에 뉘우침을 느끼고 몇 대에 걸친 원한을 깨끗이 풀어 버렸지요. 그들은 봉우리
위에다 한 채의 사당을 짓고 인연묘(姻鉛廟)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묘 안의 향불이 꺼지는 날이 없을 정도로 천하의 모든 청춘남녀들이 모여 들어 마음에 드는 반려
를 구하게 되길 기구했습니다. 그래서 그 봉우리의 이름은 인연묘의 이름을 따서 인연봉이라고
하게 되었지요.”
노인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두구가 다시 싸늘하게 말했다.
“노인장, 우리는 응양봉과 반사곡이 어디 있는가를 묻고 있지 노인장에게 이 무이산에 깃들은 전
설을 듣자는 것이 아니외다.”
노인은 황급히 항변했다.
“나는 하고 싶어 한 말이 아니오. 여러분이 물으니 말할 수밖에 없지 않소이까?”
소영은 슬며시 속으로 생각했다.
‘응양봉과 인연봉 그리고 반사곡과 만사곡…. 비록 음은 비슷하나 생판 다른 이름이다.’
상팔은 재빨리 소영의 심중을 알아 낸 듯 소영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말을 했다.
“이 무이산이 천 리나 뻗혀 있어 이 노인장께서 비록 이곳에서 오래 사셨다지만 결코 천 리에 걸
친 사세를 모조리 안다고는 할 순 없을 것입니다.”
상팔은 말을 마치고 곧 그 노인을 다시 업고 급히 되돌아 갔다.
소영은 두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그림에서 분명히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틀리지는 않을 것이오.”
두구가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묘한 것은 기왕에 응양봉이 있는데 그 이름과 비슷한 인연봉이 있고 반사곡이 있는데 또한 만사
곡이 있는 점입니다. 만약 그 그림에 명백하게 씌어 있지 않았다면 정말 알아 내기 힘들 것입니
다.”
소영은 힘없이 말했다.
“아아! 그렇다면 우리가 그 응양봉을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것 같구려.”
“큰형님, 과히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세심히 찾는다면 반드시 찾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림의 구조를 보니 그 응양봉은 분명히 매우 웅대한 산세로서 단지 한 번 본 사람이면 누구나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유심히 살피고 도중에 탐문한다면 반드시 찾아 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상팔이 총총히 되돌아 와서 소영을 보며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
물었다.
소영은 그가 속으로 의심을 품은 줄 짐작하고 곧 그림속의 비밀을 발견한 내정을 말해 주었다.
“큰형께 제가 몇 마디 여쭈어 볼 말이 있습니다.”
“상형과 나는 형제지간이니 무슨 일이건 서슴지 말고 말해 보시오.”
“이 열쇠를 남겨 놓은 분은 솔직하게 그 금궁의 소재지를 설명하지 않고 이러한 한 폭의 그림으
로써 암시를 하였으니 필시 이 그림은 많은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금궁의 열쇠를 취득한 사람의 지혜를 시험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 합니다. 만약 그 사람의 재
지가 모자라면 비록 그 열쇠를 취독한다 해도 역시 금궁에는 들어 가지 못할 것입니다.”
“옳지, 그 말도 일리가 있소.”
“큰형님의 재지는 원래 보통 사람이 따르기 힘드는 비상한 것이오나 지금 마음에 무슨 고민이 있
으신 바 득실지심(得失之心)으로 마음이 불타듯 초조한 상태인듯 합니다.”
소영은 속으로 슬그머니 생각했다.
‘나는 지금 악 누님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초조하니 득실지심을 지니고 있는 게 틀림없
지…..’
상팔의 말은 다시 계속되었다.
“그러니 큰형님께서 속히 득실지심을 버리고 냉정을 되찾으신다면 능히 큰형님의 지혜로써 그림
에 담겨 있는 비밀의 뜻을 풀 수 있을 것이며 금궁의 문에 들어 가기는 어렵지 않으리라 믿습니
다.”
소영은 돌연 일어나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읍하며 입을 열었다.
“상형의 간곡한 충고에 감사드리는 바이오.”
그러자 상팔은 급히 땅에 엎드려 넙죽 절을 하며 말했다.
“이러한 생각 역시 큰형님의 감화로 알고 있습니다.”
소영은 상팔을 황급히 부축해 일으켰다.
“내게 무슨 능력과 덕망이 있다고 두 분 형제의 이렇듯 후한 애호를 받겠습니까?”
상팔은 몸을 일으키며 한숨과 함께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왕년의 중주이고는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무진장 금은보화를 모으는 것에 전력을 기울였지요.
만약 이것을 먹고 마시고 노는데 쓴다면 아마 천 년을 낭비해도 백분의 일도 다 쓰지 못할 것입
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만족지 않고 마치 이 세상의 보화를 모조리 긁어 모아야 만족이 될
듯 탐욕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큰 형님을 모시고부터 우리는 진실로 왕년의 잘못을 깊이 깨달았습
니다. 비록 천하의 재물이 모두 우리 중주이고의 소유라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백 년이 못 가 흙속에 묻힐 텐데. 그때 가선 한 조각의 재물인들 갖고 갈 수 없을 것을…..”
소영은 상팔의 술회를 들으며 속으로 슬그머니,
‘이 사람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적지 않은 재물을 모은 것 같구나.’
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곧 상팔에게 물었다.
“상형, 당신들은 대관절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았소?”
“천 리에 성을 쌓아도 끄떡 없을 정도이떠 이루 계산할 수 없습니다. 큰형님께서 심목풍을 격퇴
시키신 다음 우리는 모든 재물을 형님에게 맡겨 보천창생(普天蒼生)에 유익한 일을 하고 싶습니
다.”
소영이 감격하여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하길 원하였소. 그러나 감히 요청하지 못하였을 뿐이오.”
상팔이 웃으며 말했다.
“큰형님의 분부시라면 저희들은 무엇이든지 따르겠습니다.”
다시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떻게 해서 빨리 금궁을 찾느냐 하는 것입니다.”
소영은 자기의 경력이 실로 중주이고를 따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궁으로 들어 가자면
두 형제의 경력과 지식의 힘이 필요하다고 절감했다.
소영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그 그림을 지면에 펴 놓고 말했다.
“두 분은 이리 다가 오시오. 우리 한 번 다시 검토해 봅시다.”
세 사람은 잠시 그 흰색 비단 헝겊에 그려진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이때, 갑자기 상팔이 손을 뻗쳐 그 그림을 들더니 그것을 햇빛에 비쳐 한동안 열심히 바라 보았
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제 의견으로는 이것은 결코 간단히 풀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 독수리 발 아래 씌어져 있는
지명이 바로 그 금궁의 소재지라면 일은 간단하지 않을까요?”
“상형의 의견은 어떻소?”
“제가 보기에는 이 그림 안에 따라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여섯 자 글씨
속에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소영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상형, 다시 가서 그 나문꾼 노인을 모셔 오시오.”
하였다. 상팔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노인을 모셔다 무엇 하려구요?”
“우리는 우선 인연봉 위로 가 봅시다.”
“인연봉 양쪽은 모두 절벽으로 되어 있어 한 쪽은 만사곡이고 또 한 쪽은 바로 그 청춘남녀가 몸
을 던진 낭떠러지입니다.”
소영은 부지중에 외쳤다.
“뭐라구요? 그 만사곡도 인연봉 아래에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제가 이미 그 노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이곳에서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백 리도 되지 않는다 하더군요.”
“좋소! 그럼 가서 그 노인을 모셔다 그곳으로 안내하게 하시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이미 명백하게 물어 머리 속에 자세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인연봉이라는 것이 그림에 씌어 있는 응양봉이건 아니건 간에 한 번 가 보는 것도 무방할 것
이다.’
마침내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고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걸음을 재촉한다면 아마 날이 저물기 전에 그곳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오.”
“제가 앞장 서겠습니다.”
상팔은 말과 함께 재빨리 앞에 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소영과 두구는 상팔의 뒤를 바싹 따랐다.
상팔은 이미 그 나뭇꾼 노인에게 극히 상세하게 길을 알아 낸 듯 마치 익숙한 길을 가듯이 쏜살
같이 치달았다.
세 사람은 경공이 모두 무림에서 일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비록 산길이 험악했으나 마치
고삐 풀린 말이 경쾌하게 달리는 듯했다.
그들은 반나절을 급히 달려 해가 서산에 질 무렵 이미 목적한 고봉(高峰)밑에 도착했다.
소영은 과거에 천 년 묵은 돌버섯을 많이 복용하였기 때문에 내력이 충족하여 별로 피로를 느끼
지 않았다. 그러나 상팔과 두구는 연속 몇 시간을 치달아 산을 넘고 골짜기를 건너 조금도 휴식
없이 달려 왔기 때문에 목적지에 당도했을 때는 이마에 땀방울이 많이 맺혀 있었다.
상팔은 눈앞에 우뚝 솟은 고봉을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저의 기억이 틀림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그 인연봉일 것입니다.”
고개를 들어 봉우리를 쳐다 보니 때마침 해가 질 무렵이라 서쪽 하늘은 붉게 노을져 있었으며 석
양이 봉우리의 꼭대기를 비치고 있었다.
소영은 자세히 바라 보니 봉우리 위엔 금벽(金碧)도 찬란히 호화롭게 지은 한 채의 사당이 보였
다.
상팔이 재빨리 설명했다.
“저 사당이 바로 인연묘입니다. 그 나뭇꾼 노인의 말에 의하면 저 인연묘가 완성되던 날 남자쪽
가장이 참혹하게 죽은 자기 아들을 애도하여 그 혼을 달래기 위해 자기집의 대대로 물려 오는 보
석을 저 인연묘에 장식했다 합니다. 그러므로 해와 달이 그 보석을 비칠 때마다 항상 일곱 가지
아름다운 색채가 빛을 발사한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원인을 모르고 두 남녀의 혼이 나타난
것이라고 전한다 하더군요. 그래서 저 인연묘는 크게 번성하여 매달 초하루 보름이면 수많은 젊
은이들이 불원천리하고 이곳에 참배하여 분향한다 합니다. 그리고 보통 날에는 적지 않은 향객이
저 절간 밖에서 미련을 두고 배회한다 하더군요.”
소영은 불현듯 그 옥소랑군과 남옥당이 악소채를 애타게 사모하는 심정이 생각났다. 만약 저 인
연묘가 정말 영험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안다면 두 사람도 어쩌면 이 무이산의 인연묘로 달려 와
종신의 대사를 구했을지도 모른다.
상팔은 소영이 계속 침묵을 지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자
그를 깨우치듯이 다시 말했다.
“그 노인 말에 의하면 저 인연묘의 향불은 갈수록 번창 일로이므로 밤을 새워 절 앞에 서성거리
는 향객들을 위하여 묘 주위에 몇 채의 아실(雅室)을 지어 그들에게 유숙할 수 있도록 했다 합니
다.”
소영은 상팔에게 말했다.
“우리도 어서 올라가 봅시다.”
상팔도 곧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는 연일 달렸으니 만약 저 인연봉 위에서 하룻밤을 쉬고 정신을 맑게 한다면…..”
하더니 말끝도 맺지 않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그는 발길을 옮겨 산봉우리를 향해 달려
갔다.
소영과 두구도 상팔의 뒤를 따라 위로 올라 갔다.
이 인연봉은 툭 튀어 나온 고립된 산봉우리였으므로 삼면이 모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낭떠러
지였으며 다만 한 곳만이 봉우리와 통하였다.
해는 이미 기울었으나 아직도 하늘은 훤했다.
소영은 사방을 한 차례 돌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이 봉우리에 딴 곳으로 통하는 길이 또 있다면 그 젊은 남녀는 낭떠러지에 몸을 던져 죽지
는 않았을 것이며 그렇다면 자연 이 인연묘도 세워졌을 리가 없다.’
그는 인연묘를 바라 보았다. 그 안에는 네 자루의 붉은 초가 휘황하게 대전 안을 밝히고 있었다.
이 사당은 규모가 매우 작아 한 채의 대전을 제외하고는 양쪽에 각각 한 칸의 상방(廂房)이 있었
다. 대전 안에는 육십쯤 되어 보이는 향화도인(香火道人)이 신상(神像) 한 쪽에 서 있었다. 그리고
불공탁자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이 인연봉 꼭대기의 크기는 불과 한 마지기 정도였으며 그 둘레에는 과연 청석을 벽으로 한 초가
집이 두 채 있었다. 그곳에는 주점의 간판이 높이 걸려 있었고 불이 환하게 켜 있어 보기에는 인
연묘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소영이 사방의 경치를 바라 본 다음 상팔과 두구에게 말했다.
“우리는 기왕 이 인연봉에 올라 왔으니 들어가 보는 것이 어떻겠 소?”
그들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인연묘 앞으로 다가 갔다. 상팔은 재빨리 불룩한 큰 배를
내밀고 앞장서 들어 갔다.
대전 안의 향화도인은 상팔을 힐끗 바라 보더니 곧 얼굴에 웃음을 띠고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어르신네, 어서 오십시오. 이 인연묘의 두 신은 남녀의 인연을 짝지어 줄 뿐 아니라 여하튼 수복
을 구하는 모든 분들에게 한결같이 영험이 있습니다.”
상팔은 품 속에서 아무렇게나 금전을 꺼내 탁자 위의 시주함에다 넣고 향화도인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머리를 들어 두 개의 신상을 바라 보았다. 이 인연묘의 신상은 보통 절간과
다르게 한 쌍의 남녀의 조각상만이 있었다.
그 남자는 온몸에 단장(短裝)을 하였고 두 발을 노출시켰으며 이목이 준수하였다. 한편 여자는 몸
에 녹색단삼(祿色短杉)의 저고리와 녹색의 긴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 신상은 누가 조각했는지 몰라도 시골의 순박한 면모를 지니게 하였으니 역시 얻기 힘든 솜씨
구려.”
향화도인은 상팔이 아무렇게나 꺼낸 돈이 금전인 것을 보자 지극히 흡족한 표정에 겸손한 태도로
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들 곁으로 바싹 다가와 설명을 시작했다.
“인연묘는 천 리 밖까지 이름이 널리 퍼져 있으며 제비를 뽑든 점을 치든 간에 모두 영험합지요.
세 분께서는 암암리에 각기 염원을 말씀하시면 인연 두 신은 세 분의 기원을 반드시 들어 줄 것
입니다.”
그러나 신상 앞에 꿇어 엎드렸던 그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그들의 이야기소리를 듣자 살며시 일
어나더니 소영과 상팔을 일별하고 몸을 슬쩍 돌려 총총히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녀가 만약
태연히 나갔다면 소영이 그녀를 유심히 바라 보지 않았을 것이고 무심히 대전 밖으로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이 당황한 듯한 거동은 즉시 소영에게 수상한 감을 느끼게 하였고 또한
중주이고의 의심을 샀다.
두구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 여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 여자의 동작도 빨랐다. 그녀는
대뜸 발걸음을 멈추고 단번에 석자를 뛰어 넘더니 두구를 지나 절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상팔도
벌써 경계를 하고 있었기에 그녀가 두구를 피해 넘는 쾌속한 신법을 보자 즉시 오른팔을 내밀어
그 여자를 가로막았다.
이 인연묘의 대전 문은 비록 넓었으니 두구가 반을 가로막았고 상팔이 큰 배를 불룩하게 내밀고
더구나 오른팔까지 내밀었으니 그 여자는 손으로 상팔을 밀어 제치고 나가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재빨리 오른손을 들어 식지와 중지를 함께 뻗더니 상팔의 맥문을 곧장 찍었다.
상팔은 오른팔을 급히 거두어 그녀의 일격을 피하고 다섯 손가락을 쑥 내밀더니 그녀의 오른팔을
반대로 낚아챘다.
그때 소영의 소리가 들려 왔다.
“빨리 길을 비켜 주십시오.”
소영은 이미 그 여자가 바로 귀주성(歸州城) 안에서 처음 보았던 얼굴이 엄숙한 그 소녀라는 것
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이 여자는 줄곧 단 목정을 따라 다니며 조금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분명히 단목정
도 이 인연봉 위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상팔은 소영의 말을 듣자 즉시 몸을 비켜 길을 터 주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믐을 비스듬히 돌리
더니 비호같이 달려 나갔다.
이미 완전히 날이 어두워 그녀의 모습은 곧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상팔은 유심히 사방을 살펴 보았으나 그녀의 모습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소영이 나직이 말했다.
“찾을 것 없소이다.”
상팔이 소영을 돌아 보며 물었다.
“큰형님께서는 그 여자를 아십니까?”
“항상 단목정과 함께 다니는 그 낭자가 아니오?”
상팔은 무릎을 탁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바로 그 아가씨입니다. 저도 역시 낯이 익었는데 어디서 봤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
었지요.”
두구가 불쑥 말했다.
“그 낭자는 줄곧 푸른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오늘은 어찌 검은 옷을 입었을까요?”
상팔이 잠시 생각하더니,
“어쩌면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일세.”
소영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녀의 눈에 아직도 눈물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저 인연신상에게 소원
을 빌고 있었을 것 같소.”
상팔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 낭자가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어쩌면 단목정도 이곳에 있을 것 같군요. 우리는 그 단목
정을 찾아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왕년에 그들은 큰형님이 백화산장에 투항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으니 지금 큰형님과 심목풍을
모르는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저 낭자는 큰형님께 대하여 조금도 존경을 표시하지 않
으니 단목정을 찾아 반드시 그녀의 불경을 따져야겠습니다.”
소영은 두구에게 말했다.
“그만 두오. 그들은 우리들과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이인데, 우리들을 존경할 필요가 어디 있겠
소?”
두구는 그래도 따지려 했지만 상팔이 눈짓을 하며 만류하였다.
그 향화도인(香火道人)은 마치 다투고 싸우는 일에는 익숙해진 듯, 아예 이들의 행동에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상팔이 낮은 소리로 소영에게 물었다.
“우리는 오늘 밤 인연봉(姻緣峯)에 남아 있어야 합니까?”
소영이 대답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냉랭한 음성이 들려 왔다.
“남는 것이 제일 좋겠지요.”
소영과 중주이고는 깜짝 놀랐다. 이윽고 두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누구냐?”
예의 그 맑고 차가운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나요.”
대답 소리와 함께 키가 작고 가는 몸집에 얼굴이 예쁘장하게 생긴 청의소년이 천천히 들어 왔다.
상팔은 그 소년을 힐끗 보았다. 준수하게는 생겼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력이 부족해 보이고 남자
다운 기개가 없어 보였다.
상팔은 곧 입을 열었다.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는 귀하와 아무런 상관이 없거늘 귀하는 어찌하여 우리들의 이야기에 끼어
드는 거요?”
그러나 청의소년은 묻는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소영을 똑바로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소대협은 무엇 때문에 이 인연봉으로 왔소?”
그 말투는 마치 옛친구를 다시 만나 책망이라도 하는 듯한 말씨였다.
소영은 그 청의소년이 도무지 어디서 만나 본 사람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귀하는 누구시오?”
청의소년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소대협은 정말 나를 모르겠소?”
“매우 낯익은 얼굴 같기도 한데 어디서 보았는지는 생각나지 않는군요.”
“소대협은건망증이 심하군요. 나는 소대협을 기억하고 있는데..”
청의소년은 말과 함께 손을 들어 머리에 쓴 푸른 수건을 벗어 버렸다. 고운 머리채가 드러났다.
“백리낭자가 아니오?”
“이제야 겨우 찾게 되었군요.”
상팔과 두구는 서로 시선을 교환한 후 슬며시 절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오랜 세파에 시달린 향
화노인은 갑자기 동종(銅種)을 한 번 두드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연이 있으면 천 리 밖에 있어도 만날 수 있고, 인연이 없으면 마주보고 있어도 만나지 못한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알아 주는 법……’
소영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낭자는 어찌하여 이곳에?”
이 사람은 바로 북천존자의 딸 북해공주 백리빙이었다.
“저는 소대협을 찾아서 천 리길을 뒤쫓아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소영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내가 이곳 인연봉에 온 것은 우연한 동기에서인데 이 낭자는 어찌 이다지도 정확하게 알아 맞출
수 있었을까?’
“낭자는 언제 이곳에 오셨소?”
“정오 때쯤해서……”
그녀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나는 소대협에게 물어 볼 말이 너무도 많습니다.”
소영은 주위를 둘러 보며 말했다.
“이곳은 이야기를 할 곳이 못 되니 우선 적당한 곳을 찾아…..”
그러자 백리빙이 말을 가로챘다.
“저는 이미 객사를 예약해 두었어요.”
“우리 일행 중엔 아직도 두 형제가 남아 있는데……”
백리빙이 다시 말을 가로챘다.
“괜찮아요. 그 객사엔 아직도 빈 방이 남아 있으니 제가 안내하지요.”
백리빙은 돌아 서면서 다시 수건을 덮어 썼다.
소영은 이 천진난만한 북해공주가 그 동안 매우 성숙한 느낌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짧은 몇 개
월이었지만 백리빙은 몇 년을 자란 듯한 느낌을 주었다.
백리빙은 이미 절을 빠져 나가 앞장 서서 걸어 가기 시작했다.
소영도 그녀의 뒤를 따라 절 밖으로 나갔다. 소영은 절 밖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중주이고를
찾았으나 중주이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 두 사람이 그동안 어디로 가 버렸을까?’
소영은 크게 불러 보려고도 생각했지만 신통할 것 같지 않아 그만 두었다.
백리빙은 걸음을 재촉하여 한 채의 모옥(茅屋)으로 들어 갔다.
소영은 뒤를 따라 들어 갔다. 이와 같은 객점은 원래 그 목적이 손님들에게 비바람을 피할 수 있
을 정도의 장소를 제공하는 것 뿐이므로 물론 대우는 좋지 않았다. 소영은 다만 백리빙을 따라
곧장 들어 가서 객점 뒤편의 객실로 갔다.
실내에는 이미 한 자루의 촛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방에는 너무도 엄숙하여 거의 웃는 얼굴이
라고는 볼 수 없을 듯한 흑의를 입은 한 여인이 먼저 들어 와 있었다. 소영은 의아한 생각이 들
었다.
‘이 두 사람은 어째서 함께 있는 것일까?’
백리빙은 고개를 돌려 소영을 쳐다 보고는 입을 열었다.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에요?”
소영은 그녀를 보기는 몇 번 보았지만 한 번도 인사를 나눈 적이 없었으므로 공수를 하며 일례를
올렸다.
“단목 노선배님은 함께 오시지 않았습니까?”
흑의의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스승님 말씀이시지요? 그 분은 어떤 사람의 기습을 받아 이 백리낭자께서 만일 구해 주시지 않
았더라면 봉변을 당할 뻔했지요.”
소영은 그제야 이들 두 사람은 서로 그와 같은 사연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영은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단목 노선배님의 상세는 어떠하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소대협께서 그처럼 염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스승님께서는 백리낭자의 영단이 영험하여 무사
합니다.”
그녀는 이미 소영과 두 번이나 말을 주고받았지만 끝내 고개를 숙인 채 소영을 한 번도 바라 보
지 않았다.
이때 백리빙이 입을 열었다.
“단목 노선배님의 상세는 이미 좋아졌지만, 아직도 휴양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분은 제가 험
한 강호에 혼자 나다니는 것을 보고는 특별히 염려하셔서 단목 낭자를 동반하도록 해주신 거예
요.”
백리빙은 말을 마친 후 시선을 계속 소영에게 못박고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으나 소영은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대답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백리빙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흥! 하고 코웃음을 쳤
다.
“어째서 소대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요?”
소영은 그제야 꿈에 깨어난 듯 반문했다.
“낭자께서는 저에게 말씀하신 겁니까?”
백리빙이 대답했다.
“이 방 안엔 다만 우리뿐인데 내가 단목낭자와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그야 물론 소대협에게 말한
게 아니겠어요?”
“낭자께서는 나에게 무슨 말이 듣고 싶으신지?”
백리빙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대협도 나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을 게 아닙니까? 가령 내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께선 저를 구하기 위해 문규(門規)를 어겼으니 영존께서는 크게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지
금도 낭자를 찾기 위해 애태우고 있을 것입니다.”
백리빙은 흑의녀에게 시선을 돌리며 무슨 말을 할 듯 하다가 입을 다물어 버리고 천천히 앉았다.
그러나 혹의녀는 매우 총명한 여자이므로 나직이 말했다.
“두 분께서는 얘기를 나누십시오. 저는 음식이라도 준비해야겠습니다.”
소영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객점의 종업원에게 분부할 일을 어찌 낭자께서 직접 수고를 하십니까?”
그러나 흑의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이제 백리빙과 소영만이 남게 되었다. 백리빙의 맑고 빛나는 두 눈동자는 줄곧 소영의 얼굴에 못
박혀 마치 그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어 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금검지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