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125
125. 심목풍에게 대항하는 여인들
소영도 그들의 뒤를 따라 막 몸을 날리려는데 돌연 우문한도가 옷소매를 잡았다.
“소대협, 제가 몇 마디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소?”
소영은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무슨 말씀이오?”
“심목풍이 무엇 때문에 금궁에서 빨리 달려 나갔는지 아시오?”
소영은 그의 말씀을 알았으나 짐짓 반문했다.
“모르겠소. 무엇 때문이오?”
“그는 자신의 부하를 풀어 계곡의 입구를 봉쇄하려는 것이오. 소대협은 보물을 지니고 있으니
그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오.”
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래서 우문선생은 나에게 선뜻 장방의 무공비록을 맡기셨군 요.”
우문한도는 엄숙한 표정으로 소영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무안의 빛이 어려 있었다.
“심목풍과 소대협 사이에서 그것을 보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소. 소대협에게 맡기지 않았더라
면 나는 벌써 심목풍의 암수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오.”
“당신의 속셈은 나와 심목풍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바라는군요. 당신은 가만히 구경만 하
고 금궁의 보물을 얻자는…..”
소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내가 설령 그런 마음을 가졌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지난 일이오. 이제 우리는 또다시 생사를 판
가름하는 난관에 부딪쳤소. 그러니 처음과 같이 서로 합심하여 살 수 있는 길을 뚫어 봅시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백리빙이 참지 못하고 불쑥 말참견을 하였다.
“당신은 몹시 교활하군요. 벌써 몇 번이나 우리를 배반하였으니 이제는 더 당신을 믿지 못하겠
소. 당신과 이제 손을 잡는다는 것은 마치 호랑이와 가죽을 놓고 흥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우문한도는 조금도 표정이 변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사정은 급박하오. 우리는 뭉치면 살 수 있소. 두 분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지
만 단 둘이 아니오?”
“당신은 어떻게 우리 두 사람뿐이라고 단정할 수 있소?”
백리빙의 뚱딴지 같은 물음에 우문한도는 잠시 멍청해졌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도 응원하는 사람이 있나 보군.’
“두 분의 동료가 계곡 밖에 대기하고 있다 하여도 심목풍이 이끄는 부하들보다 적을 것이 분명
하오. 나는 비록 무공은 약하나 머리를 써서 계략을 만들어 내는 데는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하
오. 열 명의 동료보다도 내 지혜가 더 나을 것이오.”
소영은 언뜻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앞으로 사흘 동안은 심목풍이 손을 쓰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그는 왜 두려워할까?’
소영은 의문을 못 참고 우문한도에게 직접 물었다.
“당신은 그와 약속을 하였으므로 사흘 동안의 여유가 있지 않소. 그가 손을 안 쓴다고 하였으니
쉽게 골짜기를 나갈 수 있을 텐데 어찌 그러시오?”
우문한도는 이미 그런 물음을 예상했었는지 대번에 말을 받았다.
“심목풍은 아무리 약속을 하였어도 믿을 만한 인물이 못되오. 그가 나를 밖으로 내보낼 것 같
소? 그는 시간만 약속했지 밖으로 내보낸다는 것은 약속하지 않았소. 즉 나보고 이곳에서 사흘을
허송세월한 후 곱게 죽으라는 것이오. 그러니까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로 사흘 동안 더 살라는
것이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소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소대협, 당신이 나와 합심한다고 응하면 즉시 장방의 무공비록을 절반 드리겠소.”
백리빙이 말을 받았다.
“당신은 우리의 금궁 열쇠를 잃었으니 이제는 그 비록을 달라 할 수 없소.”
그러자 우문한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품속에서 금궁의 열쇠를 꺼냈다. 소영이 그
에게 넘겨 주었던 바로 그 열쇠였다.
소영과 백리빙은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하였다.
우문한도가 열쇠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것이 맞소?”
소영은 그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대뜸 크게 소리쳤다.
“당신은 줄곧 수중에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구려.”
우문한도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소대협께선 앞서 약속한 것이 있으니 모른 체하지는 않을 줄 아오.”
그가 들고 있는 열쇠를 암암리에 살펴보니 틀립없는 금궁의 열쇠였다.
“우문선생, 당신의 꾀에 탄복하였소. 그럼 어떻게 하여 비록에 적힌 무공을 나누어 갖자는 것이
오?”
“그럼 언제 이것을 가르겠소?”
소영은 이미 우문한도와 합심한다는 결심을 굳힌 터였다.
우문한도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우선 심목풍의 세력권 밖으로 나간 후에 나누기로 합시다.”
하고는 몸을 옆으로 비켜 길을 터주며 말을 계속했다.
“소대협, 이제 내려가도 되겠소. 그러나 그들의 암수를 조심하시오.”
“고맙소.”
소영은 짤막한 말과 함께 금궁의 출구를 나가 절벽 밑으로 내려갔다.
우문한도의 말대로 심목풍은 부하를 사방으로 풀어 계곡을 완전히 봉쇄하여 놓았다. 소영은 땅
으로 내려 서자마자 주위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그가 내려선 곳에서 오른쪽으로 금화부인과 당노부인 그리고 주조룡이 보였다. 그리고 왼쪽으로
는 검문쌍영과 강남의 사 공자가 빈틈없는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소영은 무엇보다 강남 사 공자가 이곳에 나타나 심목풍을 돕는 것이 이상하였다. 그는 강남 사
공자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정말 세상이 좁군. 이곳에서 여러분들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였소. 그동안
모두들 안녕하셨소?”
강남 사 공자는 한몸같이 고개를 숙여 답례하였다.
“소대협도 안녕하셨소?”
소영은 그들과 형식상의 인사를 주고받은 후 눈길을 돌려 정면에 서 있는 심목풍에게 말했다.
“심대장주! 당신은 이렇게 많은 사람으로써 내 앞길을 막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오?”
심목풍은 음흉한 웃음을 소영에게 보냈다.
“흐흐흐…이제 금궁을 나왔으니 그동안 금궁에서 약속한 모든 것은 무효가 되었소.”
“그래서…..”
소영의 말에는 살기가 넘쳐 흘렀다.
이때 백리빙과 우문한도가 소영의 옆으로 내려섰다.
심목풍은 그들을 상관치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소영에게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도 자네를 삼제라고 부르고 싶네. 과거의 일은 모두 잊고 지금에라도 백화산장으로
돌아오게.”
소영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당신을 도와 악행을 저지르며 강호를 제패하자는 것이오?”
“그렇다네. 이 형이 강호를 제패한다고 삼제에게 무슨 해가 있나? 내가 좋아지면 삼제도 더욱
명성을…..”
“자고로 얼마나 많은 무림 인물들이 그런 생각을 하였겠소. 그러나 소원을 이루었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였소. 당신의 손은 벌써 오래 전부터 죄없는 사람들이 뿌린 피로 물들어
있소. 그리고 일신은 온갖 죄악으로 꽉 들어차 있소…..”
말을 하는 소영의 신색은 죽음도 불사한다는 굳은 표정이었다.
듣고 있던 심목풍이 계속 듣기가 거북한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두지 못하겠나!”
소영은 힐끗 눈길을 돌려 주위를 살피고는 코웃음과 함께 다음 말을 꺼냈다.
“나는 옛날의 형제였소. 정분을 생각해서 당신을 용서하겠소. 지금이라도 백화산장을 해체하고
다시는 나쁜 짓을 안한다면 내 스스로 당신 수하로 들어가겠소. 그리고 강호의 영웅들에게 일일
이 찾아다니며 당신 대신으로 내가 용서를 빌겠소. 그들도 당신이 마음을 바로잡고 참회한다면
당신의 지난 죄악을 눈감아 줄 것이오.”
심목풍은 돌연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웃음은 언제인가 들었던, 상처를 받은 맹수의 울부짖음 같았다.
소영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얼마가 지나자 그는 서서히 웃음을 멈추고 냉랭히 입을 열었다.
“삼제의 말은 나를 모욕하는 것이군.”
“그렇소. 당신을 꾸짖는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심목풍은 악당의 두목답게 소영의 말에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소대협, 자넨 이미 험지에 몸을 두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일세. 지금까지 자네가 내 욕을 한 것
으로 보아서는 당장 목을 베고 싶지만 참겠네. 나도 자네를 동생으로 부르던 시절을 잊지 못하네.
그러니 다시 한 번 생사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네. 자네가 목숨을 걸고 싸운다손 치더라
도 이 골짜기를 살아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네. 어떡하겠나?”
소영은 고개를 돌려 백리빙과 우문한도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소영과 등을 맞대고 암암리에
진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적을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느끼자 조금 마음이 안정되었다.
“지금 당신의 무공은 옛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오. 당신의 무공이 그때 그대로라면 나는
충분히 당신을 대적할 수 있소.”
심목풍은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나는 자네의 마음이 돌아설 것을 은연중 기다렸네. 그래서 자네를 도와 몇 번 독수를 비켜나게
한 것이네. 지금 나는 천하의 각 대문파 대부분의 실권을 쥐고 있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내 한
마디 명령이면 강호의 대부분의 문파를 몰살시킬 수 있다는 것이네. 그런데도 자네는 강호의 편
이 되겠나?”
소영은 그에게 대답을 안할 수 없어 생각나는 대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의 생각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오. 당신이 침투시킨 첩자는 지금쯤 각 대문
파의 고수들에게 덜미를 잡혔을 것이오.”
소영은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확실치 못한 것이라 조마조마했다.
‘저놈이 어떻게 받아 들일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러나 이런 위급한 순간에는 거짓말로라도 상대의 기세를 꺾어야 했다. 소영으로서는 참으로
오랜 만에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의 몇 마디 말은 심목풍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심목풍은 뜻밖의 말에 한쪽 팔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호를 제패하는 데 있어 그것만을 믿었더니…..’
그러나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침투시킨 인물들은 모두 신분을 감추고 있으며 각 문파에서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는데
어찌 그들을 알아낼 수 있을까?”
소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옳지, 상대는 내 말을 곧이 들었구나.’
“내가 알고 있는데 어찌 그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겠소.”
심목풍은 냉소를 띠었다.
“흐흐, 자네는 정녕 나와 적이 되겠다는 것이군. 그것도 영원히 변치 않고…..”
“당신이 내 권고를 받아 들이지 않는 한 목숨을 걸고 대결하겠소.”
심목풍은 눈썹을 치켜 세웠다.
“우리는 지금껏 진정으로 자웅을 겨루어 보지 못했다. 오늘에서야 너의 무공을 시험해 볼 기회
가 생긴 것 같구나.”
소영은 상황의 흐름이 한바탕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직감하였다. 그래서 짐짓 약함을 보
이지 않으려고 미소로 답했다.
“소생 목숨을 걸고 당신의 무공에 맞서겠소.”
그러자 등을 맞대고 대치하고 있던 우문한도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심목풍에게 물었다.
“심대장주, 금궁에서 나와 약속한 사흘 간의 여유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설마 약속을 어기시는
것은 아닐 테지요?”
그의 말에 제일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금화부인이었다.
‘저놈은 수작을 부려 도망치려고 하는구나. 그러나 그를 놓아 줄 수는 없다. 그가 이곳에서 나가
면 소영은 한 사람의 동료가 줄어들게 되지. 그를 그대로 묶어 놓아 소영을 돕도록 해야지.’
그녀는 심목풍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시오? 우문선생께선 가시려고 그러시오?”
우문한도는 침착을 잃지 않으려고 괜한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되물었다.
“부인께선 저를 마음대로 하실 수 있소?”
“잘 물었소. 나는 선생을 마음대로 놓아 줄 수는 없지만 이곳을 마음대로 벗어나는 것은 용서치
못하오.”
그녀는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말을 이었다.
“우문선생께서 저를 이기고 가실 수 있다면 모르지만, 어디 선생 마음 내키는 대로 방향을 잡고
가보시겠소?”
우문한도는 그제서야 그들 뒤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심목풍 이하 금화부인 등 빈틈없이 몇 겹으로 형성된 포위망이 펼쳐 있었다.
‘아! 이제는 부득이 손을 써서 뚫을 수밖에 없구나. 그러나 상대는 많은 고수와 뒤를 밀어 주는
힘이 있으니 도저히 상대를 꺾을 수는 없다. 소영의 무공이 높다 하여도 심목풍에 대적할 수도
없으니…그를 따르는 낭자가 있어도 상대는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이니 역시 힘이 모자라고…..’
그는 눈길을 돌려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우문한도는 전날 오랫동안 백화산장에 머물러 있어서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에 대해 잘 알았다.
그녀들은 비록 심목풍과 함께 행동하지만 본심은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심목풍이 이곳으로 데리고 온 주조룡이나 강남 사 공자는 과히 무공이 높지 않다. 지금 상대는
심목풍 이외에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이 제일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만약, 만약 그녀
들이 태도를 바꾸어 심목풍을 공격한다면 우리쪽도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망성이 있다.’
우문한도는 암암리에 이렇듯 쌍방의 실력과 승산을 계산했다. 그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승부의 면으로 본다면 소영쪽이 불리하다. 그렇다고 나 혼자 이곳을 뚫을 수도 없으니 최악의
경우에는 소영과 힘을 합해야겠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이 소영을 도울 희망
도 있으니…..’
그의 이 같은 긴 생각은 잠시 동안 이루어졌다. 마음을 결정하자 어느 정도 배짱이 생겼다.
그는 심목풍에게 다시 다그쳐 물었다.
“어떡하시겠소? 나는 심대장주의 대답을 듣고 싶소.”
심목풍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우문형! 가고 싶으시다면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약속을 깨뜨릴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까.”
우문한도는 씁쓸하게 웃었다.
“심대장주, 고맙소이다. 당신이 소제를 보내 주시겠다니 그 인격을 존중하겠소이다. 그러나 심대
장주 이외에 다른 사람이 소제를 막는다면 어쩌시겠소? 다른 사람에게는 뭐라 말하지 않으시겠
소?”
심목풍은 눈길을 돌려 금화부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금화부인은 이곳 사람이 아니오. 묘강에서 왔으며 백화산장의 인물도 아니오. 더군다나 당신들
사이의 개인적인 원한관계에 참견하고 싶지 않소.”
“심대장주는 한 마디로 우리의 약속을 깨뜨리겠다는 말씀이구려. 그러시다면 솔직히 말하실 것
이지 무얼 그렇게 핑계를 대시오. 그런 수법은 심대장주가 할 만한 일이 못되오.”
심목풍은 담담히 웃었다.
“우문선생은 언제나 잔꾀가 많소. 그러므로 금궁에서 소대협과 잠시 머물러 있을 동안 무슨 흉
계를 꾸몄을 것이오. 틀림없이 소대협과 힘을 합하여 이곳을 빠져나가자는 이야기를 했을 것이오.
안 그렇소? 지금 당신을 놓아 준다면 강호에서 고수들을 데리고 올 터이니 어찌 그런 것을 바라
겠소. 당신을 놓아 주기보다는 호랑이를 우리 밖으로 내놓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오. 나는 당신과
의 약속 때문에 직접 손을 쓰지 못할 뿐이오.”
“심대장주는 너무 큰소리 치지 마시오. 내가 이곳에 남는다면 오히려 소대협을 돕는 결과가 될
뿐이오.”
심목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은 강호에서 존경하고 있는 소대협과 함께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시
오. 훗날 강호에서는 당신을 영웅이라고 칭할 것이오. 얼마나 좋은 일이오.”
그 말을 들은 우문한도의 표정은 대뜸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의 눈에는 말할 수 없이 날카로운
살기가 서렸다.
서로 침묵을 지키며 잠시 대치하고 있었다. 그 침묵을 깨뜨리며 우문한도가 천천히 몸을 돌려
소영에게 다가왔다.
그는 품속에서 보검을 꺼내어 소영에게 건네 주었다.
“저의 낮은 무공으로는 이 단검을 갖고 있을 자격이 없소. 소대협에게 단검을 드리니 요긴하게
쓰시오. 이 단검은 무예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소지하면 절기한 위력을 지닐 것이오.”
소영은 많은 군호들이 보는 앞이라 사양하지는 않았지만 내심으로 꺼림칙하였다.
‘이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건지려는 뜻이 실패하자 비로소 나를 돕겠다는 거군. 이런 것은 강호
에서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비겁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형편으로는 이런 것을 따질 수 없다.
그가 나를 도와준다니 우선 받아 들이자.’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우문한도도 몇 가지 추측을 하였다.
‘소대협은 나의 비겁한 행동을 탓하고 있구나. 그러나 그에게 사과를 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가야지…..’
그는 소영에게 내민 단검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나는 소대협을 돕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심목풍의 인간됨을 알아보기 위함이었소. 심목풍이
과연 약속을 지키는 위인인가 하고 말이오. 이제 그가 자처하듯이 강호를 제패하겠다는 인물이
일개 하찮은 약속을 저버렸다는 것은 실로 수치스러운 일이오. 이 소문은 곧 강호에 퍼져 그의
인간됨을 모두 알게 될 것이오. 소대협께선 다른 생각 마시고 어서 단검을 받으시오.”
소영은 마지못하여 그의 단검을 받아 들었다.
“우문선생, 감사하오. 제가 이곳에서 죽지 않으면 반드시 선생에게 돌려 드리겠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려줄 필요없소. 나는 검을 사용치 않으니 필요없는 것이오.”
“공로가 없으면 녹을 받지 않는 법, 그런데 어찌 내가 이런 귀중한 보물을 받을 수 있겠소.”
“보검은 협사가 지녀야 되고 미인은 영웅에게 시집가야 된다고 하였소. 그러므로 이 단검은 소
대협에게 어울리오.”
소영이 그래도 사양하려는 데 백리빙이 말참견을 하였다.
“그렇다면 제가 오빠 대신에 감사를 드리겠어요.”
그녀는 말을 끝내면서 정중히 손을 모아 허리를 굽혔다.
우문한도는 의외의 일에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저 계집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나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롭겠군.’
그는 절세의 보검을 아낌없이 소영에게 주면서도 그에게 감사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을 내심 언짢
게 생각했다. 그러나 표면으로는 나타내지 않고 공손히 답례하였다.
“낭자 말씀이 너무 무겁구려.”
심목풍은 이들이 하고 있는 모양을 주시하고 있다가 소영에게 단검이 쥐어지는 것을 보고는 흠
칫 놀랐다.
‘저 보검을 소영에게 넘겨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렇다면 조금…..’
그는 요 근래 소영과 몇 차례 수를 나누어 본 경험이 있어 그의 고강한 무공을 족히 알고 있었
다. 더군다나 소영의 상승내공은 무시 못할 경지에 도달하여 초인적인 실력이었다.
‘그런데 저놈에게 단검이 쥐어졌으니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결과가 되지 않았나! ‘
그는 내심 두려움을 느꼈지만 짐짓 냉랭하게 말했다.
“소대협, 준비되었나?”
소영은 서서히 단검을 가슴께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다 되었소. 이제 덤벼 보시오.”
심목풍은 고개를 돌려 검문쌍영을 쳐다보았다.
‘우선 저들로 하여금 소영의 단검을 시험하게 하자.’
그는 모든 것을 계산하고 일을 하는 인물이었다.
“두 분께선 평생 검을 다루었으니 응당 소대협의 상승 검법을 배워야 되지 않겠소? 우선 두 분
께서 먼저 나가 보시오.”
검문쌍영은 소영의 검술을 두려워하였지만 그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죽음의 비장한 각오를 나누었다.
‘지금 나가면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지 않게 힘껏 싸우다 죽자.’
그들은 따로따로 싸운다면 금방 죽을지 모르나 둘이 한꺼번에 협공하면 몇 수 겨룰 수 있으리라
믿었다.
죽음을 두려워 않고 나서는 사람의 마음은 적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법이었다.
검문쌍영은 일제히 장검을 뽑아 어깨 위로 치켜 세웠다.
‘그러나 우리쪽의 인원이 많으니 만약 우리에게 위험이 닥치면 도와 주겠지.’
두 사람은 이런 희망도 가졌다.
우문한도는 검문쌍영이 먼저 도전해 옴을 보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심목풍과 소영의 싸움은 생사를 판가름하는 것이다. 만약 소영이 상대에게 화를 당하여 죽게
되면…좋다. 나도 목숨을 바치겠다. 그러나 싸움을 하여 목숨을 잃기보다는 스스로 자결하리라. 그
리고 다행히 소영이 심목풍을 물리친다면 나머지 인물들은 지레 겁을 집어 먹고 도망갈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판가름은 심목풍과 소영의 대결에 달려 있다.’
그는 심목풍의 음흉한 계책도 저울질하여 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나오지 않고 검문쌍영을 내보내다니 무슨 속셈이 있는 것 같군.’
우문한도는 뒷걸음질로 소영에게 다가갔다.
“소대협, 상대는 우선 당신의 체력을 소모시킬 심산인 것 같소.”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심목풍에게 말했다.
“심대장주는 차륜(車輪)전법으로 나오실 모양이구려.”
심목풍은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흐…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소.”
그 사이에 벌써 검문쌍영이 소영의 일 장 앞에까지 다가왔다.
소영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그들을 노려본 다음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문쌍영과 소영의 사이가 거의 반 장 정도 되었을 때 돌연
“잠깐 멈추시오!”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백리빙이었다.
그녀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몸을 날려 소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소영이 무어라 제지하려
는 기색이 보이자 대뜸 입을 열었다.
“오빠, 잠깐 기다리세요.”
그리고는 검문쌍영에게 눈길을 보내며 냉랭하게 말했다.
“두 분께선 저의 오빠와 싸우기 전에 우선 저를 물리쳐야 되오.”
검문쌍영은 암중으로 소영과 부딪치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다. 그런데 뜻밖에 여자가 나서니 여
간 기쁜 것이 아니었다.
‘이 계집은 누구인가? 그러나 소영과 맞서는 것보다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나. 제까짓 계집이 얼
마나 높은 무공을 가졌을라고…..’
백리빙을 향해 먼저 추풍검 배백리가 말을 걸었다.
“낭자 이름을 대시오.”
“우리는 지금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하지 않소? 친구로 사귀는 것도 아닌데 어찌 내 이름을 묻
소?”
무영검 담통이 말을 받았다.
“그러시오? 낭자께서 그렇게 싸우고 싶으시다면 무기를 드시오.”
백리빙은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두 분께선 저에게 빌려줄 무기를 안 갖고 오셨나 보군요?”
배백리가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낭자께선 살기가 싫으신 모양이구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는 말을 끝내지도 않고 갑자기 장검을 내리쳤다.
그의 날카로운 검법은 강호에서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한 줄기 검광을 번쩍이며 사정없이
백리빙의 목을 노렸다.
백리빙이 건방지게 무기도 들지 않고 검문쌍영을 상대하자 우문한도는 적지 않이 걱정 되었다.
‘저 낭자는 마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호랑이 같구나. 검문쌍영이라 하면 강호에서도 무
시하지 못하는 인물인데…그들의 검법은 바람도 잡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런 생각으로 그녀의 무모한 행동을 말리려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백리빙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백리빙은 상대의 검이 움직이려는 순간 어깨를 약간 흔들어 공중으로 솟구쳤던 것이다.
배백리는 자신의 재빠른 일격이 빗나가자 내심 흠칫했다.
‘강적이로구나!’
그가 이런 생각을 갖고 뻗었던 검을 거두려 하였다.
그가 막 몸을 움직이려는데 돌연 검을 쥐고 있던 손목이 마비되며 다시 손가락이 저절로 풀렸
다.
“짱그렁!”
배백리가 들고 있던 장검이 땅에 떨어지자 주위의 모든 군호는 놀람을 금치 못하였다.
배백리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며, 마비된 손목을 쳐다보았다.
손목에는 어느 새 파란 빛을 띤 독침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백리빙은 기묘한 신법으로 몸을 솟구쳐 상대의 일격을 피하고, 상대가 당황하는 기회를 이용하
여 독침을 뻗은 것이었다.
이것은 일순간의 일이었다.
그녀는 땅으로 내려서며 재빠르게 배백리의 장검을 집었다.
백리빙의 놀라운 신법에 정신을 잃고 멍하니 있던 담통은 백리빙이 장검을 집어 드는 것을 보고
서야 제정신을 찾았다.
그는 냉랭하게 독설을 퍼부었다.
“야! 이 계집애야. 어디서 함부로 날뛰느냐? 네 비록 한 수는 이겼지만 기어코 목을 잘라 독수리
밥으로 만들겠다.”
그의 검법은 조금 전의 상대보다 더 큰 살기를 지니고 있었다.
담통은 연속 삼 장을 공격했다. 그러나 백리빙을 곤경으로 몰아넣지는 못하였다.
우문한도는 두 사람의 싸움을 방관하면서 내심 감탄하였다.
‘매우 무공이 고강한 계집이로군. 적 하나를 거뜬히 처치하고…..’
그는 백리빙의 분투를 보고 그동안 쌓였던 두려움이 어느 정도 가시는 것을 느꼈다.
배백리는 자신의 무공을 그리 약하게 생각지 않았었다. 더군다나 여자에게 두 명이 협공하니 틀
림없이 상대를 누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이없게 한 수에 당하고 마니 정말 기
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는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을 참지 못하여 손목에 꽂혀 있는 독침을 뽑아내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계집애야. 나하고 다시 자웅을 겨루자.”
그러나 독침에 찔린 손목이 점점 부어오르고 그 주위가 검게 변색했다. 이제는 오른손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백리빙과 담통의 싸움은 치열하였다.
그들의 싸움을 지켜 보던 심목풍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배백리에게 다가왔다.
“바늘에 독이 있는 것 같소?”
배백리는 말없이 몸을 돌려 오른손목을 그에게 보였다. 벌써 그의 손목은 퉁퉁 부어 올라 사람
의 팔 같지가 않았다.
심목풍이 무어라 입을 열려는데 백리빙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 바늘에는 맹독이 묻어 있소. 당신은 앞으로 한 시진 내에 그 독이 심장을 파고들어 목숨을
잃게 되오. 독을 제거할 수 있는 약은 나 이외에 아무도 갖고 있지 않을 것이오.”
심목풍은 흥! 냉소를 치고는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낭자는 말투가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지 않소!”
그리고는 품속에서 조그만 약병을 꺼내 두 알의 영단을 꺼냈다.
“이것을 먹어 보시오. 당신의 독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오.”
“심대장주 당신의 해약은 아무 소용도 없어요. 그 독은 우리 북해 독문의 것이오.”
심목풍은 잠시 생각하더니 능글맞은 웃음을 보냈다.
“만약 낭자의 말이 맞다면 나는 부득이 낭자에게 손을 쓰겠소. 낭자를 사로잡아 해약을 뺏겠다
는 말이오.”
백리빙은 계속 담통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말했다.
“당신이 도전을 한다 해도 나를 사로잡지 못할 것이오. 어쩌면 당신이 도리어 내 손에 상할지도
모르오.”
“정말 건방진 낭자로군.”
심목풍은 이렇게 혼자말처럼 내뱉고는 슬그머니 백리빙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재빠르게 소영이 달려 나와 심목풍의 앞을 막았다. 그는 정중히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
다.
“심대장주, 이제야 손이 근질근질하시오? 그렇다면 제가 모시겠소.”
심목풍은 걸음을 멈추고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에게 말했다.
“소대협의 무공이 고강하고 단검을 지녔으니 당신들 둘이서 덤비시오. 나는 저 건방진 계집을
사로잡아 해약을 빼앗아야 되겠소.”
우문한도는 그의 말에 언뜻 느끼는 바가 있었다.
‘심목풍은 자꾸만 소영을 피하는군. 그는 손쉽게 낭자를 누른 후 체력이 소모된 소영을 덮치려
는 수작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심목풍의 계략에 말려 들어…..’
그는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의 행동이 궁금하여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고 두 여인을 주시하였다.
두 여인은 마치 심목풍의 말을 못 들은 것같이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였다.
심목풍은 양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금화부인에게 다그쳐 물었다.
“부인! 저의 말을 못 들으셨소?”
금화부인은 담담히 대답했다.
“들었소.”
심목풍은 당노부인에게 물었다.
“당노부인도 들으셨소?”
그녀도 역시 담담히 대답했다.
“들었소.”
심목풍의 음성을 약간 높고 거칠어졌다.
“두 분께선 못 들은 것도 아닌데 어찌 모른 척하시오?”
우문한도는 내심 개가를 불렀다.
‘옳다구나. 저들이 먼저 집안싸움을 한다면 더욱 전세는 우리쪽이 유리하다.’
금화부인은 독충을 언제 어느 때나 사용할 수 있는 묘기를 지니고 있었다. 당노부인도 무림 암
기의 으뜸으로 생각되고 있는 고인이다.
금화부인은 냉랭히 입을 열었다.
“오늘의 싸움은 오직 심대장주의 개인사정이오. 그리고 당신은 나를 의심하고 있소. 그런데 내가
당신의 말대로 소대협을 상대하여 그를 누른다 하여도 나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오. 이
것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니 굳이 밝히지는 않겠소. 지금 내가 소대협과 싸운 후 기력이
약한 틈을 이용하여 당신에게 당하는 것은 원치 않소.”
심목풍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부인은 정말 걱정도 팔자로군요. 두 분은 무공도 고강하고 몸에 절기를 지닌 분인데 어
찌 해치겠소. 두 분은 언제까지나 우리 백화산장의 귀빈이오.”
심목풍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놓아라!”
하는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담통이 장검을 땅으로 떨어뜨렸다.
소영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다급히 소리쳤다.
“빙아야!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
백리빙은 상대의 장검을 떨어뜨린 기세로 그의 손목을 자를 수 있었지만 소영의 말에 손을 거두
었다.
그녀는 담통을 날카롭게 쏘아보고는 소영의 옆으로 다가왔다.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배백리를 가리켰다.
“빙아야, 저분에게 어서 해약을 드려라.”
백리빙은 빙그레 웃음을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 품속에서 노란색의 영단을 꺼내어 배
백리에게 던져 주었다.
“해약이니 어서 먹으시오.”
배백리는 조금도 주저없이 그녀의 해약을 받아 먹었다.
심목풍은 배백리가 해약을 먹는 것을 보고 크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표면상 나타내지
는 않았다.
금화부인의 말소리가 다시 들렸다.
“심대장주, 정말로 당신이 우리들을 신임한다면 한 가지 부탁을 들어 주시겠소?”
심목풍은 묵묵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두 부인이 지금 나를 배반하면 적에게 무척 유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녀들의 부탁
이 무엇인지 우선 들어 주고 나중에…..’
그는 입가에 듬뿍 미소를 담고 부드럽게 물었다.
“부인, 무엇인지 말씀해 보시오.”
“백화산장의 모든 사람은 지금 당신의 독수에 걸려 있지 않소? 심지어 주 이장주도 말이오. 그
동안 우리는 당신의 숨은 비밀을 거의 알고 있소. 그러니 당신의 악랄한 마음으로 보아 우리를
그냥 놓아 두지는 않을 것이오.”
금화부인의 말에는 죽음을 각오한 어떤 결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무공이 당신만 못하니 죽어도 변명할 말이 없소. 당신은 우리들에게 독수를 뻗쳐 십 일
에 한 번씩 해약을 먹게 만들어 놓지 않았소? 당신이 우리를 신임한다면 나와 당노부인의 독을
풀어 주시오.”
심목풍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하하, 그런 불만이 있었으면 왜 진작 말하지 않으셨소?”
“내가 만약 진작 이야기하였다면 지금쯤 썩은 송장으로 변했을 것이오.”
심목풍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부인께서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나를 곤경에 빠뜨리자는 것이 아니오?”
“그렇소. 오늘의 이 기회는 어느 때보다도 좋소. 오늘 미련을 갖고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다시
찾을 수 없을 것 같소.”
심목풍은 시선을 당노부인에게 돌렸다.
“당노부인도 그렇소?”
당노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화부인과 같은 생각이오.”
“좋소. 그러나 내가 두 분의 부탁을 들어 주고 싶어도 지금은 그럴 수가 없소.”
당노부인이 다그쳐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해약이 없다는 것이오.”
금화부인이 나섰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당신을 따라야 된다는 말이오?”
심목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두 분의 독을 제거할 수 없는 것은 아니오.”
“그럼 어째서 해약이 없다는 것이오?”
심목풍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부인은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두 분의 독을 제거할 수 있는 약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수중에 없다는 말이오. 백화산장에 돌아가면 있으니 내일까지 드리리다.”
“믿을 수가 없소.”
당노부인은 갑자기 품속에서 녹비장갑을 꺼내었다. 그녀는 그것을 왼손에다 끼고 다시 품속에서
조그만 독사를 꺼냈다.
“심대장주께선 저의 당문의 절기가 무엇인지 아시오?”
“암기가 아니오?”
당노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절반만 맞췄소. 우리 당가의 절기로는 암기도 있지만 그보다 독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오.”
그녀는 들고 있는 독사를 가리켰다.
“바로 이것이오. 당신이 나에게 독을 썼듯이 나도 독을 써서 피차가 죽음을 택하겠소.”
강호를 위협하고 수많은 부하를 부리는 심목풍도 이때만은 가슴이 섬뜩하였다.
우문한도는 그들의 암투를 보고 내심 기쁜 마음이 지나쳐 절로 미소가 흘렀다.
그는 소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소대협이 이런 때에 말을 꺼내 유리한 상황을 무너뜨리기 전에…..’
이런 생각으로 소영에게 바짝 다가가 입을 열었다.
“소대협, 강호에는 저런 일이 보통이오. 저들이 암투를 할수록 우리에겐 유리하오.”
소영은 무표정하게 우문한도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언제나 거만하고 냉정을 잃지 않던 심목풍도 지금만은 얼굴을 붉히고 씨근거렸다.
“두 분은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금화부인은 사태가 험악해짐을 직감하고 암암리에 진기를 모아 그의 급습에 대비하였다.
당노부인도 그를 경계하며 냉랭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이런 경우에는 우리도 못살고 당신도 온전치 못할 것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