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126
126. 백리빙의 순결한 연정(戀情)
한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긴장이 장중을 감싸고 있을 때, 금화부인이 입을 열었
다.
“심장주께서는 지금의 형세를 한 번 짐작해 보시오. 당신 심장주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 중 누
가 당노부인의 암기를 피할 수 있겠소?”
그녀는 비록 당노부인의 암기만을 들추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소영과 자신도 심목풍을 공격
할 수 있다는 뜻도 포함한 것이었다.
그러자 심목풍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내가 만약 포위를 뚫고 나간다면 두 분은 해독약을 얻기 어려워 독의 발작으로 인해 죽음을 면
치 못할 것이오.”
금화부인이 야무지게 받아 말했다.
“이것은 무공과 기지와 재주가 합쳐진 한 판의 큰 도박이므로 승부를 가리기 전에는 무슨 결과
와 변화가 있을지 예측할 수 없지요. 대장주는 비록 신용다지(神勇多智)하지만 이런 상황 아래에
서는 반드시 이긴다고 단언할 수 없으며 우리도 꼭 패한다고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심목풍은 코웃음을 쳤다.
“말하자면 당신은 도박을 하고 싶다는 것이군요?”
“그렇소.”
심목풍은 눈길을 당노부인에게 돌리며 물었다.
“부인은 어떻소? 역시 도박을 하고 싶으신지요?”
당노부인은 잘라 말했다.
“판국이 이렇게 됐으니 이 늙은 몸도 안할 수 없지.”
심목풍은 표정이 험악해지며 큰소리로 외쳤다.
“좋소! 두 분께서 정 원한다면 나는 상대해 줄 수밖에 없구려.”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소영과 우문한도를 쏘아보았다.
“그대와 우문한도가 힘을 합친다 해도 내가 포위를 뚫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오.”
금화부인이 당노부인을 바라보자 그녀는 돌연 뒤로 다섯 발자국 물러서더니 멈추었다.
심목풍은 앙천대소하며 말했다.
“이제 자네는 먼저 그들을 데리고 물러가게.”
주조룡은 가볍게 읍하고 강남 사 공자를 데리고 급히 돌아갔다.
금화부인과 우문한도가 대체 몇 사람을 막아야 할는지 미처 생각이 떠오르기도 전에 이미 주조
령은 군호들을 거느리고 사오 장 멀리로 달려 나갔다.
심목풍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이렇게 나 혼자만 남았으니 여러분 중에서 누구든지 먼저 나오시오.”
금화부인과 당노부인, 우문한도는 모두 심목풍의 공력이 매우 고강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들이 먼저 손을 댄다면 역시 먼저 그의 반격을 받게 되며 그 반격의 기세는 필시 배산도해(排山
倒海)와 같이 맹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금화부인과 당노부인은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을 굳히고 있었으나 역시 한편으로는 꺼려져서 감
히 선수를 쓰지 못했다.
소영은 사방을 한 번 둘러보더니 나직한 소리로 백리빙에게 말했다.
“빙아, 멀리 물러서 있거라.”
하고는 큰 걸음으로 심목풍을 향해 걸어 나갔다. 심목풍은 엄숙한 얼굴로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
지 않고 두 손을 모두 내린 채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않은 것 같았
다.
소영도 감히 바짝 접근하지 못하고 그와 다섯 발자국 정도의 거리에서 멈춘 후 입을 열었다.
“대장주, 어서 무기를 드시오.”
그러자 심목풍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적수공권으로 그대의 검초와 겨루고 싶소.”
소영도 천천히 단검을 거두었다.
“그럼 나도 쌍장으로 맞이하겠소이다.”
심목풍은 소영의 말에 미간을 모으며 물었다.
“우리는 서로 생명을 건 결투인데 이미 그대의 손에 있는 무기를 어찌 쓰지 않으려고 하는가?”
소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무리 당신의 행위가 만인의 응징을 받아 죽어 마땅한 정도라고 해도 나와 당신 사이는 한때
서로 동맹을 맺었던 사이오. 비록 의리를 끊고 절교를 하였다 해도 남은 정은 아직 미진하니…..”
별안간 심목풍이 매섭게 소리쳤다.
“닥쳐라!”
소영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의롭지 않지만 나는 과거의 정리를 아주 끊을 수 없으니 만일 당신이 오늘 싸우고 싶지
않다면 해독약이나 남겨 놓고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대는 몇 사람의 힘으로 나를 여기에 잡아둘 수 있다고 보는가? 나는 이곳을 나간다 해도 내
힘만으로 포위를 뚫고 나갈 것이다.”
“나와 당신의 싸움은 다른 사람과 관계가 없으니 꼭 싸우고 싶다면 마음껏 손을 써 보십시오.”
심목풍은 냉소하며 물었다.
“그대는 나에게 정말 한 수를 양보할 작정인가?”
“나는 그런 능력이 없음을 자인하오. 그러나 당신 심대장주가 먼저 손을 쓴다면 자연 그렇게 되
는 거지요.”
“너무 날뛰지 말고 어서 먼저 공격을 하오.”
“심대장주께서 신분이 높으시니 그 말에 따르겠소이다.”
소영은 말과 함께 오른손을 들어 심목풍의 앞가슴을 향해 일 장을 뻗쳤다. 금화부인과 당노부인,
우문한도 등은 소영과 심목풍이 싸움을 벌인다면 필시 석파천경(石破天驚)의 악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긴장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고 두 사람의 싸우는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소영이 쳐낸 장력은 점차로 속도가 느려지며 천천히 심목풍의 가슴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심목풍은 여전히 똑바로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영의 일 장이 심목풍의 가슴에 거의 닿을 순간 심목풍은 돌연 오른장을 재빨리 젖혀 소영의
장력을 맞받았다.
심목풍의 반격은 너무나 빨라 소영이 피하기에는 때가 늦었으므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쌍장이
맞부딪쳤다.
소영은 일순 몸의 균형을 잃어 뒤로 다섯 발짝 물러선 다음 겨우 몸을 가누었다. 심목풍은 두
어깨가 흔들거렸으나 끝내 버텨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군호들의 눈에는 소영의 준수한 얼
굴이 붉게 상기되고 마치 술에 취한 것같이 보였다.
잠시 후 소영은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하고는 말했다.
“대장주의 내력은 과연 웅휘(雄揮)하군요.”
심목풍은 한바탕 앙천대소를 하더니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그래도 나와 싸울 능력이 있소?”
소영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비록 입은 상처가 가볍지는 않으나 얼마든지 싸울 수 있소.”
말끝을 맺는 것과 동시에 비호같이 앞으로 돌진하면서 쌍장을 연속 휘둘러 사 장을 공격했다.
이 사 장은 초식이 쾌속하기 짝이 없어 마치 전광석화와 같았다.
그러자 심목풍은 쌍장을 휘둘러 역시 쾌속한 장법으로 소영의 장을 모두 받아냈다.
소영은 재빨리 몸을 날려 뒤로 여덟 자나 물러났다.
백리빙은 단번에 소영에게로 달려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물었다.
“오빠, 상처가 중하지 않아요?”
그때 또다시 소영은 두어 번 비틀거리더니 다시 한 모금의 선혈을 토했다. 그는 성품이 강하여
중상을 입고도 투지는 더욱 격앙되어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걱정마라.”
백리빙은 소영이 두 번이나 피를 토하는 것을 보자 내상이 매우 중함을 깨달았다. 그녀는 안색
이 변하여 급히 소영을 부축하며 말했다.
“오빠는 상처가 매우 심해요. 더 이상 싸우지 못합니다.”
소영은 천 년 묵은 돌버섯을 많이 먹었고 또한 장산패가 건청강기의 상승내공을 전수해 주었으
며 이미 약간의 성취가 있었으므로 인내력이 몹시 강하여 보통 사람과 크게 달랐다.
그는 곧 암암리에 진기를 모은 다음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정의를 위해 악마를 굴복시키고 죽는다면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죽으면 안 돼요. 오빠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에요.”
말을 하는 백리빙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소영은 호탕하게 웃으며 타일렀다.
“사람이 백 살을 산다 해도 죽음은 면치 못하는 법, 내가 만약 나의 소신대로 행동하다 죽어 무
림에 이름을 남긴다면 무슨 미련이 있겠니? 빙아, 어서 나를 놓아라.”
백리빙은 소영을 빤히 바라보며 침통하게 말했다.
“오빠의 말이 맞아요. 오빠는 대영웅이며 대호걸이에요. 나는 오빠를 막을 수 없군요.”
그녀는 가만히 소영을 놓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심목풍은 여전히 철탑과 같이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심중이 어떤지 예측하
기 어려웠다.
당노부인과 금화부인은 소영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도중 자기들이 만
약 손을 써서 그를 도와준다면 필시 그는 불쾌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그런데 심목풍은 줄곧 반격을 꾀하지 않고 단지 소영의 장세만을 받아 내었는 데도 놀랍게 소영
의 내부를 손상시켜 연속 피를 토하게 하지 않았는가!
한편 금화부인은 심중에 야릇한 질투심이 일었다. 그것은 백리빙이 소영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정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심 차라리 소영을 죽게 내버려 둔 뒤, 백리빙이 단장의 슬픔
을 안고 애절히 우는 모습을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두 사 람은 모두 힘을 아껴 손을
쓰지 않고 방관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문한도는 냉정하게 두 사람이 싸우는 형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심목
풍이 소영에게 반격하지 않는 일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심목풍이 속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소영이다. 지금 이때가 바로 소영을 죽일 수 있
는 절호의 기회이거늘 어찌 손을 쓰지 않고 오히려 고의로 소영으로 하여금 숨돌릴 기회를 주어
다시 싸울 능력을 회복시키는 것을까? 심목풍의 위인으로 보아 결코 자비심을 베푸는 것은 아닐
것이니 여기에는 무슨 속셈이 있을 것이다.’
그는 생각을 한 끝에 드디어 세 가지의 원인을 생각해냈다.
첫째는 심목풍이 소영과 같은 고수를 잃고 싶지 않아 그를 굴복시켜 다시 자기가 이용하려는 것
이다. 약물로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여 자기에게 복종케 하려는 것이다.
둘째는 심목풍도 두 사람이 맞부딪쳤을 때 역시 매우 중한 내상을 입었으나 그의 경력이 풍부하
고 내공 또한 소영보다 강하여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실은 반격할 기력이 없어 소영
이 휴식할 동안 운기조식하려는 심산이 아닌가 싶었다.
셋째로는 심목풍이 반격을 가할 때 당노부인, 금화부인, 자기, 백리빙 등이 한꺼번에 덤벼들어
소영의 반격을 옹호한다면 자신을 보호할 수 없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
다.
이 세 가지 원인은 모두 큰 가능성이 있었다. 우문한도는 비록 교활하고 지혜가 많았으나 결론
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때 백리빙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뜻이 정녕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어요. 여하튼 오빠가 죽으면 나도 살 수 없어요. 모든 것은 오
빠가 하기에 달렸어요.”
그녀는 소영의 상세가 매우 중한 것을 보자 그만 감정이 격동되어 전부터 마음속에 간직했던 말
을 부지중에 입 밖으로 해 버린 것이다.
그녀의 간절한 마음은 목소리로 나타나 애끓는 진정은 구구절절이 듣는 이의 마음을 감동시켰
다.
소영은 백리빙을 뒤돌아 보며 말했다.
“빙아, 나를 위해 너무 걱정 마라. 북해의 빙궁에는 어머님이 빙아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
니 얼마나 마음이 초조하시겠느냐? 빨리 이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그는 두 번이나 심목풍과 장력을 겨루어 내상을 입어서 기혈이 치솟아 오장육부가 뒤집히자, 더
이상 싸운다면 결코 무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중원의 무림과 아무런 은원도 없는 순결한 소녀 백리빙을 살육전에 끌어들
인단 말인가.
소영이 이런 생각으로 그녀에게 귀가를 권했다. 백리빙은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으나 눈에
서는 주르르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 내렸다.
“오빠! 지금에 와서도 정말 내 심정을 모르신단 말이에요?”
심목풍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소영이 그토록 대단한 존재일까? 놀랍게도 북천존자의 딸이 마음을 주다니…..’
한편 우문한도는 이 광경을 보자 매우 초조했다.
‘지금은 바로 생사를 결정 짓는 중대한 시기인데 저들은 어찌 남녀의 사사로운 정을 논하며 마
음을 다른 곳에 두고 있단 말인가? 이것은 심목풍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우문한도는 참다 못해 충고를 했다.
“지금 어느 때인데 아녀자와 사사로운 정담을 나누고 있소?”
소영은 펀뜻 정신이 들어 재빨리 심기를 가다듬고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심목풍은 우문한도를 쏘아보며 말했다.
“우문선생, 오늘의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간에 당신은 나의 일 장을 받을 준비나 하시오.”
우문한도는 심목풍이 자기를 극도로 미워하여 살기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경
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말했다.
“심대장주가 만약 소영의 공세를 반격할 능력이 있다면 지금쯤 소영은 이미 피를 토하고 죽었을
것이오.”
심목풍은 냉소를 짓더니 왼쪽 소매를 휘둘러 소영을 향해 곧장 달려들며 오른장을 쳐냈다.
소영도 날카로운 기합소리를 지르며 왼손으로 비스듬히 일 장을 쳐내고 오른손으로는 수라지력
(修羅指力)을 쳐냈다. 그는 비록 힘껏 운기하였지만 심목풍의 적수는 못되었다. 그래서 또한 공력
을 두 가지로 나누어 한쪽은 장력으로 항거하고 한쪽은 수라지력을 쳐낸 것이었다.
쌍방의 장력이 마주치자 소영의 몸은 마치 줄 끊어진 연처럼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심목풍도 신음 비슷한 비명소리를 지르고 갑자기 정서(正西)를 향해 달려갔다. 분명
히 심목풍의 장력이 소영을 칠때 자신도 소영의 수라지력에 부상을 당한 것이리라.
절세의 효운 심목풍에게는 일반 무림인물들을 능가하는 심후한 공력이 있어 중상을 입고도 여전
히 장력을 뻗칠 능력이 있었다.
심목풍이 오른팔을 거두었다가 뻗치자 한 줄기의 내력이 내포된 음유지경이 돌연 우문한도를 향
해 뻗어갔다.
우문한도는 심목풍이 소영을 향해 공격하던 기세를 돌연 자기에게 돌리는 것을 보자 속으로 크
게 당황하여 재빨리 몸을 날려 그것을 피하려 했으나 이미 한 줄기의 잠력이 눈앞에 닥친 것을
느꼈다.
이 잠력의 기세는 은밀하여 그것이 몸 가까이 닥쳐 와서야 겨우 느낄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우문한도는 황망히 쌍장을 전력으로 내뻗쳤다. 그러나 그 밀어낸 장력이 심목풍의 암경과 마주
치자 우문한도는 이미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심목풍의 암경은 우문한도의 장력과 마주치자 더욱 강해졌으며 장력을 되돌려 보냈으므로 그는
마침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종내 나자빠지고 말았다.
이런 모든 상황은 극히 짧은 순간에 일어난 것이었다. 심목풍의 오른손이 우문한도를 공격할 때
휘두른 왼쪽 소매 속에서 동시에 네 줄기 싸늘한 섬공이 번쩍이며 당노부인과 금화부인을 노리고
날아갔다.
당노부인은 천하에서 암기를 다루는 데는 일류 명수였다. 그러나 그녀도 손을 밀어 심목풍이 쳐
낸 암기를 받아 들일 수 없어 황망히 옆으로 몸을 돌려 그 두 줄기의 싸늘한 빛을 피했다.
금화부인도 당노부인과 동시에 그 암기를 재빨리 피했다.
심목풍은 장력을 쳐내고 마치 나는 듯 서쪽으로 곧장 달려갔다. 그러므로 당노부인이 재빨리 암
기를 쳐냈을 때는 이미 그는 사 장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마치 바
람과 같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심목풍과 당노부인이 쳐낸 암기는 획획 바람을 가르며 각기 두 방향으로 날아가 바위에 부딪쳤
다.
폭풍이 지난 뒤 모든 것은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저녁 해가 협곡에 비치니 골짜기 속은 더욱
정적 속에 파묻혔다.
이때 갑자기 나직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금화부인이 길게 탄식하며 눈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백리빙이 바위에 기댄 채 온몸이 물에 젖은 소영을 안고 나직이 흐느끼고 있었다.
당노부인이 가볍게 한숨 지으며 말했다.
“소대협은 상처가 매우 중한 것 같소. 저 계집애가 저토록 슬프게 우는 것을 보니…..”
금화부인이 물었다.
“북해의 빙궁이란 어디에 있습니까?”
“아주 유명한 곳이지요. 당신은 북천존자를 아시오?”
“알지요. 저 계집애가 바로 북천존자의 딸이 아닌가요? 그녀의 양친은 모두 무공이 강하여 그
영향을 받아 당신에 중원 무림 인물들도 저 계집애한테까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데 그렇습니
까?”
하고 묻더니 금화부인은 당노부인의 대답도 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가셔서 우문한도를 좀 살펴 보십시오. 이미 숨이 끊어졌나. 만일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
았다면 노부인께서 방법을 강구하여 그를 구해 보십시오.”
당노부인은 냉소를 하고 말했다.
“그 사람은 너무 엉큼하기 때문에 다시 살려 낸다 해도 좋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그는 꿍꿍이 속이 많기 때문에 심목풍을 상대할 수 있소. 그의 생명을 구해 준다는 것
은 심목풍에 대한 원수를 하나 더 늘게 하는 셈이오.”
노부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당신은 저 소대협을 보살피시오. 앞으로 삼십 년 안에 무림인물이 햇빛을 볼 수 있는가의
여부는 소영의 안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소. 아아! 나는 벌써 그의 공력 내공이 결코 심목풍
의 적수가 아니며 또한 장력을 맞부딪쳐서는 안 되며 나의 추측대로…..”
하더니 그녀는 약간 망설이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있는데 이 늙은 몸이 자세히 몰라 고견을 듣고 싶소이다.”
“무슨 일입니까?”
“우리는 이미 기독에 중독되어 심목풍의 손에 죽지 않는다 쳐도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한다는 사
실이오. 만약 그때 합세하여 선수를 쳐서 공격을 퍼부어 소영의 한 팔을 도왔다면 어쩌면 지금쯤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 아니오.”
금화부인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사정이 그렇게 됐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당노부인은 고소를 짓고 우문한도의 곁으로 걸어갔다.
금화부인도 서서히 백리빙의 앞으로 다가가 나지막한 소리로 타일렀다.
“울지 마오.”
소영은 심목풍의 일 장을 맞고 비틀거리다가 호수에 빠졌던 것이다.
그때 백리빙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급히 호수로 달려가 소영을 구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소영은 상처가 너무 심했다. 그는 숨이 거의 넘어갈 듯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백리
빙은 크게 마음이 혼동되어 슬픔을 참지 못하고 나직이 흐느꼈던 것이다. 금화부인이 두 사람 곁
으로 다가갔을 때에도 백리빙은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경황없이 울고 있다가 금화부인의 목소리를 귓결에 듣자,꿈 속에서 깨어난 듯 머리를 들
고 맥없이 금화부인을 바라보았다.
금화부인은 몸을 굽히고 오른손으로 소영의 앞가슴을 가만히 짚어 보더니 한참 후에야 차분하게
말했다.
“그의 심장은 아직 멈추지 않았으니 아직 살 수 있소. 그런데 낭자는 어찌 그를 구할 생각은 하
지 않고 울고만 있는가?”
백리빙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를 구할 수 있을까요?”
“암, 구할 수 있지. 희망이 크지는 않지만 전력을 기울여 구해 볼 수밖에…..”
금화부인도 그의 맥을 짚어 보고는 소영이 너무나 심한 중상을 입었다는 것을 깨달앗다. 그러므
로 그녀 역시 소영을 살릴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감히 확고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
였다.
백리빙은 마음속으로 금화부인에게 별로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로부터 소영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을 듣자 그녀를 보는 눈이 즉시 달라졌다.
백리빙은 금화부인에게 매달리듯 물어 보았다.
“저는 마음이 분산되어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인께서는 이분을 살릴 수 있겠
습니까?”
금화부인이 싸늘하게 물었다.
“낭자는 나를 믿는가?”
“부인께서 만약 우리 오빠의 목숨을 구해 준다면 부인을 믿을 것입니다.”
“그를 구할 수 있든 없든 급히 손을 써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어서그를 땅에 눕혀요.”
백리빙은 곧 소영을 조용히 땅에 눕혔다.
금화부인은 암암리에 운기하여 손을 내밀어 소영의 가슴에 갖다대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의 내공은 기초가 튼튼해 심목풍과 장력을 겨룰 때 몹시 심한 충격을 받았으나 즉시 공력이
다시 모아져 급소를 보호했으므로 비록 중상은 입었으나 심장은 멈추지 않았소.”
그녀는 말을 하며 공력과 내력을 암암리에 운기하여 쉬지 않고 소영의 내상 깊숙이 파고들게 했
다.
이처럼 심한 내상을 치료할 수 있는지는 금화부인 자신도 걱정이 되었으나 다시 여러 말 하기도
멋쩍어 전력을 기울여 치료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생사를 운에 맡겨 보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
였다.
그러나 사정은 놀랍게도 금화부인에게 큰 기대를 주었다. 그녀가 치료하기 시작하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소영이 길게 숨을 내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감았던 눈을 번쩍 뜨더니 금화부인과 백리빙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빙긋 미소를 짓고는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아 버렸다.
백리빙은 소영이 의식을 회복한 것을 보자 크게 기뻐하여 외쳤다.
“부인! 그가 깨어났어요!”
“그렇지! 그는 살아났소.”
금화부인도 미소를 머금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백리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
굴에 웃을 때마다 나타나는 보조개가 더욱 매력적이었다.
금화부인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천진난만한 백리빙을 보자 암암리에 생각하였다.
‘이처럼 아름답고 순진한 소녀라야 소영과 교제할 수 있을 것이다.’
백리빙은 소영이 다시 눈을 감아 버리자 미간에 다시 수심을 담고 물었다.
“부인, 그는 다시 눈을 감았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지요?”
금화부인은 다시 웃는 낯으로 말했다.
“낭자는 오른손을 그의 가슴에 누르고, 내력을 끌어내 그것을 그의 심맥 안으로 스며들게 하오.”
그녀는 자기의 손을 천천히 소영의 가슴에서 떼었다.
백리빙은 금화부인의 분부대로 내력을 모아 오른손을 소영의 가슴에 대고 그 내력을 그의 심맥
속으로 스며들게 했다.
그녀는 전력을 기울여 내력을 발휘하였다. 그러자 잠시 후 그녀는 힘에 겨워 얼굴에 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잠시 후 소영은 두 팔을 쭉 뻗으며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빙아, 빙아도 좀 쉬어라.”
백리빙은 손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 빙긋 웃었다.
“나는 괜찮아요. 오빠는 좀 어떠세요?”
소영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금화부인이 앞질러 말했다.
“말을 하면 못써요”
소영은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지 않았다.
금화부인이 백리빙에게 주의를 주었다.
“낭자, 지금은 그에게 말을 붙여서는 안 되오. 그는 가능한한 휴식을 취해야 하니까…..”
평소에 언제나 쌀쌀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백리빙도 지금은 매우 온순하게 변하여 고분고분 대답
했다.
“부인의 가르침을 명심하겠어요.”
금화부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낭자가 보살펴 주시오. 그의 내공이 심후하여 이제 깨어났으니 다른 변화는 없을 것이오. 그럼
나는 가겠소.”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걸어갔다.
백리빙은 벌떡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부인은 어디로 가실 작정입니까?”
“나는 묘강에서 왔으니 묘강으로 돌아가야지. 죽어도 고향에서 죽어야지요.”
백리빙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부인은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해요?”
금화부인은 바람에 나부껴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나는 가슴에 웅지(雄志)를 가득 담고 중원 무림에 도전하러 왔었소. 그러나 중원 무림에는 고수
들이 구름같이 많아 나의 무공쯤으로는 무림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러므로 당초
에 품었던 모든 희망은 사라져 버리고 비참한 심정만 남게 되었소.”
“그렇다고 죽을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금화부인은 처량하게 웃었다.
“나도 죽기는 싫소. 그러나 머지 않아 불가불 죽게 되어 있는 걸 어떻게 하오.”
백리빙이 다그쳐 물었다.
“아니, 무엇 때문입니까?”
“낭자는 꼭 알고 싶은가?”
“그렇습니다. 부인은 나를 도와 오빠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저도 제 힘을 다하여 부인을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소용없소. 이 세상에는 단지 두 사람만이 나를 구할 수 있소.”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하나는 심목풍이오. 그러나 그와는 이미 정면으로 대적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나를 구해 주지
않을 것이오.”
“그럼 또 하나는 누구입니까?”
“독수약왕! 그러나, 그 사람은 행적이 일정치 않기 때문에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알기 힘들
것이오.”
금화부인은 눈을 먼 곳으로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를 요행히 찾아낸다 해도 과연 나를 치료해 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오.”
“그럼 이미 중독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맞아요. 나는 그 심목풍에게 매우 괴상한 독을 몸에 입었소.”
백리빙은 상냥하게 위로했다.
“세상엔 좋은 약이 많으니 부인은 의원을 찾아 치료하는 것이 어떨까요? 용한 의원을 여럿 찾아
다니면 혹 그것을 해독할 수 있을는지 누가 압니까?”
금화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쓸쓸히 웃었다.
“낭자는 내가 독을 사용하는 데 있어 명수라는 것을 모르오?”
“몰랐어요. 그러면 독을 다루는 명수라면 해독도 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천하에 활독(活毒)을 사용하는 데는 아마 나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무엇을 활독이라고 합니까?”
“낭자는 꼭 알고 싶소?”
“저는 아직 나이가 어려 세상 일을 잘 모릅니다. 전에는 줄곧 빙궁에서 살며 위로는 부모님과
아래로는 하인들에게 둘러싸여 아무것도 모르고 호강하며 살았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
릅니다. 나는 오빠를 따라 강호에서 활동을 해야 하니 자연 많은 지식을 얻어야 합니다. 부인께서
는 내가 너무 졸라댄다고 화나셨나요?”
금화부인은 하는 수 없이 그녀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좋아요. 그럼 자세히 설명해 주겠소. 활독이라는 것은 생명이 있는 독물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오. 즉 독사, 지네, 전갈, 독거미 등이 바로 그것이오.”
“아아! 이제 알겠군요. 그럼 보통 독을 쓰는 사람은 사독(死毒)을 쓰겠군요?”
“그렇지! 그러나 이것은 내 추측에 불과하오.”
“사독은 대부분 활독 몸의 물질로 조성한 것이니 부인께서 활독의 명수라면 사독도 아시겠지
요?”
“자연 알지요. 다만 정통하지 못할 뿐이지……”
그때 갑자기 소영이 눈을 번쩍 뜨더니 일어나 앉았다.
그는 금화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누님, 누님.”
금화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왜 말을 듣지 않소? 어서 누워요.”
그러나 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조금 전 암암리에 운기하여 시험해 보니 진기가 이미 통하였으니 누님께서는
안심하십시오.”
금화부인은 백리빙을 힐끗 바라보더니 소영에게 말했다.
“동생! 동생은 부디 몸조심을 해야 하오. 동생은 이 백리낭자가 얼마나 동생을 생각하는지 아마
모를 거요. 동생에게 만약 무슨 불상사가 있다면 내가 보건데 아마 저 낭자도 정말 살아갈 수 없
을 거요.”
그녀의 음성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약간의 질투가 섞인 것도 같았다.
소영이 얼떨결에 백리빙을 바라보자 그녀는 수줍은 듯이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
은 금화부인의 말을 묵인하는 표정이었다. 소영은 가볍게 한숨 지으며 말했다.
“누님, 이 동생의 몇 마디 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좋소. 어서 말해 보오.”
“조금 전 누님이 하신 말씀을 모두 들었습니다. 누님이 묘강으로 돌아가 중원 무림에서 몸을 뺀
다는 것을 나는 감히 말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누님은 결코 가시지 못합니다.”
“어째서?”
“왜냐하면 누님은 기독에 중독되었으며 묘강에는 누님을 치료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중원에 남아 있다고 한들 누가 나를 치료해 준단 말이오?”
“최소한 치료할 기회는 있는 것입니다. 누님의 그 죽음을 겉으로는 심목풍을 배반해서 죽게 되
는 것이지만 사실은 나 때문이지요…..”
금화부인은 깔깔거리며 그녀의 독특한 그 완세불공(玩世不恭)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고간난유일사(千古艱難唯一死)이거늘, 무엇 때문에 동생을 위해 죽는단 말이오.”
“숨길 것 없습니다. 조금 전에 나는 누님의 처량한 웃음과 쓸쓸한 표정을 보았습니다. 만약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심목풍을 배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쯤 이미 나는 싸늘한 시체로 변하였
을 것인데 누님이 그를 배반하고 나를 도와주셨기 때문에 심목풍이 두려운 마음이 생겨 감히 싸
움을 길게 끌지 못하고 가 버린 것입니다.”
“동생의 말이 맞다 해도 동생은 나를 도울 수 없는 일이오…..”
금화부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 백리낭자가 동생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부끄러울 따름이니 앞
으로 저 낭자를 잘 대해 주기 바라오. 그녀는 나이가 어리고 순진하며 나같이 완세불공하지 않으
니 이 누이를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그녀는 말을 마치자 소영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급히 걸어갔다.
소영은 속으로 크게 놀라며 소리쳤다.
“누님, 잠깐 멈추시오!”
소영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금화부인은 소영이 일어나는 것을 보자 급히 되돌아 오며 말했다.
“무엇하러 일어났소? 빨리 앉으시오.”
소영은 그녀가 자기를 염려하는 말을 듣자 얼굴에 감동한 표정을 나타내며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 여자의 성미가 외골수로 과격하여 종일토록 독물을 다루며 살인을 식은죽 먹듯이 하나, 나
소영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목숨을 구해 준 은공이 있으며 정의가 두텁고 위장(僞裝)된 것 같지
않다. 그녀가 나에게 베푼 관심은 매우 깊은 것이다.’
그는 금화부인에게 말했다.
“만약 누님께서 가지 않고 이곳에 남는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즉시 앉아 운공조식하겠습니다.”
백리빙도 소영의 뒤를 이어 간청했다.
“부인, 대답해 주세요.”
금화부인은 가볍게 탄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