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128
128. 노인과 비록 책자
소영은 백발노인의 말을 듣자 섬뜩함을 느꼈다.
“노선배께서 신경쓰실 것 없소이다. 그 사람들은 이미 이곳에서 떠나 갔으니까요.”
백발노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상팔, 두구, 백리빙을 훑어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그들을 쫓아 보냈나?”
소영이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백화산장의 사람들이니 모두 장주의 명령을 받고 이곳을 떠난 것이지
요.”
“그도 그렇겠군.”
백발노인은 소영을 뚫어질 듯 바라보더니 몸을 돌렸다.
그는 앞을 바라보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영은 생각했다.
‘저 노인은 진짜 미친 사람이 아니다. 일부러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고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미치광이로 가장을 했을까? 변장할 마음만 먹으면 다른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변장할 수
있었을 텐데…필경 어떤 뜻이 있기 때문이겠지.’
이때 성큼성큼 걷던 노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리며 소영에게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천하에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했는데…너는 그 어린 나
이에 놀랍게도 노부의 행적을 알아차리다니…..”
소영은 이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그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나의 지우(知友)가 될 수 있어.”
소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어찌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있겠소? 나는 당신과 말다툼을 하기 싫어 입을 다물고 있는 것
인데, 당신은 우습게도 나를 친구라 부르며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군.’
소영이 여전히 아무 말도 않자 백발노인이 다시 말했다.
“노부는 내일 중토(中土)를 떠나 천축(天竺)으로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생각지 않게도 길을 떠
나기 전에 너 같은 지우를 알게 되다니…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소영은 우습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했으나 공손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은 저에게 너무 과분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젊은이! 만일 노부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자네들은 매우 중한 내상(內傷)을 입었네.”
소영은 속으로 놀랐다.
‘이 노인은 기인이구나. 숨겨야 소용없겠다.’
이렇게 생각한 소영은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를 제외한 세 사람 중에서 두 사람이 중한 내상을 입었습니다.”
“노부가 보건데 저들 세 사람은 모두 성하지 않은 것 같은데 …..”
백발노인은 싸늘한 안광을 빛내며 상팔, 두구, 백리빙 등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은 바위라도 뚫
을 듯 강렬했다.
‘매서운 눈빛이구나.’
소영은 속으로 노인의 눈빛에 흠칫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부상당한 것은 다만 두 사람뿐입니다. 저 낭자는 우리 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너무 내공의 진
기를 소모했기 때문에 지친 것입니다.”
“너는 총명한 지우일 뿐만 아니라 매우 솔직한 군자이다. 안타까운 것은 노부의 갈 길이 바빠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으니 너를 만난 것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노인은 말을 끊고 소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이 노인이 갑자기 또 미친 병이 발작하나?”
소영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노인은 하늘이 흔들릴 듯 요란스럽게 한바탕 웃어대더니 별안간
웃음을 그치며 중얼거렸다.
“기왕에 만났으니 늦고 빠름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노부가 어찌 범인의 행동에 얽매이겠는
가!”
소영은 노인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노인은 때로는 미친 것도 같지만, 필경 무궁한 학식과 무예를 지니고 있는 것 같구나. 지금
한 말에도 무슨 뜻이 있는 듯한데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으니…역시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노인은 천천히 소영 앞으로 다가서더니. 시선을 백리빙 등의 세 사람에게 던지며 말했다.
“노부는 공력을 돕는 영약을 지니고 있다. 만일 네가 노부를 신임한다면 그들에게 약을 먹여라.”
소영은 새삼 노인의 얼굴을 살폈다.
‘이 노인의 눈빛으로 보아 무공이 절정에 도달했음에 틀림없다. 만일노인이 우리를 해칠 마음만
있다면 지금 같은 형세에서는 매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 노인은 우리를 해치려는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는 공손히 대답했다.
“노선배님의 은혜는 실로 감당키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의 형세가 매우 각박하니 그들을
대신해서 감사드리며 약을 받겠습니다.”
노인은 품속에서 작은 옥병을 꺼내 소영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그 병에는 네 알의 약이 남아 있다. 너희들 네 사람이 한 알씩 나누어 복용해라.”
소영은 병을 받아 들고 마개를 뽑았다. 그는 한 알의 약을 꺼내 입에 넣어 삼켰다.
그것을 본 노인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젊은이! 네가 먼저 약을 먹는데, 그 약에 어떤 독이 들어 있는지 염려되지도 않나?”
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노선배님께서 후배를 지우로 생각해 주셨으니 만일 약에 극독이 있어 제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유감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음, 과연 감탄할 만한 기개를 지닌 청년이로다. 노부는 곧 서쪽으로 걸음을 옮겨 천축을 유람할
생각이다. 언제 다시 이쪽으로 돌아올는지는 나도 예측할 수 없다. 내일 아침 해 뜰 무렵에 노부
는 길을 떠날 예정인데, 너는 노부를 전송해서 나의 장도를 빛내 주지 않겠느냐?”
소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 말은 내가 먼저 했어야 하는데 이 노인이 앞질렀구나.’
“좋습니다. 후배는 꼭 전송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서 만나야 좋을는지 모르겠군요.”
“허허, 네가 나를 전송한다는 것은 매우 험난한 일이다.”
소영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후배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노선배님께서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노부는 내일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그런데, 그 배를 타는 장소는 이곳에서 수십 리
떨어졌으며 중간에 높고 험난한 산을 두 개나 넘어야 된다. 너는 비록 내가 준 영약을 복용했으
나 매우 긴 시간 동안의 운공조식이 필요하다.”
노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네가 하늘을 나는 경공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 경이 되어야 몸을 움직일 수 있으니 날이 새기
전에 겨우 목적지에 당도할까 말까 하다. 어디 계산 좀 해 봐라. 약속한 장소에 도착할 재간이 있
겠나?”
소영은 정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는 한 번 대답한 이상 전력을 다해서 가겠습니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면 길에 익숙치 못해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을는지가 걱정입니다.”
“그것은 걱정할 것 없다.”
“걱정할 것 없다니요?”
“노부는 너를 위해 한 가지 방법을 강구해서 네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 즉 도중에 길
안내를 하는 표식을 해 두겠다.”
소영은 자신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후배는 안심입니다. 후배는 꼭 약속한 장소에 약속 시간 안에 도착하겠습니다.”
“좋아, 노부는 기다리겠다. 네가 이곳에서 산에 오르면 길을 상세히 가르쳐 주는 표식을 발견할
것이다. 그럼 노부는 먼저 가겠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소영이 공손히 인사했으나 노인은 이미 삼사 장이나 멀리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
다.
‘아차! 좀 더 정확한 거리를 물어 봐야겠다.’
하고 소영이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백발노인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번개처럼 빠른 경공술이구나. 그런데 노인은 어째서 나에게 전송을 부탁한 것일까? 절세의 무
공을 지닌 기인이 나 같은 애송이의 전송을 받을 만한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소영은 노인이 사라진 어둠 속을 바라보며 생각을 이었다.
‘아무튼 노인을 전송해 주기로 약속했으니 번복할 수는 없지. 험난한 길을 가야 할 테니 어서
운기조식을 해야겠구나.’
소영은 그 자리에 앉아 운공을 조식했다. 진기를 몸 안에 한바퀴 돌렸을 뿐인데 갑자기 단전에
서 뜨거운 것이 치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열기(熱氣)는 전신의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과연 신기한 영단이구나. 그가 나에게 이런 영약을 준 것만으로도 나는 그를 꼭 전송해야겠구
나.’
소영은 몸을 벌떡 일으켜 상팔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 분 형제는 입을 벌리시오. 내가 줄 약이 있소.”
상팔과 두구는 소영의 말을 못 들었는지 꼼짝도 안했다.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그들은 운공조식
의 중요한 고비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소영은 그들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제서야 그들은 서서히 눈을 뜨며 소영을 보았다.
소영은 양손에 한 알씩 약을 나눠쥐며 말했다.
“두 분은 말하지 말고 입만 벌리시오.”
상팔과 두구는 입을 벌렸다.
소영은 약을 그들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 약은 매우 효력이 신묘한 영약이오. 두 분께서는 얼른 약을 삼키시고 운기를 조식하시오.”
상팔과 두구는 머리를 끄덕이며 약을 삼키더니 눈을 감고 다시 운기조식하기 시작했다.
소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백리빙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빙아, 좀 어떠냐?”
백리빙은 중주이고처럼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다만 내력을 너무 소비해 몹시 지쳐 있었던 것이
다.
그녀는 운공을 조식하자 새로운 진기가 많이 회복되어 중주이고처럼 기진한 상태는 아니었다.
소영이 묻는 말에 그녀는 눈을 살며시 뜨며 생긋 웃었다.
“오빠, 난 많이 좋아졌어요.”
소영은 약을 그녀에게 주며 말했다.
“어서 이 약을 먹어라. 체력 회복에 많은 도움이 있을 거야.”
백리빙은 손을 내밀어 약을 받을 생각은 않고 입을 살짝 벌렸다.
“오빠, 먹여 줘요.”
소영은 당황했다.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입을 벌린 채 생글생글 웃고 있는 백리빙의 자태는 깨
물고 싶도록 귀여웠다.
소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약을 백리빙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백리빙은 약을 삼키며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조용한 자세로 운공조식에 들어갔다.
소영도 백리빙과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운공을 조식했다. 약효가 체내에서 순환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쯤 운공을 조식해서 진기를 어느 정도 회복한 소영은 상팔과 두구를 돌아다 보았다. 그들은
아직도 운공을 조식하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소영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먹구름은 서서히 흩어지고 별이 드문드문 보였다.
‘밤이 꽤 깊었구나. 백발노인과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지니 지금쯤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
소영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중주이고에게 말했다.
“상형과 두형! 나는 약속이 있어 곧 이곳을 떠나야겠소. 빠르면 점심 때쯤 늦어도 황혼 무렵에는
돌아오게 될 것이오. 형제들은 인연봉에서 기다려 주시오.”
그러자 백리빙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나도 가겠어요.”
“운기조식을 끝냈어?”
“벌써 끝났어요. 기운이 벌써 회복되었는데요.”
소영은 망설였다.
‘그 노인의 성질이 괴팍해서 내가 백리빙을 데리고 간다면 싫어할는지도 모른다. 더우기 중주이
고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으니 백리빙을 이곳에 있게 하여 두 사람을 보호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빙아, 우리가 모두 간다면 중주이고를 누가 보호하지? 백화산장의 사람들이 이미 철수했지만
심목풍이 다지 나타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니 빙아는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백리빙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남겠어요. 언제 빙아가 오빠 말을 거역했어요?”
소영은 백리빙의 불쾌한 표정을 보고 마음이 언짢았으나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빙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할 것은 없어. 나는 빨리 돌아오도록 노력할 테니…내가 돌아올 때쯤
이면 중주이고의 상처도 많이 아물겠지! 자, 우선 이곳을 떠나자.”
백리빙은 언제 화를 냈더냐는 듯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오빠, 언제 나를 데리고 서호에 가서 놀 거예요? 나는 그곳에 가서 뇌봉탑(雷峰塔) 아래의 백낭
자(白娘子)를 만나보고 싶어요.”
“그것은 다만 전설에 불과한 얘기인데…..”
“전설이든 사실이든 그 백낭자는 정말 가련해요. 그녀는 일편단심으로 허선(許仙)을 대했는데,
그 매정한 허선은 법해화상(法海和尙)의 말을 듣고 낭자를 뇌봉탑으로 눌러 놓았으니…..”
백리빙은 갑자기 전설 속의 주인공이나 된 듯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 흐느낄 듯한 표정이
었다.
‘빙아가 갑자기 왜 이럴까? 나에게 어떤 암시를 주려고 하는 모양인데…정말 나를 이토록 당황
하게 만들지 말아 주었으면…..’
소영은 가슴에 벅찬 감동을 주체하기 곤란해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그러자 백리빙은 두 줄기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푸념처럼 말했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 중원에서 한 분의 학식이 높은 선비를 모셔왔어요. 그분은 나에게 많은 학
문을 가르쳐 주었지요. 그 선배는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매우 다정다감한 분이었어요. 이따금 중
원의 전설과 신화를 들려 주었지요. 백낭자의 슬픈 전설도 그때 들은 것인데…..”
“…..”
“나는 그 전설을 들으며 백낭자의 어리석음을 비웃었어요. 천하에 미남자는 얼마든지 있을 텐데
오직 허선만을 연모하다가 슬픈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가? 나 같으면 그런 어리석은 생각으로 슬
픈 일생을 보내지 않겠다고…..”
소영은 백리빙이 갑자기 전설을 꺼내는 것이 못마땅했으나 그녀의 태도가 너무도 진지했기 때문
에 싫다는 표정을 감추고 한 마디 물었다.
“빙아 같았으면 어떻게 했을까?”
백리빙은 눈물에 젖은 커다란 눈으로 소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의 나는 남자가 그토록 매정한데 백낭자만이 헌신적인 애정을 바칠 것은 무엇이냐. 백낭자
는 왜 허선을 죽여 버리지 못했을까 하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지금 나는…..”
백리빙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의 내 생각은 달라졌어요. 역시 백낭자의 일편단심이 이해되고, 여자가 서야 할 곳이 어디
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어요.”
소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빙아, 나이도 어린데 너무 많은 일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아.”
백리빙은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고 소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배시시 웃어 보였다.
“오빠, 내가 쓸데 없는 말을 해서 기분 나빠요? 난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고집
이 있어서 큰일이에요. 이런 얘기 하나 들어보겠어요?”
“무슨 얘기인지 빨리 해 봐라. 나는 시간이 없으니까…..”
백리빙은 눈을 살짝 흘기더니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의 일이에요. 아버지께서 무공을 연구하고 계시는데 나는 마구 떼를 썼어요. 나를 안
고 밖으로 나가 눈 구경을 시켜 달라고요. 아버지는 응낙하지 않았어요. 나는 마구 울어댔죠. 울
다울다 안 되겠길래 아버지가 아끼는 책이랑 골동품들을 마구 부수고 찢어 버렸어요.”
“그래서?”
“생전 한 번도 화를 안 내시던 아버지께서 그때는 불같이 노하셔서 나를 막 때리셨어요. 계집애
가 성질이 사나우면 팔자가 드세다고 하시면서 말예요. 나는 사지를 버둥거리며 목청이 찢어지도
록 울었어요. 온종일 울음을 그치지 않았어요. 어머님이 달래려고 무진 애를 쓰셨지만 막무가내였
지요. 결국은 아버지가 나를 안고 눈 구경을 시켜 주어 울음을 그치게 만들었어요.”
소영은 가벼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정말 고집장이었구나. 그래 커오면서 성격이 달라졌나?”
“네, 점점 사물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눈이 뜨이면서 부모님에게 효도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부모
님은 내 어릴 적의 성질을 생각하고 내가 고집하는 일은 무조건 따르셨어요. 그런데, 오빠를 안
뒤부터 나는 사람이 변해진 것 같아요.”
“어떻게? 착해졌단 말인가?”
백리빙은 씁쓸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줄곧 내 성질을 누르고 오빠의 말에 순종했어요. 내가 어째서 이토록 약해졌는지…하지만
오빠는 늘 차갑게 나를 대하고 …나는 이따금 이런 착각에 빠져요.”
“어떤 착각?”
“오빠는 허선이고 나는 백낭자이고…언젠가 오빠는 허선이 백낭자를 찼듯이 나를 매정스럽게 버
리고 떠나게 될 것이라는…..”
말끝을 흐리며 백리빙은 고개를 숙였다.
소영은 뭉클 치밀어 오르는 애정 같은 것을 의식했다. 백리빙의 어깨를 꽉 끌어 안고 다정한 말
로 어떤 맹세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소영은 감정의 충동을 누르며 일부러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빙아, 무슨 농담의 말을 그렇게 잘하나? 나는 허선이 아니고, 빙아도 백낭자가 될 수
없으니 그런 믿을 수 없는 전설에 우리 두 사람을 관련시키지 말아라.”
소영은 백리빙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저 두 사람을 잘 보살피고 있어. 나는 이만 가 봐야겠어.”
백리빙은 고개를 들고 큰 눈을 반짝이며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오빤 농담으로 들어요?”
“무엇을? 아하! 또 그 얘기구나. 자, 그런 건 마음에 두지 말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다녀와요.”
“그래, 그럼 기다리고 있어.”
소영은 흘러내린 백리빙의 머리칼을 쓸어올려 주고, 양쪽 뺨을 두손으로 감싸 쥐었다가 놓았다.
그러자 백리빙은 얼굴을 붉혔다가 웃음을 띠며 맑은 음성으로 말했다.
“기다릴 테니 빨리 다녀와요.”
소영은 눈웃음으로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걷는 그의 뒷모습을 백리빙은 꿈을 꾸는 듯
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영은 절벽을 기어올라 산봉우리에 올라 섰다. 그곳에는 과연 한 조각의 비단 헝겊이 돌에 눌
려 있었다.
소영은 허리를 굽혀 비단 헝겊을 집어 들었다. 그곳에는 길을 안내하는 글과 그림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노인은 이곳의 지리에 정통한 모양이구나.’
소영은 비단 헝겊에 지시한 방향대로 몸을 움직였다.
도중에도 여러 곳에 지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길은 매우 험했다.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을 기어 오르고 그의 키를 넘는 가시덤불을 헤쳐야 했고
탁류가 흐르는 냇물을 건너고 높은 산봉우리를 넘어야 했다.
소영은 내상을 몹시 심하게 입었고 또 진기를 완전히 회복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얼마 안 가 피
로가 무겁게 엄습했다.
‘그 노인은 내가 내상을 입고 완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이토록 험준한 길을 달리도
록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려는 마음에서일까?’
소영은 되돌아 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를 악물고 앞으로 전진했다.
‘남아의 일언은 천금보다 무겁다고 했다. 내 어찌 이만한 것을 못 참아 중도에서 포기하고 약속
을 깨뜨릴 수 있겠는가?’
소영은 땀에 흠뻑 젖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쉬지 않고 달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봉우리에
올라 서자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구나. 그런데 앞으로 남은 길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소영은 마음이 다급해져 쉴사이 없이 달렸다. 천신만고 끝에 어느 시냇가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
미 해가 한 발이나 떠올라 있었다.
탁류가 소용돌이 치며 흐르는 시냇물은 넓이가 삼사 장이나 되었다. 평소의 소영이 지닌 무공으
로써 건너지 못할 넓이는 아니었지만, 지금 소영은 몹시 지쳐 있었다.
‘도저히 뛰어서 건널 수는 없겠다.’
소영은 단검을 뽑아 몇 그루의 작은 나무를 베었다. 그것을 덩굴로 엮어 작은 뗏목을 만들었다.
‘뗏목을 타고 건널 수밖에 없지.’
소영이 강을 건너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하하하, 젊은 놈이 걸음이 몹시 느리군. 만일 네가 이곳에 나타날 것을 노부가 믿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백 리 이상은 갔을 것이다.”
소영은 소리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길이 넘는 수풀 사이에서 대로 엮은 한 척의 뗏목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뗏목에는 머리에 나무동곳을 꽂은 노인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푸른도포를 입고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노인의 손에는 죽장이 들려 있었다.
노인이 죽장으로 냇물을 쿡 찔렀다.그러자 뗏목이 화살처럼 빠르게 소영의 앞으로 오더니 우뚝
멈춰 섰다.
‘노인은 긴 머리를 빗어 올려 동곳으로 다듬었고 얼굴도 매우 숭엄해 보여 마치 신선 같은 모습
이구나!’
소영은 노인의 중후한 용모에 위압감을 느끼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후배는 중상이 채 아물지 않았고 무공이 빈약해 노선배님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습니다.”
노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노부는 네가 최대한의 경공을 발휘했으며 전력을 다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인은 잠시 말을 끊고 시냇물에 눈을 던지더니 다시 이었다.
“너는 수중공부(水中功夫)를 할 줄 아느냐?”
“못합니다.”
“이 냇물은 무서운 소용돌이가 있어 수중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더구나 피곤까지 겹쳤으면서 뗏
목으로 건너려고 했다는 것은 죽음을 일부러 택하는 결과인데…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소영은 급류에 시선을 던지며 대답했다.
“후배는 이미 노선배님과 약속을 하였으니 그것을 어길 수 없습니다. 모험을 하면서라도 강을
건너려고 한 것입니다.”
“너는 노부와 만나기로 한 것을 후회하느냐?”
“후배가 만일 후회했다면 오는 도중에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니?”
“후배는 노선배님이 남기신 지표를 따라 모험을 하며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후배가 보니
다른 안전한 길도 있었습니다. 노선배님이 일부러 험준한 길을 골라서 후배에게 고통을 겪게 하
신 것이…..”
노인이 손을 흔들어 소영의 다음 말을 막으며 입을 열었다.
“이봐, 청년! 이 세상에 공들이지 않고 되는 일은 없어. 너에게 나는 자그마한 시험을 했을 뿐이
야.”
소영은 오기 섞인 어조로 말했다.
“만일 후배가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비록 열 배나 더 험한 길이었다 하더라도 좀 더 일찍 이곳
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하하, 네 말이 맞다. 네가 부상만 당하지 않았다면 어찌 백 배의 험난한 길인들 못 뚫었겠느냐.”
소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선배님의 말씀은 후배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뿐입니다.”
“하하, 너는 지금 매우 지쳐 있군. 어서 눈을 감고 운공을 조식해라. 네가 체력을 회복한 뒤에
다시 얘기하지.”
“후배는 따르겠습니다.”
소영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그가 몽롱한 의식 속으로 빠져 들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머리에 심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코끝을 찌르는 향기를 느끼며 소영은 눈을 떴다. 해는 이미 중천에 높이 솟아 있었다. 소영은 부
드러운 풀밭에 누워 있었다.
소영이 누운 곳은 넓이가 불과 오육 장밖에 안 되는 작은 분지(盆地)였다. 사면이 높은 산봉우리
에 둘러 싸여 바람을 막아 주고 있었다.
동쪽 산 가까운 곳에는 대나무에 둘러싸인 한 채의 초가가 있었다.
소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손으로는 품속을 뒤졌다. 소왕의 무공비록은 그대로 간직되어 있
었다.
소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사지를 움직여 보았다. 이상하게도 전신이 개운하고 생기가 넘쳐
흘렀다.
‘나는 분명 시냇가에서 운기를 조식하고 있었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고 까무러쳤었지.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와 있을까? 그리고 그 백발노인은 어디로 갔을까?’
소영은 그동안 여러 가지 사건에 부딪쳐 왔기 때문에 성격이 매우 침착해져 있었다. 그는 사방
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모두가 그 노인의 짓이다. 그런데 그동안 노인은 나를 어떻게 다뤘는지 모르겠군.’
소영은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초가로 눈길을 돌렸다.
‘저 집이 노인의 거처인 모양이다.’
소영은 초가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땅에는 꽃들이 피어 있었는데 그 종류가 수백 가지는 되
었다.
‘이 꽃나무들은 본래 이곳에서 자란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옮겨다 심은 것이로구나.’
소영은 초가집의 대문 앞으로 다가섰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소영은 가볍게 기침을 하고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후배는 보살핌을 입고 감격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기다렸다가 목청을 높여 말했다.
“후배는 이만 물러가야겠는데 노선배님을 뵈올 수 없겠는지요?”
이번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 노인은 천축으로 가겠다더니 이미 떠난 것인가?’
소영은 그런 생각이 들어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과 토방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
단 하나뿐인 방은 다른 세간은 없고, 나무 탁자 하나와 두 개의 의자뿐이었다. 탁자 위에는 얄팍
한 책 두 권이 놓여 있고 그 책 위에는 종이 쪽지 한 장이 있었다.
소영은 방으로 들어가 종이쪽지를 집어 들었다.
밑에는 ‘망년지교―忘年之交’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반 시간만 일찍 깨어났어도 노인을 한 번 더 볼 수 있었을 텐데…이제 훌쩍 떠났으니 언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책의 표지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엽산 검법정록(葉山 劍法精錄)이라
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밑에는 작은 글씨로 이라고 써 있었다.
소영은 자기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눈을 비비고 다시 들여다 보았다. 역시 ‘엽산 검
법정록’ 여섯 자임에 틀림없었다.
‘금궁에서 우문한도가 어느 백발노인의 시체 앞에서 절을 하며 분명 담운청이라고 했었다. 지금
이 책의 저자도 담운청이다. 그렇다면 금궁에 우리보다 먼저 들어간 사람이 바로 그 노인이었단
말인가?’
소영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노인이 금궁에 들어갔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
고 십대 기인이 남긴 책을 또 얻게 되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 노인은 확실히 기인이다. 이런 기인을 만난 것은 하늘이 주신 행운이었는데 나는 그분의 이
름조차 묻지 못했으니…내가 눈이 먼 때문이겠지만 너무 안타깝다.’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우연히 만난 나를 지우라 칭하고 이런 무공비록까지 남겨 주고도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떠났으
니…정말 도량이 넓은 이인이다.”
소영은 떨리는 손으로 담운청의 검법비록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밑에 있는 표지가 드러났다. 그
곳에는 ‘탄지신공(彈指神功)’이라는 제목과 ‘소림제자 무상(小林弟子無相) 남김’이라고 적혀 있었
다.
이것을 본 소영은 또다시 놀라며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사부님 말씀이, 소림의 탄지신공은 극묘한 내공의 절초라고 하셨는데, 뜻밖에도 이 비록을 그
노인이 나에게 남겨 주다니…..’
소영은 검법비록을 놓고 탄지신공의 책을 집어 들었다. 첫 장을 들치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
다.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교수신공 포일천은 한 채의 금궁을 짓고 당시 무림의 십대 기인을 불러 들여 일망타진하려고
했다. 그는 이들을 죽여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고 했으나 오히려 먼저 죽고 한 권의 무공비록도
남기지 못했으니…남을 함정에 넣으려면 자신부터 들어가야 된다는 말 그대로이군.”
소영은 다시 책장에 시선을 던져 읽어 갔다.
소영은 다시 책에서 눈을 떼었다.
‘그가 이 탄지신공을 남긴 것은 그가 일생 동안 무공을 연마한 결정체일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얻어 짧은 시간에 그의 절묘한 무공을 얻을 수 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영은 책을 탁자 위에 놓고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옷깃을 가다듬고 두 번 큰절을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제자는 이번에 스승님의 절기 비록을 얻어 실로 평생 은혜를 못 다 갚을 행운이옵니다. 후일
기회가 있으면 대사님의 절기유서(絶技遺書)를 소림 문중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소영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듯 공손한 예를 올리고 나서야 비로소 조용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림사의 무상대사는 매우 뛰어난 인재였다. 어느날 그는 열두 사람이 탄지신공을 연습하는 것
을 목격했다. 그들은 어느 고인이 남긴 책을 읽으며 절기를 습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절기는
백 년이 걸려야 습득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열두 사람은 중도에서 모두 물러나고 그 중의 두 사람은 자기들의 무능을 탓하며 자결하고 말았
다.
‘내가 그것을 습득해야겠다.’
무상대사는 곧 사장(師長:주지)을 졸라 탄지신공을 배우겠다고 했다.
“너는 아직 이르다. 다른 무공을 연마하는 것이 오히려 빠르다.”
사장은 이렇게 말하며 설득했으나 그는 초지일관,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장은 할 수 없이
허락했다.
무상대사는 곧 석실에 들어가 일체 외계와의 접촉을 끊고 연습에 몰두했다. 거의 잠도 자지 않
고 피나는 노력을 하기 오 년…그러나 그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이 절기를 이기려면 우선 선결돼야 할 일이 있구나. 깊은 내공이 없고서는 절기의 겉모습도 흉
내낼 수 없겠다. 그렇다. 우선 내공의 힘을 기른 후에 다시 연구하자.’
무상대사는 무공의 기초부터 닦기로 결심하고 좌선(坐禪)에 들어갔다. 눈비가 몰아치고 찬바람,
뜨거운 태양이 피부를 가르는 고통을 참으며 삼 년 동안 내공의 힘을 길렀다.
높은 내공을 지니게 되자 다시 탄지신공을 파고들었다. 불철주야, 뼈를 깎는 행공을 하기 오 년,
비로소 그는 탄지신공의 절기를 몸에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장장 십팔 년이나 걸린 고행 끝에 얻
은 절기였다…..
여기까지 읽어온 소영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 탄지신공을 연마하는데 십여 년의 세월을 소비해야 된다면 도저히 내 힘이 미치지 못
하겠다.”
소영은 실망을 느꼈으나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읽어 내려갔다.
…이 절기를 배운 뒤에서야 비로소 나는 이 속에 쉽게 배울 수 있는 비결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이 비결만 안다면 절기를 터득하기는 매우 쉬우며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
깝게도 선대 사조부들은 이 비결을 서술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노부는 이 비결을 서술하여 누
구든지 쉽게 탄지신공을 터득할 수 있게 하였다. 난 이 절기가 금궁에 묻히는 것을 원치 않으니,
이 책을 습득한 사람이 절기를 익혀 악을 제거해 줄 것을 부처님에게 비는 바이다.
그 다음부터는 바로 무상대사가 비결을 적어 놓은 것이었다. 그것은 매우 쉽고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소영은 어느 새 그 비결을 읽으며 연습을 하고 있었다.
탄지신공은 다만 손가락을 굽혔다가 퉁기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무상대사는 이 하나의 초
식을 수천 마디로 상세하게 풀이하고 있었다.
진기운행법, 경맥법 등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어 소영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놀랍다. 이토록 자세하고 쉽게 풀이하다니…아주 간단하구나.’
소영은 책 속에 정신이 흠뻑 빠져 어느 새 십여 번이나 연습을 했다. 하면 할수록 자신이 생기
고 오묘한 지력의 위력에 놀라기도 했다.
방에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소영은 깜짝 놀랐다.
‘아차, 내가 너무 시간을 보냈구나. 중주이고와 백리빙이 눈이 빠지도록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
데…..’
소영은 급히 두 권의 책을 품속에 간직하고 방을 나섰다. 밖에는 이미 황혼이 짙게 깔려 있었다.
더우기 이 분지는 사방에 산이 막혀 어둠이 일찍 찾아들었다.
소영은 급히 산봉우리로 올라가 방향을 확인한 뒤 인연봉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인연봉
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날이 어두웠다.
깜깜한 밤중이라 얼른 사물을 분별할 수 없어 소영은 사방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깎아지른 벼랑 가까이에 다다른 소영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거센 바람에 나부끼는 흰 옷자락
을 발견했던 것이다.
‘백리빙인가?’
소영은 그곳으로 천천히 다가서며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빙아냐?”
그러자 흰 옷의 소녀가 몸을 돌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